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자전거 여행에세이-10>
바람과 향기, 숲은 ‘숨’이다

풍경의 안쪽 - 광릉 숲에서


나는 모국어의 여러 글자들 중에서 ‘숲’을 편애한다. ‘수풀’도 좋지만 ‘숲’만은 못하다. ‘숲’이라는 글자의 생김새는 숲과 똑같다. ‘숲’의 어감은 깊고 서늘한데, 이 서늘함 속에는 향기와 습기가 번져있다. ‘숲’의 어감 속에는 말라서 바스락거리는 건조감이 들어있고 젖어서 편안한 습기가 느껴진다. ‘숲’은 마른 글자인가 젖은 글자인가. 이 글자 속에서는 나무를 흔드는 바람소리가 들리고, 골짜기를 휩쓸며 치솟는 눈보라 소리가 들리고 떡갈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린다.

깊은 숲 속에서는 숨 또한 깊어져서 들숨은 몸속의 먼 오지에까지 스며드는데, 숲이 숨 속으로 빨려 들어올 때 나는 숲과 숨은 같은 어원을 가진 글자라는 행복한 몽상을 방치해둔다. 내 몽상 속에서 숲은 대지 위로 펼쳐놓은 숨의 바다이고 숨이 닿는 자리마다 숲은 일어선다. ‘숲’의 피읖받침은 외향성이고 ‘숨’의 미음받침은 내향성이다. 그래서 숲은 우거져서 펼쳐지고 숨은 몸 안으로 스미는데 숨이 숲을 빨아 당길 때 나무의 숨과 사람의 숨은 포개지고, 몸속이 숲이고 숲이 숨인 것이어서 ‘숲’과 ‘숨’은 동일한 발생근거를 갖는다는 나의 몽상은 어학적으로는 어떨는지 몰라도 인체생리학적으로는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몸이 입증하는 것들을 논리의 이름으로 부정할 수 있을 만큼 명석하지 못하다.

밥벌이에 지친 날에는 숲 속의 나무들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먹이를 몸 밖에서 구하지 않고, 몸 밖의 먹이를 입으로 씹어서 몸 안으로 밀어 넣지 않고, 제 몸 속에서 햇빛과 물과 공기를 비벼서 스스로를 부양하는 저 푸르고 우뚝한 것들은 얼마나 복 받은 존재들인가. 중생의 맨 밑바닥에서, 나무는 중생의 탈을 벗고 있다. 밥벌이에 지친 저녁에 이경준교수가 지은 ‘수목생리학’이나 파브르의 ‘식물기’를 꺼내놓고 광합성, 수목의 생장, 햇빛과 엽록소의 관계 같은 페이지들을 읽는 일은 쓸쓸하다. 이 쓸쓸함은 식물의 자족(自足)앞에서 느끼는 동물의 슬픔이다. 무기물을 유기물로 전환시키는 작용이 나무의 생명현상이다.

그 전환의 생화학적 과정을 모두 분석하고 분석의 파편들을 다시 종합해도 어째서 생명이 아닌 것들로부터 생명인 것이 빚어지는 것인지를 나는 알 수가 없다. 어째서 이 전환은 초록계통의 세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숲은 왜 초록색인지, 숲을 초록으로 인지하는 나의 지각과 언어는 정당한 것인지를 나는 결국 알지 못한다. 나의 무지에도 불구하고 광합성을 기술하는 수목생리학의 페이지들은 아름답고, 바람에 흔들리는 광릉의 여름 숲은 자유가 깃들만큼 서늘하고 깊어서, 숲 속에서 나는 세계의 궁극으로 다가가는 식물학자가 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숲 속의 모든 나무는 먹이 없이 스스로 살아가는 독립기관이다. 나무는 뿌리에서부터 우듬지 꼭대기의 잎에까지 물을 이동시키는데, ‘수목생리학’에 따르면 이 물은 분자들 간의 상호응집작용으로 이동하는 것이어서 나무는 양분을 만들기 위해서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다. 물은 저절로 이동한다. 나무는 서두르거나 늑장을 부리지 않는다. 기다렸다가 때가 이르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나무는 개화나 결실에 많은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나무는 생명이 아닌 것을 생명으로 바꾸는 전환의 과정으로 저 자신의 생명을 완성한다. 그래서 나무는 오래오래 땅 위에 살아있는 것인데 500년이 된 느티나무조차도 젊어있어서 땅 위에 늙은 나무란 없다.

