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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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는 상당히 대중적인 베스트셀러 소설로 알고 있었다. TV 광고에서 어느 지적인 미녀가 기차 안에서 품위 있는 포즈로 읽던 책이 바로 이 소설이고, 그런 이미지는 아직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 이 책에 대한 호기심과 매혹을 선사한다. '상실의 시대'라는 멋진 제목과 문학 교과서에서는 접하지 못한 외국 작가라는 그 이국적인 이끌림! 실제로 일본에서는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거리가 거의 없다고 한다.

(물론 그런 이분법적인 구분 자체가 우스운 일이긴 하다. 그렇지만, 수준 높은 문학이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고, 또 대중적인 작품도 독자를 빨아들이는 오락성과 흥미성 안에서 어느 정도의 감동과 철학을 담을 수 있는 그런 문학 창작과 독서의 풍조는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거리가 좁혀질 때에만 가능한 일이리라.) 어쨌든, <상실의 시대>는 일본문학이 본격문학의 질 저하나 수준 낮은 대중문학의 창궐 때문에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거리 차이를 없앤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듯 하다.

한 마디로 <상실의 시대>를 말하자면, '허무적 감상주의'이다. 와타나베를 비롯한 이 소설의 주인공들을 고독과 허무감, 그리고 슬픔 속으로 밀어버리는 힘은 기즈키의 죽음과 그리고 여러 얽히고 설킨 삶의 상처들이다. 그런 복잡한 상처의 무늬가 이 소설의 처음에서부터 끝까지를 엮어내는 줄기가 된다. 그렇지만 다른 소설들과 색다른 점은 그런 상처들이 소설의 서사성 보다는 소설의 서정성에 기울어 있다. 이 소설에서 '죽음과 상처들'은 이야기의 짜임보다는 이야기의 분위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허무한 어느 청춘의 십대에서 이십대로의 성장과 방황을 다룬 소설이란 점에서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를 언뜻 떠올리게 했는데, 내게 있어서는 장정일의 소설 쪽이 좀더 마음에 든다. 주인공의 방황에 있어서도 아담의 방황이 더욱 흥미로웠고 그것은 아마도, 와타나베보다는 아담이 내게 더 가까웠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두 소설의 주인공 모두 허무하고 고독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소설 안에서의 독서를 예를 들자면, 그들의 독서는 판이하게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아담에게 있어서의 독서는 '직업이 아닌 문학은 역겹다'라고 생각했던 장정일의 그것과 닮았고(아니, 바로 그것이고) 그래서 무거운 느낌까지 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와타나베의 독서는 '걸어서 여행하는 것, 수영, 책읽는 것'의 그가 좋아하는 '혼자서 하는 일'의 한 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와타나베의 애독서 리스트는 <위대한 개츠비>나 <켄타우로스>같은 것이고 아담은 신경림이나 김지하, 최승자를 언급하기도 한다. 두 소설 모두 문학, 음악, 영화 등의 많은 작품이 자주 등장하는데, '노르웨이의 숲'같은 음악에 대해서는 무지한 나는 외국곡에 대해서는 한없이 이국적인 분위기만을 느낄 뿐이다. 그러니 책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되는데, 한국 문학까지도 말하는 장정일의 소설에 더 친근감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 말한 나의 외국문학에 대한 무지!)

한편, <상실의 시대>는 주인공이 읽는 문학뿐만 아니라 약간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그려낸 부분 등을 제외한다면 상당한 일본색이 없는 편이다. 그런 무국적의 분위기가 한국인에게도 이 소설을 읽게 하는데 부담감을 줄이고 이국적 매혹을 더하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문학에서 전혀 새로운 이국성을 즐기기보다는 나와 조금은 가까운 것들의 거리감을를 확인하기를 즐기는 내게는 흥미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아직은, 나는 '먼 곳에의 그리움'보다는 내가 밟고 서있는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더 흥미롭다.)

* 아, 그리고 이 소설에서 허무적 감상주의에 버금가는 강한 인상은 세밀한 묘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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