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책속에 책 > [책마을] 나의글 나의서가.....문학평론가 이어령씨

[책마을] 나의글 나의서가.....문학평론가 이어령씨


◀ 이어령 교수는 요즘 현실 공간의 책들을 ‘사이버 서재 ’에 옮겨 놓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그는 “새로운 검색 프로그램들 덕분에 구체적인 분류기준이 필요없을 정도로 편해졌다 ”면서 “키워드 하나만 입력하면 나만의 정보들이 순식간에 떠오른다 ”고 했다.
 
 
 

## 새 책 도착하면 스캐너로 CD에 저장 ##

문학평론가 이어령(67ㆍ이화여대 석좌교수) 씨의 서재는 공식적으론 세 군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평창동 집과, 넘쳐 나는 책을 어찌할 수 없어 100 쯤 떨어진 집 근처에

따로 낸 개인 연구실, 그리고 강의에 필요한 책들이 있는 학교 연구실이다.

하지만 그에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서재가 하나 더 있다. ‘사이버 서재’다.

“최근 내 글쓰기의 비밀은 모두 이 곳에 있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집 서재 카드 색인함에는 종이 카드 대신 수십 장의 CD가 들어차 있었다.

이 교수는 책을 읽다가 중요한 부분이 나오면 바로 스캐너를 통해 ‘긁어’ 들인다.

그리고는 자신만의 분류방식으로 CD에 저장한다.

파일이름은 우선 국가명(미국은 U, 영국은 B, 한국은 K식으로)에서 첫 이니셜을 고르고,

큰 분류(문학은 L, 문명은 C, 기술은 T 기업은 B)에서 다음 이니셜을 적어준 뒤, 작은 분류에서 간단한

키워드를 적는다. 가령 새로 읽은 내용이 미국 기업에서 개발한 무기에 관한 것이라면

‘UBWEAPON’이 되는 셈이다. 그렇게 직접 저장한 내용들이 벌써 CD 50여장에 달한다.

CD 한 장에 일반 단행본 수백권의 텍스트가 들어간다고 하니 막대한 분량이다.

물론 ‘사이버 서재’는 현실공간의 책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자주 보는 책들은 집 서재에 보관되어 있다.

현관을 지나 왼쪽 계단을 몇 걸음 내려가면 그의 지하 서재가 나온다. 이 교수의 전공인 문학과 기호학,

한국학 관련 책들이 십 수개의 책장에 촘촘히 꽂혀있다. 현실 공간에서의 분류방법은 우선 장르별,

국가별, 소주제별로 나뉜다. 가령 ‘메타포어’에 관련한 책들을 찾는 그의 손길은 이런 식이다.

기호학쪽 책을 모아둔 책상 왼쪽편 책장에서 왼쪽 상단의 영문 원서 중 락오프(Rakoff)의 ‘Metaphor’

(시카고대 출판부)를 찾아내더니, 오른쪽 상단에서는 우리나라 책 중에서 김욱동 교수의

‘은유와 환유’(민음사)를 골라낸다. 맨 아래줄에서는 일본어 원서 중 사토 노부오의

‘레토릭 감각’(강담사)을 끄집어냈다.

이 교수는 “처음에는 도서관 분류방식을 따라 봤지만 책이 늘어나자 오히려 더 찾기가 힘들었다”며

“각자 자신만의 익숙한 방식으로 책을 분류하는 게 더 낫다”고 권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연역적 분류’

보다는 몸에 밴 습관에 의존하는 ‘귀납적 분류’가 더 편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책상 가장 가까운 곳에는 사전과 신간서적을 둘 것을 추천했다.

실제로 그의 책상 위에 있는 책꽂이에는 각국 언어사전을 비롯, 20세기 문화사전, 상징사전, 기호학 사전,

민족생활어 사전 등 수십 권의 사전이 꽂혀 있었다. 또 그 근처의 두 칸 정도는 항상 비워두고 새로 구입한

신간서적을 위한 공간으로 남겨둔다. 필요한 책은 모두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하는 데 “평균 잡으면

한 달에 10권 정도를 사는 셈일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출판사나 저자가 보내오는 책이 월 60~70권에

달한다고 하니 그의 서재는 여전히 공간이 부족하다. 보유 장서는 줄잡아 3만권에 이른다.

“지금까지 이사를 5번 했는데, 넘쳐나는 책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라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책 욕심이 많아 같은 책이 두 권 있는 경우나 소비성 잡지를 제외하고는 책을 버린 적은

없다”고 한다. 천성적으로 술을 못하는 이 교수는 저녁 6시 이후에는 거의 약속을 잡지 않고 집에 들어와

두문불출한 채 서재에 특어박힌다. 그리고는 새로 산 책들을 훑어보며 스캐너에 넣을 지 말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어수웅기자 jan10@chosun.com) 출처: 조선일보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도서관여행자 2004-07-30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강준만의 독서 기록 및 스크랩 정리 방식 같은 게 궁금... 주제별로 파일에 집어 넣었다가 적당한 양이 되면 저술에 활용한다고 한 게 기억에 남긴 하지만, 그의 풍성한 참고도서 목록을 생각하면 좀더 자세히 알고 싶음. ㅎ_ㅎ;
 
 전출처 : balmas > 프로이트 개론서의 고전

마르트 로베르는 프랑스의 저명한 독문학자로, 문학과 정신분석에 관한 주목할 만한 저작들을 여럿 발표한 사람이다. 푸코는 자신의 문학비평에서 자신이 로베르에게 많은 이론적 빚을 지니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로베르의 이론적 역량과 위상을 잘 보여주는 한 사례다.

프로이트 전집의 발간과 지젝 등의 작업이 소개되면서 국내에서도 점점 더 정신분석에 관한 관심이 증대하고 있음에도, 로베르의 이 책이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1964년 이래 이 책은 프로이트에 관한 개론서 중에서는 그야말로 최고의 저술 중 한 권으로 평가받아 왔으며, 또 그럴 만한 이유를 지니고 있다.

