동인문학상 수상작 모음집 1985~1989 - 17~20회
정소성 외 지음 / 조선일보사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제17회에서부터 20회에 이르는 동인문학상 수상 소설들은, 분단의 상처와 그에 대한 극복의지를 다룬 두 소설(17, 18회)과 자꾸만 우리의 꿈을 배반하는 지독한 현실의 진창에서 희망을 껴안고 뒹구는 두 소설(19, 20회)로 나뉜다. 분단과 생활현실이라는 이 투박하고 섬세하지 못한 소설 주제 구분은 별로 쓸모없는 것이지만, 1985년에서 1989년에 쓰여진 소설들이 무엇을 담고자 했는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정소성의 <아테네 가는 배>는 표제에서 드러나듯 소설의 배경도 한국을 벗어나 있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도 한국인 유학생, 중국인 학자, 동독 아가씨, 그리스인 등등이다. 아마도, 작가인 정소성의 유학 시절과 해외여행 체험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이 소설의 배경은 외양상 ‘국제적’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한국적’인 소설 주제의 무대를 꾸며주기 위한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서양사학을 전공하는 프랑스 유학학생 종식이 중심인물이 되어 자신과 그들의 여로를 관찰하는데, 그러면서 그는 신화와 역사[과거]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동행자들의 과거와 현재를 보고 듣기도 한다. 종식의 가장 중요한 관찰대상은 주하라는 유학생이다.

“주하는 물론 신체적 불구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불구를 의식하지 않으려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정신의 불구를 극복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참 딱합니다.”
“이굉석씨, 무슨 소리요? 정신의 불구자라니? 좀 괴짜스런 데가 있긴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라 주하의 아버지는 북에, 어머니는 남에 살고 계시다는 거지요. 그분들이 지상의 삶을 다할 때까지 서로 얼굴을 대면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놓고 주하의 지팡이는 뛰고 있습니다.”
“…….”(39쪽)

한반도는 분단으로 인해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신체적 불구가 되었다. 동시에 그 반도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정신의 불구가 되었다. 그 ‘정신의 불구됨’은 유재용의 <어제 울린 총소리>에서 다시 한번 만나볼 수 있다. 조한세 노인에게 계속되는 총소리 환청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에게만 들리는 총소리를 고쳐보기 위해서 이비인후과를 찾은 조한세 노인은 의사에게서 신경정신과의원을 소개받는다. 문제는 귀가 아니라 마음에 있었던 것이다.

조한세씨는 문득 정신을 가다듬고는 고개를 저어 눈앞에 머릿속에 떠오른 아버지의 얼굴과 아들의 얼굴을 지워버렸다. 총소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야. 조한세씨는 고집하듯 정리하듯 그렇게 생각하며 뒤늦게 김부일씨 말에 대답했다.
“나두 자네같이 생각하겠네. 총소리 따위, 날래믄 나래지. 제풀에 주저앉을 날이 있겠지 뭐.”
조한세씨가 말을 끝낸 순간이었다. 따, 따, 따, 탕, 탕! 총소리가 울렸다. 대기의 진동이 손가락 끝에 찌르르 와 닿았다. 조한세씨는 김부일씨의 얼굴을 재빨리 살펴보았다. 하지만 김부일씨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얼굴로 걸음을 옮겨놓기만 했다. 조한세씨는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어쨌든 고향에 남으신 부모님이나 이민 떠난 아들네 식구와 총소리는 아무런 상관두 읎어.’
조한세씨는 완강하게 고집 부리듯 그렇게 생각하며 김부일씨와 나란히 걸음을 옮겨놓았다.(134-135쪽)

분단의 고통과 상처는 이토록 오래 남는 것인데, 그에 대한 반응은 강한 극복의지가 아니라 강한 회피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찢어져 있지 않다. 나는 불구가 아니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어디든 갈 수 있다. 누구든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조한세씨뿐만 아니라 우리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어제 울린 총소리는 오늘도 계속 울리고 있다는 걸. 따, 따, 따, 탕, 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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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라스콜리니코프의 분열증적인 삶

가장 러시아적이면서도 가장 유럽적인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1866)은 이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1880)에 이르는 위대한 작가적 여정의 첫 번째 이정표이다. 이미 작가는 중편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를 통해서, 당시 유럽과 러시아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던 공리적 사회주의의 이념을 공박하면서, 진정 '살아있는 삶'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 바 있다. <죄와 벌>은 이러한 관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지하생활자의 수기>에 등장하는 2×2=4의 수학적 공리의 세계(합리적 이성의 세계)는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범죄이론으로 변형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범인(凡人)과 비범인(非凡人)으로 나뉠 수 있고, 이때 비범인은 초법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그는 역사상의 모든 입법자나 건설자들은 이와 같은 권리를 행사해왔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한다.

