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신문 이념지형 ‘보수’ 우세
[미디어오늘 2004-12-16 00:00]

[미디어오늘] 최근 4개월 동안 전국단위 10개 종합일간지를 대상으로 신행정수도 이전과 열린우리당이 제출한 4대입법 등을 다룬 칼럼을 통해 각 신문의 정치적 지향성을 측정한 결과, 한겨레와 경향신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문들이 강한 보수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이 같은 조사결과는 본지가 지난달 3일 대전 배재대학교 정연정 교수(행정학과)와 성균관대 김위근 강사(언론학)로 구성된 공동연구팀에게 ‘칼럼니스트·취재원 분석을 통한 신문의 정치적 편향성 연구’를 의뢰해 집계한 것이다.

연구팀은 8월1일부터 11월30일까지 4개월 동안 10개 종합일간지에 실린 내·외부 칼럼을 대상으로 한국언론재단 기사데이터 시스템 KINDS DB와 중앙일보 DB 검색을 이용해 조사대상 신문에 실린 칼럼 685건을 추출한 후 이 중 507건을 분석했다.

이 기간 동안 실린 분석대상 칼럼중 신행정수도 이전 4대입법 전체 국가보안법 과거사진상규명법 등의 4개 주제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할 경우 1.00점, 반대일 경우에는 -1.00점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점수를 매긴 결과, 10개 일간지 전체 평균은 -0.16점으로 나왔다.

10개 종합일간지의 평균적인 칼럼논조가 4대입법과 신행정수도 이전에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음을 보여주는 결과로 풀이된다.

조선일보는 -0.89점을 기록해 신행정수도와 4대 개혁법안에 가장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중앙일보가 -0.62점으로 그 뒤를 이었다.

반면 한겨레와 경향신문은 각각 0.97점과 0.90점을 기록해 조선·중앙과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한편 서로 대척점에 서 있는 조선과 한겨레·경향은 모든 쟁점에서 정치지향이 일관됐으나, 동아일보의 경우 쟁점별 점수 편차가 커 일관성이 떨어졌다.

사내외에서 지면보수화 논란이 한창인 문화일보의 경우 동아일보(-0.52점)보다도 부정적인 -0.56점을 나타내 이미 새로운 보수신문으로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줬다.

문화일보는 4가지 쟁점사안의 상당부분에서 동아일보와 비슷한 점수를 받았거나 오히려 더 부정적인 성향을 나타냈다.

한겨레·경향 다음으론 서울신문(0.45점)과 한국일보(0.24점)가 위치했으며 국민일보와 세계일보는 보수쪽으로 기울어진 중립적 논조를 유지하면서 각각 -0.35점과 -0.29점을 기록했다.

한편 이 기간동안 각 신문에 게재된 칼럼 507건 중에서는 과거사청산 문제를 다룬 칼럼이 30.0%를 차지해 신문사들의 높은 관심을 반영했다.

신행정 수도이전과 국가보안법 폐지는 각각 21.9%(111건)와 21.5%(109건)을 차지해 언론개혁과 사학개혁 등의 사안보다 상대적으로 칼럼 게재 비율이 높았다.

외부 칼럼니스트의 직업은 교수가 65.2%를 차지해 학계가 신문의 여론정치에 주요 소스로 활용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줬다.

내부 칼럼니스트의 직책 비율은 논설위원(50.2%), 차장·부장급 데스크(26.6%), 기자(23.2%) 순으로 집계됐다.

김성완 기자 sabi@mediatoday.co.kr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립간 2004-12-16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 Libris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그래프에서 X축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나요? Y축도 범위가 -2부터 2까지 인데...

도서관여행자 2004-12-16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궁금한 점입니다. <미디어오늘>의 기사에는 그래프에 아래와 같은 캡션이 달려있네요 :

▲ 신문사 칼럼의 정치적 지향성의 상호거리를 측정하기 위해 다차원척도법을 사용했다. 분포도 1차원의 위로 올라갈수록 4대 개혁법안 등에 긍정적이며 아래로 내려갈수록 부정적임을 의미한다. 차원1과 2의 함수값은 신문사간 이념적 거리를 뜻하는 것으로, 이 방법에 따르면 조선 중앙을 1그룹, 동아 문화를 2그룹, 한국 세계를 3그룹, 경향 한겨레를 4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전출처 : 노부후사 > [이런 생각] 세속주의를 위하여 - 고종석

 [이런 생각] 세속주의를 위하여
 
[한국일보 2004-12-01 19:33] 
 
화가 친구의 파리 전시회를 보러 온 김에 모로코의 탕헤르에 들렀다.
아프리카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에 자리잡은 항구도시다.



7세기 말 이래 수백년 동안 사라센제국 영토였으나, 전략적 가치 때문에 15세기 말 이후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열강의 각축장이 된 곳이다.



15세기까지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던 남부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이 이슬람적 과거에 기독교적 현재가 포개진 잡거공간이라면, 해협 건너 탕헤르는 제국주의적 기독교인들에게 짓밟힌 몇 세기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압도적으로 이슬람 공간이었다.



라마단 기간이어서 음식점들은 거의 문을 닫았다.



대낮의 굶주림을 실천하는 이슬람인들의 신심에 감동하면서도, 새삼 종교에 대해 딴죽을 걸고 싶어졌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종교의 중요한 기반이긴 하지만, 실상 인류는 거의 전 역사에서 종교를 죽임과 죽음의 구실로 남용해 왔다.