여름의 광릉 숲은 나무들마다 제 모습으로 무성해져서, 나무의 개별성은 주저없이 발현되어 있다. 참나무 큰 잎은 늘 바람에 서걱거린다.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굴참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의 그늘도 마찬가지다. 잎 사이마다 빛이 꺾이면서 스며들어 참나무 숲 속은 어슴푸레하고 그림자가 없다. 넓은 잎들이 물기를 내품어 참나무 숲에서는 콧구멍 속이 편안해진다.

소나무나 전나무 숲의 바닥은 가는 잎 사이로 스며들어온, 자잘한 빛들이 바글거린다. 전나무는 키가 커서 전나무 숲 바닥의 빛들은 멀어 보이고 소나무 숲 바닥의 빛은 가까워 보인다. 소나무 숲의 향기는 말라있고 참나무 숲의 향기는 젖어있다. 숲 속의 나무들 중에서 느티나무는 가장 완강한 착지성(着地性)을 보인다. 느티나무의 밑동은 중심이 되는 기둥을 구별할 수 없다.

느티나무 밑동은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또 들러붙어서 튼튼한 저변의 근거를 확보한다. 느티나무는 화사하지 않고 꽃도 볼품없지만, 느티나무는 강력하고 장대하다. 산전수전의 신령성이 서린 그 밑동은 오래 사는 자가 이기는 자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마을 어귀의 정자나무나 당나무는 대부분이 느티나무다. 느티나무가 들어선 숲에서 다른 나무들은 이 신령한 나무 곁에 범접하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있다. 참나무, 소나무, 느릅나무는 굴곡진 껍질로 외벽을 치지만, 백일홍, 물푸레나무, 자작나무는 기름기 흐르는 껍질 위에 꽃사슴의 무늬를 그려낸다.

여름의 광릉 숲에서, 숲의 전체성은 이 모든 나무들의 개별성을 품고 있었고, 몸 밖에서 벌어먹어야하는 자의 먹이의 운명만이 그 전체성에서 제외되어 있었는데, 숲 속에서는 그 제외된 운명이 선명히 드러남으로써 오히려 견딜 만했다.

문화일보 2004/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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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여행자 2004-06-21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숲'이란 단어를 좋아한다고, 그 글자의 모양이 숲을 닮았다고, 나 역시 며칠 전에 쓴 적이 있다. 숲에 들어설 때 느끼는 그 기분좋은 서늘함에 대해서도... 숲길에서의 산책, 그리고 무엇보다 숲그늘에서의 독서는 나를 미칠듯한 행복으로 몰아간다.
 
남자, 여행길에 바람나다 - Never Ending Travel 2, 풍경의 덫에 걸린 외톨박이 시인의 연애편지 33장
박성우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이파리 무성한 등나무 아래로
초록 애벌레가 떨어지네
사각사각사각,
제가 걸어야 할 길까지 갉아먹어서
초록길을 뱃속에 넣고 걸어가네

초록 애벌레가 맨땅을 걷는 동안

뱃속으로 들어간 초록길이 출렁출렁,
길을 따라가네
먹힌 길이 길을 헤매네
등나무로 오르는 길은 멀기만 하네

길을 버린 사내가 길 위에 앉아 있네



- 박성우, 「길」



박성우의 시, 「길」은 아름답다. 내가 좋아하는 ‘초록’이라는 밝은 울림의 말이 여러 번 박혀 있어서인지, 사각사각사각, 출렁출렁… 이렇게 가벼이 흔들리며 귓속으로 경쾌하게 걸어 들어가는 소리들이 살아있어서인지, “제가 걸어야 할 길까지 갉아먹어서 / 초록길을 뱃속에 넣고 걸어가네”라는 시적 발견이 그 안에 녹아있어서인지. 어쨌든, 박성우의 첫 시집 <거미>에 들어있던「길」은 아름다웠다.


박성우 시인의 여행‘길’은 어떨지… 물음표가 책을 읽는다.


