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여행길에 바람나다 - Never Ending Travel 2, 풍경의 덫에 걸린 외톨박이 시인의 연애편지 33장
박성우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이파리 무성한 등나무 아래로
초록 애벌레가 떨어지네
사각사각사각,
제가 걸어야 할 길까지 갉아먹어서
초록길을 뱃속에 넣고 걸어가네

초록 애벌레가 맨땅을 걷는 동안

뱃속으로 들어간 초록길이 출렁출렁,
길을 따라가네
먹힌 길이 길을 헤매네
등나무로 오르는 길은 멀기만 하네

길을 버린 사내가 길 위에 앉아 있네



- 박성우, 「길」



박성우의 시, 「길」은 아름답다. 내가 좋아하는 ‘초록’이라는 밝은 울림의 말이 여러 번 박혀 있어서인지, 사각사각사각, 출렁출렁… 이렇게 가벼이 흔들리며 귓속으로 경쾌하게 걸어 들어가는 소리들이 살아있어서인지, “제가 걸어야 할 길까지 갉아먹어서 / 초록길을 뱃속에 넣고 걸어가네”라는 시적 발견이 그 안에 녹아있어서인지. 어쨌든, 박성우의 첫 시집 <거미>에 들어있던「길」은 아름다웠다.


박성우 시인의 여행‘길’은 어떨지… 물음표가 책을 읽는다.


그리고 물음표는 답한다. 이 여행기록에 실망했다고. 여행에 관한 책이라면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고 친절하게 제공하거나, 그 여행지로 독자를 유혹할 만한 사진이나 문장들로 잔뜩 채워져 있다, 혹은 그래야 한다는, 내 생각은 이 여행기록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책은 그야말로 짤막한 ‘여행기록’들의 모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사적인 여행기록이라면, 필자의 문학적 감수성이 넘치는 글들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 시인의 시집을 읽은 나는 이 책보다 시집 <거미>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내 물음표는 가혹하지만은 않다. 이 여행기록들을 통해서 배운 것이 많으니까. 박성우 시인의 여행은 사실, 대단하지 않다. 그가 살고 있는 전라도 정읍에서 멀지 않은 곳들을 떠돌고 보고 느낀 것들을 쓴 거니까. 처음엔 솔직히 말해서 이걸 ‘여행산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행’이라는 걸 내가 그동안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다시 한번 되새김질해봤다. 어렵사리 휴가를 얻고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그냥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 ‘이곳’을 벗어나기? 돈을 최대한 모아 최대한 버리러 가기? 남들 다 가는 이름난 곳 찾아다니기? 우리가 막연히 ‘떠나고 싶다고 느끼는 그 여행’, 그것만큼 우스운 것도 없다.


시인이 유년시절 다니던 초등학교에 들러서 과거를 추억하는 장면. 그 페이지에 이르러 나는 내 유년의 추억과 시인의 추억을 겹쳐 읽었고, 지난 겨울, 그처럼 나도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들렀던 일을 꺼내어 우물우물 머리 안에서 되새김했다. 아직도 남아있는 이순신 동상과 이승복 어린이 동상, 그리고 책 읽는 어린이 동상을 마음에 담고, 얼어붙은 운동장 옆 연못에는 그때 그 시절처럼 큼직한 잉어들이 차거운 물 속에서 잘 자고 있는지 궁금했고, 이제는 ‘추억’의 도움이 아니라면 별로 즐겁지도 않을 놀이터에서 아이처럼 놀다온 일. 큼직한 미루나무 아래서 친구놈들과 구슬치기 하고, 지금도 깜빡깜빡하는 구구단 그때도 잘 못 외워서 쩔쩔매던 기억을 다시 살려서 가져온 일. 나는 그걸 왜 ‘여행’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까.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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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물고기 2004-06-10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작은 미미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인 셈이 된 건가요? 소소한 정겨움을 찾아내신 듯 해서, 바보.. 란 말에 슬쩍 웃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전경린을 좋아하는데, 그의 여행기는 이스트 과다증으로 잔뜩 부푼 빵같은 느낌이어서 꽤 실망했었습니다. 저에 비하면 대어(?)를 낚으신 듯.

도서관여행자 2004-06-11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소한 정겨움'... 멋진 말이네요. 여행에서 일상에서보다 더 강한 자극을 찾는 일도 좋겠지만요. (전경린의 여행기는 읽기를 피해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