기독교의 역사는 그 사랑의 윤리에도 불구하고, 피로 얼룩진 죽임과 죽음의 역사, 증오의 역사였다.



그것은 모든 일신교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 같기도 하다.



일신교의 신은 질투하는 신이니 말이다.



상대적 관용성을 역사 속에서 실천해온 이슬람교도들 역시 자신의 신에게 세계를 헌정하려는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부시가 이슬람권을 상대로 벌여온 전쟁은 경제 정치적 이해관계에 바탕을 둔 것이겠지만, 거기에 기독교 근본주의라는 자기중심적 세계관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역사에서 종교는 흔히 평화와 사랑보다는 전쟁과 증오에 기여해왔다.



그리고 그것은 프랑스혁명사에서 보듯, 공화정의 적이기도 했다.



미디어 이론가 레지스 드브레가 미국은 공화정이 아니라고 주장한 이유의 하나는 그 나라의 유사 신정국가적 성격에 있었다.



그는 취임 선서 때 프랑스 대통령이 공화주의 헌법에 기대는데 비해 미국 대통령은 성서에 손을 얹는 사실을 지적했다.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종교관이 이런 유사 신정 분위기 그 언저리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 미국 학자가 21세기를 문명충돌의 세기로 내다봤을 때, 그 문명들은 결국 종교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종교나 신심은 흔히 증오와 전쟁의 연료이고, 잘해봐야 상호 무관심 속에서 실천되는 고립의 연료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라는 사회제도의 보편성은 종교적 열정이 애초부터 인간의 유전자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마저 하게 한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종의 나약함과 관련 있는 것이겠지만, 그 나약함이 한 순간의 결단으로 극복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종교를 되도록 우리 내면에 가두고 그것이 세속세계에 영향을 덜 끼치도록 애쓰는 것일 터이다.



핵심은 세속적 삶의 역학에 종교를 이용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 것은 직업적 종교인들만이 아니라 세속인들도 함께 실천해야 한다.



예컨대 우리 정치인들은 제 종교적 신념과 무관하게 여러 종교의 지도자들을 찾아 '가르침'을 구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는 이성의 규칙에 따라 운영돼야 할 세속사회를 탈이성의 영역에 갖다 바치는 퇴행적 악습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라는 말로 예수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가운데 하나는 종교를 세속에 개입시키지 않는 세속주의였을지도 모른다.



종교를 지니고 종교의식을 실천하는 것은 인간존재의 자연스러운 일부지만, 문명의 건설과정은 흔히 자연스러움과의 싸움이었다.



/고종석 논설위원



파리에서 aromachi@hk.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노대통령, 아르빌 자이툰부대 전격방문














△ 노무현 대통령이 8일 오전(한국시각) 유럽 순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라크 북부 에르빌의 자이툰 부대를 전격 방문해 도열한 장병들의 환영을 받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에르빌/탁기형 기자 khtak@hani.co.kr




철통보안 속 방문…“평화재건 임무 충실해달라” 격려

유럽 3개국 방문을 마치고 8일(이하 한국시간) 귀국길에 오른 노무현 대통령이 귀국 도중 이라크 아르빌에 주둔중인 자이툰 부대를 전격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새벽 프랑스 파리를 출발해 쿠웨이트를 경유, 우리 군용기 편으로 낮 1시반께 이라크 북부 아르빌에 도착했으며, 2시간여 동안 현지에 머물며 자이툰 장병들과 조찬을 함께 하는 등의 행사를 한 뒤 다시 귀국길에 올랐다. 노 대통령은 9일 새벽 서울공항을 통해 귀국할 예정이다.

이번 방문은 지난달 27일 노 대통령의 최종결심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청와대와 외교부, 군 등은 그동안 뒤 극도의 보안 속에 행사를 준비해왔다고 정부 관계자는 전했다.

노 대통령은 자이툰 부대 영내에서 장병들과 조찬을 함께 하면서, “처음에 파병할 때 어려 논란이 있었지만 마지막에 안전이라는 측면에서 걱정 많이 했다”며 “와서 보니 우리 군의 능력이 증명되는 것 같아 자부심을 느낀다”고 치하했다. 노 대통령령은 이어 “이라크의 평화재건 지원, 그리고 이라크내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심는 것이 고생스런 일이지만 여러본의 몫”이라며 “한국의 역사속에서 우리 군이 맡아야할 일에 오로지 출실해달라”고 당부했다.

노 대통령은 자이툰 부대 황의돈 사단장으로부터 현황보고를 듣고, “국가를 대표해서, 국민들 대표해서 장병들에게 인사를 하고 싶었다”며 “와서보니 정말 잘하고 있고 장하고”고 격려했다. 이어 부대 내무반을 찾아 장병들을 격려했으며, 지난달 27일 개원한 자이툰 병원을 둘러봤다.

노 대통령은 자이툰 방문을 마친 뒤 다시 우리 군용기편으로 쿠웨이트로 이동해 전용기를 이용해 부인 권양숙씨와 함께 귀국했다.

앞서 노 대통령은 파리 출발 직후 기내에서 약식 기자간담회를 열어 “그동안 비공개리에 진행된 자이툰 부대 배치가 완전히 끝났다”며 “장병들이 안착한 만큼 연말을 기해 제가 한번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 도리”라고 말해, 자이툰 부대 방문사실을 최초로 공개했다.

