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만든다는 과정 자체는 당신이 살고 있는 자본주의 안에서 함께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왜 당신은 영화에서, 영화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솜사탕 같은 이야기만 원하십니까. 영화도 결국은 피와 땀으로 만드는 것이며 그 과정은 여러분들이 낮에 흘리는 소금만큼 그렇게 눈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팝콘을 들고 영화관의 입장 티켓을 살 때의 그 순간은 동시에 영화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자생존의 경쟁의 아귀다툼을 벌이는 순간이기도 한 것입니다.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여러분들께서는 꿈과 환상에 젖어들고 싶으시겠지만 정말 미안하지만 당신의 꿈과 환상을 위해서 영화를 하는 우리들은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영화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서 제가 지난 8년 동안 깨달은 것은 세상이란 결코 고상한 것이 아니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결국 당신 주머니 속의 지갑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고다르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영화는 꿈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꿈꿔서는 안된다' 는 겁니다.
…물론 그 성공의 기준점에는「쉬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680만명이 들었고 이 영화는「타이타닉」의 기록을 깨트렸습니다. '야, 한국 영화 만세' 라고 이야기하시면 안됩니다.
이 680만명이라는 관객이 든 것은, 이것이 가능해진 것은 단지 한국 영화가 갑자기 잘 만들어져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화의 배급 방식이 전면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이 관객들을 영화관 안으로 끌어모으는 새로운 방식이 가능해진 겁니다. 여기에 새로이 도입된 전략적 용어가 블럭버스터인 겁니다. 물론 블럭버스터라는 말이 정확하게 맞는 표현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블럭버스터란 말이 처음 도입된 것은 헐리우드에서 1975년 베트남전이 끝나고 올해 헐리우드에서 가장 성황하는 영화가 무엇인가 한번 여름 시즌을 기다려보자 했었을 때 유니버셜영화사는 작은 한 편의 신인 감독이 찍은 영화를 들고 배급 방식을 완전히 바꿔서 한번 개봉해보자 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이제까지 영화가 돌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흥행수입 1억불이라는 블럭을 이 한 편의 영화가 버스터, 돌파해버렸습니다. 바로 이 영화가 27살 스티븐 스필버그의「죠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블럭버스터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연 것입니다.
이 개념을 도입해서 한국 영화에서 설명하자면 한국 영화의 블럭버스터라고 대접받을 수 있는 영화는 큰 제작비를 들인 영화가 아니라 전국 관객 300만명을 넘는 영화들이 이 용어에 적합할 것입니다. 블럭버스터를, 영화들이 만들어지면서 문제는 제 생각에, 문제는 기이한 현상이 두 가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자 이 문제는 여러분들의 호주머니 속의 지갑과 연관돼있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일시적으로 영화 관객을 끌어모으지 못하면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에 홍보마케팅 비용이 갑자기 상승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한국 영화 한 편의 평균 제작비는, 산업에 종사하는 말에 의하면 26억 5천만원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평균 마케팅비가 영화 한 편에 20억원이 따라붙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한국 영화의 평균 제작비는 결국 45억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제로섬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전국 관객 140명이 들 때부터 자기 수입이 생기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140만명이요?) 네. 무조건 140명을 동원하지 않으면 그 외의 영화는 다, 이런 표현을 심야에 용서하십시오. 제작자들 표현으론 죽어버려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여기에 영화도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소비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유통이 잉여가치를 발생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자, 이 과정에서 두 가지 이해관계가 부딪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는 최대 개봉을 하는 겁니다. 가장 많은 영화관에서 개봉하자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작자가 가장 큰 돈을 버는 방법은 가장 많은 개봉을 하는 것이겠죠. 그러나 배급업자가 가장 많은 돈을 버는 것은 빨리빨리 돈 많이 버는 영화를 개봉시켜야되는 거니까 최단개봉이 되는 겁니다. 최대개봉과 최단개봉이라는 이 기이한 개념이 결합하면서 어떤 문제가 생겼냐면, 자 여러분들 올해 크리스마스 때 영화관에 가서 16개 영화관이 있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러 가셨습니다. 아무 영화나 봐야지 하고 가셨는데 16개관에서 몇 편의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습니까. 다섯편 상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들 한가지 불만 더. 자, 그러면 내가 이번 주에 바쁘니까 다음 주에 보러가야지 하고 약간 예술적이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을 것 같은 영화를 보러가실 땐 어떤 상황이 벌어집니까. 다음 주에 가면 이미 (못 보죠) 볼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과정에서 스크린쿼터라는 문제는 단지, 이 문제는 사실 저희가 하루를 할애해서라도 토론을 할 만한 주제라고 생각하는데 스크린쿼터는 단지 헐리우드 영화로부터 한국 영화 보호라는 단순한 차원의 메커니즘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결국 영화 문화의 다양성입니다. 이것이 블럭버스터 시대 한국 영화의 파티 뒤에 있는 제 생각에 그 어두운 그림자인 것입니다. 사실상 이것은 제 생각에 매우 폭력적 상황입니다.
자, 여러분들께서는 올해 겨울「실미도」를 보고서는 정말 감동적이라는 말을 하셨을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인구 4700만명의 나라에서「실미도」는 곧 1000만명을 돌파한다고 그럽니다. 한 편의 영화를 1000만명이 본다는 것은 매우 끔찍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결론을 성립시킬 수 있었던 조건은 여러분들 상상해 보십시오. 자, 인구 4700만에 1000만이 봤다는 얘기는 4.7명 중에 한 명이 봤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목욕탕에가서 다섯명이 있으면 실미도 본 사람 그러면 누군가 한 명 손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거의 로또 확률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즉, 이것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제한된 숫자의 극장에서 제한된 상영일 동안에 인구 4.7명 중에 같은 영화를 보기 위해서 끌어들일 때에 그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영화 문화적 체험의 단일성이란 얼마나 한심한 것입니까.
…제가 꼭 드리고 싶은 말은 세가지 입니다. 첫번째 말은 '한국 영화를 지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지지해야 될 것은 좋은 영화이지 한국 영화이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이것이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두번째는 정말 진심으로 하소연하건대 제가 영화를 보면서 느낀 제 작은 결론 중의 하나, '영화를 너무 많이 보지 마십시오'. 영화는 대부분이 쓰레기입니다. 좋은 영화는 정말 적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세상을 살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께서는 그 세상의 즐거움을 그 위대한 소설들을, 시를, 연극을, 미술을, 음악을 즐기시고 난 다음 시간이 남거든 영화를 보시기 바랍니다. 영화는 고작 백년 밖에 안된 예술이기 때문에 그 예술이 이 위대한 수천년의 전통을 가진 예술들을 이긴다면 그건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마지막 세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좋은 영화를 만난다면 그것을 진짜 즐기는 법. '두번 보시기 바랍니다'
『정은임의 영화음악』2004.01.28. FM 씨네마떼끄 정성일편 - 한국영화 中
전문 : http://user.chol.com/~dorati/web/radio/ra040128.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