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라스콜리니코프의 분열증적인 삶

가장 러시아적이면서도 가장 유럽적인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1866)은 이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1880)에 이르는 위대한 작가적 여정의 첫 번째 이정표이다. 이미 작가는 중편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를 통해서, 당시 유럽과 러시아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던 공리적 사회주의의 이념을 공박하면서, 진정 '살아있는 삶'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 바 있다. <죄와 벌>은 이러한 관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지하생활자의 수기>에 등장하는 2×2=4의 수학적 공리의 세계(합리적 이성의 세계)는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범죄이론으로 변형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범인(凡人)과 비범인(非凡人)으로 나뉠 수 있고, 이때 비범인은 초법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그는 역사상의 모든 입법자나 건설자들은 이와 같은 권리를 행사해왔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한다.

가난한 전직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중요한 것은 과연 자기 자신이 비범인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러시아어로 '(범)죄'의 어원적인 뜻은 '한 발작 넘어섬'인데, 그는 자기 자신이 모든 장애를 딛고 한 발작 넘어설 수 있는가를 시험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고리대금업을 하는 전당포 노파에 대한 살인을 계획하고 이를 실행한다. 하지만 살인 사건 이후에 그는 줄곧 혼미한 정신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데, 그것은 주로 자신이 한 발작 넘어서서 첫 번째 걸음을 옮기는 데 실패했다는 자책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일종의 정신분열이 일어나는데, 학대받는 늙은 말을 끌어안고 울던 유년시절의 라스콜리니코프와 유럽 합리주의의 세례를 받은 청년 라스콜니코프 사이의 분열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러시아와 유럽의 분열을 함축한다.

사실 주인공의 이름에서 '라스콜'은 러시아어로 분리/분열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분리/분열이 해소되는 것은, 루터가 '악마의 창녀'라고 부른 이성의 대변자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수를 결심하고 성스런 창녀 소냐의 권유대로 광장에서 대지에 입을 맞추게 됨으로써이다. 하지만, 8년간의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은 라스콜니코프가 진정한 갱생에 이르는 과정의 이야기는 작가의 말대로 이 작품의 주제가 아니다. 나폴레옹 모방이 아닌 그리스도 모방으로서의 진정한 인간의 삶, 혹은 위대한 죄인의 생애를 묘사하고, 고통과 수난을 통한 삶의 구원을 역설하고자 한 작가의 고투는 이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알료샤에 이르는 여정을 남겨놓고 있다.

<죄와 벌>의 현재적 의의란 어떤 것일까? 라스콜니코프의 이론과 그 실행을 소비예트 러시아(1917-1991)의 건설과 파산에 견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작가가 유난히 강조한 바, 결코 변증법으로 대체할 수 없는 '살아있는 삶'은, 모두가 합리적/계산적 이성에 근거한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새로운 정치학으로서의 윤리학을 요구한다. 역사의 종언 이후에 우리에게 남겨진 삶은 바로 이 갱생의 삶이다.

2002. 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동인문학상 수상작 모음집 1979~1984 - 13~16회
조세희 외 지음 / 조선일보사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혁명가가 바다로 띄워 보낸 비망록


1.


제13회 동인문학상의 수상작은, 이미 고전의 고전이 되어버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다. 평론가들마저도 <난.쏘.공>을 논할 때는 평론이 아니라 독후감을 쓰곤 한다. “이 소설책을 총 몇 번 읽었는데, 첫 번째는 어떠어떠한 감동이었으며, 그 다음의 독서는…” 이런 식인데, 이 소설집의 해설을 쓴 방민호도 여러 권의 <난.쏘.공>을 가지고 있다며 개인적인 독서체험을 이야기한다. 다치바나는 고전을 두고서 “그 저서(고전)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로서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 자체가 토론의 대상이 되어,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의 소재로 활용되기에 적절한 책만이 결국 진정한 의미의 고전으로서 살아남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55쪽)라고 말했다. 그렇다. 실상, 특정한 텍스트가 고전이나 정전으로 채택되기 위해서는 처음에는 그 텍스트의 내적인 가치가 귀중한 것으로 판명되는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그 이후에는 많은 이들의 입과 귀에서 끊이지 않고 얘깃거리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텍스트의 내용보다 그 텍스트와 관련된 독서체험이나 심경변화를 이야기하는 일이 더 벌어지는 것은, 이미 그 텍스트의 품질을 보장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명품의 디자인이나 기능을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명품 자체에 얽힌 이야기를 즐기는 것과 같다.