노 대통령의 자이툰 방문에는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 권진호 국가안보보좌관, 정우성 외교보좌관 등 정부 관계자와 경호요원 등 30여명이 수행했다.

아르빌 현지에는 자이툰 사단 3700명이 주둔중이며, 이라크 군·경의 치안질서 유지를 지원하는 한편, 도로건설·상수도 정비 등 민사 및 재건지원 활동을 벌이고 있다. 아르빌/공동취재단, 쿠웨이트/<한겨레> 백기철 기자 kcbaek@hani.co.kr


△ 12월 9일 오프라인 6판에서는 제1면 오른쪽 상단에 컬러 사진을 포함해서 실렸다. 헤드라인의 글꼴 크기는 두 번째로 크다. 독자들이 신문을 읽을 때의 시선의 움직임을 고려해 보면, 두 번째나 첫 번째로 중요한 기사라고 할 수 있다. 온라인에서는 첫 번째로 중요한 기사로 올라와 있다.


 










“침략범죄 피고 노무현에 유죄를”
[한겨레 2004-12-09 00:39]

[한겨레] 민중재판 “평화의 이름으로 기소” 박수터져 [3판]“피고인 노무현에게 유죄결정을 내려줄 것을 요청합니다.” 7일 밤 ‘부시·블레어·노무현 전범 민중재판’이 열린 서울 연세대 백양관 강당. 3413명의 시민 기소인단을 대표해 위대영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가 배심원석을 향해 피고인 단죄를 요구했다.


위 변호사는 “피고인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침략전쟁을 거부하고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함에도 국군파병을 통해 침략국의 일원이 됐으며, 이는 침략범죄와 침략범죄 방조를 규정한 이라크 전쟁범죄와 파병에 대한 민중법정 헌장 제3조 제1항, 제4조 제1항에 해당한다”며 압박했다.

이에 변호인단은 “유엔의 파병 결정이 있었던 만큼 절차적 정당성을 갖췄다”고 맞섰다. 이어 이라크 재건, 한-미 동맹 강화, 경제적 효과 등 익숙한 파병 논리와 국익론을 강조했다. 앞서 이라크 전쟁의 ‘기원’만큼이나 긴 기소요지 낭독에 이어 “부시·블레어·노무현을 반전평화를 염원하는 전세계 민중의 이름으로 기소한다”는 말이 나오자 150여명의 방청객들은 박수로 답했다.

전국에서 뽑힌 10명의 배심원들 앞에서 열린 이날 법정공방은 예정된 시간을 넘겨 밤 11시가 넘도록 진행됐다. 9일에는 지난해 이라크에서 총을 맞고 숨진 김만수(당시 오무전기 노동자)씨 가족 등이 증인으로 나와 파병으로 인한 국민 생명권 위협을 다룬 심리가 열릴 예정이다. 청와대는 지난 2일 전범 민중재판의 ‘소환장’ 접수를 거부했다. 결심과 선고재판은 오는 11일 오후 3시 서울 경희대 크라운관으로 법정을 옮겨 진행된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 12월 9일 오프라인 6판에서는 제10면 왼쪽 하단에 실렸다. 온라인에서는 검색을 통해 찾을 수 있었다.


한겨레 지면 내에서도 노무현의 자이툰 부대 방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결여된, 그래서 언뜻 보면 객관적으로만 보이는) 기사가 제1면 기사로 실리는데, 다른 찌라시들은 오죽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문학상과 문화권력의 함수관계

이상빈
한국외대 불어과 대우교수
프랑스 파리제8대학 문학박사



처녀작이 많다는 것은 여전히 문학작품에 대한 수요가 있다는 뜻이고, 문학에 뜻을 두는 사람이 여전히 들끓는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프랑스에서는 영상 쪽에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하는 문학의 역할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당연히 이루어져 있다.



문화의 달로 정한 10월이다.
우리가 관 주도의 행사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문화의 의미를 부각시키려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면 프랑스인들에게 있어 가을은 무엇보다도 문학상의 계절이다. 우리의 경우 디지털 매체의 보급과 더불어 인쇄 매체, 특히 문학의 죽음에 대한 논의가 많은 신문과 잡지 지면을 채우고 있지만 프랑스 문학의 현재는 더없이 건강해 보인다. 매년 9월 학기 시작과 더불어 집중적으로 신간이 쏟아지는데, 2004년의 경우 총 669권의 소설이 일반인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그중 452권이 프랑스 소설이고, 217권이 외국소설의 번역작품이며, 작가들의 처녀작만도 무려 138권이 이른다. 처녀작이 많다는 것은 여전히 문학작품에 대한 수요가 있다는 뜻이고, 문학에 뜻을 두는 사람이 여전히 들끓는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프랑스에서는 영상 쪽에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하는 문학의 역할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당연히 이루어져 있다. 실제로 오늘날 제작되고 있는 많은 영화들이 소설을 기반으로 제작된 것들이고, 그러기에 문학과 영상은 긴밀한 협조 하에 공생을 도모하고 있다.
자국 언어에 대해 누구보다 더 애정을 갖고있는 프랑스인들이기에 언어의 결정체인 문학은 프랑스에서 각별한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문예지의 의미가 오늘날 많이 퇴색하기는 했지만, 이차대전 당시 프랑스를 접수한 독일 대사가 집중적으로 관리해야할 대상 중 하나로 1909년 소설가 앙드레 지드가 창간한 문예지 ꡔ누벨 르뷔 프랑세즈ꡕ를 거론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적어도 20세기 전반부까지 문학이 프랑스 사회 속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문학에 대해서는 10월부터 문학상을 통해 집중적으로 보상이 이루어지지만 프랑스 문학상의 역사는 1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에드몽 공쿠르의 유언에 따라 제정된 공쿠르 상이 그 시초이다. 이 상을 수상하면 최소 60만 부 정도의 판매가 보장되기에 작가들 입장에서는 평생 글만 쓸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이 상을 소망한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바 있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ꡔ연인ꡕ은 100만 부 이상의 판매부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프랑스에는 공쿠르 상 외에도 무수한 문학상들이 존재한다. 1925년 제정된 르노도 상, 1904년 제정된 후 여성 문제를 다룬 작품들에게 수여되는 페미나 상, 1958년 만들어진 후 새로운 기법을 추구하는 작가들에게 수여되는 메디치 상 등이 대표적인 문학상들이다.