처음에 라디오방송을 위해 쓰여졌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매우 평이한 문체로 쓰여 있으며, 내용 역시 프로이트의 생애를 따라가면서 그의 학문적 작업과 지적 교류, 일상적 삶을 서술하고 있어서, 프로이트 사상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의 강점은 무엇보다도 프로이트의 사상의 발전과정을 충실히 따라갈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로베르는 프로이트를 일종의 성인으로 간주하여 숭배와 찬양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로베르는 가난한 집안을 일으켜 세울 책임을 안고 있고, 결혼할 돈이 없어서 오랫동안 약혼자를 기다리게 만들고 있으며, 학문적 성공에 목말라 있는 유대인 출신의 젊은 학자인 프로이트가 상황의 압력과 학문적 고뇌를 겪으면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 가는 과정을 사실적이면서 매우 감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 결과 독자들은 프로이트라는 한 유대인 학자의 삶과 사상을, 마치 대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재미와 함께, 충실하게 읽어낼 수 있다.

로베르의 문체 자체가 유려한 데다 번역도 잘 되어 있는 편이어서(다만 프로이트 원전 인용문들 중 일부는 오역이어서 내용이 잘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큰 어려움 없이 읽히는 것도 이 번역본의 장점이다. 프로이트의 삶과 사상을 알아보려는 모든 독자들에게 강력히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릴케 현상 >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후반기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철학자로서 데리다를 꼽는 데 주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철학은 물론 문학, 예술, 문화비평, 법률, 건축, 페미니즘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새로운 문제와 시각을 제기하면서 미래적인 지적 모험의 지평을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차이의 지평이다.

차이의 시대를 연 데리다는 1930년 서양의 주변부인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그곳에서 성장했다. 어머니가 아랍계 토착 유대인이어서 2차 세계대전 중의 나치 정권 아래 퇴학 조치를 비롯한 여러 인종 차별을 경험했다. 데리다의 작품은 천재적 재능의 결실이지만 그의 성장기는 방황과 좌절로 점철된 듯한 인상을 준다. 대입 자격고사에 낙방하여 재수를 했고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할 때와 교수자격 시험을 통과할 때도 몇 번의 실패를 겪었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후 데리다는 1983년 파리 고등사회과학원 교수로 자리를 옮기기까지 고등사범학교에서 가르쳤고 최근까지 매년 미국을 오가면서 강연을 했다. 그가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60년대 초반기이다. 현상학, 구조주의, 정신분석, 하이데거, 레비 스트로스, 푸코, 레비나스 등 당대의 지적 흐름에 논쟁적으로 개입하는 동시에 플라톤에서 헤겔과 니체에 이르는 서양 철학사의 주요 고전들을 날카롭게 해부하는 그의 글들은 보기 드문 통찰력으로 가득 차 있었고 글쓰기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었다.

이런 글쓰기의 성과는 두 번에 걸쳐 3부작 형식의 저서들로 정리되었다. 1967년에 발표된 '글쓰기와 차이' '목소리와 현상' '그라마톨로지', 그리고 1972년에 발표된 '산종' '철학의 여백' '입장'이 그것이다. 데리다는 최근까지도 꾸준히 저서를 내놓아 매번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주었지만 그의 사상은 이 초기작에 완결된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전 세계적으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는 이 작품들은 이미 고전의 목록에 올라와 있을 정도로 명성이 높다. 특히 우리말로도 번역된 '그라마톨로지' '글쓰기와 차이' '산종' 등이 그런 책이다.

지극히 존재론적인 데리다의 철학은 해체 혹은 해체론이라 불리고 차이 혹은 차연(差延)을 핵심적 개념으로 한다. 해체론은 그리스 이래의 서양철학사 전체의 기본 전제들에 대한 회의와 극복을 의도한다. 서양적 사유, 그리고 이에 기초한 서양적 문화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다.

해체론은 서양적 사유의 전통에서 아직 사유되지 않은 것, 아직 분석되지 않고 명료화되지 않은 것을 철저히 되새김질하면서 그 전통을 극복하고자 한다. 이런 극복의 작업은 서양적 사유의 한계를 발견하는 단계를 지난다. 그러나 해체론적 의미의 한계는 단순히 어떤 것이 가다가 멈추는 곳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어떤 것을 낳고 일정한 형태 안에 보존하는 울타리이기도 하다. 서양적 사유의 정체성이 비롯되면서 동시에 끝나는 지점, 그런 이중적 의미의 한계를 발견하는 것이 데리다적 의미의 해체이다.

해체론이 던지는 궁극적 의미는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이다. 그리스에서 시작되었고 현대 과학 기술에서 완결되는 서양적 사유와 다른 사유, 그것을 능가하는 사유는 있을 수 없는가. 서양적 문화와 다른 종류의 문화, 그것을 능가하는 문화를 계획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데리다는 이런 이성 중심적 사유의 한계와 그 바깥을 그 사유 자체의 안쪽에서 발견한다. 그 안쪽에서 그 안의 논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부분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 부분은 어떤 상위의 논리가 지배하는데, 그것이 차이의 논리이자 그것이 수반하는 보충의 논리다. 동일성은 언제나 차이의 논리가 전개되는 과정의 부대적 효과에 불과하다는 것, 그래서 이분법적 배타성의 배후에는 언제나 상호 보충과 접촉이 자리한다는 것, 이것이 해체론의 논점이다.

즉 차이의 논리는 이성적 사유가 잊고 있는, 그러나 이성적 사유의 생성과정을 결정하는 가능 조건이자 불가능 조건이다. 합리적 질서는 차이의 유희에서 처음 생기는 동시에 거기서 와해되기 시작한다. 데리다는 이 차이의 사태를 해체 불가능자라 부른다. 더 이상 분석할 수 없고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회의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회의했는데, 데리다는 모든 것을 해체해보면 해체 불가능한 사태로서 차이의 유희가 남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데리다는 여러 철학적 주제들을 실마리로 이 해체 불가능한 차이의 논리가 작동하는 지점을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그라마톨로지'에서는 서양의 음성 중심적 언어관과 문자 비하의 전통이 이성 중심적 사유의 편견임을 밝히고, 그 편견을 제거했을 때 드러나는 진정한 언어의 기원이 그람임을 주장한다. 이때 그람이란 언어의 시작인 동시에 끝인 한계적 사태, 즉 차이의 유희다. 음성과 도형 사이의 상호 보충과 대리를 유발하는 차이의 유희가 그람이고, 그에 대한 탐구의 전략이 그라마톨로지다. 이런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데리다의 전언은 이성을 폐기하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진정한 유래와 한계, 이성적 사유의 태생적 편견을 자각하자는 데 있다.

