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무늬, 이중선율

 "그리고 나는 가끔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부러운 것은 몸이 날씬한 금발 미인이라고 생각하네. 하지만 어떨 땐 검정머리 소녀가 더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네. 게다가 아름답고 부드럽기는 하늘 높이 떠다니는 자유로운 새를 따를 게 없다는 생각도 드네. 그런가 하면 때로는 날개에 붉은 무늬가 있는 흰 나비보다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할 때도 있네. 그리고 혹은 찬란하게 빛나지만 눈부시지 않고 환희에 넘치는 순결한 저녁 노을이 가장 좋단 말이야."

 "사실 그래. 그러고 보면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게 없네."

 "그렇지만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기쁨을 주는 동시에 슬픔과 불안도 안겨 준다고 생각하네."

 "그건 어째서?"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라도 한때 뿐이거든. 나중에는 늙어서 죽기 마련이야. 또 그 까닭에 사람들은 아름다운 소녀를 보면 사랑하게 되는 걸세. 만일 아름다움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처음에는 매혹되지만 나중에는 대수롭게 생각되지 않을 걸세. 언제나 볼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그렇지만 연약하고 변모하는 것에 대하여는 언제나 기쁨과 비애를 동시에 느끼게 마련이 아니겠나?"

 "그렇긴 해."

 "그렇기에 나는 밤 하늘에 오르는 불꽃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는 줄 아네. 어두운 밤에 치솟는 푸른 불꽃은 가장 휘황찬란한 무렵에 작은 혼선을 그리면서 꺼져버리거든. 그때 그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연히 기쁨과 불안을 동시에 느끼게 마련이지. 기쁨과 불안은 이렇게 서로 짝지어 다니면서 그것이 순간적일수록 더욱 아름다운 것일세. 그렇지 않나?"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영혼을 갖고 있지. 그러므로 다만 사람의 영혼과는 완전히 구별되네. 사람은 둘이서 같이 걸어갈 수도 있고, 말할 수도 있으며, 가까이 다가앉을 수 있지만, 두 영혼은 마치 꽃과 같아서 각각 어느 일정한 곳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서로 가까이 할 수 없네. 가까이 하려면 뿌리를 뽑아야 할 테니 그게 어디 될 말인가. 그러므로 꽃은 그 향기나 씨앗으로 가까이 접근할 수 있네. 그러나 그것은 꽃이 하는 일이 아니고 바람이 하는 일이지. 바람은 마음대로 내왕할 수 있으니 말이야”


ㅡ 헤르만 헤세, <크눌프> 중에서



  나는 이중성을 표현하고 싶다. 나는 대립적인 두 가지 멜로디가 동시에 나타나고 다채로움과 통일성, 농담과 진지함이 공존하는 글을 쓰고 싶다. 왜냐하면 나에게 삶은 바로 양극 사이의 파동, 즉 세계의 두 지주 사이의 움직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세계의 축복받은 다채로움을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만큼 이러한 다채로움이 통일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나는 항상 아름다움과 추함, 밝음과 어두움, 죄악과 신성함이 한순간만 대립적일 뿐, 줄곧 서로 교차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다.

  나에게 인간성에 대한 최상의 언어는 이러한 이중성을 마술적인 기호로 표현하는 것이다. (9)


ㅡ 헤르만 헤세, <영혼의 수레바퀴> 중에서

 

 

  헤세의 소설들을 읽는 것은, 잔잔한 피아노곡의 선율을 따라 내 마음도 흘러가는 느낌이다. 혹은, 헤세의 소설을 읽을 때엔 피아노곡이 잘 어울린다. 헤세의 겹무늬, 그리고 이중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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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04 1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 여름 밤의 꿈

라이샌더  비록 결합이 이뤄졌다 해도 모두 전쟁이니 죽음이니 병이니 하는 것 때문에 불행에 빠져 ㅡ 사랑은 마치 음향처럼 순간적이고, 그림자와 같이 재빠르고, 꿈과 같이 짧고, 그래, 한 순간 천지간을 밝게 비추어, 사람들이 “보라!”하고 외칠 사이도 없이 다시 암흑의 아가리 속에 먹혀버리고마는 캄캄한 밤의 번개보다 더 짧은 목숨으로 되버리거든. 그처럼 아름다운 것은 눈깜짝할 사이에 부수어지기 쉬운 법이라구.


허미어   진정한 사랑을 하는 연인들이 늘 장애를 받기 마련이라면 그건 그야말로 운명이 만든 하나의 법규가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우리 마음도 사랑의 앙화(殃禍)를 야멸차게 감내하도록 타이릅시다. 사랑엔 고통이 늘 따른다니, 사념이니, 꿈이니, 한숨이니, 소망이니, 눈물이니 하는 것 등이 가엾은 사랑의 동반자들인 거죠.