나는 불우(?)하게도 중학 시절에 필독도서의 하나로 <난.쏘.공>을 읽어야만 했다. 필독도서로 억지로 읽는 책이었으므로, 그것은 짜증과 지루함으로부터 시작되어 감동으로 끝난 독서였다. 그러나 스무 살이 넘은 뒤에 읽은 <난.쏘.공>은 그때와는 또 다른, 더 깊은 감동을 주었다. 사회과학과 역사 책으로 더 정밀하게, 더 구체적으로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세계를 인식할 수 있겠지만, 문학 읽기를 통한 세계 인식은, 삶의 인식은, 이와는 또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과학이나 역사와는 다른 문학만의 감동과 전율이 있기 때문이다. <난.쏘.공>의 경우, 시적인 문체와, 현실과 환상이 포개어지는 매혹적인 구성 등이 독자들을 사로잡는 것이고, 여전히 고전의 고전으로 칭송받는 까닭일 것이다.


2.

제13회에서 16회에 이르는 동인문학상 수상작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와 소재들은 각기 다채롭다. 13회 수상작 <난.쏘.공>에서 ‘난장이’로 상징되는 억압적인 시대상과 ‘쏘아올린 작은 공’이란 제목에서도 드러나는 ‘차마 버리지 못하는, 또는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되는, 작은 희망과 의지’의 혼재의 고통을 독자들은 즐거이 받아들여야 한다. 14회 수상작인 전상국의 <우리들의 날개>는 동생의 존재 때문에 가족들이 비극을 겪게 된다는 운명의 망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가족들의 모습을 그린다. 인간이 운명(이것의 실체도 정작 모르면서!)을 받아들이거나 비극의 원인을 전혀 다른 곳에서 찾아내는 까닭은 무얼까. 15회 오정희의 <동경>은 죽음으로 서서히 미끄러져 가는 노부부의 일상을 그려낸다. 오정희의 섬세한 문체가 그려내는 구체적 일상들은, 어린 아이의 거울 장난이 오히려 늙은 부인의 노쇠를 조롱하는 것처럼, 얄밉게 반짝인다. 16회 수상작 이문열의 <금시조>는 일종의 예술가 소설이다. 금시조의 비상을 보고픈, 예술의 극점에 다다르려는 한 서화가의 일생과 갈등이 <금시조>의 세계다. 예술가 소설로는 특별히 도드라진 점은 없겠지만, <금시조>에서 마음에 든 점은 주인공 고죽의 일상적 삶이 천재들의 불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적당히 불우하고 적당히 평범하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드라마틱한 삶이 예술가의 삶은 아니니까. 16회 수상작, 김원일의 <환멸을 찾아서>는 현대 한국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인 분단 문제에 천착한다. 어느 좌천당한 혁명가의 북에서 띄워 보낸 비망기를, 역시나 분단으로 고통 받고 있는 실향민 아버지가 바다에서 습득하게 되고, 시인이자 교사인 아들이 이것을 가족들에게 전해준다는 이야기이다. 소설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다.


‘영동행각’이란 제목으로 일곱 편의 시를 썼던 울진 출신의 젊은 시인은 전쟁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였으나, 시대의 앞뒤를 두루 살펴 그 불가해한 상처의 뿌리를 노래했다. 그는 ‘다시 영동에서’란 시의 마지막 연을 이렇게 썼다.


한 생애가 눈물 가득 찬 물결로도 출렁이고

서러울수록 그 위에 엎어져 함께 흐느껴 가면

어둠 속을 더욱 넓어지는 소리의 한없는 두런거림

여기서 자라 이 물결에 마음붙인

사람들의 오랜 고향을 나는 안다.(342쪽)


전쟁을 겪지는 않았으나 총성이 들리지 않는 전쟁, 즉 분단 상황하에서 살고 있으며 여전히 상처가 치유되지 못한 역사적 상황에서, 우리는 삶의 바다에서 길어올린 이 쓰라린 편지를 어느 곳으로, 누구에게 배달해야만 하는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zaza 2004-08-17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찬제도 난.쏘.공의 해설을 독후감으로 시작하고 있더군요...^^
어두웠던 팔십년대를 경제학도로 살았던 그에게 난.쏘.공이 던져준 인상은 각별한 것이었겠죠.

