少女行 2

하노이에서

― 신경림



그녀의 아버지는 시클로에 외국사람을 싣고

신나게 거리를 내달리고 있을 거야.

오빠는 돈 많은 먼 나라에서

굴욕적인 헐값에 노동을 팔고.

할아버지는 디엔비엔푸 전선에서

팔 하나를 잃은 사람, 할머니는

미라이 마을에서 더 값진 것 빼앗긴 사람,

이웃과 함께 구지 땅굴을 파고

외국군대를 몰아냈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수예품을 들고

관광객을 잡고 적선을 구걸하고 있을 거야.


하지만 누가 감히 말하랴, 이것이 그녀가

열대의 꽃처럼 눈부신 까닭이라고,

익은 과일처럼 향기 짙은 까닭이라고,

정글의 짐승처럼 날렵한 까닭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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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 최승자



왕의 영토는 무한 대륙이었다.

즉위한 그날부터 왕은 자기 영토의 중심에,

검은 의자 위에 앉아 검은 거문고로

검은 죽음의 가락들을 탄주하기 시작했다.

왕의 거문고 솜씨는 너무도 신적이어서,

그가 거문고를 뜯기 시작하자 맨 먼저,

허공을 날고 있던 모든 새들이 추락했고,

그 다음엔 모든 나무들이 키 큰 순서대로 쓰러졌고,

지상의 모든 기고 걷는 것들은 영원히 그 움직임을 멈췄다.

그가 신명을 다해 어둡고 깊은 죽음의 가락들을

하나씩 토해낼 때마다, 먼 대륙 끝이 하나씩 대양의 물 속에 잠겼다.

왕은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검은 머리가 긴 백발로 변할 때까지,

검은 대양에 대륙을 삼키고

억조 창생이 물 속에 익사할 때까지,

자신의 온 생애를 기울여 죽음의 가락을 탄주했다.

어느 날 그가 필생의 신명을 기울여 최후의 연주를 끝냈을 때

무한 대륙의 영토는 사라지고, 무한 대양의 검은 물결이

바로 그의 발 아래서 남실거리고,

그가 탄주했던 그 모든 어두운 가락들은

귀곡성 같은 바람 소리로 변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는 거문고를 안은 채, 이제 그의 영토의 전부가 된

의자 위에 앉아 흡족한 미소를 띠고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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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 매

― 김혜순



<A가 좋아>라고 나는 말했다.

그러자 B가 달려와 나를 때렸다.

<A가 좋아라고 말해서 B에게 맞았어>라고 말하자 C가 달려와 나를 때렸다.

<A가 좋아라고 말해서 B에게 맞았고, B에게 맞았어라고 말해서 C에게 맞았어>라고 말하자 A가 달려와 나를 때렸다.

<A가 좋아라고 말해서 B에게 맞고, B에게 맞았어라고 말해서 C에게 맞고, C에게 맞았어라고 말해서 A에게 맞았어>라고 말하자 A, B, C 모두 달려와 나를 때렸다.

나는 이제 헐떡거리며 <맞았어, 맞았어>라고 말하며, 맞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누구를 좋아했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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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
― 이성복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강이 하늘로 흐를 때,

명절 떡쌀에 햇살이 부서질 때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흐르는 안개가 아마포처럼 몸에 감길 때,

짐 실은 말 뒷다리가 사람 다리보다 아름다울 때

삶이 가엾다면 우린 거기

묶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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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불을 놓는 사람

ㅡ 문태준



이 불길, 크고 작게 번지는 불길의 간격은

폐허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늙은 군복바지가 두렁에 침목처럼 서서

긴 부지깽이를 내두르는데,

나는 풀이 타들어가는 소리를 듣는다

겨울 아침, 동력경운기에 시동 거는 그 소릴

듣는다 가르릉거리다 픽 꺼지는

고집 센 이 두렁의 폐허, 옮겨붙다 사그라드는

불길, 불은 풀의 폐허를 건드리지 못한다

제때 시동 걸리는 것은 生이 아니라는 듯





먼저, 문태준의 이 시가 그려내는 그림은 이렇다 :