                                                                                                          ㅡ 제1막 제1장 중.



라이샌더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분별을 갖게 되어 이성은 내 욕망의 지배자가 되고 나를 당신의 눈으로 인도하여줍니다. 당신의 눈이야말로 사랑의 진실을 가장 아름답게 기록한 책이오, 그걸 난 읽고 있는 겁니다.


                                                                                                           ㅡ 제2막 제2장 중.



디슈스   …연인들이나 미친 사람들이나 머리 속이 들끓은 탓인지 허무맹랑한 환상으로 가득 차 냉정한 이성으로는 상상도 못할 터무니없는 일들을 꾸며낸단 말요. 광인이나 연인이나 시인은 모두 상상력으로 머리 속이 꽉 차 있는 패거리들이오. 그런 자들은 넓은 지옥도 수용 못할 정도의 악마를 본다오. 그게 결국 광인이라는 거지. 연인도 그에 뒤질세라 미쳐 가지고 집시의 까만 얼굴에서도 절세의 미녀 헬렌을 보기도 하는 거요. 시인의 눈망울도 같은 거지. 시적 황홀함에 흠뻑 젖어 천상에서 대지를 굽어보고 대지에서 천상을 쳐다보며 상상 속으로 나래를 편단 말요. 그래서 시인의 상상력은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고 시인의 붓은 그들에게 확실한 형태를 만들어주며, 있지도 않은 무에 거처와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오. 그처럼 왕성한 상상력엔 무서운 마력이 있는가 보오. 만약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 싶으면 그 즐거움을 갖다줄 실체를 생각한단 말이오. 또 어두운 밤에 어떤 공포를 상상하면 밤에 덤불을 보고도 무서운 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소!


                                                                                                           ㅡ 제5막 제1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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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 2004-08-11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인가? 같이 허접한 연극을 보지 않았겠나..ㅋㅋ

도서관여행자 2004-08-12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름대로 요정이 귀여웠어. +_+
 
 전출처 : 갈대 > 집단 정신의 진화 中

 

 

 

 

케냐의 케코피에 있는 사바나에는 클리포드라는 어린 개코원숭이가 다리를 다치자 즉시 공격 목표가 되었다. 클리포드의 어미가 말릴 때까지 동년배 원숭이들이 집단으로 습격한 것이다. 어미의 개입 후에도 학대는 계속되었다. 부상으로 불구가 된 어른 개코원숭이들도 같은 운명을 겪는다. 수컷 한 마리가 다치자, 그 집단의 개코원숭이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비명을 지르며 피했고, 친구로 지내던 수컷들은 이제는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신체적 장애에 대한 혐오는 영장류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포식자에게 꼬리가 잘린 우두머리 도마뱀은 무리로 돌아가 봤자 이제는 폐물이 될 뿐이다. 재난을 당한 재갈매기를 본 동료들은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공격을 하는 일이 많다. 동물 행동학의 창시자 니코 티베르헨의 말에 따르면,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개체들"에 대한 적대 행위는 사회적 동물에게 거의 보편적인 것이다.