프랑스 문학상에는 문학권력 혹은 문화권력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닌다. 공쿠르 상의 경우 ‘갈리그라쇠이유(Galligrasseuil)’라는 표현으로 그 권력이 상징된다. 이 단어는 거의 대부분 공쿠르 상을 독식하는 갈리마르, 그라세, 쇠이유 출판사들을 동시에 지칭하는 표현이다. “공쿠르 상을 조종하는 문학권력이 존재하느냐?”에 대해 논쟁이 끝없이 벌어지지만, 출판사가 심사위원 및 언론을 대상으로 벌이는 로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작가와 비평가의 이데올로기, 글쓰기 경향, 출신학교, 인맥관계 등에 의해 문단의 현실이 미세하게 나뉘어져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모습을 찾기 힘들 정도로 각종 문예지들 역시 서로 완연히 다른 성향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권 쪽의 문학권력에 대항해 시도되는 여러 행사들 역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고 있는데, 그중 가장 신선한 것이 바로 ‘고등학생 공쿠르 문학상’이다. 공쿠르 상을 본 따 1988년 렌 소재 프낙(FNAC)과 한 문학 담당 선생이 주도하여 만든 이 상은 고등학교 2학년과 3학년 재학생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매년 ‘올해의 소설’ 수상자를 선정하는 독특한 행사이다. 이 행사를 후원하는 교육부는 매년 문학, 과학, 기술을 전공하는 약 400명으로 구성된 13개 학급을 먼저 선정하고, 이들이 9월중 공쿠르 상 공식 선정작품 중 8개를 고른다. 또 각 학급은 모든 작품을 읽고 서로 의견을 교환한 후 3개의 작품을 최종적으로 선정한다. 그리고 각 학급이 선정한 작품들을 설명, 옹호할 수 있는 대표 겸 심사위원들이 11월 12일 렌에 모여 공쿠르 상 수상작이 공식 발표되기 수십 분 전 ‘고등학생 공쿠르 상’ 수상작을 발표하고 있다. 로비와 인맥 등으로 얼룩진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들의 메커니즘에 공식적으로 도전하는 이러한 시도는 프랑스 문화계에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프랑스의 문학권력을 거론할 때면 점증하는 저널리즘 비평의 무게도 소홀히 다룰 수 없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들은 ꡔ르 몽드ꡕ, ꡔ르 피가로ꡕ 및 ꡔ리베라시옹ꡕ 지의 서평들이고, 글의 성격 역시 각 신문의 성향에 따라 완연히 달라진다. 예를 들어 우파 신문 ꡔ르 피가로ꡕ가 여행, 식도락과 관련된 문학 특집호를 간간이 꾸미는 반면, 좌파 신문 ꡔ리베라시옹ꡕ에서는 그런 부류의 기사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역사 문제와 작가의 사회 참여에 훨씬 비중을 두는 ꡔ리베라시옹ꡕ지의 경우 미국 만화가 아트 슈피겔만이 그린 ꡔ쥐(Maus)ꡕ에 대해 거의 두 페이지에 걸쳐 취급하고 있다. 풀리처 상을 받은 이 만화집이 유대인 학살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 ꡔ르 피가로ꡕ 지가 영국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나 이차대전 당시 대독 협력작가 드리외 라 로셸에 대해 관대한 반면, 좌파 신문들에서는 그들에 대한 언급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젊은 층을 겨냥한 ꡔ리베라시옹ꡕ은 사르트르 같은 작가를 위해서 10페이지씩이나 신문 지면을 할애하는 파격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 프랑스 쪽에 진지하게 제기되는 질문은 문학의 의미 쇠퇴나 변질에 대한 것보다, 문학이 과연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근원적 질문에서 비롯된다. 또 1968년 5월 사태 이후 도래한 기성 가치의 전복은 문학 쪽에도 혁명을 가져왔다.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누보 로망(신소설)의 이름으로 표출된 새로운 문학의 모습은 이성, 합리성이라는 서구의 중심가치를 뿌리째 부정하면서 중심과 주변의 이름으로 설파되던 기존의 프랑스 문학 모습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았다. 환언하자면 보편성, 박애, 인권의 이름으로 세계에 대해 일갈하던 프랑스 문학은 그 역할을 포기하는 대신 주변인, 외국인, 제국주의를 체험한 국가들, 혹은 소외 받는 자들 이름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에 집중적으로 문학상을 수상하는 작가들 중에서는 예전에 프랑스가 식민지로 거느렸고 지금도 해외 소재 프랑스 영토로 관리하고 있는 지역 출신들이 많다. 어떤 의미에서는 프랑스의 자신감 상실과도 관련되는 이러한 모습은 제3세계 문학에 대해서 훨씬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게 만들고 있다. 단적인 예로 2004년 9월 프랑스 신문들은 황석영의 ꡔ손님ꡕ을 가장 주목해 볼만한 신간 중 하나로 격찬한다.
프랑스 문학계에서 대가들이 거의 사라진 사실에 대해서는 프랑스 사람들 대부분 이 동의한다. 오직 미셸 투르니에 정도가 대가들 시대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해줄 뿐이다. 그렇지만 문학을 통해 세계를 알려는 진지한 노력이 지속되는 한 프랑스 문학의 권력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유지될 것이다. 문학상이 문학에 대한 경의의 표시이기는 하지만, 문학이 곧 세계 이해의 첩경인 까닭에 우리가 새로운 프랑스 소설들의 차고 넘침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충분히 있지 않을까?