그는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현실문제에도 적극 참여했다. 1981년엔 프라하에서 체코의 반체제 지식인들과 비밀회합을 갖다가 체포되기도 했고, 만델라 구명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예술가들과도 교류해 미국 건축가 피터 아이스만과 함께 공원을 설계하고, 비디오 아티스트 게리 힐의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다. 90년대 들어서는 '마르크스의 유령' 등 기아, 인종주의, 핵문제 같은 현실문제에 대한 저서를 잇따라 내놓고 있다. 그의 해체주의는 프랑스 안팎의 반응이 극단적으로 엇갈린다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1966년 존스 홉킨스대의 초청으로 국제회의에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문학, 건축, 영화, 미술 등 다양한 영역에서 그의 해체주의가 응용되며 그의 해체주의는 미국에서 환영받았다. 데리다 사상이 학파의 모양새를 갖추게 된 것도 미국이다.

1975년 이후 매년 수주씩 예일대에 초청돼 머물면서 강연한 것을 계기로 폴 드 만, 블룸 등 예일대 교수들을 중심으로 '예일학파'가 형성됐다. 반면 프랑스 학계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가 사용하는 개념의 난해함, 하이데거 철학의 아류로 보는 시각 때문에 '현대판 소피스트'라는 비아냥도 그를 귀찮게 했다. 프랑스 학계의 데리다 푸대접은 1980년 파리 10대학 철학과 폴 리쾨르 후임교수 선발 때 잘 드러났다. 이 자리를 따기 위해 나이 쉰에 소르본대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아온 데리다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 후 데리다는 1983년 국제철학학교를 창설, 초대 교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철학과 주임교수로 재직중이다.(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시인의 꿈」


어느 시인의 입술에서 나는 잠잤다,
그의 숨결 소리 맞추어 꿈을 꾸면서,
사랑에 통달한 이가 그렇듯이
세상의 행복을 그는 구하지도 얻지도 않는다.
다만 상념의 황야를 드나드는 형상들의
영묘(靈妙)한 키스를 즐기며 살 뿐.
새벽부터 황혼까지 그가 늘 보는 것은
호수에 반사된 해가 담쟁이꽃 속의
노란 별들을 비추는 것.
그것들이 무엇과 무엇이라는 것은 주의하지도 보지도 않고 ―
그러나 이들로부터 그가 분명히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은
산 사람보다 더욱 진실한 형상들,
영원한 것의 아들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4.07.10 토

불속에 던져라

탈근대 철학이 문제인 건 오히려 맑스주의적이기 때문이다. 맑스주의 이론은 현실과 대중에 의해 끊임없이 검증받으며 제 오류와 한계를 수정해나간다. 그러나 탈근대철학은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는 언어의 범벅이라 현실에게서든 대중에게서든 검증받을 수 없는 속성을 가진다. 우리는 그렇다면 탈근대철학은 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 라는 자연스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맑스주의를 대중과 현실에서 끝없이 격리시키면서 가장 지적이고 세련된 맑스주의처럼 행세하는 이 물건은 말이다.

아래 글은 그 물건에 대한 촘스키 선생의 견해다. 그는 주눅 들것 없이 해명을 요구하거나 그 물건을 “불속에 던질” 것을 권한다.

Z에 기고한 촘스키의 글

여행을 가서 강연을 마치고 - 제 대부분의 생애를 이것으로 보내지요 - 돌아와보니 "이론"과 "철학" 에 대한 토론과 관련해서 계속 글들이 올라오고 있군요. 제가 보기에는 다소 기묘한 논쟁입니다만 말입니다. 여기 제 반응들을 몇가지 올립니다. 단, 미리 인정하겠지만, 솔직히 지금 무슨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 이 논쟁은 처음에, 저와 마이크[Michael Albert; "Z"의 편집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아무런 "이론"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여러가지 사건들이 왜 일어나는가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에서 촉발되었지요.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고 해결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이 점에서 약점을 가지고 있고, 이 약점을 고치기 위해서는 "이론"과 "철학"과 "이론적 구성물들"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굳이 마이크를 대변할 필요는 없겠지요. 지금까지 저의 응답은 제가 35년전, 그러니까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 지성계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기 오래 전부터 이미 활자화했던 주장들을 거의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만약에 시사 문제들을 다루거나 국내외의 분쟁들을 해결하는데에 적용할 수 있고, 충분히 시험을 거쳤으며 잘 검증된 이론이 있다면, 누군가가 그런 이론의 존재를 지금까지 비밀리에 잘 감춰왔음이 분명하다. [그런 이론이 있다는] 수많은 사이비 과학적 허세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제가 아는한 이 말은 35년전에도 맞는 말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더구나, 제가 한 말은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모든 연구들에 확장되며, 35년전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온 "이론"들에 대해서도 물론 단 하나의 예외없이 적용됩니다. 제가 아는 한 그동안 바뀐 것이라면, 이른바 "이론"과 "철학"을 제안하는 사람들 사이에, 스스로에 대한, 그리고 서로에 대한 존경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사실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이비 과학적 허세"이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찾을 수 없지요. 제가 에전에도 썼지만,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는 것들중 가끔 꽤 흥미있는 것들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들도 제 시간과 정력을 바치고 있는 실제 세계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함축을 가지고 있지 않지요. (가령, 예를 들어달라는 구체적인 요구와 관련해서 제가 언급한 것으로, 롤즈(Rawls)의 중요한 작업이 있습니다.)

자기네들끼리에 대한 존경심의 폭발적인 증가라는 현상은 이미 주목받고 있습니다. 가령 상당히 괜찮은 철학자이자 사회이론가 (그리고 또한 활동가이기도 하지요)인 앨런 그라우바드 (Alan Graubard)가 몇년전에 롤즈에 대한 로버트 노직 (Robert Nozick)의 "자유지상주의적"인 응답, 그리고 그 응답에 대한 반응들과 관련해서 흥미있는 논평을 썼었지요. 앨런은, 노직의 응답에 대한 반응들이 아주 열광적이었음을 지적했습니다. 논평을 썼던 사람들마다 노직의 논변들이 가지는 파워 및 그밖의 여러 점들을 극찬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누구도 실제 세계와 관련된 노직의 결론들중 그 어느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 중 이미 그런 결론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예외로 하고 말이지요). 앨런의 지적이 맞습니다. 더불어 이런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그의 논평도 맞구요.