한 살이 넘으면 유아들은 부모가 정하는 기준들에 고착되어, 주위의 대상들을 사회적인 기준과 비교하여 가족이 정한 이상향에서 벗어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14개월 정도에는 아직 규범에서 벗어나는 일들에 개의치 않지만, 19개월이 되면 아이들은 아주 작은 결함에도 비난의 손가락질을 한다. 이를테면 옷에 구멍이 났다거나 장난감의 칠이 벗겨졌다거나 벽에 얼룩이 졌다거나, 무엇보다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경우가 그렇다. 그러다가 20개월 무렵이면, 규범에서 벗어난 것을 지적하는 풍부한 어휘를 갖게 된다. 그래서 주위의 사물들이 "싫어", "에비", "지지"일 때 무척 화를 낸다. 간단히 이야기해서, 적어도 두살이 안 된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도 이미 자신의 내적인 동조를 감시하는 본능뿐 아니라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집행할 때 사용하는 도구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 예쁘지 않은 아이들 혹은 낯선 종교적 배경이나 우스운 이름, 그리고 드문 인종의 아이들이 이러한 괴롭힘의 목표가 된다. 또 아이들은 학교에서 평균적인 수준보다 훨씬 더 뛰어난 아이들, 훨씬 더 못하는 아이들을 응징한다. 뛰어난 재능이 화를 부른 한 초등학교 3학년 여자어린이의 경우가 있다. 이 여자아이는 피아노, 발레, 읽기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학급 친구들은 모두 이 어린이를 싫어했다. 아무리 친구들에게 상냥하게 대하려고 애써도 잘난 척하는 아이라는 취급을 받았고, 전형성에서 벗어난 탁월한 재능은 당연히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조화와 일치라는 이상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본에서는 동조 집행이 특이하고 악랄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바로 이지메다. 남들과 달라 눈에 띄는 누군가를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그러한 행동은 심지어 학교 선생님이 유도하기도 한다. 혐오스러운 일이지만, 이것이 바로 인류의 특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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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여행자 2004-08-03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대 님 코멘트 추가 :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분명 선구적이고 훌륭한 저작이지만 많은 모순, 불합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에 썼다는 걸 감안해야겠지만) 거짓 정보를 인용했을 뿐만 아니라(물론 도킨스는 맞다고 생각했겠지만 후에 거짓으로 판명났죠) 모든 실험 결과를 자신의 이론에 유리하도록 끼워맞추려는 위험한 시도도 엿보입니다(역시 후에 잘못됐다고 판명). 그럼에도 역시 필독서라 할 만한 책이죠^^
<집단 정신의 진화>는 '이기적 유전자'론에 반대해서 씌어진 책입니다. 진화의 핵심은 유전자의 이기성이 아니라 집단 정신, 즉 세포, 개체들간의 네트워크라고 주장합니다. 네트워크가 중요하다는 건 곧 유전자가 이기적이 아니라 협력을 중시한다는 것을 뜯하죠. 저로서는 네트워크 쪽 손을 들어주고 싶네요^^

갈대 2004-08-03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유전자가 네트워크에 의존하는 건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혼자서 살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유전자는 네트워크를 통해 뭔가 상호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이 섰을 때에만 협력하는 것 같습니다. 일방적인 봉사는 없다는 말이죠. 결국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유전자는 도킨스가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기적입니다. 하지만 "유전자는 단지 자신과 똑같은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이고 인간은 유전자의 이런 목표를 위해 이용당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내세운 주장은 아무래도 수정이 필요할 듯 합니다.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는 개체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기도 한다는 것이 밝혀졌으니까요. 정리를 해보자면 '유전자는 이기적이지만(이때 '이기적'이라는 단어의 뜻은 도킨스가 말한 것과는 약간 다릅니다. 집단의 이익을 지향하는 이기심이니까요) 생존을 위해 서로 협력한다' 정도가 되겠네요. 쓰다보니 횡성수설이 되었네요. 괜히 혼란만을 안겨드린 건 아닌지...-_-;;

도서관여행자 2004-08-04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렇군요. 중요한 문제들은 언제나 한 문장으로 요약되지 않는 법이죠. <작은 인간>에서 마빈 해리스 아찌도 언어에 대한 장에서, 현대인들의 언어 중에서 서로에 대해서 무언가 요구하는 말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나다는 걸 얘기했던 걸로 기억되요. "물 좀 줘요. 소금 좀... 돈 좀..." 인류학에서는 아마도 '교환'이라는 개념으로 자주 다루어지는 거 같은데 자세한 건 잘 모르겠구요, 인간과 인간들의 행동에 대한 정의와 묘사라 흥미있네요^^
 
 전출처 : 바람구두 > 헤르만 헤세

열세 살 때였으리라. 나는 시인이 되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에 휩싸였다. 그러나 다른 모든 길에는 이끌어 주는 제도와 스승과 선배가 있었으나, 시인이 되는 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음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막연한 길이었다. 그 길이란 자칫하면 웃음거리가 될 수 있는 너무나 막연한 환상과 같은 그림자였다.

그러나 나는 오래지 않아 곧 깨닫게 되었다. 시인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시인은 언제 어디에서나 찬미와 찬탄을 받으며, 그러한 운명을 갖고 있는 다른 모든 존재들처럼 비범한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 을 나는 비로소 절감하게 되었다. 마침내 긴 방황과 고통 끝에 시인이 되겠다는 길을 선택하고 부터는 다른 모든 것들이 모호해지면서 집에서나 학교에서 남들이 이 해하기 힘든 사건들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다른 도시의 라틴어 학교로, 또 그 이듬해에는 신학교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억압받은 내 청춘의 갈등이 나로 하여금 그곳을 끝끝내 떠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뒤에도 학업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열망과 내 자신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나는 여러 방면의 기술의 도제(徒弟:어려 서부터 소송을 따라 기술을 배우는 제자)와 견습공으로 몇 년간을 전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학업에 실패하고 난 후, 나는 내 스스로 가고자 하는 선택의 길에 있어서 내 나름대로의 수업을 시작했다. 조부 때부터 가전(家傳)되어 온 많은 장서 속에 묻혀서 독서와 습작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고 행복한 순간 순간의 시간들이었다. 스무 살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눈에 띤 문학 서적들을 반쯤은 읽었으며, 철학과 예술사(藝術史)와 언어학 등에도 끈질기게 집념을 보였으며 또한 수 많은 습작을 할 수 있었다.

