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숲

― 황인숙



내 가슴은 텅 비어 있고

혀는 말라 있어요.


매일매일 내 창엔 고운 햇님이

하나씩 뜨고 지죠.

이따금은 빗줄기가 기웃대기도,

짙은 안개가 분꽃 냄새를 풍기며

버티기도 하죠.

하지만 햇님이 뜨건 말건

빗줄기가 문을 두드리건 말건

안개가 분꽃 냄새를 풍기건 말건

난 상관 안해요.

난 울지 않죠.

또 웃지도 않아요.

내 가슴은 텅 비어 있고

혀는 말라 있어요.


나는 꿈을 꾸고

그곳은 은사시나무숲.

난 그 속에 가만히 앉아 있죠.

갈잎은 서리에 뒤엉켜 있고.

난 울지 않죠, 또 웃지도.

은빛나는 밑둥을 쓸어보죠.

그건 딱딱하고 차갑고

그 숲의 바람만큼이나.


난 위를 올려다보기도 하죠.

윗가지는 반짝거리고

나무는 굉장히 높고

난 가만히 앉아만 있죠.

까치가 지나가며 깍깍대기도 하고

아주 조용하죠.

그러다 꿈이 깨요.

난 울지 않죠, 또 웃지도 않아요.


내 가슴은 텅 비어 있고

혀는 말라 있어요.

하지만 난 조금 느끼죠.

이제 모든 것이 힘들어졌다는 것.

가을이면 홀로 겨울이 올 것을

두려워했던 것처럼

내게 닥칠 운명의 손길.

정의를 내려야 하고

밤을 맞아야 하고

새벽을 기다려야 하고.


아아, 나는

은사시나무숲으로 가고 싶죠.

내 나이가 이리저리 기울 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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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 브레히트 / 김광규 옮김



나도 안다, 행복한 자만이

사랑받고 있음을. 그의 음성은

듣기 좋고, 그의 얼굴은 잘 생겼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

토질 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례 나무를

못생겼다 욕한다.


해협*의 산뜻한 보우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이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무엇보다도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이 눈에 띌 뿐이다.

왜 나는 자꾸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나의 시에 운을 맞춘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생각된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악이

나의가슴 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두번째 것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1939년)



*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의 해협.

** 히틀러를 지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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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女行 2

하노이에서

― 신경림



그녀의 아버지는 시클로에 외국사람을 싣고

신나게 거리를 내달리고 있을 거야.

오빠는 돈 많은 먼 나라에서

굴욕적인 헐값에 노동을 팔고.

할아버지는 디엔비엔푸 전선에서

팔 하나를 잃은 사람, 할머니는

미라이 마을에서 더 값진 것 빼앗긴 사람,

이웃과 함께 구지 땅굴을 파고

외국군대를 몰아냈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수예품을 들고

관광객을 잡고 적선을 구걸하고 있을 거야.


하지만 누가 감히 말하랴, 이것이 그녀가

열대의 꽃처럼 눈부신 까닭이라고,

익은 과일처럼 향기 짙은 까닭이라고,

정글의 짐승처럼 날렵한 까닭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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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 최승자



왕의 영토는 무한 대륙이었다.

즉위한 그날부터 왕은 자기 영토의 중심에,

검은 의자 위에 앉아 검은 거문고로

검은 죽음의 가락들을 탄주하기 시작했다.

왕의 거문고 솜씨는 너무도 신적이어서,

그가 거문고를 뜯기 시작하자 맨 먼저,

허공을 날고 있던 모든 새들이 추락했고,

그 다음엔 모든 나무들이 키 큰 순서대로 쓰러졌고,

지상의 모든 기고 걷는 것들은 영원히 그 움직임을 멈췄다.

그가 신명을 다해 어둡고 깊은 죽음의 가락들을

하나씩 토해낼 때마다, 먼 대륙 끝이 하나씩 대양의 물 속에 잠겼다.

왕은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검은 머리가 긴 백발로 변할 때까지,

검은 대양에 대륙을 삼키고

억조 창생이 물 속에 익사할 때까지,

자신의 온 생애를 기울여 죽음의 가락을 탄주했다.

어느 날 그가 필생의 신명을 기울여 최후의 연주를 끝냈을 때

무한 대륙의 영토는 사라지고, 무한 대양의 검은 물결이

바로 그의 발 아래서 남실거리고,

그가 탄주했던 그 모든 어두운 가락들은

귀곡성 같은 바람 소리로 변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는 거문고를 안은 채, 이제 그의 영토의 전부가 된

의자 위에 앉아 흡족한 미소를 띠고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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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 매

― 김혜순



<A가 좋아>라고 나는 말했다.

그러자 B가 달려와 나를 때렸다.

<A가 좋아라고 말해서 B에게 맞았어>라고 말하자 C가 달려와 나를 때렸다.

<A가 좋아라고 말해서 B에게 맞았고, B에게 맞았어라고 말해서 C에게 맞았어>라고 말하자 A가 달려와 나를 때렸다.

<A가 좋아라고 말해서 B에게 맞고, B에게 맞았어라고 말해서 C에게 맞고, C에게 맞았어라고 말해서 A에게 맞았어>라고 말하자 A, B, C 모두 달려와 나를 때렸다.

나는 이제 헐떡거리며 <맞았어, 맞았어>라고 말하며, 맞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누구를 좋아했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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