"이론"과 "철학"을 지지하는 이들은, 자신들을 옹호하길 원한다면 아주 쉽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냥 저에게,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비밀"로 남아있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면 됩니다. 기꺼이 공부하겠습니다. 사실 이전부터 알려달라고 여러번 요구했지요. 그리고 여전히 답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답변하기 어려운 요구가 아닙니다: 마이크, 저,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사실, 편협하고 놀랍게도 자족적인 지식인 사회를 제외한 대다수의 인류가)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들과 사안들에 "적용할 수 있고, 충분히 시험을 거쳤으며, 잘 검증된 이론"의 예를 보여주면 됩니다.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그리고 글을 쓰고 있는 문제들과 사안들, 또한 이들과 같은 종류의 문제들과 사안들에 대해서 말이지요. 조금 다르게 말해보면, 우리가 공부해야한다고 하고 또 적용해야 한다고 하는 "이론"이나 "철학"의 원리들이, 우리 및 다른 이들이 다른(또는 더 나은) 근거에 의해 이미 다다른 결론들을 타당한 논변을 통해 이끌어낸다는 점을 보여주십시오. 이 "다른 이들"에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도 포함됩니다. 왜냐하면 이들 또한 "이론적" 모호함 같은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상호 관계를 통해, 또는 곧잘 스스로들, 제가 말한 그런 결론들에 다다르니 말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은 간단한 요구입니다. 이런 요구를 전에도 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그 비밀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지요. 저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몇가지 결론을 끌어냈습니다.

요즘 진행되고 있는 (그리고 논쟁에서 언급된 바 있는) 이른바 "해체(deconstruction)"과 관련해서는 논평을 할 수가 없군요. 왜냐하면 그 대부분이 저에게는 횡설수설인것처럼 보이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이것이 심오함을 깨닫지 못하는 저의 능력부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신호라면, 다음으로 여러분이 해야할 일은 분명합니다: 그 결과들을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들로 다시 서술해주고, 이 결과들이, 세음절 이상 나가는 단어, 비정합적인 문장, (최소한 저에게는)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이 남발되는 수사, 이런 것들 없이도 이미 오래 전부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 결과들과 왜 다른지, 또는 왜 더 나은지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제 능력부족이 치료가 되겠지요. - 물론, 치료가 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말입니다. 어쩌면 치료가 안될지도 모르지요. 이 가능성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이건 만족시키기 아주 간단한 요구입니다. 그렇게도 대단한 열정과 분노로 제기되는 주장들에 어떤 근거라도 있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요구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하는 대신, 답변들을 보면 잔뜩 화만 내고 있지요: 이런 요구를 제기하는 것은 "엘리트주의", "반지성주의", 또 그밖의 다른 범죄들을 범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 반면에, 스스로에 대한 존경과 상호간의 존경이 가득한 지식인 사회에 머무르면서 자기네들끼리만 얘기하고 제가 있기를 더 선호하는 종류의 세계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엘리트주의"가 아니라고 하는 듯 합니다. 제가 더 선호하는 세계에 대해서라면, 제 강연 및 집필일정만 봐도 제가 뭘 의미하는지 예시가 될 겁니다. 물론 이 토론 참가자들이야 다 알고 있거나, 쉽게 알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저는 그 세계에서 어떤 "이론가"들도 본적이 없으며, 그들이 하는 회의나 파티에 가본적도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저와 그들은 그냥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의 세계가 아닌 제 세계가 "엘리트주의"적 세계인지는 알기 힘듭니다. 더 이상 논평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그 반대가 사실이라는 것은 자명한듯이 보이지요.

또 다른 면을 덧붙이자면, 저에게는 강연 요청들이 너무나 많이 밀려들어와 도저히 제가 원하는만큼 다 수용을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런 경우 저는 다른 사람들을 제안하지요. 하지만 기묘하게도, 저는 "이론"이나 "철학"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절대 제안하지 않습니다. 대중 모임과 활동가들의 모임및 단체, 일반 단체, 대학, 교회, 노조, 등등, 또 국내외 청중들, 제3 세계 여성들, 난민들, 등등, 이들과 관련된 제 자신의 (상당히 광범위한) 경험에서, 그런 사람들과 (또는 그들의 이름조차도) 우연히 부딪히거나 한 적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궁금합니다.

그래서, 게시판의 이 모든 논쟁이 기묘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한편으로는, 성난 비난과 탄핵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비난과 탄핵을 지지할만한 증거와 논변을 보여달라는 요구에 대해 더한층 분노로 가득찬 비난으로 응답을 합니다. --- 하지만 놀랍게도, 어떤 증거나 논변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왜 그럴까를 물어보게 되지요.

제가 뭔가를 놓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도 전적으로 가능합니다. 또는 어쩌면 과거 20년동안 [프랑스] 파리의 지식인들과 그 추종자들이 밝혀놓은 심오한 사실들을 이해할만한 지적 능력이 저에게 부족한 것이지도 모르지요. 저는 그런 가능성들에 대해 전적으로 열려있습니다. 비슷한 비난들이 쏟아진 수년간 계속 그래오고 있지요 - 하지만 제 질문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답변도 들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제 질문들은 간단하고 답변하기 쉬운 것들입니다 - 답변이 있다면 말입니다: 제가 뭔가를 놓치고 있다면, 그게 뭔지 보여주십시오.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들로 말이지요. 물론, 그것들이 완전히 제 이해를 벗어나 있는 것이라면 - 그럴 수도 있습니다 -, 그렇다면 체념해야지요.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제가 이해할수 있는 것 같은 일들을 계속해야지요. 또한 이 일들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으며 관심있어하는 것 같은 사람들과 계속 다녀야지요. (물론 저로서는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자기 자족적인 지식인 문화에 대해서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아무도 제가 뭘 놓치고 있는지 성공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남은 것은 두번째 가능성인 것 같습니다: 제가 이해를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 가능성이 참일지도 모른다는 점은 기꺼이 인정합니다만, 저로서는 계속 미심쩍어할수밖에 없군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말이지요: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 가령, 중성미자(neutrino)가 질량을 가지고 있는가에 관한 최신 논쟁, 또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최근에 어떤 식으로 증명되었는가에 대한 지식. 하지만 저는 이쪽 동네에 50년간을 있으면서 다음과 같은 두 사실을 배웠지요:

(1) 관련 분야에 있는 친구들에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설명해달라고 부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특별한 어려움없이 내 부탁을 들어줄수 있다.

(2) 내가 관심있으면, 좀 더 공부해서 이해할 수도 있다.