마침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생활을 꾸려 가기 위해 나는 서점 점원으로 취직을 했다. 책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확실히 나에게 알맞는 직업이었다. 책 속에 묻혀서 나는 처음에는 새로 나온 것들에만 집착하여 급급했는데 점차로 오래된 책(古書)과의 관계를 통해서 보다 더 정신적인 위안을 받으며 지혜를 터득해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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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여행자 2004-08-03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문은 헤세 도서관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hesse-library.mokwon.ac.kr/lifeworks/kurz.html
 

 …영화를 만든다는 과정 자체는 당신이 살고 있는 자본주의 안에서 함께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왜 당신은 영화에서, 영화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솜사탕 같은 이야기만 원하십니까. 영화도 결국은 피와 땀으로 만드는 것이며 그 과정은 여러분들이 낮에 흘리는 소금만큼 그렇게 눈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팝콘을 들고 영화관의 입장 티켓을 살 때의 그 순간은 동시에 영화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자생존의 경쟁의 아귀다툼을 벌이는 순간이기도 한 것입니다.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여러분들께서는 꿈과 환상에 젖어들고 싶으시겠지만 정말 미안하지만 당신의 꿈과 환상을 위해서 영화를 하는 우리들은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영화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서 제가 지난 8년 동안 깨달은 것은 세상이란 결코 고상한 것이 아니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결국 당신 주머니 속의 지갑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고다르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영화는 꿈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꿈꿔서는 안된다' 는 겁니다.

…물론 그 성공의 기준점에는「쉬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680만명이 들었고 이 영화는「타이타닉」의 기록을 깨트렸습니다. '야, 한국 영화 만세' 라고 이야기하시면 안됩니다.

이 680만명이라는 관객이 든 것은, 이것이 가능해진 것은 단지 한국 영화가 갑자기 잘 만들어져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화의 배급 방식이 전면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이 관객들을 영화관 안으로 끌어모으는 새로운 방식이 가능해진 겁니다. 여기에 새로이 도입된 전략적 용어가 블럭버스터인 겁니다. 물론 블럭버스터라는 말이 정확하게 맞는 표현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블럭버스터란 말이 처음 도입된 것은 헐리우드에서 1975년 베트남전이 끝나고 올해 헐리우드에서 가장 성황하는 영화가 무엇인가 한번 여름 시즌을 기다려보자 했었을 때 유니버셜영화사는 작은 한 편의 신인 감독이 찍은 영화를 들고 배급 방식을 완전히 바꿔서 한번 개봉해보자 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이제까지 영화가 돌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흥행수입 1억불이라는 블럭을 이 한 편의 영화가 버스터, 돌파해버렸습니다. 바로 이 영화가 27살 스티븐 스필버그의「죠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블럭버스터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연 것입니다.


