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평전
조영래 지음 / 돌베개 / 198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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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불쑥 찾아드는 알음과 앓음이 있다. 그 알음과 앓음은 또 때때로 책으로부터 오기도 한다. 내 경우에도 그런 책들이 있었고, 아직까지도 그 책들은 내 사고의 울타리를 치고 있다. 물론 그 이후에 그 책보다 더 깊은 울림을 주는 책들도 많이 있었지만, 그때의 깨어짐보다는 못한 것이었다. 일종의 인식의 전환이랄까, 세계관의 성립이랄까. 심각하게 말하자면 그런 정도이고, 아주 가벼이 표현하자면, 그것은 '깊은 감동'이란 단어로 바꿔 말할 수 있겠다. 나의 어느 한 친구에게 그 대단한 책은 바로 <전태일 평전>이란다.

<전태일 평전>은 난해한 현학을 담은 철학서도 아니고, 모호한 개념으로 도배한 이론서도 아니다. 아름다운 수사로 가득찬 시집도 아니고, 즐거운 소설 이야기도 아니다. 저명한 학자가 쓴 정교한 사회과학서도 아니며, 종교의 교리를 담는 신앙서적도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의 가치는 지금껏 나열한 종류들 이상일 것이다. 이 책은 하나의 도화선이었다. 천지간을 울리는 폭음으로 인간을 일깨우는 횃불, 그 횃불로 이어진 도화선.

가난과 착취, 억압에 대항해 자신이 인간이라는 선언을 한, 한 젊은 노동자의 이야기가 <전태일 평전>이다. 인간답게 살게 해달라는 노동자의 외침이, 그 뜨거운 분신이, 메아리쳐 울렸다. 그래서 전태일 이후의 한국과 그 이전의 한국은 전혀 다른 것이다. 전태일이란 청년의 죽음이 있었기에…, 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조영래가 있었기에…, 라는 말도 가능할 것이다.

전태일의 수기 곳곳에서 발견되는 뛰어난 문학성과 성찰은 그가 잘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고 그가 생전에 얼마나 심각한 사유를 했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또 조영래의 펜을 더불어 죽은 전태일의 혼령은 새로운 입술을 얻어 한풀이를 한다는 점에서 조영래의 역량도 가히 짐작하게 해준다. 빼어난 영혼을 지닌 - 한 노동자와 한 지식인이 여기 이 책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렇게 이 책은 빈자의 철학인 동시에 인간선언의 철학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뜨겁게도 아픈 흔적을 드러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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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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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는 상당히 대중적인 베스트셀러 소설로 알고 있었다. TV 광고에서 어느 지적인 미녀가 기차 안에서 품위 있는 포즈로 읽던 책이 바로 이 소설이고, 그런 이미지는 아직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 이 책에 대한 호기심과 매혹을 선사한다. '상실의 시대'라는 멋진 제목과 문학 교과서에서는 접하지 못한 외국 작가라는 그 이국적인 이끌림! 실제로 일본에서는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거리가 거의 없다고 한다.

(물론 그런 이분법적인 구분 자체가 우스운 일이긴 하다. 그렇지만, 수준 높은 문학이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고, 또 대중적인 작품도 독자를 빨아들이는 오락성과 흥미성 안에서 어느 정도의 감동과 철학을 담을 수 있는 그런 문학 창작과 독서의 풍조는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거리가 좁혀질 때에만 가능한 일이리라.) 어쨌든, <상실의 시대>는 일본문학이 본격문학의 질 저하나 수준 낮은 대중문학의 창궐 때문에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거리 차이를 없앤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듯 하다.