가난한 전직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중요한 것은 과연 자기 자신이 비범인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러시아어로 '(범)죄'의 어원적인 뜻은 '한 발작 넘어섬'인데, 그는 자기 자신이 모든 장애를 딛고 한 발작 넘어설 수 있는가를 시험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고리대금업을 하는 전당포 노파에 대한 살인을 계획하고 이를 실행한다. 하지만 살인 사건 이후에 그는 줄곧 혼미한 정신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데, 그것은 주로 자신이 한 발작 넘어서서 첫 번째 걸음을 옮기는 데 실패했다는 자책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일종의 정신분열이 일어나는데, 학대받는 늙은 말을 끌어안고 울던 유년시절의 라스콜리니코프와 유럽 합리주의의 세례를 받은 청년 라스콜니코프 사이의 분열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러시아와 유럽의 분열을 함축한다.

사실 주인공의 이름에서 '라스콜'은 러시아어로 분리/분열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분리/분열이 해소되는 것은, 루터가 '악마의 창녀'라고 부른 이성의 대변자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수를 결심하고 성스런 창녀 소냐의 권유대로 광장에서 대지에 입을 맞추게 됨으로써이다. 하지만, 8년간의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은 라스콜니코프가 진정한 갱생에 이르는 과정의 이야기는 작가의 말대로 이 작품의 주제가 아니다. 나폴레옹 모방이 아닌 그리스도 모방으로서의 진정한 인간의 삶, 혹은 위대한 죄인의 생애를 묘사하고, 고통과 수난을 통한 삶의 구원을 역설하고자 한 작가의 고투는 이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알료샤에 이르는 여정을 남겨놓고 있다.

<죄와 벌>의 현재적 의의란 어떤 것일까? 라스콜니코프의 이론과 그 실행을 소비예트 러시아(1917-1991)의 건설과 파산에 견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작가가 유난히 강조한 바, 결코 변증법으로 대체할 수 없는 '살아있는 삶'은, 모두가 합리적/계산적 이성에 근거한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새로운 정치학으로서의 윤리학을 요구한다. 역사의 종언 이후에 우리에게 남겨진 삶은 바로 이 갱생의 삶이다.

200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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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문학상 수상작 모음집 1979~1984 - 13~16회
조세희 외 지음 / 조선일보사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혁명가가 바다로 띄워 보낸 비망록


1.


제13회 동인문학상의 수상작은, 이미 고전의 고전이 되어버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다. 평론가들마저도 <난.쏘.공>을 논할 때는 평론이 아니라 독후감을 쓰곤 한다. “이 소설책을 총 몇 번 읽었는데, 첫 번째는 어떠어떠한 감동이었으며, 그 다음의 독서는…” 이런 식인데, 이 소설집의 해설을 쓴 방민호도 여러 권의 <난.쏘.공>을 가지고 있다며 개인적인 독서체험을 이야기한다. 다치바나는 고전을 두고서 “그 저서(고전)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로서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 자체가 토론의 대상이 되어,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의 소재로 활용되기에 적절한 책만이 결국 진정한 의미의 고전으로서 살아남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55쪽)라고 말했다. 그렇다. 실상, 특정한 텍스트가 고전이나 정전으로 채택되기 위해서는 처음에는 그 텍스트의 내적인 가치가 귀중한 것으로 판명되는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그 이후에는 많은 이들의 입과 귀에서 끊이지 않고 얘깃거리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텍스트의 내용보다 그 텍스트와 관련된 독서체험이나 심경변화를 이야기하는 일이 더 벌어지는 것은, 이미 그 텍스트의 품질을 보장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명품의 디자인이나 기능을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명품 자체에 얽힌 이야기를 즐기는 것과 같다.


나는 불우(?)하게도 중학 시절에 필독도서의 하나로 <난.쏘.공>을 읽어야만 했다. 필독도서로 억지로 읽는 책이었으므로, 그것은 짜증과 지루함으로부터 시작되어 감동으로 끝난 독서였다. 그러나 스무 살이 넘은 뒤에 읽은 <난.쏘.공>은 그때와는 또 다른, 더 깊은 감동을 주었다. 사회과학과 역사 책으로 더 정밀하게, 더 구체적으로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세계를 인식할 수 있겠지만, 문학 읽기를 통한 세계 인식은, 삶의 인식은, 이와는 또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과학이나 역사와는 다른 문학만의 감동과 전율이 있기 때문이다. <난.쏘.공>의 경우, 시적인 문체와, 현실과 환상이 포개어지는 매혹적인 구성 등이 독자들을 사로잡는 것이고, 여전히 고전의 고전으로 칭송받는 까닭일 것이다.