자, 이제 데리다(Deridda), 라캉(Lacan), 리오타르(Lyotard), 크리스테바(Kristeva), 등등 - 심지어 푸코(Foucault)도 말이지요. 비록 제가 그를 알고 있고 좋아했으며, 이 부류의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말입니다 - 은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글들을 쓰지요. 하지만 [이들의 글과 관련해서는] (1)과 (2)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해했다고 하는 어떠한 사람도 저한테 그걸 설명해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사실 그런 저의 이해불능을 어떻게 극복해야할지 조금의 실마리도 찾을 수 없습니다.그렇다면, 다음의 두가지 가능성중 하나가 맞겠지요. (a) 지성계에 무엇인가 새로운 진보가 이루어졌다 (아마도 어떤 종류의 갑작스러운 유전자 돌연변이에 의해서이겠지요). 그 결과 그 깊이와 심오함에 있어서 양자역학, 위상수학, 등등을 뛰어넘는 형태의 "이론"이 탄생되었다. 또는 (b) . . . .자세히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이 지식인 세계라는 데에서 50여년간을 살아왔고, "철학"과 "과학"이라고 불리우는 영역들 및 지성사 분야에서 제 자신의 일을 상당량 해 왔습니다. 아울러 자연과학, 인문학, 사회과학, 그리고 예술 분야에서의 지식인 문화에 대해 상당한 개인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지요. 이런 경험을 통해, 저는 지식인들의 생활에 대한 제 자신의 결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세히 쓰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간단히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여러분들보고 "이론"과 "철학"의 경이로움에 대해 말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해줄 것을 요구하십시오. 물리학, 수학, 생물학, 언어학, 그 밖의 다른 분야들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군가가 그들보고 진지하게 그들 이론의 원리들이 무엇이고, 그 원리들이 어떠한 증거들에 바탕해있고, 그것들이 설명하는 것들이 이미 명백한 것들이 아닌지 등등을 물어볼 때 기꺼이 답해주겠지요. 이건 누구나 해야하는 공평한 요구들입니다. 이 요구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면, 그렇다면 저는 비슷한 상황에서 흄(Hume)이 제시한 충고를 받아들이라고 제안하겠습니다: 그 "이론"과 "철학"을 불속에 던져버리십시오.


이제 몇가지 세부적인 논평을 하겠습니다: 제가 "파리 학파들"(Paris Schools)과 "포스트모더니스트 종파들"(Postmodernist cults)을 말할 때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건지 페틀랜드(Phetland)가 물어보았지요. 위에 든 사람들이 그 일례들입니다.

그 다음에 페틀랜드가, 당연하게도, 왜 제가 이들을 "무시"하느냐고 물어보았지요. 가령 데리다를 들어볼까요. 우선, 저는 이제부터 제가 하려는 것과 같은 종류의 논평을 아무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점을 밝힙니다. 하지만 여기 이 게시판에 참가한 사람들이, 가령, 소쉬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원하는지 의심스럽군요. 그리고 어쨌든 저는 그런 분석을 하지 않을 겁니다. 페틀랜드가 제 견해를 명시적으로 물어보지 않았다면 이제부터 할 얘기를 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리고 만약 제 견해를 뒷받침하라고 요구받는다면 저는, 그런 일은 시간들여서 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답변할 것입니다.

어쨌든 데리다를 보겠습니다. 나이많은 저명한 사람들 중 하나이지요. 저는 최소한 그의 <그라마톨로지(Grammatology)>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읽으려고 시도했지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가령 제가 매우 잘 알고 에전에 거기에 관해서 논문도 쓴 적이 있는 고전적 문헌들에 관한 비판적 분석같은 것 말이지요. 우스꽝스런 오독에 근거한, 형편없는 스칼라쉽이었습니다. 아울러 그 논변이라는 것이, 제가 사실상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익숙해왔던 정도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지요. 글쎄, 아마 제가 뭘 놓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위에서 말한대로 의심은 여전히 남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무런 근거도 대지 않은 논평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견해를 물어봤으니, 답변을 하는 겁니다.

이 종파들 (제가 보기에는 종파들처럼 보입니다)에 있는 사람들 중 몇몇은 저도 만나보았습니다: 푸코 (우리는 심지어 몇시간씩 토론도 했지요. 활자화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동안 매우 즐거운 대화를 했지요. 실질적인 사안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 그는 불어로, 저는 영어로). 라캉 (여러번을 만났고, 재미있는, 그리고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사기꾼 (charlatan)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종파를 형성하기 이전인 그의 초기 연구는 사리에 맞는 것이었고 이에 대한 제 논의도 활자화되어있지만 말입니다). 크리스테바 (그녀가 열광적인 마오주의자였을 때 잠깐 만난적이 있지요). 그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나보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요. 저는 제 선택에 의해 이들 써클을 멀리 했고, 전혀 다르면서 훨씬 광범위한 써클들을 더 선호했으니까요 - 제가 강연하고, 인터뷰하고, 운동에 참여하고, 매주 몇십장씩 긴 편지들을 쓰고 하는 써클들 말입니다. 저는 호기심에 이끌려 그들의 저술에 손을 댔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이유들 때문에 진도를 많이 나가지는 못했지요: 제가 본 것은, [이들이] 극단적으로 허세를 부리면서도, 검토해보면 그 허세중 대부분은 단순히 그 분야에 대해 기본 소양이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때로는 제가 논문을 쓴 적도 있는) 문헌들에 대한 엄청난 오독, 기본적인 자기-비판도 수시로 무시한다는 점에서 지독하게도 형편없는 논변, (복잡다단한 말들로 치장되어있지만) 사소하거나 거짓인 많은 진술들, 이런 것들에 근거한 허세이지요. 더불어 상당부분은 그냥 횡설수설(gibberish)입니다.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분야들에서 중간에 막힐 경우에는, 저는 위에서 말한 (1)과 (2)에 관련된 문제들과 부딪히지요. 어쨌든 위에서 말한 사람들이 제가 애초에 염두에 둔 사람들이고, 또 제가 왜 진도를 많이 나가지 못했는가에 대한 이유입니다. 혹시 불분명하다면 더 많은 이름들을 나열할수도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하지만 내부인으로서의) 관찰에 대한 문학적 묘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데이비드 롯지 (David Lodge)의 소설들을 권하겠습니다. 제가 판단할 수 있는 하에서는, 정곡을 찌른 것 같습니다.