한 마디로 <상실의 시대>를 말하자면, '허무적 감상주의'이다. 와타나베를 비롯한 이 소설의 주인공들을 고독과 허무감, 그리고 슬픔 속으로 밀어버리는 힘은 기즈키의 죽음과 그리고 여러 얽히고 설킨 삶의 상처들이다. 그런 복잡한 상처의 무늬가 이 소설의 처음에서부터 끝까지를 엮어내는 줄기가 된다. 그렇지만 다른 소설들과 색다른 점은 그런 상처들이 소설의 서사성 보다는 소설의 서정성에 기울어 있다. 이 소설에서 '죽음과 상처들'은 이야기의 짜임보다는 이야기의 분위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허무한 어느 청춘의 십대에서 이십대로의 성장과 방황을 다룬 소설이란 점에서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를 언뜻 떠올리게 했는데, 내게 있어서는 장정일의 소설 쪽이 좀더 마음에 든다. 주인공의 방황에 있어서도 아담의 방황이 더욱 흥미로웠고 그것은 아마도, 와타나베보다는 아담이 내게 더 가까웠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두 소설의 주인공 모두 허무하고 고독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소설 안에서의 독서를 예를 들자면, 그들의 독서는 판이하게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아담에게 있어서의 독서는 '직업이 아닌 문학은 역겹다'라고 생각했던 장정일의 그것과 닮았고(아니, 바로 그것이고) 그래서 무거운 느낌까지 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와타나베의 독서는 '걸어서 여행하는 것, 수영, 책읽는 것'의 그가 좋아하는 '혼자서 하는 일'의 한 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와타나베의 애독서 리스트는 <위대한 개츠비>나 <켄타우로스>같은 것이고 아담은 신경림이나 김지하, 최승자를 언급하기도 한다. 두 소설 모두 문학, 음악, 영화 등의 많은 작품이 자주 등장하는데, '노르웨이의 숲'같은 음악에 대해서는 무지한 나는 외국곡에 대해서는 한없이 이국적인 분위기만을 느낄 뿐이다. 그러니 책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되는데, 한국 문학까지도 말하는 장정일의 소설에 더 친근감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 말한 나의 외국문학에 대한 무지!)

한편, <상실의 시대>는 주인공이 읽는 문학뿐만 아니라 약간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그려낸 부분 등을 제외한다면 상당한 일본색이 없는 편이다. 그런 무국적의 분위기가 한국인에게도 이 소설을 읽게 하는데 부담감을 줄이고 이국적 매혹을 더하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문학에서 전혀 새로운 이국성을 즐기기보다는 나와 조금은 가까운 것들의 거리감을를 확인하기를 즐기는 내게는 흥미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아직은, 나는 '먼 곳에의 그리움'보다는 내가 밟고 서있는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더 흥미롭다.)

* 아, 그리고 이 소설에서 허무적 감상주의에 버금가는 강한 인상은 세밀한 묘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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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영웅전설 - 제8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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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는 DC 코믹스와 같은 미국 만화제작사의 '슈퍼 영웅'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들은 미국의 패권에 대한 은유이다. 그리고, '덤'으로 등장하는, 우리의, 바나나맨! 바나나처럼 겉은 노랗지만 속은 하얀, 슈퍼 영웅의 뒤를 하염없이 따르는, 그렇다, 바로 한국이다.

소설책을 그리 많이 읽지 않는 내게 이 소설책을 집어 들게 한 힘은, 언뜻 보기에 가볍게만 보이는 '슈퍼맨' 등의 대중만화에서 빌려온 캐릭터들을 활용(패러디)한 '풍자' 내지는 '코미디'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문학동네의 신인작가상을 수상한 까닭이 무엇일까 하는 그 궁금함에 있었다. 세 명의 심사위원인 도정일, 이인성, 남진우는 어떤 까닭으로 이 소설을 높은 값을 쳐준 것일까. (그저 대중이 즐거워할 '팔릴만한 소설'을 꼽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과 함께 대중문화와 문학의 만남은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이뤄질까 하는 호기심이 둘 다 작용 했으리라.)