http://www.hufs.ac.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로쟈 > “책은 무조건 즐겁게 읽어라”(1)


낮에 (점심이 아니라) 아침을 먹고서 수업에 들어가기 위해 나서는 참에 문 우편함에 인쇄 우편물이 들어 있는 걸 발견했다. 북매거진 <텍스트>(23)였다. 지난 22호부터 20일 간행 체제로 바뀌고서 두번째로 나온 것인데(22호에 나는 체홉론을 기고한바 있다), 표지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실용적이었지만, 책과 시대란 가볍지 않은 주제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었다. 제목의 인용구는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처럼>(문학과지성사)에 대한 서평의 제목이기도 한데, <텍스트>의 표지에는 그의 글이 조금 더 인용돼 있다.


지금까지 우리의 인격을 형성해온 책읽기란 대개는 순응하고 따르는 책읽기라기보다는, 무언가에 반하고 맞서는 책읽기였다. 즉 이제껏 우리가 책을 읽어온 것은, 마치 세상과 등지듯 현실을 거부하고 현실과 대립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때론 우리가 현실 도피자처럼 여겨지고 현실마저 우리가 탐닉하는 독서의 매력에 가려져 아득해질지언정, 어디까지나 우리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도망자,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탈주자인 것이다. 모든 독서는 저마다 무언가에 대한 저항 행위이다.(<소설처럼>, 103-4)
두 개의 인용구를 종합하면, 책읽기는 즐거운 도망이고, 즐거운 저항이다. 도망치면서 저항하는 것인지, 저항하면서 도망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한없이 도망치고 한없이 저항한다. 아니, 도망치기 위해서, 저항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 건지도 모르겠다. (페나크에 따르면) 그것이 책읽기의 의의이다. 중요한 것은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는 것. 만약에 당신이 책을 읽으면서 즐겁지 않()다면, 당신은 제대로 도망가지도, 저항하지도 못한 것이 된다(그건 당신이 변변찮다는 얘기이다). 그러니, 책은 무조건, 절대적으로, 악착같이 즐겁게 읽을 필요가 있다(물론 애초에 그럴 만한 책을 고르는 안목이 중요하다).


'즐거운 책읽기와 관련하여 나에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책이 두 권 있다. 그건 김현의 평론집 <책읽기의 괴로움>(민음사)과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동문선)이다. 기억에 <책읽기의 괴로움>은 최인훈의 <회색인>에 대한 평문의 제목을 표제로 한 책이었다. 나는 김현 전집으로 다른 책과 묶여서 나온 <책읽기의 괴로움>도 갖고 있지만, 내가 더 아끼는 건 민음사판의 초판본이다. <분석과 해석> 이전에 나온 것이니까 아마도 80년대 초반에 나왔을 법한데, 내가 중학교 때부터 문학평론집을 읽은 건 아니므로 내가 이 책을 구한 건 당연히 훨씬 나중이다(물론 책은 이미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다 읽은 뒤이다). 
절판됐던 그 책을 구한 건 아마도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90년대 초반에 새로 개장한 영풍문고에서였다. 아마 재고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던 책이 나온 듯한데, 나는 한 권 남아 있던 이 책을 집어들고서 쾌재를 부른 적이 있다(요컨대, 이런 게 책 구하기의 즐거움이다). 그게, 마지막 한 권이었는지는 어떻게 아느냐고? 그걸 확인해보려고, 책을 사고 며칠 안 돼서 서점에 또 가봤기 때문이다(더는 진열돼 있지 않았다). 해서, 한동안 내가 가장 즐겨 들르던 서점이 영풍문고였고, 영풍문고는 내게 <책읽기의 괴로움>으로 각인돼 있다. 사실, (내 기억에) 김현이 말한 책읽기의 괴로움은 책을 통해서 읽을 수밖에 없는 세상 읽기의 괴로움을 뜻한다. 그러니까 그 자체로는 즐거운 책읽기를 괴롭게 만드는 건 세상인 셈. 하지만, 책읽기의 즐거움은 그런 괴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도록 하는 즐거움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쾌락원칙을 넘어선다. , 책읽기의 즐거움은 쾌락이 아니라 향락이다.   