페틀랜드는 또한, 제가 "뉴욕 타임즈의 허세와 혹세무민을 드러내는" 데에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이들 지식인 써클들에 대해서는 아주 "간단히 무시"하는 것이 "매우 당혹스럽게" 여겨진다고 썼습니다. "왜 이 사람들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취급해주지 않는 것이지요?" - 정당한 질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간단한 답변이 있지요. 제가 논의하는 (뉴욕 타임즈, 여러 저널들, 많은 학술책들) 텍스트들은 이해가능한 글들로 씌어져있고 세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사회같이 성공적으로 교설적인 (doctrinal) 사회에서, 생각과 표현을 담는 교설의 틀 (doctrinal framework)을 제공하니까 말입니다. 이것은 세계 전역에 걸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주지요. 저는 이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지, 롯지가 (제 생각에는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따라서 만약 일반적인 사람들과 그들의 문제들에 관심이 있다면, 제가 논의하는 텍스트들을 진지하게 다루어야지요. 페틀랜드가 언급한 글들은, 제가 판단하는 한, 전혀 그런 성격의 글들이 아닙니다. 분명히 그 글들은 세계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지요. 왜냐하면 이 글들은 단지 같은 써클들 내에 있는 다른 지식인들에게만 읽혀지니까요. 더구나, 이들 글들을 일반 대중들 (가령, 제가 강연을 하거나, 만나거나, 편지를 쓰거나, 또는 제가 글을 쓸때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별다른 특별한 어려움 없이 제가 말하는 것들을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비록 일반적으로 볼 때 이들 역시 제가 포스트모던 종파들에 맞닥뜨렸을때 가졌던 것과 같은 종류의 지적 장애를 그 종파들에 대해 가지는 것 같지만 말입니다)에게 이해시켜보려는 시도가 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또한 저는 그런 글들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적용해보려는 시도가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제가 앞에서 언급한 의미에서, 이미 명백한 것이 아닌 뭔가 새로운 결론들을 뒷받침해주는 역할로서의 적용을 해보려는 시도 말이지요. 저는 지식인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명성을 부풀리고, 특권과 존경을 얻고, 일반일들의 투쟁에 동참하는 것을 점점 멀리하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 큰 관심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것이지요.

페틀랜드는 푸코에서부터 시작해 볼 것을 제안하는군요. 반복하지만, 푸코는 다른 이들과 두가지 이유에서 조금 틀리지요: [첫번쩨로] 최소한 푸코가 쓴 글들중 몇몇은, 비록 그렇게 흥미롭지는 않습니다만, 저도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푸코는 개인적으로 [대중들의 투쟁에]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고, 같은 부류의 특권 엘리트 써클들안의 다른 이들과만 상호 교류하지도 않았지요. 이어서 페틀랜드는 정확히 제가 요구했던 것을 답하려고 합니다: 페틀랜드는 왜 자신이 푸코의 저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쓰고 있지요. 이것이 토론을 하는 제대로 된 방식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여기에 대한 제 답변을 통해 왜 제가 이런 부류의 저술들에 대해 그렇게도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는지 이해가 되리라 봅니다 - 사실, 전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지요.

페틀랜드가 서술하고 있는 푸코의 "이론" - 올바른 서술이라고 확신하건데 - 은 제가 보기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론"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알고 있었던 것이니까요 - 사회사 및 지성사와 관련된 세부 사항들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사실 이 세부사항들에 대해서도, 저라면 상당히 주의하겠습니다: 이 영역들 중 몇몇은 제 자신이 우연히도 꽤 광범위하게 연구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영역들과 관련해서는 푸코의 스칼라쉽이 별로 신뢰할만한게 못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요. 그 결과 제가 모르는 영역들에 대해서도, 별다른 조사는 하지 않았습니다만, 그의 작업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1972년 이래로 활자화된 논의들을 보면, 이런 문제점들이 조금씩 불거지기 시작하지요. 17세기와 18세기에 관련해서 [푸코보다] 훨씬 더 나은 스칼라쉽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들과, 제 자신의 조사결과를 참고하지요. 하지만 다른 역사 관련 저술들은 제쳐놓고, "이론적 구성물들"과 설명들로 넘어가봅시다: "가혹한 억압 메커니즘으로부터, 사람들이 권력이 원하는 것들을 (심지어 자발적으로) 하게 되는 보다 교묘한 형태의 메커니즘으로의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 설명은 진실입니다. 사실, 당연한 말이지요. 만약 이런 게 "이론"이라면, 저에 대한 모든 비판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그런 "이론"은 있으니까요. 저는 정확하게 푸코가 지적하고 있는 바로 그 점을 지속적으로 주장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유와 역사적 배경도 제시했지요. 하지만 저는 제 견해를 "이론"이라고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론"이라는 용어를 붙일만한 것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헷갈리게 만드는 수사도 쓰지 않았지요 (왜냐하면 제 주장은 아주 단순한 것이니까요). 아울러 제 견해가 새로운 것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지요 (왜냐하면 당연한 사실이니까요). 통제와 억압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이 쇠락해감에 따라 20세기초 PR 산업 종사자들이 "대중들의 마음을 조종하기"라고 부른 것들에 점점 의존해야 될 필요성이 생겼다는 것은 오랫동안 인지되어온 사실입니다. 18세기에 흄이 말했듯이,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의 느낌과 욕구를 통치자들의 느낌과 욕구에 굴복하여 암묵적으로 맡겨버리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통치자들이 사람들의 견해와 태도를 조종하는데에 근거해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당연한 사실이 갑자기 "이론"이나 "철학"이 되어야하는지는, 다른 사람들이 설명해주어야지요. 흄이라면 웃었을 겁니다.

푸코의 특정한 예들 중 몇몇 (가령 18세기의 형벌 방식)은 흥미있어 보이고, 그 정확성에 대해 조사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단순히, 남들이 별다르게 심오한 것이 있다는 허세없이도 간단하게 지적해놓은 것을 엄청나게 복잡하게 만들고 부풀려서 다시 진술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페틀랜드가 서술한 것 중 그 어느 것도 제가 35년간 써왔고 많은 자료들을 통해서 보여왔던 것들 - 이것들 모두가 명백하고 당연한 사실들이지요 -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사소한 사실들에서 흥미있는 것은 어떤 원리가 아니라 - 그 원리가 무엇인지는 명백하지요 - 어떻게 이 원리가 사람들에게 중요한 일들에 구체적으로 적용되는가 하는 점을 보이는 것입니다: 국가개입, 칩략, 착취, 테러, "자유시장"이라는 사기, 등등에서 말입니다. 이것들과 관련된 작업은 푸코의 저술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반면에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문장들을 쓸 수 있고 지성계에서 "이론가들"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의 많은 저술들에서는 그런 작업을 찾아볼 수 있지요.