도서관여행자 2004-08-17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 아마, 내가 그 해설을 두고 얘기한 걸꺼야.
이미 난.쏘.공에 대한 2차텍스트들은 숱하게 쓰여졌을테니, 다른 얘기를 하는 게 독자들을 덜 지루하게 만드는 게 아닐지.
 

어떤 권력 관계


이 글이 장애인을 타자화하고 희생자화하는 데 일조하지 않을까, 그렇게 읽히지는 않을까 매우 두렵다. 며칠 전 나는 휠체어에 누워서 이동해야 하는 뇌성마비에다가 지체 장애를 가진 중증 장애인이자 무학으로 한글을 모르는 이들을 상대로 3회에 걸쳐 여성학 강의를 했다. 미국인 중에서, 남성 중에서, 비장애인 중에서, 이성애자 중에서도 문맹이 있을 수 있고, 실제로 많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문자를 모른다는 것이 장애인이 겪어야 할 상식적인 현실이거나 운명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 대상이므로 그날 강의에서 나는 일단 칠판에 필기를 할 수 없었다. 시청각 교재가 나을 것 같아, 낙태 관련 영화를 보여주었는데 이번에는 비디오 자막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이기 전에 남성이거나 여성이어야 하는 한국 같은 철저한 성별 사회에서 장애인은 무성적 존재, 즉 젠더 이전의 비인간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장애인의 현실에서 생물학적 성별인 섹스와 사회문화적 성별인 젠더 개념에 대한 나의 설명은 중증 장애인인 그들의 삶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나는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성활동이 남성 성기 중심적이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강사로서 나는 비참했다. 남성 장애인은 남성이라기보다는 장애인이었고, 기본적으로 기존의 섹슈얼리티를 실천할 몸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웅동체인 양성구유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은 양성으로 구분할 수 없다, 자웅동체는 하등동물, 자웅이체는 고등동물로 배웠던 고등학교 생물 수업은 자연과학에 남성중심주의가 반영된 왜곡된 지식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들이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는 점점 할 수 있는 말을 찾기 어려웠다. 나의 이 우스꽝스러운 점입가경의 절정은, “즐거운 금요일 주말 밤이죠”라는 수업 끝 인사였다. 집밖으로 이동이 정치적 투쟁인 그들에게는 매일매일이 주말인 것을 ….

나의 여성주의를 그들에게 전달하기 힘들었던 것은, 페미니즘이든 마르크스주의든 자유주의든 이론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의 결과이다. 하지만 내게는 이 문제보다 더 중요한 깨달음이 있었다. 물론 이 깨달음조차도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주체인 비장애인이 자기 성찰과 인식의 확장을 위해, 타자인 장애인의 삶을 활용, 동원하는 또다른 비장애인의 권력일지 모른다. 지배와 피지배는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같은 언어를 공유할 때만 가능하다. 모든 권력의 작동과 지속은, 지배자의 언어와 논리를 피지배자에게 강요하고 피지배자는 이를 수용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애인 시설 ‘정립회관’은 정립(正立), ‘바로’ 서기는 비장애인 중심의 담론이다. 서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은 누구의 논리인가.

피지배자가 지배자의 언어 배우기를 거부하면, 이때 당황하는 사람은 지배자이고 지배 논리의 관철은 불가능하게 된다. 다른 강의에서 수강생들은 5분마다 웃음을 터뜨리고 내게 열렬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나는 자신감 넘치는 강사였다. 그런 반응에 익숙해 있던 내게 이들의 ‘무표정’한 얼굴은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곧 그들이 나의 말하기에 열정적으로 반응하는 뛰어난 청자이자 저항 세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반응이 없는 것이 아니라, 뇌성마비 상태인 그들의 몸이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그 언어를 내가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소통되지 않는 상황의 답답함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정의하기 힘든 엄청난 힘의 분출을, 폭발하는 자의식을, 격렬한 지적 호기심을 느꼈고 몹시 당황했다. 문맹은 나였다. 그들은 비장애인의 언어와는 다른 방식의 언어로 나와 소통하고자 했지만, 나는 장애인의 언어를 읽을 수 없는 문맹이었다. 그들의 언어와 나의 언어 중 나의 언어가 소통의 기준이 되는 언어, 우월한 언어라는 인식은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 편승한 무임승차 행위일 뿐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한겨레 2004.02.04(수) 18:18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도서관여행자 2004-07-07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칼럼 읽기를 좋아한다. 짧은 글 속에서 많은 걸 얻을 수 있다. 학교보다 신문이나 책들이 더 좋은 선생이었다. 선생님, 사랑해요. ♡_♡

balmas 2004-07-07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은 글이네요. 고맙습니다. 퍼가겠습니다.^^
 