바르트의 책 <텍스트의 즐거움>은 우리말로 두 종의 번역서가 나와 있는데(나에겐 이 두 번역본과 영역본이 있다), 읽은 만한 건 김희영 교수가 옮긴 동문선본이다(연대출판부본은 책읽기의 괴로움을 강요하는 번역이다). 바르트의 책들은 우리말 전집이 기획/출간되고 있을 정도이니까 우리에게 친숙한 편이지만, 아쉽게도 그의 유미적인/유희적인 문체 때문에 쉽게 읽히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사랑의 단상>이나 <카메라 루시다> 정도가 예외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우리말로 번역된 바르트의 책들은 대부분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카메라 루시다>, <밝은 방>만 아직 보지 못했다). 더 번역된 건 두툼한 선집 외에 <S/Z> 정도. 그 중에서 내가 산 건 아직까지는 <기호의 제국> 한 권뿐인데, 그건 내가 영역본을 따로 갖고 있지 않아서이다. 


<텍스트의 즐거움>을 읽기 위해서 먼저 읽어야 하는 것은 <저자의 죽음> <작품에서 텍스트로(From Work to Text)>라는 바르트의 두 짧은 평문이다(동문선본에 같이 번역돼 있을 듯하다). 어떤 책을 작품(Work)으로 간주하는 건 간단히 말해서, 그걸 산출한 주인 혹은 아버지로서의 저자를 상정하고, 그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을 작품 읽기의 목적으로 삼는 태도이다(따라서 신학적이며 형이상학적인 태도이다). 반면에 어떤 책을 텍스트(Text)로 간주하는 건(교재란 의미의 텍스트가 아니다), 더 이상 그런 의미작용의 중심으로서의 저자를 고려하지 않는 태도이다. 그래서, 저자의 죽음이다(이건 반형이상학적이며 탕아적인 태도이다). 바르트는 작품의 은유로 유기체를 드는 반면에 텍스트의 은유로는 을 든다. 하나는 채워져 있고, 다른 하나는 비어 있다. 그래서, 작품은 독자가 읽어내는 것이지만, 텍스트는 독자가 채워넣는 것이 된다. 해서, (바르트의 다른 용어로 표현하자면) 작품이 독자가 읽어내는 텍스트(readerly text)에 대응한다면, 텍스트는 독자가 써나가는 텍스트(writerly text)에 대응한다.  


나는 러시아 문학 이전에 문학이 전공이다 보니까 문학이론/비평 또한 관심에서 제쳐놓을 수가 없()는데(해서 문학이론서들을 지겨울 정도로 많이 읽었다. 그런데, 이론이라는 게 말 그대로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요구한다. 공부하기엔 좋은 동네인 셈), 이른바 이론 20세기 후반 인문학의 주도적인 담론이었다. 그 기폭제가 (프랑스) 구조주의였다면(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구조주의는 현실구조로 대체/환원했다) 문학비평에서 구조주의 혁명을 주도했던 바르트의 위치는 간과될 수 없다(물론 그는 <텍스트의 즐거움>(1973)을 경계로 포스트 구조주의로 넘어간다).


특이한 건 그가 주로 아카데미즘의 바깥에서 활동했다는 것.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기호체계의 사상을 가르치는 교수로 취임하는 것이 1977년이니까 1953 <글쓰기의 영도>(이 또한 우리말 번역이 있는데, 번역의 0쯤으로 불릴 만하다)데뷔한 지 22년이 지나서야 그는 변변한 직업을 갖게 된다(이전에 그가 몸담았던 연구소 등에서의 지위나 보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는 것은 불과 몇 년 후이다(내 기억에는 1980년이고 그의 유작이 <밝은 방>이다).     


아마도 그런 전기적 이력이 보다 본격적인 구조주의 비평가라는 제라르 주네트보다 바르트에게 더 친밀감을 갖게 하는 듯하다(나는 두툼한 영어판 바르트 전기도 갖고 있으며, 1/3쯤 읽었더랬다). 그건 불문학자 김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프랑스비평사: 현대편>(문학과지성사)에서 주네트 대신에 바르트에게 한 장을 할애한다(곽광수 교수 같은 이는 바르트를 딜레탕트 비평가, 재치 있는 비평가 정도로 평가절하한다). 참고로, 김현이 재구성한 프랑스 현대비평은 <사르트르-바슐라르-바르트-블랑쇼> 4각형으로 이루어지는바, 이들의 키워드를 차례대로 나열하면 <참여-상상력-언어-죽음>이다(나는 문학을 구성하는 네 원소가 사랑과 가난과 죽음과 언어라고 생각하는바, 사랑과 상상력, 가난과 참여를 등가화시키면, 두 사각형은 동일한 매트릭스의 변주가 된다). 


어쨌든 <책읽기의 괴로움> <텍스트의 즐거움>, 두 권의 책이 생각난다는 얘기이다. 물론 텍스트가 그러하듯이 모든 생각에는 꼬리가 있다(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김현의 유작은 사후에 출간된 일기 <행복한 책읽기>인데, (내 기억에) 생전에 제목을 정해두었다는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책읽기의 괴로움>이었을 것이다(돌이켜 보건대, 그의 죽음은 90년대 한국문학의 최대 손실이다. 비평가와 불문학자로서 그의 열정업적을 넘어설 만한 이는 아직 없으며, 앞으로도 당분간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건 한편으로 고인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행복한 책읽기 10년 정도만 더 연장됐어도, 우리는 (그는 4년에 한번 꼴로 책을 냈으므로) 최소한 두 권의 문학비평집과 (그가 <프랑스비평사>에서 포부를 밝힌바) 리쾨르와 데리다 등의 연구서를 더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다(현재까지 우리말로 씌어진 리쾨르, 데리다 단독 연구서는 각각 한 권씩이다. 아마도 일본의 1/10 정도 수준이지 않을까 싶다. 학문어로서의 한국어는 아직도 한참 가난하다).