책의 뒤 표지나 앞날개의 심사평의 일부분은 어차피 광고문이다. 소설책 안에 실린 심사평의 전문에서는 박민규에게 찬사의 박수만을 주지 않는다. 도정일의 심사평 중 '이 작가의 재능은 탁월한 미끄러지기에 있는 듯하다. 판타지인가 싶으면 풍자로 가고, 풍자인가 싶으면 다시 냉소로 간다. 냉소인가 하면 냉소의 건너편에 가서 블랙코미디가 된다. 그 블랙코미디는 또 그리 코미디가 아니다. 이 작가의 탁월한 질주와 미끄럼 타기가 어떤 새로운 세상을 우리에게 보여줄지 한번 기대해보고자 한다.'라는 말은, 이 소설의 발랄함을 말하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불안한 소설의 형상화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설 쓰기 전에 시를 썼다는 작가의 이력 때문인지 자주 행 나누기가 발견되는데 이것도 가벼움을 더해주고 있다.

소설 뒤에 실린, 소설가 하성란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슈퍼맨 등의 만화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는 것으로 말한다. 제8회 한겨례문학상을 수상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를 쓰기도 한 그는 삼미슈퍼스타즈의 팬도 아니었으며, 야구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 체험이나 관심이 아닌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 전략적인 소설 쓰기를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소설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각주들은 이 정보와 지식 들이 자연스레 녹아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부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특히 아쿠아맨의 츠나미(tsunami ; 지진성 해일)에 대한 지루한 긴 해설은 소격효과로 인한 웃음보다는 정말로 뜬금없음만을 느끼게 한다.

이인성의 말처럼 ''진짜' 문학과 '가짜' 문학의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이 소설은 어느 술자리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는 도식적이고 오래된, 결코 새롭지는 못한, 그러나 정당해 보이는,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과 평가를 보여주고 있다. 대중문화를 패러디하고 그곳에서 캐릭터를 끌어다 쓰고 있지만 이 소설은 약간의 반성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철학과 오락(유희) 사이에서 긴장하는 예술이 문학이라면, 이 소설은 (풍자의 정치적 비판 기능을 감싸안은 채로) 유희 쪽에 더 기울어져 있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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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 1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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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귀화한 러시아 출신의 한국학 학자. '한겨레'의 지면에서 가끔 만나보는 그의 칼럼들은 신선하고 날카로운 시각에 윤리적인 감수성까지 갖추었다. 태생이 러시아인인데 이렇게까지 우리글 구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이의 말처럼 그가 혹, 천재가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물론, 모어가 아닌 언어의 획득 능력만을 가지고 그에게 그런 찬사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그만큼 잘 다루는 사람은 분명 많을 것이다. 그가 그런 찬사를 얻을 수 있었던 데에는 사회주의적 비판 시각에, 평화주의적 윤리와 감수성, 한국사를 꿰뚫는 인문학적 지식이 평범한 글쟁이와 논객들을 상회한다는 것이다.

문학과 인문학 쪽의 좁은 독서만을 하다보면 내면과 정신의 아래로 깊이 침잠해 버린다. 그러다 보면 가끔씩 비판적 논객들의 칼럼집을 읽어 줄 필요를 느낀다. 2%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다. 더욱이 좌파적 또는 비판적 시각의 논객들은 윤리적 감수성에 빼어난 문체까지 갖춘 경우가 많아서 그들의 글을 찾게 된다. 사회에 어두운 눈을 뜨게 하는 데 그만큼 좋은 글들은 없다. 더욱이 신문의 지면 읽기도 편식하고, 사회과학의 체계적인 이론과 학술서를 소화하기 힘든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저널리즘에 가까운 평문, 칼럼은 감사해야할 대상이다.

박노자의 글도 이 같은 맥락에서 내게는 큰 매력이었다. 더욱이 그는 외국인에서 귀화한 학자라는 독특한 내력에서 독특한 관점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도 그렇다. 러시아에서의 체험과 한국 유학과 교수 시절의 체험의 비교도 흥미 있었다. 이 책을 읽어 나가는 과정에서 박노자는 상당한 평화주의자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여러 종교와 사상을 거치는 동안 자신만의 철학과 세계관을 갖게 된 것일까. 그가 세워놓은 정신 세계도 상당한 매력을 갖는다. 다음과 같은 말은 부끄럽게 고개를 끄덕거리게 한다.