‘책맹’사회에서 책읽기


고등학교 시절, 나는 영화광이었다. 그것도 지독할 정도로. 그리하여 친구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내 별명은 ‘충무로’였다. 당연하게도 그 시절의 내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물론,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고자 하는 바람도 품고 있었다. 허나 그 바람은 대학입시를 눈앞에 두고 산산이 부서졌다. 부모님께 연영과에 입학하고 싶다는 소망을 꺼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나에게는, “네가 딴따라가 되겠다는 것이냐”라는 부모님의 힐난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정말 소심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권하시는 대로 법대에 진학했다. 그렇게 기대치 않았던 물결을 따라 꿈이 표류하게 되자마자, 내 일상은 갑자기 심심해지고 말았다. 예정된 수순처럼,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나에게 묵직한 권태의 시간이 찾아왔다. 먹고 자는 일 외의 나머지 시간은 지리멸렬했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 갑작스레 맞게 된 그 지리멸렬함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비상구 하나가 절실했다. 그때, 내 손에 잡힌 것이 있었다! 바로 책이었다. 어릴 적부터 홀로 공상하기를 즐겼던 덕에 나는 책의 마력에 쉽사리 빠져들 수 있었다. 그 후 십년 동안 나는 책읽기의 매혹에 풍덩 빠져 살았다. 정말 잘난 척한다는 빈정거림을 들을 각오를 하고 말하건대, 정말이지 책은 남부럽지 않을 만큼 읽었다. 그렇게 해서 집에 쌓인 책만도 대략 삼천 권이다.

어쨌거나 나의 십대 끝자락과 이십대의 전부는 그렇게 흘러갔다. 당연하게도 그 시절 동안의 나는 혼자 방안 한구석에 몸을 파묻은 채 책장을 넘기는 시간이 많았다. 종종, 책맹(冊盲)사회에서 책에 미쳐 살아가는 일의 고독이 얼마나 큰지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내 어머니는 나를 바라보시며 한숨을 푹푹 내쉬곤 하셨다. 그리고 한 달에 한번꼴로는 나에게 근심 어린 표정으로 이렇게 타이르셨다. “책 그만 읽고 공부 좀 해라. 그렇게 책만 읽어서 어디다 써먹으려고. 쯧쯧.” 그럴 적마다 나는 너털웃음으로 화답했다. 어머니가 지칭하는 ‘책읽기’와 ‘공부하기’의 차이가 무엇인지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지만, 적어도 그 시절의 나에게 책읽기와 공부하기는 동의어였던 탓이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흐르고, 그리하여 내 나이의 무게가 더해갈수록, 나는 내 스스로가 인생의 공식으로 세워두었던 책읽기와 공부하기의 등호관계가 점차 부등호관계로 어긋나가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 사회는 나이를 먹어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갈 시점에 이를수록 그 나이에 맞는 역할 모델을 강요했지만, 미련하게 ‘공부는 안 하고 책만 읽어 온’ 나는 그 역할 모델에서 점차 멀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서른의 나이에 이르고 보니, 어느샌가 나는 거의 한국사회의 부적격자가 되어 있었다! 이 오묘한 세상에 하나의 유한한 생명체로 태어나 먹고사는 문제에 초연할 수 없었던 나는, 그리하여 내 이십대를 온통 도배질하다시피 한 책읽기 이력이 갑작스레 버거워졌다. 최종학력이 ‘국졸’인 내 어머니의 한국사회 감식안이 십 년 넘게 대학 캠퍼스를 학생 신분으로 유령처럼 배회한 나보다는 수십배 더 예리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도 나는 내가 책벌레로 보낸 지난 십 년 남짓의 시절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아둔하게 ‘책만’ 읽어온 지난 세월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는 것은 솔직하게 고백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국사회에서 책읽기와 공부하기가 등호관계에 가까웠다면, 아마도 나의 삶이 요즘처럼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맨 처음 본격적으로 책의 매혹에 빠져들었을 때에도 그러했고, 서른의 나이에 이른 지금에도 그러하듯, 이 나라 책맹사회는 책에 빠져 사는 사람들을 공중부양이나 축지법을 꿈꾸는 몽상가 정도로 취급한다. 말로는 책 열심히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자기 자식이 책벌레 되는 거 겁내는 부모들이 꽤 많다. 과장이 아니다. 그건 내 삶이 증명한다.

