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사상 30 - 탄핵받는 '탄핵' 그 이후
고종석 외 지음 / 개마고원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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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상 30권의 특집은 <탄핵>과 <불순함을 옹호함>이다. 5월 25일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탄핵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끝난 마당에 ‘특집’으로 읽히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두 번째 특집은 정말 특집인가? <불순함을 옹호함>이라니! 고종석이 특집 기획을 맡았다는 것을 서지사항에 박아 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고종석스러운 주제다. 나는 가끔 쓰레기 하나 없는 거리를 걷게 되면 고종석의 칼럼들이 떠오른다. 그렇게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에서 모종의 반발심을 느끼는 고종석의 생각에 지지할 수밖에 없다. 깨끗한 거리를 누군들 바라지 않겠냐마는, 아무런 수식어도 달지 않는 그저 그런 ‘거리’가 ‘깨끗한’ 거리가 되기 위해선, 시민들의 자발적인 선의의 행동보다는 무언가 억압적인 외부의 강요가 필요할 것이란 비관적인 시각이 작용하는지, 그 ‘외부’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깨끗한 거리보다는 강요 없는 자유로운 거리가 나는 좋다.

단일민족의 신화, 순수한 언어에 대한 무비판적 동조에 대한 시비걸기가 두 번째 특집의 목적이다. 홍세화는 <우리는 모두 이주노동자다>라는 글에서 “자기 성숙을 위해 내면과 대화하지 않는 사람에게 스스로 우월하다고 믿게 해주는 것은 그가 속한 집단이다. 사회문화적 소양을 높이기 위한 긴장이나 자기성찰이 없는 사람일수록 귀속집단에 집착하기 마련이다.”(131쪽)라고 말한다. 홍세화의 이 말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뿐만 아니라 학연, 지연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복거일의 <혼혈인 : 살빛이 다른 한국인들>에서는 그가 요즘 심취해있는 것으로 보이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근거로 해서, 민족주의는 직관에 완전히 부합하는 밈(유전자의 개념에 빗댄 문화 복제자)이며 유전자들의 이기심에 바탕을 두었지만 본질적으로 잘못된 적응이라고 말한다. 복거일이 받아들인 <이기적 유전자>의 유전자의 관점이나 문화적 복제자인 ‘밈’의 관점을 통해서 인간 사회를 해석하는 일은 새롭고 흥미로운 작업이다. 얼마 전 복거일이 쓴 ‘밈'에 관한 글을 우연히 읽고 내 지적인 미각은 새롭게 갱신되는 느낌이었다.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를 보고나서도 ’밈‘이란 단어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최소한 사이보그들에게는 육체보다는 ’밈‘이 중요할테니.(그리고 지적인 작업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몸도 그런 의미에서 유전자의 수레보다는 밈의 수레에 가깝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본 그의 (조선일보에 기고한) 칼럼에는 여전히 동일하게 <이기적 유전자>의 관점에서 사회를 해석하고 있었지만, 매우 놀랍게도(!) 탄핵 반대는 직관적이고 상식적인 밈이며 탄핵 찬성은 복잡하고 이해되기 어려운 밈이라고 쓰고 있다. 물론 쉽게 이해되고 누구나 찬성하는 다수 의견이라고 해서 반드시 논리적이거나 옳지는 않다, 그렇다 해서 소수 의견이라고 해서 반드시 논리적이거나 옳지 않은 것도 당연한 것 아닌가. 논리의 정당성과 논리를 지지하는 이들의 숫자와는 관계가 없을 터.


고종석의 <섞임과 스밈>의 부제는 ‘언어순수주의에 거는 딴죽’이다. 우선 고종석은 ‘한글’(한국어 문자 표기체계)과 ‘한국어’의 쓰임새의 혼동에 대해서 바로잡기를 시도한다. 그리고 외국어나 채팅 언어가 한국어에 섞이고 스미는 것을 불순함으로 보는 언어순수주의를 거부한다. 더불어 한겨레 신문의 ‘궂긴소식’이란 꼭지 이름에 딴지를 건다, 어려워서 반민중적이라고. 사전에서 찾아봐야할 정도의 순우리말을 자주 섞어 쓰는 손석춘 씨가 이 글을 읽으면 할 말이 많겠다고 생각했지만, 고종석의 말은 타당한 점이 있다. 그러나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 고종석의 말이 100% 옳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한겨레 신문 지면에서는 ‘궂긴소식’, ‘벌칙차기’라는 다소 낯설은 우리말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리고 리영희의 말마따나 거의 모든 영자를 한글로 풀어쓰려는 괜한 오바를 하기는 하지만, 나는 그것을 강압적인 운동 차원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물론 고종석이 그 <하나의 예>를 한겨레 신문의 ‘궂긴소식’이 아닌 자신의 책에서의 ‘우수리’에서 찾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 한겨레 신문은 그의 개인적인 저술보다는 독자층이 많고 그래서 더 큰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다고 그는 반론할 수도 있고, ‘우수리’는 ‘궂긴소식’보다 쉬운 우리말이라고 내 무지를 공격할 수도 있을 것이니까. 물론 나는, “되도록 언어를 자유롭게 내버려두기”라는 주장에는 고종석에 찬성한다.


고종석은 획일화된, 그래서 새로운 사유의 틈을 주지 않는 강압적인 태도를 반대한다. 이것은 고종석의 스승인 복거일도 유사하다. 그러나 이들도 전복적인 사유를 지나치게 끌고 나가려는 태도를 가질 때도 있다. 저항적인 담론, 반담론의 매력과 한계! 이제 깨끗한 거리를 보면 나와는 다른, 자발적 손길을 가지고 있는 선량한 눈빛들도 떠올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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