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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라기 / 광대가 ㅣ 공연예술신서 78
허규 지음 / 평민사 / 2020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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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갑술생. 경기도 고양 사람으로 서울대 농대 시절에 연극부에 다니며 뜻을 세웠다. 연극하는 데 졸업장이 무슨 대수, 임학과 다니다 때려치웠다. 1956년 제작극회 창단멤버로 들어가 존 오스본 작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의 조연출로 시작했으니 처음부터 연기에는 뜻이 없었다고 본다. 1960년엔 실험극장 창단멤버로 참여해서 창립공연으로 이오네스코의 <수업>을 연출했는데, 본격적인 연출 데뷔작으로는 1961년 제작극회의 명동 국립극장 공연 차범석 작 <껍질이 째지는 아픔이 없이는>으로 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엔 연극해서 밥 빌어먹고 살기 정말 팍팍해서 KBS, TBC, MBC를 차례로 돌아가며 연속극과 드라마 연출자로 활약해 “방송드라마의 차원을 높이고 건강한 방향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다. 1970년에 실험극장에서 오영진 작 <허생전>을 연출한 것을 계기로 우리나라 전통극에 몰입해 방송국을 때려치우고 “전통의 현대적 계승과 재창조”를 목표로 민예극장을 창단, 창단극으로 <고려인 떡쇠>를 올렸다. (인터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했음)
허규의 첫 희곡은 1977년 제1회 대한민국연극제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물도리동>. 이후 1979년 대한민국연극제에서도 <다시라기>로 한 번 더 연출상을 받아 10월 25일에 무대에 올렸다. 1979년 10월 25일. 이날 딱 한 번 공연하고 막을 내렸다. 다음 날 새벽, 궁정동에서 김이 쏜 총알이 박의 뇌에 박히는 유고상황이 벌어져 게엄령이 떨어졌으며, 지금 생각하면 놀랄지 모르지만 전국적으로 애도 물결이 몰아치던 때라 어딜 감히 <다시라기> 같은 마당극을 올릴 수 있었을까. 공연을 준비하느라 쓴 돈은 하늘로 날아갔건만 절치부심, 허규는 다음해 5월에 국립극장 소극장을 빌어 재공연에 들어간다. 아뿔싸. 이제 또다시 한반도는 남쪽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황황하고 참담한 국면을 맞았으니 이번엔 관객이 한 명도 들지 않은 텅 빈 극장에서 공연을 해야 했다. 그리고는 2000년, 허규가 숨을 거둘 때까지 재공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책 머리말 참조). 극작가는 재공연도 못 봤지만 지금은 <다시라기>가 예술종합학교 입학 시험 실기 텍스트일 때도 있고, 다양하게 각색해 자주 공연하는 대표적 레퍼토리라고 한다.
연출가, 극작가라기보다 이것들을 통틀어 연극인으로의 허규는 무엇보다 창극을 현대 무대에 새롭게 올려놓았다는 업적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전설적인 여성 명창인 박녹주, 김소희 등을 앞세운 여성국극으로 명을 이어가던 창극은 1970년대 들어 개봉관 공연은 전혀 없었고 재개봉관에선 간혹 있었으나, 거의 대부분 변두리 동네의 작은 재재개봉관 극장에서 “1부 쇼, 2부 영화”, 이런 수준으로 전락해버렸다. 당연히 공연 시간도 두 시간을 넘지 못해 우리나라 고유의 창극이 갈 길을 찾지 못하던 때, 허규는 다섯 시간 이상을 공연하는 대작 혹은 제대로 된 창극을 시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잊혔던 <강릉매화전>을 복원했다고 한다. 이이가 없었더라면 1970년대 중후반부터, 기억하기로는 중구 정동 당시 문화방송 건물 강당에서 주로 공연했던 마당극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노인이 되었지만 당시 윤문식, 김종엽, 김성애 등이 시민들의 눈과 귀를 붙잡아 기어이 배꼽까지 빼고 말았던 여러 마당극은 그때의 인기를 유지하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다시래기”의 사전적 의미는 “전라남도 진도에서 전승되는 장례풍속. 출상 전날 밤에 상가에서 노래와 춤과 재담으로 상주를 위로하는 놀이이다. 국가 무형 문화재 정식 명칭은 “진도 다시래기”이다. 국가 무형 문화재 제81호.” (인터넷. 표준국어대사전)
이것이 위키피디아로 넘어가면 “한국의 상여놀이의 일종”이며 “출상 전날 밤 빈 상여를 이용한 놀이로서 상을 당한 유족들의 슬픔을 누그러뜨리고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축원하기 위한 행사”이다. 진짜 상주 말고 가짜 상주, 즉 가상주가 등장해 상주 대신 손님도 맞고 곡도 하고 어른들 빈 술상 눈에 들어오면 어, 진숙이 어멈 윗돌 어른 새 상 가져다 드려, 술 한 주전자하고, 마당 간수도 제대로 한다. 물론 진도라니까 신랄한 전라도 사투리로 그랬을 거다. 그런데 아무 초상이나 이런 건 아닐 터. 어린 아이 아홉 두고 초년에 고기잡이 갔다가 파도에 실려 온 초상집에서 아무리 슬픔을 누그러뜨린다는 명목이라도 꽹과리, 장고, 북을 동원해 춤과 재담을 발휘할 수는 없을 테니. 그리하여 필요충분 조건이 반드시 호상일 것. 놀이패를 넉넉하게 먹이고 초상 끝나면 행자라도 쥐여줄 수 있는 방귀깨나 뀌는 집일 것.