이휘현/자유기고가·대학원생
한겨레 2004.02.11(수) 18:08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도서관여행자 2004-07-07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김현의 <한국 문학의 위상>을 읽었다. 이 문학개론서의 핵심 주제는 "써먹을 데 없는 문학의 쓸모"이다. 물고구마를 빨면서 소설책을 쌓아두고 읽던 어린 김광남에게 그의 어머니가 내던진 한 마디에 대한 오랜 훗날의 답변이다. 문학도의 항변이고 변명이다. '김광남'에서 문학평론가 '김현'이 되었건만 그의 부모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그가 문학도가 된 것에 대해서 아쉬워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김광남의 어머니나, 김현의 어머니나, 이휘현 씨의 어머니나, 내 어머니는, 김광남이나 김현이나 이휘현 씨나 나보다 훨씬 현명했으므로 우리들이 답하기 곤란한 문제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전출처 : 갈대 > INTP

 

대학교 1학년 2학기에 교양과목으로 심리학을 신청했다. 이 과목은 대단히 인기가 있어서 수강신청이 시작되고 몇시간만에 꽉 차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학교측에서 자리를 늘려주어 신청할 수 있었다. 수업은 기대했던 것처럼 재밌지는 않았지만 다른 수업보다는(미적분학, 경제성공학 등등) 훨씬 들을만했고 그수업으로 나는 심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프로이드의 성에 기반을 둔 성장단계별 설명은 납득할 수 없었지만 학기 중간에 실시했던 융의 MBTI 성격검사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재미삼아 하는 심리테스트와 MBTI는 완전히 달랐다. 

바보처럼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스스로의 성격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내성적이고 말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유별난 점을 찾기는 힘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원인이 학교생활에 있지 않았나 싶다. 고등학교시절 새벽같이 등교해 늦은 시각까지 50명이 넘는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정해진 규칙대로 살다보니 개인의 성격은 억압되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한국의 학생들은 대학생이 된 후에 제 2의 사춘기를 겪게 되는게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튼 이런 불확신은 성격겁사를 할 때도 여지없이 드러나게 되어 둘 중 어느곳에 체크를 해야할지 애매한 경우가 많았다. 고등학교시절의 나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불확실하지만 마음이 이끄는 대로 선택할 것인가? 결국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확신은 없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INTP라는 결과가 나왔는데 이는 전 세계 인구의 1%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즉 100명에 한명 있을까 말까 한 성격이었다. MBTI에 16개의 성격유형이 있으니 평균적으로 본다면 한 유형당 6%를 차지해야 한다. 하지만 자연은 이런식의 균등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 ISTJ.라는 유형은 10%가 넘는 점유율을 보이고 있었고 3%가 안되는 유형도 INTP를 포함해서 3가지가 있었다. 나는 이런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놓고 고민했다. 그때까지 별다른 문제없이 평범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가장 희귀한 유형이라는 사실은 놀라우면서도 당혹스러운 것이었다.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특별한 존재라는 결과는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INTP는 흔히 '사회의 부적응자'로 불린다. INTP라는 사실은 단순히 희귀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임을 생각해볼 때 이는 매우 치명적인 결점이 될 수 있다. INTP가 이렇게 적은 이유도 진화적으로 부적합하기 때문에 줄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길만도 하다. 왜 부적응자로 불리는 지는 INTP의 특성을 살펴보면 이해가 쉽다. 이들은 밖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보다는 집에서 혼자 자신만의 관심사에 몰두하는 것을 좋아하고 극단적인 경우 자폐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또 스스로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말을 거의 하지 않으며 술자리, 파티장 등 사람들이 많고 왁자지껄한 곳을 매우 싫어한다. 타인에게 인간적인 관심을 보이는 경우도 드물고 설령 마음이 있더라도 행동으로 표출되는 일은 거의 없다. INTP에게 특별한 용무없이 일상적인 전화받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들이 말이 많아지는 경우가 있는데 상대방이 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있을 때이며 상대방은 사실 이들이 대단히 말을 잘한다는 사실에 놀란다. 이정도면 왜 부적응자인지에 대한 이유는 대답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INTP를 절망적인 사람들로 볼지도 모르겠지만 단점 못지 않게 장점도 많다. 확실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는 불리하지만 이들은 혼자 하는 일에서는 두곽을 나타낸다. 특히 논리적 순수성에 대한 욕구가 대단하기 때문에 학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 아인슈타인과 뉴턴, 과학의 혁명을 이끈 두 사람 모두 INTP라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다. 자신의 관심영역에 대해서는 놀라운 직관력과 독창성을 보이는 것도 이들의 특징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머 중에 INTP의 비율이 무척 높다는 사실은 이들이 얼마나 오류를 잘 찾아내는지를 보여준다. 앞에서 말한 논리적 순수성을 추구한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틀린 부분을 잘 찾아낸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이들은 학창시절 성적이 상위권일 가능성이 높다. 자식이 이 성격이라면 부모는 높은 성적을 기대해도 좋다. 다만 자신이 하는 공부가 바보같다고(혹은 선생이) 느낄 때는 최악의 결과를 기대해도 좋다 -_-;; 

