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꾼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장인숙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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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다시 발자크. 발자크는 눈에 띄기만 하면 읽는다! 게다가 이건 발자크 표 인생극 “휴먼 코미디”가 아니고 무려 희곡이기도 하다. 어찌 일독이 없을 수 있을까? 장인숙이 쓴 역자해설을 보면, <사기꾼>은 1841년에 쓰여졌으며 초연은 1851년에 당대 가장 유명한 배우 프레데리크 르메트르가 맡았다. 그러나 공연이 성공이었는지 실패였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에 의하면 발자크가 빚을 갚기 위해 여러 사업을 시도했다가 어떻게 그렇게 알뜰하게 말아먹었는지, 거의 전 종목을 해 자시고, 이 와중에 애초에 작가로 등장하기 전에 시도했다가 난타 당해버리고 만 연극계로 눈길을 돌린다. 그리하여 과감하게 선언하기를 1년에 서른 편의 희곡을 쓰겠다, 사실 발자크의 필력으로 보면 1년에 희곡 서른 편이 그렇게 무리한 분량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하여간 츠바이크는 평전을 통해 연간 서른 편이라면 발자크가 연극과 희곡을 우습게 알고 있었던 증거라고 들이밀었다.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역자의 해설을 읽어보면,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을 탁 집어 알려주어 갑자기 눈 앞에 환하게 밝아지기도 한다. 장인숙 교수는 말한다.


  “이 희곡에서 작가는 몰리에르 희극의 전형적인 등장인물 구도에 따라 남편과 부인, 과년한 딸 그리고 하인들로 구성된 동시대의 평범하고 안락한 가정이 어떤 위기에 직면해 있는지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래서 일단 가방끈이 긴 사람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좋다. 나는 <사기꾼>을 읽으면서 후배작가 에밀 졸라의 루공-마카르 총서 가운데 <돈>과 <이전투구>의 무대인 파리 증권시장을 연상하며 주인공 메르카데를 어떻게 졸라의 사카르와 비교할까 만 궁리했지, 시기를 18세기도 아닌 17세기로 돌릴 건 아예 생각하지도 못했다. 당연히 <타르튀프>를 읽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위 인용문을 읽자마자 애꿎은 허벅지만 한 대 얻어 터졌지 뭐야.

  그런데, 발자크의 인생극 가운데 파리의 증권거래소의 선물거래를 다룬 작품이 어째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읽은 열 권의 발자크 가운데는 없다. 다 합해서 아흔 편이 넘는 인생극 가운데엔 있겠지. 이왕 인생극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사기꾼> 역시 희곡이 아니라 소설로 썼더라면 근사한 인생극 드라마가 될 뻔했다. 희곡, 연극 공연을 위한 텍스트라 해피 엔드로 마감을 해서 그렇지 소설이었다면 <고리오 영감>처럼 비감한 결말로 얼마든지 유도할 수 있었을 텐데. 오히려 몰리에르의 전통을 따르느라 엉뚱한 인물이 나타나 억지 해피엔드를 만든 기분이 든다. 물론 이 극을 초연한 1851년의 파리지앵들은 갈채했을지 몰라도 21세기 독자는 내 입장에서는 아쉽다. 비극으로 만들었다면 그냥 주인공이 권총 자살하는 것으로 끝냈을 지도 모르겠다. 이것도 전통이잖여?


  주인공은 오귀스트 메르카데. 참 다양한 사람들에게 약 32만 프랑의 빚을 지고 있다. 막이 오르면 1년 8개월 동안 월세를 내지 않은 파리의 방 열한 개짜리 고급 주택의 집주인이 메르카데한테 밀린 월세 더하기 월세의 복리 이자를 내든지, 집을 비우든지 선택을 하라고 추궁한다. 무려 11년 동안 살아온 세입자에게 그간 정도 많이 들었을 텐데, 원래 그런 거 다 봐주면 건물주 노릇 못 하는 것이라 집주인 브레디프는 얄짤없다. 그러나 메르카데 손엔 미쇼냉이란 작자가 발행한 4만7천여 프랑의 부도 어음 한 장. 이제 메르카데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무남독녀 외동딸 쥘리를 지참금 없이 백만장자에게 시집보내 사위의 돈으로 급한대로 자신의 부채를 끄거나 연기하고, 다른 사업으로 기사회생을 도모하는 일.