제 논지를 분명히 하겠습니다. 페틀랜드는 정확히 옳은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보기에 푸코가 발견한 "중요한 통찰들과 이론적인 구성물들"을 제시하고 있으니까요. 제 문제는, 그 소위 "통찰들"이라는 것이 이미 익숙한 것들이며, 더구나, 단순하고 익숙한 아이디어들이 복잡하고 허세에 가득찬 수사들로 치장되었다는 점을 뺀다면 어떠한 "이론적인 구성물들"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페틀란트는 제가 푸코의 작업을 "틀렸는지, 쓸모없는지, 또는 허세인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역사와 관련된 그의 작업은 때때로 흥미롭습니다. 비록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고, 하나하나 검증을 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말이지요. 오랫동안 명백한 사실이었고 훨씬 더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점들을 재진술한 부분은 "쓸모없지" 않습니다. 사실 매우 쓸모있고, 그게 바로 저와 다른 활동가들이 늘 같은 점들을 지적하는 이유이지요. "허세"와 관련해서는, 물론 제 견해로는 푸코가 쓴 많은 것들이 허세입니다. 하지만 특별히 그것 때문에 푸코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허세는 프랑스 파리의 썩어빠진 지식인 문화에 아주 뿌리깊숙히 박혀있는 것이고, 푸코는 그냥 거기에 자연스럽게 빨려들어간 것이니까요. 오히려 높이 사야 할 점은, 그가 그 문화에 거리를 두었다는 사실이지요. 파리 지식인 문화의 "부패"(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대해서는, 이건 다른 이슈이고 제가 다른 곳에서 논의한 적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여기 게시판의 사람들이 이 이슈에 대해 관심있어 해야할 필요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별로 관심없습니다. 제 견해로는, 그들 자신들만의 편협하고 (최소한 저에게는) 별로 흥미롭지도 않은 써클들에서 엘리트 지식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의 경력을 쌓았고 또 다른 것들을 추구했는지에 대해 검토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게 매우 성근 주장이라는 걸 압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아무런 증명없이 이런 논평을 한다는 것은 공정하지 않지요. 하지만 저에게 질문들을 제기해왔고, 저는 여러분들이 제기한 특정 이슈들만을 답했습니다. 제 일반적인 견해를 물어보면, 저로서는 그냥 제 견해를 말하는 방법밖에 없지요. 그리고 보다 특정한 이슈들에 대해서는 그것들 하나하나에 대해서만 답할 수 밖에요. 저는 제가 관심이 없는 주제들에 대해 책을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론"과 "철학"에 관련된 주장들이 제기될때 어떠한 합리적인 사람들이라도 곧바로 마음속에 떠올릴 단순한 문제들에 대해 누군가가 대답해줄수 없는한, 저는 제가 보기에 합당하고 계몽적인 작업들을 지속해나아갈 것이고, 또한 세계를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데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만날 것입니다.

존 (Johnb)은 "듣는 이가 준거틀 (frame of reference)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평이한 언어로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을 해주었습니다. 옳고 중요한 지적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 올바른 반응은, 있지도 않은 "이론"과 관련된 애매모호하고 불필요하게 복잡한 말과 허세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지요. 올바른 반응은, 듣는 이로 하여금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는 준거틀을 의문시해보라고 요청하고, 그것 대신 고려해 볼 수 있는 다른 대안을 평이한 언어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저는 정식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혹은 어떤 경우에는 전혀 받지 못한 사람들과 늘 얘기하지만,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단 교육 수준이 점점 올라가서 지배 이데올로기에 단단히 세뇌되어 있고 알아서 복종하는 것 (엘리트 교육의 상당 부분은 이런 걸 가르치는 것이지요)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일수록 이해시키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존은 말하기를, 여기 게시판과 같은 써클을 제외한 "우리나라[미국]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그("그"는 저를 의미하지요)는 이해불가능한 사람이다"라고 했지요. 이건 제 많은 경험들에 완전히 위배되는 말입니다. 모든 종류의 청중들과 관련해서 말이지요. 오히려, 제 경험은 제가 방금 서술한 그대로입니다. 가령, 라디오 대담을 보지요. 저는 라디오 대담에 상당히 많이 나갔는데, 억양등을 들어보면 청취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를 상당히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제가 끊임없이 발견하는 것은, 청취자가 가난하고 덜 교육받은 사람일수록 많은 배경지식이나 "준거틀" 문제같은 것을 제가 그냥 건너뛸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말하는 것들은 상당히 자명하고 모든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저는 그냥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들로 곧장 옮겨나아갈 수 있습니다. 좀더 교육받은 청취자일수록 이게 훨씬 더 힘이 듭니다. 수많은 이데올로기적 구성물들을 부숴버리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제가 쓴 책들을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건 그 안의 아이디어들이나 언어가 복잡해서 그런것이 아니지요. 강연장에서 자유토론을 할 때는, 정확히 같은 사안들에 대해, 심지어 정확히 같은 단어들을 써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요.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제 문체 때문일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상당히 방대한 자료를 제시해야 될 필요 (최소한 저는 그렇게 느낍니다) 때문에 그 결과 읽기가 어려워지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제 책에서 특정 부분을 (어떤 때는 거의 그대로) 팜플렛 형태나 그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 배포하지요. 아무도 [이해하는데] 별 문제를 느끼는 것 같지 않더군요. 물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오히려 Times Literary Supplement나 전문적인 학술 저널들은 도대체 제가 뭘 말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는 경우가 자주 벌어집니다만 말입니다. 어떤 경우에 보면, 정말 희극적이지요.