이 개념을 도입해서 한국 영화에서 설명하자면 한국 영화의 블럭버스터라고 대접받을 수 있는 영화는 큰 제작비를 들인 영화가 아니라 전국 관객 300만명을 넘는 영화들이 이 용어에 적합할 것입니다. 블럭버스터를, 영화들이 만들어지면서 문제는 제 생각에, 문제는 기이한 현상이 두 가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자 이 문제는 여러분들의 호주머니 속의 지갑과 연관돼있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일시적으로 영화 관객을 끌어모으지 못하면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에 홍보마케팅 비용이 갑자기 상승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한국 영화 한 편의 평균 제작비는, 산업에 종사하는 말에 의하면 26억 5천만원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평균 마케팅비가 영화 한 편에 20억원이 따라붙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한국 영화의 평균 제작비는 결국 45억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제로섬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전국 관객 140명이 들 때부터 자기 수입이 생기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140만명이요?) 네. 무조건 140명을 동원하지 않으면 그 외의 영화는 다, 이런 표현을 심야에 용서하십시오. 제작자들 표현으론 죽어버려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여기에 영화도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소비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유통이 잉여가치를 발생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자, 이 과정에서 두 가지 이해관계가 부딪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는 최대 개봉을 하는 겁니다. 가장 많은 영화관에서 개봉하자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작자가 가장 큰 돈을 버는 방법은 가장 많은 개봉을 하는 것이겠죠. 그러나 배급업자가 가장 많은 돈을 버는 것은 빨리빨리 돈 많이 버는 영화를 개봉시켜야되는 거니까 최단개봉이 되는 겁니다. 최대개봉과 최단개봉이라는 이 기이한 개념이 결합하면서 어떤 문제가 생겼냐면, 자 여러분들 올해 크리스마스 때 영화관에 가서 16개 영화관이 있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러 가셨습니다. 아무 영화나 봐야지 하고 가셨는데 16개관에서 몇 편의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습니까. 다섯편 상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들 한가지 불만 더. 자, 그러면 내가 이번 주에 바쁘니까 다음 주에 보러가야지 하고 약간 예술적이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을 것 같은 영화를 보러가실 땐 어떤 상황이 벌어집니까. 다음 주에 가면 이미 (못 보죠) 볼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과정에서 스크린쿼터라는 문제는 단지, 이 문제는 사실 저희가 하루를 할애해서라도 토론을 할 만한 주제라고 생각하는데 스크린쿼터는 단지 헐리우드 영화로부터 한국 영화 보호라는 단순한 차원의 메커니즘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결국 영화 문화의 다양성입니다. 이것이 블럭버스터 시대 한국 영화의 파티 뒤에 있는 제 생각에 그 어두운 그림자인 것입니다. 사실상 이것은 제 생각에 매우 폭력적 상황입니다.


자, 여러분들께서는 올해 겨울「실미도」를 보고서는 정말 감동적이라는 말을 하셨을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인구 4700만명의 나라에서「실미도」는 곧 1000만명을 돌파한다고 그럽니다. 한 편의 영화를 1000만명이 본다는 것은 매우 끔찍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결론을 성립시킬 수 있었던 조건은 여러분들 상상해 보십시오. 자, 인구 4700만에 1000만이 봤다는 얘기는 4.7명 중에 한 명이 봤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목욕탕에가서 다섯명이 있으면 실미도 본 사람 그러면 누군가 한 명 손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거의 로또 확률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즉, 이것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제한된 숫자의 극장에서 제한된 상영일 동안에 인구 4.7명 중에 같은 영화를 보기 위해서 끌어들일 때에 그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영화 문화적 체험의 단일성이란 얼마나 한심한 것입니까.



…제가 꼭 드리고 싶은 말은 세가지 입니다. 첫번째 말은 '한국 영화를 지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지지해야 될 것은 좋은 영화이지 한국 영화이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이것이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두번째는 정말 진심으로 하소연하건대  제가 영화를 보면서 느낀 제 작은 결론 중의 하나, '영화를 너무 많이 보지 마십시오'. 영화는 대부분이 쓰레기입니다. 좋은 영화는 정말 적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세상을 살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께서는 그 세상의 즐거움을 그 위대한 소설들을, 시를, 연극을, 미술을, 음악을 즐기시고 난 다음 시간이 남거든 영화를 보시기 바랍니다. 영화는 고작 백년 밖에 안된 예술이기 때문에 그 예술이 이 위대한 수천년의 전통을 가진 예술들을 이긴다면 그건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마지막 세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좋은 영화를 만난다면 그것을 진짜 즐기는 법. '두번 보시기 바랍니다'


『정은임의 영화음악』2004.01.28. FM 씨네마떼끄 정성일편 - 한국영화 中

전문 : http://user.chol.com/~dorati/web/radio/ra040128.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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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08-02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영화쪽 사람들이 본다면 잔인하다고 생각하겠는걸요. 글에 날이 시퍼렇게 서 있네요.
그런데 두 번째 주장은 좀 억지스럽지 않나요? 영화가 백 년 밖에 안 됐다는 이유로 다른 예술보다 가치가 없다는 주장은 클래식이 역사가 깊으니 락이나, 재즈 등 다른 장르의 음악보다 우수하다는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으니까요.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다는 건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도서관여행자 2004-08-02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갈대님. ^^
이 글, 아니 이 말도... 역시나 맥락을 생각해야할 거 같네요.
정성일은, 라디오의 영화음악 프로그램의 청취자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요. 꼭 그렇달 보장은 없겠지만, 그래도, 이 프로그램의 청취자들은 영화광(?)들이 많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영화만 사랑하지 말고 다른 아름다운 것들, 다른 즐거움들도 껴안으라, 그런 말이 아닐까요? (물론 저에게는, 영화보다는, 활자화된 책들에 해당하는 얘기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