  사기꾼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상당한 수준의 부자라고 과시하는 것이다. 메르카데 선생도 급여를 주지도 못하면서 집사와 하녀, 요리사를 두고 있고, 아내에게 최고급의 드레스를 입혀 잘생긴 드 메리쿠르 청년과 함께 이태리어 극장에 다니게 했다. 당연히 메르카데는 상당한 수의 채권자들에게 날마다 들들 볶이지만 딸 팔아 위기를 모면하려는 한 큐를 위해 아내를 통해 드 메리쿠르 청년에게 딸의 중매를 부탁했고, 그리하여 막이 올라가는 날, 지방에 상당한 토지를 가지고 있는 드 라 브리브가 청혼자의 자격으로 메르카데 씨의 집을 방문할 예정이다. 프랑스 전통 희극의 공식에 의하여 메르카데 씨의 외동딸 쥘리는 당연히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으니 이름을 아돌프 미나르, 라고 하는 회계사이다. 회계사는 회계사이지만 아직 새끼 회계사라서 천 몇 프랑의 월급을 받을 뿐이라 전망이 밝지는 않다.

  쥘리 아가씨는 아빠한테 자신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미나르를 집으로 불러 아빠와 면담을 주선한다. 매르카데 씨는 원래 고도 선생하고 동업을 해 사업이 번창했다가 동업은 언제는 끝나는 일이라 고도 씨가 15만 프랑을 가지고, 나머지 모든 것은 물론 남겨두고, 인도로 떴다. 이후 8년 동안은 승승장구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양길에 접어들어 지금은 주식 공매수도를 전문으로 하다가 거덜이 난 상태. 고도가 돌아와 약속대로 인도에서 사업에 성공할 경우 생긴 이익의 절반을 메르카데에게 준다면 단박에 회복할 수 있겠지만 말이지. 이런 정황을 딸이 사랑하는 미나르에게 이야기하고, 32만 프랑의 빚을 상속할 수 있으면 결혼을 허락하겠다, 이렇게 뜸을 들이다가, 솔직히 말해서 말이지, 그거 말고라도, 자네 월급이 겨우 천 프랑인데 날 때부터 좋은 옷, 좋은 음식 먹고 자란 쥘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지금은 너네들 둘이지만 곧 세 명, 네 명, 다섯 명, 어쩌면 열 명이 될 지도 모르는데?

  근데 사실은 미나르가 자기 동업자 고도 선생의 친아들이다. 부부가 인도로 떠나면서 갓 낳은 아돌프를 메르카데의 회계사였던 뒤발 씨에게 맡기고 떠나버렸던 것. 하는 걸 보니 사업에 성공해도 어디 약속대로 하겠어? 미나르는 미련이 가득 남기는 했으나, 사랑하는 쥘리의 복지와 행복을 위하여 사랑을 포기하고 만다.

  이렇게 끝나면 극이 아니지. 메르카데는 젊은 백만장자 드 라 브리브에게 저녁 만찬을 대접하기 위하여 요리사 비르지니의 돈으로 식자재를 사오게 하고, 자신의 채권자 가운데 한 명인 베르들랭에게 현란하게 구라를 쳐 은식기를 빌려오는 동시에 천 에퀴를 빌어 결혼식에 쓸 자재를 들여온다. 마포에 드 라 브리브의 황포돗배만 들어오면 인생이 바뀌는 거야, 이러면서.

  드디어 도착한 드 라 브리브. 이것도 완전 사기꾼이다. 둘 다 잿밥에만 마음이 있어서 드 라 브리브는 장인짜리를 보자마자 지참금 이십만 프랑을 요구한다. 이에 촉이 좋은 주인공 메르카데 선생은 단박에 거품인 줄 알고 그가 브리브에 가지고 있는 토지의 현 시가, 근저당 설정 금액 등을 정확하게 판정해 드 라 브리브로 하여금 좌절하게 만든다. 그리고 조금 후, 자신이 가지고 있는 4만7천 프랑짜리 부도어음의 발행인인 미쇼냉이 드 라 브리브인 것이 밝혀진다. 이제 결혼 이야기는 파투가 나고, 그렇다고 가난한 회계사인 미나르를 사위로 삼을 수도 없으며, 오늘 밤 당장 모든 채권자가 한 곳에 모여 우리의 주인공 메르카데 선생을 감방에 보내려 서류작업을 시작한다는 첩보가 들어와 메르카데는 인생 마지막 사기를 도모하기에 이르는데.

  걱정하지 마시라, 몰리에르를 전범으로 해서 쓴 작품이라 결말은 행복할지니.

  그건 그렇고, 20세기 모든 시기를 걸쳐 전 세계 젊은이들을, 고도가 누구니? 의문에 휩싸이게 했던 그 양반이 알고 보니 사실 인도로 갔었는데, 그 고도를 계속 기다려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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