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국어의 여러 글자들 중에서 ‘숲’을 편애한다. ‘수풀’도 좋지만 ‘숲’만은 못하다. ‘숲’이라는 글자의 생김새는 숲과 똑같다. ‘숲’의 어감은 깊고 서늘한데, 이 서늘함 속에는 향기와 습기가 번져있다. ‘숲’의 어감 속에는 말라서 바스락거리는 건조감이 들어있고 젖어서 편안한 습기가 느껴진다. ‘숲’은 마른 글자인가 젖은 글자인가. 이 글자 속에서는 나무를 흔드는 바람소리가 들리고, 골짜기를 휩쓸며 치솟는 눈보라 소리가 들리고 떡갈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린다.
깊은 숲 속에서는 숨 또한 깊어져서 들숨은 몸속의 먼 오지에까지 스며드는데, 숲이 숨 속으로 빨려 들어올 때 나는 숲과 숨은 같은 어원을 가진 글자라는 행복한 몽상을 방치해둔다. 내 몽상 속에서 숲은 대지 위로 펼쳐놓은 숨의 바다이고 숨이 닿는 자리마다 숲은 일어선다. ‘숲’의 피읖받침은 외향성이고 ‘숨’의 미음받침은 내향성이다. 그래서 숲은 우거져서 펼쳐지고 숨은 몸 안으로 스미는데 숨이 숲을 빨아 당길 때 나무의 숨과 사람의 숨은 포개지고, 몸속이 숲이고 숲이 숨인 것이어서 ‘숲’과 ‘숨’은 동일한 발생근거를 갖는다는 나의 몽상은 어학적으로는 어떨는지 몰라도 인체생리학적으로는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몸이 입증하는 것들을 논리의 이름으로 부정할 수 있을 만큼 명석하지 못하다.
밥벌이에 지친 날에는 숲 속의 나무들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먹이를 몸 밖에서 구하지 않고, 몸 밖의 먹이를 입으로 씹어서 몸 안으로 밀어 넣지 않고, 제 몸 속에서 햇빛과 물과 공기를 비벼서 스스로를 부양하는 저 푸르고 우뚝한 것들은 얼마나 복 받은 존재들인가. 중생의 맨 밑바닥에서, 나무는 중생의 탈을 벗고 있다. 밥벌이에 지친 저녁에 이경준교수가 지은 ‘수목생리학’이나 파브르의 ‘식물기’를 꺼내놓고 광합성, 수목의 생장, 햇빛과 엽록소의 관계 같은 페이지들을 읽는 일은 쓸쓸하다. 이 쓸쓸함은 식물의 자족(自足)앞에서 느끼는 동물의 슬픔이다. 무기물을 유기물로 전환시키는 작용이 나무의 생명현상이다.
그 전환의 생화학적 과정을 모두 분석하고 분석의 파편들을 다시 종합해도 어째서 생명이 아닌 것들로부터 생명인 것이 빚어지는 것인지를 나는 알 수가 없다. 어째서 이 전환은 초록계통의 세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숲은 왜 초록색인지, 숲을 초록으로 인지하는 나의 지각과 언어는 정당한 것인지를 나는 결국 알지 못한다. 나의 무지에도 불구하고 광합성을 기술하는 수목생리학의 페이지들은 아름답고, 바람에 흔들리는 광릉의 여름 숲은 자유가 깃들만큼 서늘하고 깊어서, 숲 속에서 나는 세계의 궁극으로 다가가는 식물학자가 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숲 속의 모든 나무는 먹이 없이 스스로 살아가는 독립기관이다. 나무는 뿌리에서부터 우듬지 꼭대기의 잎에까지 물을 이동시키는데, ‘수목생리학’에 따르면 이 물은 분자들 간의 상호응집작용으로 이동하는 것이어서 나무는 양분을 만들기 위해서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다. 물은 저절로 이동한다. 나무는 서두르거나 늑장을 부리지 않는다. 기다렸다가 때가 이르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나무는 개화나 결실에 많은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나무는 생명이 아닌 것을 생명으로 바꾸는 전환의 과정으로 저 자신의 생명을 완성한다. 그래서 나무는 오래오래 땅 위에 살아있는 것인데 500년이 된 느티나무조차도 젊어있어서 땅 위에 늙은 나무란 없다.
여름의 광릉 숲은 나무들마다 제 모습으로 무성해져서, 나무의 개별성은 주저없이 발현되어 있다. 참나무 큰 잎은 늘 바람에 서걱거린다.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굴참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의 그늘도 마찬가지다. 잎 사이마다 빛이 꺾이면서 스며들어 참나무 숲 속은 어슴푸레하고 그림자가 없다. 넓은 잎들이 물기를 내품어 참나무 숲에서는 콧구멍 속이 편안해진다.
소나무나 전나무 숲의 바닥은 가는 잎 사이로 스며들어온, 자잘한 빛들이 바글거린다. 전나무는 키가 커서 전나무 숲 바닥의 빛들은 멀어 보이고 소나무 숲 바닥의 빛은 가까워 보인다. 소나무 숲의 향기는 말라있고 참나무 숲의 향기는 젖어있다. 숲 속의 나무들 중에서 느티나무는 가장 완강한 착지성(着地性)을 보인다. 느티나무의 밑동은 중심이 되는 기둥을 구별할 수 없다.
느티나무 밑동은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또 들러붙어서 튼튼한 저변의 근거를 확보한다. 느티나무는 화사하지 않고 꽃도 볼품없지만, 느티나무는 강력하고 장대하다. 산전수전의 신령성이 서린 그 밑동은 오래 사는 자가 이기는 자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마을 어귀의 정자나무나 당나무는 대부분이 느티나무다. 느티나무가 들어선 숲에서 다른 나무들은 이 신령한 나무 곁에 범접하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있다. 참나무, 소나무, 느릅나무는 굴곡진 껍질로 외벽을 치지만, 백일홍, 물푸레나무, 자작나무는 기름기 흐르는 껍질 위에 꽃사슴의 무늬를 그려낸다.
여름의 광릉 숲에서, 숲의 전체성은 이 모든 나무들의 개별성을 품고 있었고, 몸 밖에서 벌어먹어야하는 자의 먹이의 운명만이 그 전체성에서 제외되어 있었는데, 숲 속에서는 그 제외된 운명이 선명히 드러남으로써 오히려 견딜 만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