2.

제13회에서 16회에 이르는 동인문학상 수상작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와 소재들은 각기 다채롭다. 13회 수상작 <난.쏘.공>에서 ‘난장이’로 상징되는 억압적인 시대상과 ‘쏘아올린 작은 공’이란 제목에서도 드러나는 ‘차마 버리지 못하는, 또는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되는, 작은 희망과 의지’의 혼재의 고통을 독자들은 즐거이 받아들여야 한다. 14회 수상작인 전상국의 <우리들의 날개>는 동생의 존재 때문에 가족들이 비극을 겪게 된다는 운명의 망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가족들의 모습을 그린다. 인간이 운명(이것의 실체도 정작 모르면서!)을 받아들이거나 비극의 원인을 전혀 다른 곳에서 찾아내는 까닭은 무얼까. 15회 오정희의 <동경>은 죽음으로 서서히 미끄러져 가는 노부부의 일상을 그려낸다. 오정희의 섬세한 문체가 그려내는 구체적 일상들은, 어린 아이의 거울 장난이 오히려 늙은 부인의 노쇠를 조롱하는 것처럼, 얄밉게 반짝인다. 16회 수상작 이문열의 <금시조>는 일종의 예술가 소설이다. 금시조의 비상을 보고픈, 예술의 극점에 다다르려는 한 서화가의 일생과 갈등이 <금시조>의 세계다. 예술가 소설로는 특별히 도드라진 점은 없겠지만, <금시조>에서 마음에 든 점은 주인공 고죽의 일상적 삶이 천재들의 불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적당히 불우하고 적당히 평범하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드라마틱한 삶이 예술가의 삶은 아니니까. 16회 수상작, 김원일의 <환멸을 찾아서>는 현대 한국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인 분단 문제에 천착한다. 어느 좌천당한 혁명가의 북에서 띄워 보낸 비망기를, 역시나 분단으로 고통 받고 있는 실향민 아버지가 바다에서 습득하게 되고, 시인이자 교사인 아들이 이것을 가족들에게 전해준다는 이야기이다. 소설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다.


‘영동행각’이란 제목으로 일곱 편의 시를 썼던 울진 출신의 젊은 시인은 전쟁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였으나, 시대의 앞뒤를 두루 살펴 그 불가해한 상처의 뿌리를 노래했다. 그는 ‘다시 영동에서’란 시의 마지막 연을 이렇게 썼다.


한 생애가 눈물 가득 찬 물결로도 출렁이고

서러울수록 그 위에 엎어져 함께 흐느껴 가면

어둠 속을 더욱 넓어지는 소리의 한없는 두런거림

여기서 자라 이 물결에 마음붙인

사람들의 오랜 고향을 나는 안다.(342쪽)


전쟁을 겪지는 않았으나 총성이 들리지 않는 전쟁, 즉 분단 상황하에서 살고 있으며 여전히 상처가 치유되지 못한 역사적 상황에서, 우리는 삶의 바다에서 길어올린 이 쓰라린 편지를 어느 곳으로, 누구에게 배달해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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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za 2004-08-17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찬제도 난.쏘.공의 해설을 독후감으로 시작하고 있더군요...^^
어두웠던 팔십년대를 경제학도로 살았던 그에게 난.쏘.공이 던져준 인상은 각별한 것이었겠죠.

도서관여행자 2004-08-17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 아마, 내가 그 해설을 두고 얘기한 걸꺼야.
이미 난.쏘.공에 대한 2차텍스트들은 숱하게 쓰여졌을테니, 다른 얘기를 하는 게 독자들을 덜 지루하게 만드는 게 아닐지.
 