'옛날에 풍류의 맛을 즐기면서 친구의 한마디 말에 깨달음도 얻고 인생에 중요한 가르침도 얻었다는 것을 이 사람들은 상상도 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남에게 정신적인 가르침을 줄 수 있으려면 그 남과 일단 생각의 범위가 달라야 하고, 자신만의 독보적인 정신 생활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성'과 '개인주의'를 표어로 내세우는 그들의 생각은 사실 놀랍게도 천편일률적이다.' (59-60쪽)

박노자는 군사문화와 패거리 종교문화, 그리고 폭력적인 사회의 성격, 외국인에 대한 차별 등등 한국이란 사회의 어두운 면을 잘 짚어낸다. 강준만 등이 비판한 내역들과 겹쳐지는 항목이 많지만, 인문학자 특유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새로이 본 한국, 한국 사람들의 속내는 부끄러운 구석이 많다. 과거의 한국 역사를 끌어내서 오늘날의 사회를 비판하는 역사학도의 독특한 방법론도 눈에 띤다. 비판만 담긴 글이 아닌 지적인 메스가 담긴 것이다.

이렇게도 한국의 썩은 내를 맡고서도 그가 한국인으로 귀화하고 또 한국을 사랑하는 이유는 뭘까? 한국의 지방 사람들이 도시 사람들보다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따스하게 대해주는 정. 그 사람 냄새나는 온정이 아직도 자본주의적 서구 사회보다는 많이 남은 까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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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16
김광규 지음 / 민음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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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규는 자신의 글쓰기의 틀로서 아침에 시를 쓰는 버릇을 얘기한 바 있다. 이것은 물론 실제로 오전에 글을 쓰는 생리적 습관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시를 읽어보면 그것이 단순히 오전에 글쓰는 버릇을 밝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시세계의 특질을 은유적으로 암시한 말도 된다는 느낌이 든다. 아침 나절에 맑은 정신으로 또박또박 써내려간 것 ㅡ 그것이 바로 김광규의 시편들이다. (해설 : '영산'에서 '크낙산'으로 中 -김영무)

이 시선의 꽁지에 실린 해설의 첫머리는 김광규 시의 특질을 잘 드러내고 있다. 아침의 시, 그게 김광규 시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일 것이다. 이해하기 쉽고 읽기 쉬운 시, 그래서 난해하고 혼란스런 모더니즘 시와는 조금은 다른 듯한 울림으로, 소시민의 세계를 비판적으로 때로는 따스하게 그려낸 것이 김광규의 시들이다.

언젠가 장정일이 그의 '독서일기'에서 '그때 내가 옳게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었던 시는 김광규밖에 없었으며, 이승훈류의 시들에서는 위선된 감정만 느꼈다.(117쪽)'라는 말은 내게 김광규를 읽도록 권하는 한 마디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권성우의 평문에도 그가 옛친구와의 술자리에서 지난 젊은 나날을 추억하며 김광규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함께 낭독했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러니 내 어찌 김광규를 읽지 않으랴.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기에 이미 김광규를 스쳐간 이들의 흔적들이 나를 어지럽게도 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검은 펜으로 곳곳을 밑줄을 긋고 카프카의 <변신>이나 <성>과의 겹쳐 읽기를 시도하고 있는 흔적이 발견되었다. 김광규가 독문학자이기 때문인가? 그에게서 어떤 면이 카프카의 목소리와 겹쳐 들린단 말인지... 나는 스쳐간 선배 독자를, 그리고 그를 문학 지식의 칼날로 찌를 만한 힘이 없는 무지한 나를, 저주했다.

그런 잡생각들만 하다보니, 깊은 곳에서의 울림이 기대보다는 적었다. 장정일의 시,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에서의 그 소시민적 노래와 김광규들의 시편들의 공통분모를 그려보며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흠... 장정일 시의 모던함과 극적인 면모는 최승자로부터, 그리고 소시민적 사철나무 그늘에 대한 바람은 김광규로부터 온 것일까? 헛된 생각들은 김광규 시를 잡아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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