주인/아버지로서의 저자의 죽음을 선언한 바르트였지만, 사실 그에겐 아버지가 없었다(일찍 여읜 걸로 기억된다). 그래서 그에겐 내내 어머니밖에 없었으며(<밝은 방>은 그 어머니의 죽음에 바쳐진 책이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교통사고이긴 했지만) 그는 얼마 더 살지 못했다(참고로 그는 동성연애자였다). 유복자 혹은 아비 없는 자식이란 점에서 바르트는 한 세대 선배인 사르트르를 따르고 있다(프랑스의 20세기 지성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이들은 사르트르-바르트-데리다이다. 데리다의 죽음으로 이들은 모두 고인이 됐다. 1980년부터 2004년까지이다).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린시절 나에게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79년 박정희의 죽음이 아니라 80년 사르트르의 죽음이었다. 나는 신문지상에 보도된 그의 죽음에 매료됐고, (정치가가 아닌) 작가의 길을 선망하게 된다(그 길이 이 길이었다니!).


고등학교 때부터 사르트르의 소설들을 읽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책들을 모두 읽은 건 아니다(나는 <존재와 무>도 아직 읽지 않았다). 하지만, 국내에서 나온 사르트르에 대한 책들은 거의 다 읽었다. 얼마 전에는 헌책방에서 러시아어로 된 사르트르 연구서를 샀는데(333쪽이고 1,600) 레오니드 안드레예프란 저자의 이름은 낯설지만, 1994년에 나온 이 책이 러시아에서 나온 최초의 사르트르 연구서란 점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레이몽 아롱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좌파였던 사르트르 세대의 프랑스 지식인들이 과거 소련체제, 그리고 소련의 작가들과 가졌던 친분을 고려하면(이들의 서신교환도 두툼한 책 한 권 분량이다), 90년대에 들어서야 그의 연구서가 나왔다는 점은 다소 의외이다(소련에서는 부르주아 철학도 열심히 연구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1994년에 책이 나온 건 1964년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거부 3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도 갖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올해는 그의 노벨상 수상/거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어제 날짜 <니자비씨마야>엑스 리브리스의 표제기사가 그걸 상기시켜주었는데, 러시아(소련)에 사르트르가 제일 처음 소개된 것이 바로 그 해 1964년이고, <노브이 미르>란 잡지(1962년에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발표됐던 잡지) <>이 번역/소개됐다(그의 자서전 <>읽기쓰기 두 대목으로 구성돼 있다). 계기는 물론 그가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 스웨덴 한림원의 선정에 대해서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상은 거부한다. 하지만, 돈은 받겠다.(이를 인용한 러시아 필자는 이것이 진정한 철학적 행위라고 평한다. 그는 사르트르를 무척 좋아한다고 하니까, 반어적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는(나부터도) 흔히 나는 노벨상을 거부한다란 그의 선언을 사르트르 철학(=자유의 철학)의 상징적인 제스처로 이해해왔는데, 알고 보면 그건 절반의 이해였던 셈이다. 거기에 덧붙여져야 할 것은 하지만, 돈은 받겠다!이다. 그럴 때에라야,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같은 구호가 아주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는가?(, 실존주의는 마음이 약하고, 돈에 약하다!) 그리고, 그럴 때에라야 실존주의가 왜 프롤레타리아 철학이 아니라 부르주아 철학인가가 명료해지지 않는가? 더불어, 우리는 사르트르를 더 좋아하게 되지 않는가?..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 사르트르는 <> <구토> 등이 포함된 작품집과 <보들레르>, <상상적인 것>(그의 초기 상상력 연구서) 등이다(<존재와 무>는 너무 고가여서 사지 못하더라도 전쟁일기 <이상한 전쟁의 기록>이나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은 형편을 봐서 구할 생각이다. 어린시절 영웅에 대한 예의로서). <상상적인 것>은 그가 후설의 영향하에 쓴 것으로 흔히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 연구와 비교된다(김현의 연구가 있다). 더불어, 얇은 분량의 <보들레르>는 그의 실존적 정신분석이란 방법론이 구체적으로 적용된 사례이다. <상상적인 것>은 우리말 번역이 없지만, <보들레르>(문학과지성사)는 오래 전에 번역/출간돼 있다(아마 절판됐을 것이다). 나는 지난 달에 2권짜리 보들레르 선집도 구했기 때문에(1권은 시집이고, 2권은 산문집이다) 이젠 좀 읽어보는 일만이 남았다(보들레르를 읽는 건 나의 오랜 숙제 중의 하나이다. 그가 현대시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한국어와 영어와 러시아어로(들뢰즈가 인용한 프루스트의 말을 빌면, 훌륭한 작품은 모두 외국어로 씌어져 있다니까 읽는 것도 외국어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한국어 사르트르는 제법 풍족한 편이다. 작품도 <자유의 길>을 포함해 대부분 번역돼 있고(그의 일기와 플로베르론인 <집안의 백치>, 철학서인 <변증법적 이성비판> 정도를 제외하면) 정명환, 박이문, 박정자 선생들의 소개도 충실하고 수준도 높다. 사실 다른 작가/철학자들의 경우도 이런 정도의 소개 수준만 되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이에 견줄 만한 작가는 김화영 교수의 카뮈 정도이다). 사르트르의 전기로는 코헨-솔랄의 3권짜리 전기 <사르트르>가 우리말로 번역돼 있는바, 규모에 맞게 충실하면서도 재미있다. 