어떤 권력 관계


이 글이 장애인을 타자화하고 희생자화하는 데 일조하지 않을까, 그렇게 읽히지는 않을까 매우 두렵다. 며칠 전 나는 휠체어에 누워서 이동해야 하는 뇌성마비에다가 지체 장애를 가진 중증 장애인이자 무학으로 한글을 모르는 이들을 상대로 3회에 걸쳐 여성학 강의를 했다. 미국인 중에서, 남성 중에서, 비장애인 중에서, 이성애자 중에서도 문맹이 있을 수 있고, 실제로 많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문자를 모른다는 것이 장애인이 겪어야 할 상식적인 현실이거나 운명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 대상이므로 그날 강의에서 나는 일단 칠판에 필기를 할 수 없었다. 시청각 교재가 나을 것 같아, 낙태 관련 영화를 보여주었는데 이번에는 비디오 자막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이기 전에 남성이거나 여성이어야 하는 한국 같은 철저한 성별 사회에서 장애인은 무성적 존재, 즉 젠더 이전의 비인간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장애인의 현실에서 생물학적 성별인 섹스와 사회문화적 성별인 젠더 개념에 대한 나의 설명은 중증 장애인인 그들의 삶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나는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성활동이 남성 성기 중심적이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강사로서 나는 비참했다. 남성 장애인은 남성이라기보다는 장애인이었고, 기본적으로 기존의 섹슈얼리티를 실천할 몸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웅동체인 양성구유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은 양성으로 구분할 수 없다, 자웅동체는 하등동물, 자웅이체는 고등동물로 배웠던 고등학교 생물 수업은 자연과학에 남성중심주의가 반영된 왜곡된 지식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들이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는 점점 할 수 있는 말을 찾기 어려웠다. 나의 이 우스꽝스러운 점입가경의 절정은, “즐거운 금요일 주말 밤이죠”라는 수업 끝 인사였다. 집밖으로 이동이 정치적 투쟁인 그들에게는 매일매일이 주말인 것을 ….

나의 여성주의를 그들에게 전달하기 힘들었던 것은, 페미니즘이든 마르크스주의든 자유주의든 이론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의 결과이다. 하지만 내게는 이 문제보다 더 중요한 깨달음이 있었다. 물론 이 깨달음조차도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주체인 비장애인이 자기 성찰과 인식의 확장을 위해, 타자인 장애인의 삶을 활용, 동원하는 또다른 비장애인의 권력일지 모른다. 지배와 피지배는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같은 언어를 공유할 때만 가능하다. 모든 권력의 작동과 지속은, 지배자의 언어와 논리를 피지배자에게 강요하고 피지배자는 이를 수용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애인 시설 ‘정립회관’은 정립(正立), ‘바로’ 서기는 비장애인 중심의 담론이다. 서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은 누구의 논리인가.

피지배자가 지배자의 언어 배우기를 거부하면, 이때 당황하는 사람은 지배자이고 지배 논리의 관철은 불가능하게 된다. 다른 강의에서 수강생들은 5분마다 웃음을 터뜨리고 내게 열렬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나는 자신감 넘치는 강사였다. 그런 반응에 익숙해 있던 내게 이들의 ‘무표정’한 얼굴은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곧 그들이 나의 말하기에 열정적으로 반응하는 뛰어난 청자이자 저항 세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반응이 없는 것이 아니라, 뇌성마비 상태인 그들의 몸이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그 언어를 내가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소통되지 않는 상황의 답답함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정의하기 힘든 엄청난 힘의 분출을, 폭발하는 자의식을, 격렬한 지적 호기심을 느꼈고 몹시 당황했다. 문맹은 나였다. 그들은 비장애인의 언어와는 다른 방식의 언어로 나와 소통하고자 했지만, 나는 장애인의 언어를 읽을 수 없는 문맹이었다. 그들의 언어와 나의 언어 중 나의 언어가 소통의 기준이 되는 언어, 우월한 언어라는 인식은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 편승한 무임승차 행위일 뿐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한겨레 2004.02.04(수)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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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여행자 2004-07-07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칼럼 읽기를 좋아한다. 짧은 글 속에서 많은 걸 얻을 수 있다. 학교보다 신문이나 책들이 더 좋은 선생이었다. 선생님, 사랑해요. ♡_♡

balmas 2004-07-07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은 글이네요. 고맙습니다. 퍼가겠습니다.^^
 

