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릴케 현상 >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후반기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철학자로서 데리다를 꼽는 데 주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철학은 물론 문학, 예술, 문화비평, 법률, 건축, 페미니즘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새로운 문제와 시각을 제기하면서 미래적인 지적 모험의 지평을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차이의 지평이다.

차이의 시대를 연 데리다는 1930년 서양의 주변부인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그곳에서 성장했다. 어머니가 아랍계 토착 유대인이어서 2차 세계대전 중의 나치 정권 아래 퇴학 조치를 비롯한 여러 인종 차별을 경험했다. 데리다의 작품은 천재적 재능의 결실이지만 그의 성장기는 방황과 좌절로 점철된 듯한 인상을 준다. 대입 자격고사에 낙방하여 재수를 했고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할 때와 교수자격 시험을 통과할 때도 몇 번의 실패를 겪었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후 데리다는 1983년 파리 고등사회과학원 교수로 자리를 옮기기까지 고등사범학교에서 가르쳤고 최근까지 매년 미국을 오가면서 강연을 했다. 그가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60년대 초반기이다. 현상학, 구조주의, 정신분석, 하이데거, 레비 스트로스, 푸코, 레비나스 등 당대의 지적 흐름에 논쟁적으로 개입하는 동시에 플라톤에서 헤겔과 니체에 이르는 서양 철학사의 주요 고전들을 날카롭게 해부하는 그의 글들은 보기 드문 통찰력으로 가득 차 있었고 글쓰기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었다.

이런 글쓰기의 성과는 두 번에 걸쳐 3부작 형식의 저서들로 정리되었다. 1967년에 발표된 '글쓰기와 차이' '목소리와 현상' '그라마톨로지', 그리고 1972년에 발표된 '산종' '철학의 여백' '입장'이 그것이다. 데리다는 최근까지도 꾸준히 저서를 내놓아 매번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주었지만 그의 사상은 이 초기작에 완결된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전 세계적으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는 이 작품들은 이미 고전의 목록에 올라와 있을 정도로 명성이 높다. 특히 우리말로도 번역된 '그라마톨로지' '글쓰기와 차이' '산종' 등이 그런 책이다.

지극히 존재론적인 데리다의 철학은 해체 혹은 해체론이라 불리고 차이 혹은 차연(差延)을 핵심적 개념으로 한다. 해체론은 그리스 이래의 서양철학사 전체의 기본 전제들에 대한 회의와 극복을 의도한다. 서양적 사유, 그리고 이에 기초한 서양적 문화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다.

해체론은 서양적 사유의 전통에서 아직 사유되지 않은 것, 아직 분석되지 않고 명료화되지 않은 것을 철저히 되새김질하면서 그 전통을 극복하고자 한다. 이런 극복의 작업은 서양적 사유의 한계를 발견하는 단계를 지난다. 그러나 해체론적 의미의 한계는 단순히 어떤 것이 가다가 멈추는 곳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어떤 것을 낳고 일정한 형태 안에 보존하는 울타리이기도 하다. 서양적 사유의 정체성이 비롯되면서 동시에 끝나는 지점, 그런 이중적 의미의 한계를 발견하는 것이 데리다적 의미의 해체이다.

해체론이 던지는 궁극적 의미는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이다. 그리스에서 시작되었고 현대 과학 기술에서 완결되는 서양적 사유와 다른 사유, 그것을 능가하는 사유는 있을 수 없는가. 서양적 문화와 다른 종류의 문화, 그것을 능가하는 문화를 계획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데리다는 이런 이성 중심적 사유의 한계와 그 바깥을 그 사유 자체의 안쪽에서 발견한다. 그 안쪽에서 그 안의 논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부분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 부분은 어떤 상위의 논리가 지배하는데, 그것이 차이의 논리이자 그것이 수반하는 보충의 논리다. 동일성은 언제나 차이의 논리가 전개되는 과정의 부대적 효과에 불과하다는 것, 그래서 이분법적 배타성의 배후에는 언제나 상호 보충과 접촉이 자리한다는 것, 이것이 해체론의 논점이다.

즉 차이의 논리는 이성적 사유가 잊고 있는, 그러나 이성적 사유의 생성과정을 결정하는 가능 조건이자 불가능 조건이다. 합리적 질서는 차이의 유희에서 처음 생기는 동시에 거기서 와해되기 시작한다. 데리다는 이 차이의 사태를 해체 불가능자라 부른다. 더 이상 분석할 수 없고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회의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회의했는데, 데리다는 모든 것을 해체해보면 해체 불가능한 사태로서 차이의 유희가 남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데리다는 여러 철학적 주제들을 실마리로 이 해체 불가능한 차이의 논리가 작동하는 지점을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그라마톨로지'에서는 서양의 음성 중심적 언어관과 문자 비하의 전통이 이성 중심적 사유의 편견임을 밝히고, 그 편견을 제거했을 때 드러나는 진정한 언어의 기원이 그람임을 주장한다. 이때 그람이란 언어의 시작인 동시에 끝인 한계적 사태, 즉 차이의 유희다. 음성과 도형 사이의 상호 보충과 대리를 유발하는 차이의 유희가 그람이고, 그에 대한 탐구의 전략이 그라마톨로지다. 이런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데리다의 전언은 이성을 폐기하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진정한 유래와 한계, 이성적 사유의 태생적 편견을 자각하자는 데 있다.

그는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현실문제에도 적극 참여했다. 1981년엔 프라하에서 체코의 반체제 지식인들과 비밀회합을 갖다가 체포되기도 했고, 만델라 구명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예술가들과도 교류해 미국 건축가 피터 아이스만과 함께 공원을 설계하고, 비디오 아티스트 게리 힐의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다. 90년대 들어서는 '마르크스의 유령' 등 기아, 인종주의, 핵문제 같은 현실문제에 대한 저서를 잇따라 내놓고 있다. 그의 해체주의는 프랑스 안팎의 반응이 극단적으로 엇갈린다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1966년 존스 홉킨스대의 초청으로 국제회의에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문학, 건축, 영화, 미술 등 다양한 영역에서 그의 해체주의가 응용되며 그의 해체주의는 미국에서 환영받았다. 데리다 사상이 학파의 모양새를 갖추게 된 것도 미국이다.

1975년 이후 매년 수주씩 예일대에 초청돼 머물면서 강연한 것을 계기로 폴 드 만, 블룸 등 예일대 교수들을 중심으로 '예일학파'가 형성됐다. 반면 프랑스 학계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가 사용하는 개념의 난해함, 하이데거 철학의 아류로 보는 시각 때문에 '현대판 소피스트'라는 비아냥도 그를 귀찮게 했다. 프랑스 학계의 데리다 푸대접은 1980년 파리 10대학 철학과 폴 리쾨르 후임교수 선발 때 잘 드러났다. 이 자리를 따기 위해 나이 쉰에 소르본대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아온 데리다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 후 데리다는 1983년 국제철학학교를 창설, 초대 교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철학과 주임교수로 재직중이다.(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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