그리고 물음표는 답한다. 이 여행기록에 실망했다고. 여행에 관한 책이라면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고 친절하게 제공하거나, 그 여행지로 독자를 유혹할 만한 사진이나 문장들로 잔뜩 채워져 있다, 혹은 그래야 한다는, 내 생각은 이 여행기록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책은 그야말로 짤막한 ‘여행기록’들의 모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사적인 여행기록이라면, 필자의 문학적 감수성이 넘치는 글들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 시인의 시집을 읽은 나는 이 책보다 시집 <거미>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내 물음표는 가혹하지만은 않다. 이 여행기록들을 통해서 배운 것이 많으니까. 박성우 시인의 여행은 사실, 대단하지 않다. 그가 살고 있는 전라도 정읍에서 멀지 않은 곳들을 떠돌고 보고 느낀 것들을 쓴 거니까. 처음엔 솔직히 말해서 이걸 ‘여행산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행’이라는 걸 내가 그동안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다시 한번 되새김질해봤다. 어렵사리 휴가를 얻고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그냥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 ‘이곳’을 벗어나기? 돈을 최대한 모아 최대한 버리러 가기? 남들 다 가는 이름난 곳 찾아다니기? 우리가 막연히 ‘떠나고 싶다고 느끼는 그 여행’, 그것만큼 우스운 것도 없다.


시인이 유년시절 다니던 초등학교에 들러서 과거를 추억하는 장면. 그 페이지에 이르러 나는 내 유년의 추억과 시인의 추억을 겹쳐 읽었고, 지난 겨울, 그처럼 나도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들렀던 일을 꺼내어 우물우물 머리 안에서 되새김했다. 아직도 남아있는 이순신 동상과 이승복 어린이 동상, 그리고 책 읽는 어린이 동상을 마음에 담고, 얼어붙은 운동장 옆 연못에는 그때 그 시절처럼 큼직한 잉어들이 차거운 물 속에서 잘 자고 있는지 궁금했고, 이제는 ‘추억’의 도움이 아니라면 별로 즐겁지도 않을 놀이터에서 아이처럼 놀다온 일. 큼직한 미루나무 아래서 친구놈들과 구슬치기 하고, 지금도 깜빡깜빡하는 구구단 그때도 잘 못 외워서 쩔쩔매던 기억을 다시 살려서 가져온 일. 나는 그걸 왜 ‘여행’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까.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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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물고기 2004-06-10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작은 미미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인 셈이 된 건가요? 소소한 정겨움을 찾아내신 듯 해서, 바보.. 란 말에 슬쩍 웃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전경린을 좋아하는데, 그의 여행기는 이스트 과다증으로 잔뜩 부푼 빵같은 느낌이어서 꽤 실망했었습니다. 저에 비하면 대어(?)를 낚으신 듯.

도서관여행자 2004-06-11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소한 정겨움'... 멋진 말이네요. 여행에서 일상에서보다 더 강한 자극을 찾는 일도 좋겠지만요. (전경린의 여행기는 읽기를 피해야겠군요;)
 
 전출처 : 간달프 > 순수하지 못한 사고의 융성(2,144:MA)

[...] 예술이란 아무리 호의적으로 보아도 긴장을 풀며 진행되는 퇴화이며, 성실함과 실질적인 것을 강조해야만 하는 의무로부터의 일시적 해방이다. 예술 속에서 우리는 다시 어린아이가 된다. 그러면 순식간에 옛날의 감정들이 되살아나고 이미 오래전에 잊었던 박자로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2, 142)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너무 많이 뒤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자주 일시적인 삶의 부담을 덜어주는 상태 요구하다 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를 실제적으로 개선하는 을 게을리하게 된다. (2,143) 