‘책맹’사회에서 책읽기


고등학교 시절, 나는 영화광이었다. 그것도 지독할 정도로. 그리하여 친구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내 별명은 ‘충무로’였다. 당연하게도 그 시절의 내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물론,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고자 하는 바람도 품고 있었다. 허나 그 바람은 대학입시를 눈앞에 두고 산산이 부서졌다. 부모님께 연영과에 입학하고 싶다는 소망을 꺼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나에게는, “네가 딴따라가 되겠다는 것이냐”라는 부모님의 힐난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정말 소심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권하시는 대로 법대에 진학했다. 그렇게 기대치 않았던 물결을 따라 꿈이 표류하게 되자마자, 내 일상은 갑자기 심심해지고 말았다. 예정된 수순처럼,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나에게 묵직한 권태의 시간이 찾아왔다. 먹고 자는 일 외의 나머지 시간은 지리멸렬했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 갑작스레 맞게 된 그 지리멸렬함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비상구 하나가 절실했다. 그때, 내 손에 잡힌 것이 있었다! 바로 책이었다. 어릴 적부터 홀로 공상하기를 즐겼던 덕에 나는 책의 마력에 쉽사리 빠져들 수 있었다. 그 후 십년 동안 나는 책읽기의 매혹에 풍덩 빠져 살았다. 정말 잘난 척한다는 빈정거림을 들을 각오를 하고 말하건대, 정말이지 책은 남부럽지 않을 만큼 읽었다. 그렇게 해서 집에 쌓인 책만도 대략 삼천 권이다.

어쨌거나 나의 십대 끝자락과 이십대의 전부는 그렇게 흘러갔다. 당연하게도 그 시절 동안의 나는 혼자 방안 한구석에 몸을 파묻은 채 책장을 넘기는 시간이 많았다. 종종, 책맹(冊盲)사회에서 책에 미쳐 살아가는 일의 고독이 얼마나 큰지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내 어머니는 나를 바라보시며 한숨을 푹푹 내쉬곤 하셨다. 그리고 한 달에 한번꼴로는 나에게 근심 어린 표정으로 이렇게 타이르셨다. “책 그만 읽고 공부 좀 해라. 그렇게 책만 읽어서 어디다 써먹으려고. 쯧쯧.” 그럴 적마다 나는 너털웃음으로 화답했다. 어머니가 지칭하는 ‘책읽기’와 ‘공부하기’의 차이가 무엇인지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지만, 적어도 그 시절의 나에게 책읽기와 공부하기는 동의어였던 탓이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흐르고, 그리하여 내 나이의 무게가 더해갈수록, 나는 내 스스로가 인생의 공식으로 세워두었던 책읽기와 공부하기의 등호관계가 점차 부등호관계로 어긋나가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 사회는 나이를 먹어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갈 시점에 이를수록 그 나이에 맞는 역할 모델을 강요했지만, 미련하게 ‘공부는 안 하고 책만 읽어 온’ 나는 그 역할 모델에서 점차 멀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서른의 나이에 이르고 보니, 어느샌가 나는 거의 한국사회의 부적격자가 되어 있었다! 이 오묘한 세상에 하나의 유한한 생명체로 태어나 먹고사는 문제에 초연할 수 없었던 나는, 그리하여 내 이십대를 온통 도배질하다시피 한 책읽기 이력이 갑작스레 버거워졌다. 최종학력이 ‘국졸’인 내 어머니의 한국사회 감식안이 십 년 넘게 대학 캠퍼스를 학생 신분으로 유령처럼 배회한 나보다는 수십배 더 예리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도 나는 내가 책벌레로 보낸 지난 십 년 남짓의 시절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아둔하게 ‘책만’ 읽어온 지난 세월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는 것은 솔직하게 고백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국사회에서 책읽기와 공부하기가 등호관계에 가까웠다면, 아마도 나의 삶이 요즘처럼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맨 처음 본격적으로 책의 매혹에 빠져들었을 때에도 그러했고, 서른의 나이에 이른 지금에도 그러하듯, 이 나라 책맹사회는 책에 빠져 사는 사람들을 공중부양이나 축지법을 꿈꾸는 몽상가 정도로 취급한다. 말로는 책 열심히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자기 자식이 책벌레 되는 거 겁내는 부모들이 꽤 많다. 과장이 아니다. 그건 내 삶이 증명한다.

이휘현/자유기고가·대학원생
한겨레 2004.02.11(수)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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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여행자 2004-07-07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김현의 <한국 문학의 위상>을 읽었다. 이 문학개론서의 핵심 주제는 "써먹을 데 없는 문학의 쓸모"이다. 물고구마를 빨면서 소설책을 쌓아두고 읽던 어린 김광남에게 그의 어머니가 내던진 한 마디에 대한 오랜 훗날의 답변이다. 문학도의 항변이고 변명이다. '김광남'에서 문학평론가 '김현'이 되었건만 그의 부모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그가 문학도가 된 것에 대해서 아쉬워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김광남의 어머니나, 김현의 어머니나, 이휘현 씨의 어머니나, 내 어머니는, 김광남이나 김현이나 이휘현 씨나 나보다 훨씬 현명했으므로 우리들이 답하기 곤란한 문제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