실존주의 세대(4-50년대)와 구조주의 세대(60년대)를 대표하는 사르트르와 바르트는 각각 타동사자동사로서의 문학을 주창한 걸로 흔히 비교되는데(하지만 사르트르 자신도 시는 앙가주망(=참여)에서 제외시켰다), 폴 존슨이 쓴 <지식인들>을 보면, 딱히 그렇게 대조적인 것만도 아니다(지식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는 그의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브레히트 비판이다). 그는 사르트르를 모피를 뒤집어쓴 잉크라고 불르는데, 하여간에 이 인간은 평생 끊임없이 뭔가를 써댄 것이었다(그렇게 써대고 노벨문학상까지 받았으니 할말은 없지만).


, 그에게서 글쓰기의 발화주체는 타동사적 주체였지만(사르트르의 글쓰기 주어로서의 ), 발화행위주체인 사르트르 자신은 자동사적 주체였던 것이다(쉽게 얘기하면, 앙가주망(=타동사)을 주창하는 글들을 그는 자동사적으로 썼다). 그러니, 사르트르의 참여란 것은 좀 의심스러운 것일까? 거꾸로인 것 같다. 그는 모든 지식인의 참여가 갖는 자동사적 성격(자위행위적 성격)을 상기시켜주는바, 그런 의미에서 그의 앙가주망은 진짜 앙가주망이다(오히려 우리가 의심해 보아야 하는 것은 그런 자위행위적 성격을 부인/배제하는 앙가주망이 아닐까?).


미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사르트르인바(문체의 기원이란 제목인가로 책이 나와 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형식>(<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로 번역됨)에서도 (여느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달리) 사르트르를 중요하게 다룬다. 하지만, 제임슨을 필두로 한 미국의 강단 좌파들의 정치적 행위(사르트르와 비교해 보더라도) 대학 등의 지식인 사회에만 한정된 것이다. , 그들의 참여는 의미론적으론 타동사이지만, 화용론적으론 자동사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물며 대부분의 미국 학문은 기능주의적이지 않은가? (직접적인 경험담은 아니지만) 철학이 그렇고, 심리학이 그렇다. 분업화된 분석철학은 철학의 자기소외를 자기존립의 당위적인 조건으로 수용한다는 점에서 자폐적이며, 자아(에고) 심리학은 사회에 대한 (병리적) 개인의 적응을 중심적인 과제로 설정함으로써 정작 사회의 병리성 자체는 사고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직면한다. 가령, 소비자심리학이나 유권자심리학이 자본주의나 민주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까? 가령, 분석철학이나 자아심리학은 파농의 탈식민주의를 문제로서 사유할 수 있는가?(최근 파농의 <대지의 저주 받은 사람들>(그린비)이 번역돼 나온 걸로 돼 있다. 기억에, 재번역이다.)      


이런 생각은 얼마전 미 대선 결과에 대한 김우창 교수의 시론(時論)을 읽고서 든 것인데, 정작 9.11 테러사건이 발생한 맨하탄 지역에서 부시의 지지율이 20% 미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케리가 패배한 것은 도시 지역의 진보적 지식인/중산층들과 그와는 전혀 다른 사고와 가치관을 가진 전통적/보수적 시골 사람들이 서로 유리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건 마치 제정 러시아시절, 인텔리겐치아와 민중 간의 유리를 상기시킨다). 아무리 대학은 좌파 혹은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어도 그 영향력은 대학가 주변에 한정돼 있는 것(한국이라고 사정이 다른 건 아니다. 80년대 대학가와 지방 소도시의 공기는 너무도 달랐다). 그러니까 미국사회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네트워킹이 부족한 고립사회이다(아메리카는 들로 이루어진 대륙이다). 개방된 고립사회(서로 문은 열어두고 있지만, 아무도 왕래하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리 (좌파)이론이 첨단을 가고, 좌파 지식인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하더라도 그 사회의 보수성은 쉽게 개선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경우를 타산지석으로 삼는다면, 우리가 좀더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은 사회적 의사소통의 네트워킹을 강화하는 것이다(데리다의 새로운 계몽주의는 이런 의미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건 흔한 말로 시민의식의 강화이면서 시민교양의 확충이며, 그로써 지식인과 대중간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다(지식인이 대중화되고, 대중이 지식인화되어야 한다. 마치 모든 노동자가 예술가이어야 한다는 사회주의의 구호처럼, 모든 노동자는 지식인이 될 필요가 있다. 의사나 교수보다 응급차 운전기사가 더 많은 월급을 받았던 과거 소련에서처럼). 그리고 거기에 기본이 되는 것은 기본적인 책들을 읽()는 것이고(가령, 시카고시에서 <앵무새 죽이기>를 단체로 읽듯이), 서로 대화/토론하는 것이다(학교에서 왜 말하기를 교육하지 않는가?).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것이 생활의 기본이 될 경우에(학교에서 왜 글쓰기를 교육하지 않는가?), 민주주의(=존재적 차원) (지젝이 지적하는바) 포퓰리즘(=존재론적 차원)으로 추락하지 않게 될 것이다(이런 경우엔 하이데거가 아니라 레비나스를 따라서, <존재에서 존재자로>라고 말해야 할 듯하다). 이 정도도 너무 거창한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