[...] 니체는 당시의 예술적 욕구에 대해서 아주 날카로운 사회학적인 분석을 한다. 누가 예술을 요구하고, 그들은 예술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우선 지식인들이 예술을 요구한다. 그들은 제단의 향냄새를 좋아하지 않는다. 또한 종교적 위로를 완전히 무시할 만큼 자유롭지는 않으며, 그들이 예술을 찾는 이유는 예술 속에서 사라져가는 종교를 느끼기 때문이다. 예술을 찾는 또 다른 사람들은 우유부단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다른 삶을 원한다. 하지만 그럴 만한 힘이 없으며, 그래서 그들은 예술에서 '다른 상태'를 찾는다. 다음에는 공상하는 삶들이 예술을 원한다. 그들은 헌신적인 노동을 피하려 하며 예술은 그들에게 빈둥거리며 쉬는 침대다. 영리하지만 할 일이 없는 명문가의 여자들이 예술을 원한다. 그들이 예술을 원하는 이유는 단지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의사나 상인, 그리고 공무원 등이 예술을 원한다. 이들은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 가슴속에 있어서 고상해 보이는 것을 곁눈질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예술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예술은 그들에게 잠시 동안 불쾌함, 지루함, 양심의 가책을 잊게 만들며, 그들은 또한 예술을 통해서 자신의 삶과 성격의 결점을 세계 운명의 결점으로 거창하게 포장한다. (2,447:MA) 여기에는 안락함과 건강이 넘치지 않는다. 대신에 결핍의 경험이 예술로 그들을 몰아간다. 이러한 예술 옹호자들은 순수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니체는 오늘날 사람들이 예술을 요구하는 것은 자기 즐거움 때문이 아니라 자기 불만(2,447)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뤼디거 자프란스키, 니체-그의 생애와 사상의 전기, 오윤희 역 (문예출판사,2003) p.30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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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상 30 - 탄핵받는 '탄핵' 그 이후
고종석 외 지음 / 개마고원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인물과 사상 30권의 특집은 <탄핵>과 <불순함을 옹호함>이다. 5월 25일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탄핵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끝난 마당에 ‘특집’으로 읽히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두 번째 특집은 정말 특집인가? <불순함을 옹호함>이라니! 고종석이 특집 기획을 맡았다는 것을 서지사항에 박아 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고종석스러운 주제다. 나는 가끔 쓰레기 하나 없는 거리를 걷게 되면 고종석의 칼럼들이 떠오른다. 그렇게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에서 모종의 반발심을 느끼는 고종석의 생각에 지지할 수밖에 없다. 깨끗한 거리를 누군들 바라지 않겠냐마는, 아무런 수식어도 달지 않는 그저 그런 ‘거리’가 ‘깨끗한’ 거리가 되기 위해선, 시민들의 자발적인 선의의 행동보다는 무언가 억압적인 외부의 강요가 필요할 것이란 비관적인 시각이 작용하는지, 그 ‘외부’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깨끗한 거리보다는 강요 없는 자유로운 거리가 나는 좋다.

단일민족의 신화, 순수한 언어에 대한 무비판적 동조에 대한 시비걸기가 두 번째 특집의 목적이다. 홍세화는 <우리는 모두 이주노동자다>라는 글에서 “자기 성숙을 위해 내면과 대화하지 않는 사람에게 스스로 우월하다고 믿게 해주는 것은 그가 속한 집단이다. 사회문화적 소양을 높이기 위한 긴장이나 자기성찰이 없는 사람일수록 귀속집단에 집착하기 마련이다.”(131쪽)라고 말한다. 홍세화의 이 말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뿐만 아니라 학연, 지연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복거일의 <혼혈인 : 살빛이 다른 한국인들>에서는 그가 요즘 심취해있는 것으로 보이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근거로 해서, 민족주의는 직관에 완전히 부합하는 밈(유전자의 개념에 빗댄 문화 복제자)이며 유전자들의 이기심에 바탕을 두었지만 본질적으로 잘못된 적응이라고 말한다. 복거일이 받아들인 <이기적 유전자>의 유전자의 관점이나 문화적 복제자인 ‘밈’의 관점을 통해서 인간 사회를 해석하는 일은 새롭고 흥미로운 작업이다. 얼마 전 복거일이 쓴 ‘밈'에 관한 글을 우연히 읽고 내 지적인 미각은 새롭게 갱신되는 느낌이었다.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를 보고나서도 ’밈‘이란 단어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최소한 사이보그들에게는 육체보다는 ’밈‘이 중요할테니.(그리고 지적인 작업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몸도 그런 의미에서 유전자의 수레보다는 밈의 수레에 가깝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본 그의 (조선일보에 기고한) 칼럼에는 여전히 동일하게 <이기적 유전자>의 관점에서 사회를 해석하고 있었지만, 매우 놀랍게도(!) 탄핵 반대는 직관적이고 상식적인 밈이며 탄핵 찬성은 복잡하고 이해되기 어려운 밈이라고 쓰고 있다. 물론 쉽게 이해되고 누구나 찬성하는 다수 의견이라고 해서 반드시 논리적이거나 옳지는 않다, 그렇다 해서 소수 의견이라고 해서 반드시 논리적이거나 옳지 않은 것도 당연한 것 아닌가. 논리의 정당성과 논리를 지지하는 이들의 숫자와는 관계가 없을 터.