ⅰ) 겨울 아침, 나는 논이나 밭의 두렁 앞에 서 있다. ⅱ) 늙은 남자(“늙은 군복바지”의 이미지는 ‘낡은 군복바지’를 작업복으로 입은 초로의 남자를 불러낸다)가 두렁에 쥐불을 놓는다. ⅲ) 남자가 놓은 쥐불은 풀이 돋지 못한 폐허의 땅에 맞딱드리게 된다. ⅳ) 그 폐허의 땅에는 쥐불이 옮겨 붙을 풀이 없으므로, 불은 그곳에서 사그라든다. ⅴ) 나는 그 광경을 동력경운기에 시동을 걸다가 픽 꺼지는 소리로 겹쳐 듣게 된다. ⅵ) 나는 폐허 앞에서 멈춰 서버린 쥐불의 불길을 제때 시동 걸리지 않는 生으로까지 읽는다.


농촌에서 쥐불놀이의 풍속은, 농사가 다 끝난 겨울 논밭두렁에 불을 놓아 그 불로 쥐와 해충을 죽이며 동시에 그 재를 거름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일은, 농사가 끝난 한적한 철에 농사의 시동을 거는 일에 다름 아니다. 논밭두렁에 땀을 적실 것을 예비하는 이 풍속은 불꽃의 이미지가 그러하듯 열렬한 활기와 희망에 차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쥐불놀이는 조금 쓸쓸하다. 불길의 열렬함도 폐허의 땅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삶의 열정도 한 시절이 지나가면 언제까지나 쌩쌩하게 시동 걸릴 수는 없는 노릇일까.


어둡지만 곧 밝아오는 겨울의 아침. 절망과 희망이 미묘하게 교차하는 그 시간. 시골의 늙은 사내는 자신과 한 몸을 이루는 낡은 군복바지를 꿰어 입고 두렁에 선다. 그리고서는 삶의 시동을 켜듯 쥐불을 놓아본다. 동력경운기의 시동을 걸듯. 털 털 털 털, 경운기의 시동을 걸기 위해서는 팔을 거칠게 휘둘러야 하듯 긴 부지깽이를 내둘러본다. 겨울의 희망을 내두른다. 이제 작은 불꽃은 풀 위로 떨구어져 큰 힘을 이루어 두렁 위를 달린다. 허나, 곧 폐허의 땅을 만나 숨을 거두고 만다. 낡은 군복바지는 더 이상 젊은 군인들의 씩씩한 패기와 탄탄한 근육을 담지 못하며, 풀이 돋지 않는 폐허의 땅에서는 불의 온기마저 거두어드리지 못한다. 불에 타 죽지 못하는 두렁의 땅은 이듬 해 봄에도 다시 새로운 거름을 얻지 못해 新生하지 못하리라. 차라리 내가 늙은 군복바지의 사내가 되어서 그 폐허의 땅 위로 쥐불 대신 굴러보고 싶으다.


내 어린 시절 어둠을 틈타, 부모와 형 몰래 빠져나와 동네 악동들과 논밭을 쏘다니며 불을 놓던 그 쥐불놀이에는 유희의 추억이 쌩쌩한 즐거움과 함께 담겨 있었다. 무언가 앞날의 노동을 앞 둔 일꾼의 자세가 아니라 야밤에 깡통 돌리는 불장난에 불과했으나, 우리는 즐거웠고, 그 즐거움은 내 추억 속에서 여전히 불타고 있다. 이 시는 나의 행복했던 쥐불놀이 추억을 배반했으며 그 배반은 쓸쓸함을 안겨다 준다. 그러나 제때 제때 불붙지도 않으며 제때 제때 불끄지도 못하는 게 生이란 걸 이제 조금은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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