어느 시골에 초상이 나 갔더니 고인이 아흔이 넘어, 당시엔 무지무지무지하게 오래 사신 거였다, 편하게 잠자다 깨지 않았다는데, 편히 쉬시기를, 풍물은 부르지 못하고 대신 노래방 기계 가져다 밤새 노래하고 춤추고 놀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이것도 일종의 다시래기로 볼 수 있다. 진도는 아니지만. 또 있나? 있다. 임권택 감독이 1996년에 연출한 <축제>. 밤새도록 조문객이 술 마시고 고스톱 치고 도리짓고땡 하고 주정부리고 하는 건 뭐 상가면 늘 하는 일이고, 초상 다 치룬 후에 기념사진 한 방이 무슨 일이래? 자, 모두 여기 보셔요. 하다가 상복 입고 딴 표정 지을 수 없어서 엄숙 모드로 있는데, 찍사가 하시는 말씀이, “얼굴이 왜 그래요? 어디 초상 났어요?” 하니 사람들이 와하하하…. 그것도 일종의 다시래기지 뭐겠는가. 우리나라 대부분의 호상은 전부 일종의 다시래기다.
이 책에 나오는 <다시라기> 이야기는 다 끝났다. 여태 말한 ‘다시래기’를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 춤과 소리, 음악, 장단 같은 것을 문자로 이야기해봤자 책을 직접 읽은 나도 이해 못하고, 그걸 전해본들 당신도 이해 못하니 그냥 지나가자. 초상난 김에 한 판 잘 때려먹는 굿판이 벌어지는 거다, 이런 선에서. 책을 읽으면 보탤 수 있는 건 소리꾼이 하는 사설의 내용 뿐이다. 그거 한 자락 소개해보자.
“진도 다시래기에 나오는 춤은, 사당과 중이 추는 허튼춤을 비롯하여 사당이 추는 곱사춤과 거사가 추는 봉사춤과 같은 이른바 소회적인 발림춤이 있다.” (위키피디아)
라고 했고, 허규는 거사 대신에 정말 봉사를 등장시켜 (봉사 역을 하는 거사겠지만 하여간 대본에는) 봉사가 춤도 추고 소리도 한다. 봉사의 아내가 아이를 낳는 순간, 소리 한 자락 꽝!
홀애비 죽어 원한귀야, 총각 죽어 몽달귀야 너도 먹고 물러가라, 선달 죽어 노망귀야, 과부 죽어 한 식귀야, 너도 먹고 물러가라, 신통, 방통, 해산통, 밥통, 똥통, 오줌통, 배통, 복통, 장구통, 북통, 요통, 옆구리통, 신통, 방통, 퉁 터져서,
옥동자를 쑥 내주소,
잠잘 때는 반듯 눕고
사랑한 것 보지 않고
고른 자리 찾아 앉고
음한 소리 듣지 않고
삼가하고 조심했으니
아들이면 정승감
딸이면은 정경부인
그 아이 수이 낳아
무럭무럭 자랄 적에
너그럽고 부드럽게
자상하고 지혜롭게
잘 먹이고 잘 길러서
눈망울은 수정같이
마음은 하해같이
기운은 철퇴같이
재조는 조물주같이
훌륭하게 길러 내어
그른 일 바로잡고
바른 길로 키우리다.
두리둥, 두리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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