고종석의 <섞임과 스밈>의 부제는 ‘언어순수주의에 거는 딴죽’이다. 우선 고종석은 ‘한글’(한국어 문자 표기체계)과 ‘한국어’의 쓰임새의 혼동에 대해서 바로잡기를 시도한다. 그리고 외국어나 채팅 언어가 한국어에 섞이고 스미는 것을 불순함으로 보는 언어순수주의를 거부한다. 더불어 한겨레 신문의 ‘궂긴소식’이란 꼭지 이름에 딴지를 건다, 어려워서 반민중적이라고. 사전에서 찾아봐야할 정도의 순우리말을 자주 섞어 쓰는 손석춘 씨가 이 글을 읽으면 할 말이 많겠다고 생각했지만, 고종석의 말은 타당한 점이 있다. 그러나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 고종석의 말이 100% 옳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한겨레 신문 지면에서는 ‘궂긴소식’, ‘벌칙차기’라는 다소 낯설은 우리말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리고 리영희의 말마따나 거의 모든 영자를 한글로 풀어쓰려는 괜한 오바를 하기는 하지만, 나는 그것을 강압적인 운동 차원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물론 고종석이 그 <하나의 예>를 한겨레 신문의 ‘궂긴소식’이 아닌 자신의 책에서의 ‘우수리’에서 찾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 한겨레 신문은 그의 개인적인 저술보다는 독자층이 많고 그래서 더 큰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다고 그는 반론할 수도 있고, ‘우수리’는 ‘궂긴소식’보다 쉬운 우리말이라고 내 무지를 공격할 수도 있을 것이니까. 물론 나는, “되도록 언어를 자유롭게 내버려두기”라는 주장에는 고종석에 찬성한다.


고종석은 획일화된, 그래서 새로운 사유의 틈을 주지 않는 강압적인 태도를 반대한다. 이것은 고종석의 스승인 복거일도 유사하다. 그러나 이들도 전복적인 사유를 지나치게 끌고 나가려는 태도를 가질 때도 있다. 저항적인 담론, 반담론의 매력과 한계! 이제 깨끗한 거리를 보면 나와는 다른, 자발적 손길을 가지고 있는 선량한 눈빛들도 떠올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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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립간 > 미국 신문에 관한 뼈 있는 농담

* 미국 신문에 관한 뼈 있는 농담


- 월 스트리트 저널 : 미국을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이 읽는 신문

- 뉴욕 타임스 : 자신들이 미국을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읽는 신문

- 워싱턴 포스트 : 자신들이 미국을 경영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읽는 신문

- 유에스에이 투데이 : 자신들이 미국을 경영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만 워싱턴 포스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읽는 신문

- 엘에이 타임스 : 자신들의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면, 국가 경영을 개의치 않는 사람들이 읽는 신문

- 보스턴 글로브 : 읽는 사람의 부모들이 한때 미국을 움직였던 사람이 읽는 신문

- 뉴욕 데일리 뉴스 : 누가 미국을 움직이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 읽는 신문

- 뉴욕 포스트 : 스캔들이 될 만한 일을 할 수 있으면, 누가 국가를 경영하든 상관지 않는 사람들이 읽는 신문

- 샌프란시스코 크러니클 : 미국이란 나라가 누가 경영하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 읽는 신문

- 마이애미 헤럴드 : 다른 나라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읽는 신문


 원문 : The Wall Street Journal is read by the people who run the country. The New York Times is read by people who think they run the country. The Washington Post is read by people who think they ought to run the country. USA today is read by people who think they ought to run the country, but don't understand the Washington Post. The Los Angeles Times is read by people who wouldn't mind running the country, they could spare the time. The Boston Globe is read by people whose parents used to run the country. The New York Daily News is read by people who aren't to sure who's running the country. The New York Post is read by people who don't care who's running the country, as long as they do something scandalous. The San Francisco Chronicle is read by people who aren't sure there is a country, or that anyone is running it. The Miami Herald is read by people who are running another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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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여행자 2004-05-21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널리즘 잘 아시는 분들, 어서 한국 버전으로 써달라~ 써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