전 세계 교수 중 80%가 INTJ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확실하지는 않지만 대단히 높은 것은 사실이다. ) INTP만큼 희귀한 INTJ가 교수 중에 그렇게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INTP와 INTJ의 차이는 바로 P와 J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P의 특징은 자유분망함이고 J의 특징은 성실함, 정리정돈이다. 즉 한가지 주제에 대해 높은 집중력과 직관으로 꾸준히 연구할 수 있는 것이 INTJ의 특징이다. 반면 INTP는 흥미 있는 일에 대해서 시작은 비슷하지만 추진력이 부족하다. 즉 흥미가 사라져버리면 노력 역시 사라지게 되는 경향이 강하다. 어쩌면 꾸준히 노력할 수 있는 성격 자체가 이미 대단한 능력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극단적인 INTP는 아니다. 나에게 아인슈타인만큼의 번뜩이는 직관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최근 아인슈타인이 자폐증상을 보였다는 연구결과가 있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극도로 기피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이 두가지 경향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나는 내 성격에 스스로를 가두고 싶은 마음은 없다. 스스로를 규정짓는 순간 발전의 가능성 역시 막혀버림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MBTI테스트를 만든 융 역시(그도 INTP이다) 타고난 성격이 바뀔 수는 없지만(다른 성격유형으로 변하지는 않는다는 의미) 어느정도 중화 혹은 완화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실제로 대부분의 내성적인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어느정도 외향적으로 바뀐다. INTP라는 성격에서 얻어낼 수 있는 장점들은 발전시키고 단점들은(없앨 수는 없지만) 완화시켜 가는 것이 나의 평생 과제가 될 것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도서관여행자 2004-07-05 1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도 INTP... 싸이코 기질을 유용하게 바꿔서 사회에 돌려주기 위해서는 학자나 학술저널리스트가 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http://coms.kwangwoon.ac.kr/comswiki/wiki/moin.cgi/INTP?action=LikePages

http://no-smok.net/nsmk/INTP

연우주 2004-07-05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주위엔 INTP 넘쳐요. 다 학자타입은 맞는 것 같아요...^^

도서관여행자 2004-07-05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연보라빛우주님께서 독서를 즐기시니 같은 취미를 갖고 있는 주위분들 중에서도 책중독의 INTP 성향 분들이 많겠죠? ^^

갈대 2004-07-05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쓴 글인데 지금 보니 새롭네요. 남이 쓴 글 같기도 하고..^^

도서관여행자 2004-07-05 16: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갈대 님, 반갑습니다. 갈대 님과는 닮은 게 많군요. ㅎㅎㅎ 친하게 지내자구요.

2019-07-24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유형 테스트는 그 사람의 형태를 최대한 파악해서 구분해놓은것이기 때문에 같은 직종에서 같은유형이 보이는것은 당연한것같습니다
마치 사자와 호랑이에게 고양이과 이다 하는것 같은 의미인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