마지막 지적입니다. 이미 다른 데서도 썼습니다만 (Z에서의 토론, <501년: 정복은 계속된다>의 마지막 장등), 최근 지식인 계급의 행동에서 놀라운 변화가 있었지요. 60년전이라면 노동 계급 학교들에서 가르치거나 <백만인을 위한 수학> (제목 그대로,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수학을 이해가능하게끔 해주었지요)과 같은 책들을 쓰고 대중 조직들에 참여 및 강연을 했었을 좌파 지식인들이, 지금은 그러한 활동들을 거의 도외시하고 있습니다. 이건 조그만 문제가 아니지요. 지금 이 나라[미국]는 매우 이상하고 불길한 조짐을 보이는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환상에서 깨어나고, 회의적이 되고, 혼란스러워합니다. 마이크가 말한 것처럼, 이런 상황이야말로 활동가들이 꿈꾸어오던 것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이런 상황은 선동정치가들과 광신자들에게 비옥한 토양이 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비슷한 상황에서 그들의 선배들이 뿌려왔던 메시지들을 뿌려대면서 상당수의 대중적 지지를 즐길 수 있을 (그리고 실제로 벌써 즐기고 있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과거에 이러한 상황이 어떠한 식으로 발전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지요. 과거에는 일반 대중들과 그들의 문제를 기꺼이 공유하고자 한 좌파 지식인들이 메어왔던 간극이, 현재는 엄청난 틈으로 존재하고 있지요. 제가 보기에 이러한 상황은, 불길한 함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답변을 끝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앞에서 말한 명백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받지 못할 경우, 이 문제에 대한 저의 개인적 관심도 이것으로 끝을 내려고 합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도서관여행자 2004-07-24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김규항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저는 문과대생이라서, 라캉이나 푸코 등등의 프랑스 지식인들의 이름을(이름만...^^;) 자주 접하게 되는데요, 그들이 현란한 수사를 활용하는 지식인이며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는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이 글 읽어보면, 그들의 저서를 읽거나 배우는 게 상당히 무의미하게 생각되는군요. 그들을 이해하고 공부하려는 노력이 얼마만큼 유의미한 일일까요? [질문입니다.]

쎈연필 2004-07-25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촘스키의 짧은 글을 읽고서 그들을 무의미하게 여길 정도로 생각이 좌지우지 되신다면, 그들의 짧은 글을 읽고서도 생각이 확 바뀌지나 않을까요? 그들을 읽는 게 "어떤어떤 이유 때문에" 유의미하다, 라고요.

저는, 저명한 누군가가 던져주는 정보에 쉽게 현혹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 사람이 접한 것과 제가 접한 것이 비록 같은 텍스트일지라도, 상반된 효과나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저는 솔직히 촘스키의 윗글이 더욱 이해되지 않네요. 그래서 저는 촘스키를 읽고 싶지 않은가 봅니다. 이런 게 바로 차이가 아니겠어요? 차이에 대해서는 데리다라는 사람과 푸코라는 사람이 깊게 연구를 했다고는 하데요. 저는 잘 모릅니다만... 알라딘 서재에 프랑스 철학에 대해 아주 정통하신 분이 계시더군요. balmas님이라고... 그분께 물어보는 것도 괜찮겠네요.

본의 아니게 딴지를 건 것 같은데... 기분 상하지 않으시길요. 워낙 무더워서 말이죠. 잘 지내시죠?

갈대 2004-07-25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라보예 지젝이 쓴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삐딱하게 보기>라고 "대중문화를 통한 라캉의 이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제가 이 책에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라곤 제목뿐이었습니다. 번역탓을 할 수도 있지만 아마도 제가 아둔한 탓이겠지요.

저는 현대 프랑스 철학이 형편없다고는 생각지 않지만(읽어보질 않았으니 당연히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앞으로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습니다) 촘스키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고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식적인 선에서 헛소리인지 아닌지를 분간할 수 없다면, 과연 그 이론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혹시 아주 나중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헛소리였다는 것으로 판명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더욱이 그 이론이란 것이 지금으로선 세상에 어떤 뚜렷한 변화를 가져올 수 없는 것이라면 말이죠(지식인들 집단이 아니라 일반 대중사회에). 이론을 좀더 쉬운 말로 써서(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면 이론을 만든 사람으로서도 분명 의미있는 작업일 것입니다. 그들이 지식인 집단만을 이해시키는 것으로(아니면 이해했다고 주장하는, 그것도 아니면 이해했다고 주장은 하지만 만족할 만한 설명은 못하는) 만족하는 누가 봐도 이상한 자족감에 도취되지 않았다면 말이죠. 하지만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은 정말 이상하게도 별로 없네요. 마치 현실세계와는 담을 쌓은 것처럼 말입니다.

"철학자들은 지금껏 세상을 해석하기만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은 변화시키는 것이다" 마모씨가 했던 말이죠. 저의 생각 역시 같습니다. 죽을 때까지 해석만 하는 사람들의 이론에는(이게 프랑스철학이란 건 아닙니다)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아 그리고 이거 퍼갑니다^^

도서관여행자 2004-07-25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몽상자님, 갈대님 코멘트 감사합니다. ^^

우선, 이 글이 쓰여진 맥락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할 듯 싶습니다. 일단, 김규항은 지식인들의 지적인 허세에 대한 혐오감의 표출로 촘스키를 인용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촘스키 역시도 운동가적 시선(?)에서 프랑스의 몇몇 지식인들이 필요 이상의 현학을 쓰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Z라는 곳도 진보적인 사이트로 알고 있구요.) 푸코를 다른 지식인들과 비교한 대목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푸코는 개인적으로 [대중들의 투쟁에]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고...") 사회 개혁을 위한 글쓰기가 지식인들의 목적이라면 필요 이상의 지적 현학은 그다지 유쾌해 보이는 일은 아니겠죠.

자몽상자님의 “저명한 누군가가 던져주는 정보에 쉽게 현혹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라는 말도 크게 와 닿는군요. 촘스키 아찌도 언제나 맑스주의나 레닌주의를 반대해왔고 유행에 따르지 않고 스스로가 사실에 근거를 두고 개별적인 이슈에 대해서 입장을 가진다고 말했다네요. 저도 명망 높은 작가, 학자들의 책이나 글을 성실히 읽는 만큼, 극장의 우상에서 벗어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프랑스 철학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프랑스 지식인이나 프랑스 철학에 대해서도, 심정적 비난이 아닌 적절한 탈우상화나 비판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무지한 저는, 그들의 현란한 수사나 독특한 논리는 어느 정도 다른 지식인, 다른 지식체계들에 대한 차별화 전략, 전술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아무런 근거 없는 추측도 하는데요. 저는, 언제나 그렇듯이 ‘비판적 수용’이라는 진부한 결론을 내려야 할 거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