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창비시선 414
이시영 지음 / 창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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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이시영의 시를 읽는다. 1949년 구례 출신. 60년대말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졸업하고 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월간문학 신인공모에 시가 당선하여 등단한 시인인데 그딴 거 알 거 없고, 훗날 자유실천문인협회와 협회의 후신 민족문학작가회의, 이 단체들의 후신인 한국작가회의의 이사장을 역임한 진보진영의 대표적 시인이다. 그간 이시영의 시를 솔찮게 읽은 거 같은데 정작 생각나는 시는 없다. 열일곱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시선집, 그리고 잡글들, 이른바 산문집 또는 에세이집이라 부르는 책 몇 권을 상재했다. 일찍이 “리얼리즘 시의 대표선수”라는 칭호를 받은 바 있는 이시영은 그러나 이쪽 편과 정 반대쪽에 선 서정춘, 김종삼, 천상병 등을 “시업에 비해 의외의 소외를 받는 과소평가된 시인”으로 평하는 비교적 균형 잡힌 발언을 하기도 했다. 반면에 최영미의 괴물 논란 이전에 명색이 문인이라면 감히 이이 앞에서 크게 숨도 쉬지 못했던 우리나라의 만년 노벨문학상 후보자 고은에 대하여, 놀라운 생산량에 비하여 시적 성취/발전은 주목할 만하지 못하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던 이다. 고은의 막강한 문학권력 앞에서 이런 발언을 할 수 있었다는 거 하나만 갖고도 이시영의 배포는 알아주어야 했다. 문학판도 그렇다. 아니, 그랬다. 그렇게 개판이었다.

  자유실천문인협회, 민족문학작가회의를 거쳐 한국작가회의의 이사장까지 역임했으니 이이와 En 또는 괴물이라는 닉네임이 얻어 걸린 고은과 친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 이시영이 촌스럽게 20세기 말에 호를 하나 가지고 있었으니 ‘산 이야기’ 산화山話라, 이 호를 지어준 이가 바로 고은이었다. 고은도 자신의 시를 비판한 까마득한 후배 이시영에게 호를 하사함으로써 자신의 아량을 뽐낼 수 있었으니 얼마나 기꺼웠을꼬? 시집에서도 고은과의 하루를 기억하는 시가 들어 있다.


  아욱죽


  1970년대 내내 화곡동 고은 선생 댁 마루에서 골목을 감시하던 고 형사도 때론 섞여서 두레상 펼쳐놓고 먹던 아욱죽이 그립다. “숙자씨, 여기 한그릇 더요!” 외치면 저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 끄떡이며 은밀히 귀 기울여오던 마당귀의 미끈한 아욱대를! (전문. p.32)


  이시영도 당연히 몰랐겠지. 이 시집 《하동》을 출간하고 며칠이 되지 않아 고은의 까마득한 후배 이시영의 새까만 후배 최영미가 <괴물>이란 시를 발표해서 고은, En을 시대의 저편으로 보내버릴 걸. 그런데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 참여시, 운동시라고 했던 리얼리즘 계열의 시를 쓰면서 고은과 얼굴을 트고 지내지 않기도 쉽지 않았을 터이라. 딱하게 됐다. 고은이 내린 호 산화山話를 세상에 알릴 수도 없고 쓰기도 남사스러운 날이 올 줄 몰랐겠지. 시집의 초판이 2017년 9월. 이시영 68세였다.


  “작년 가을이었던가? 남산 입구의 혼례식장에서 내려오던 길에 우리 만났지. “왜 시 안 써?”라고 인사를 건넸더니 그 가느다란 실눈을 뜨고 말보로를 한가치 꺼내 물더만, “성님, 시는 이십대에나 쓰는 거 아니요?” 그러곤 무슨 예감처럼 신호가 깜박이는 충무로를 건너 은빛 바이크들이 몰려 있는 상가 쪽으로 소파 같은 몸을 밀며 지나가더군. 맹인처럼 따각따각 지팡이를 두드리진 않았지만 사바세계의 구석구석을 걸어온 선지자처럼.” (<지우에게> 부분. p.92)


  황지우는 이성복, 최승자와 함께 우리나라가 배출한 걸출한 52년생 트리오 가운데 한 명이다. 아, 이건 전적으로 무지막지한 아마추어 독자인 내 생각이니 이 명단에 끼지 못한 다른 52년생 시인이 있어도 넓디 넓은 양해 바란다. 어쨌든 이시영은 이 시에서 황지우의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의 쪽글을 인용하면서 평소에 그리 친하지도 않았고, 자주 얼굴을 스치기는 했어도 ‘정식으로’ 만난 적 없는 황지우와의 촌편을 시 한 수로 썼다. 아마 서로 추구하는 시 세계가 판이하고, 시를 쓰는 스타일도 거의 완벽하게 반대편에 자리하기 때문에 평소 가까이할 수 없었으리라. 황지우가 52년생이니 시인과 겨우 세 살 차이. 그럼에도 그의 말을 인용한 시를 썼으면 황지우의 말대로 시를 좀 줄이든지. 이 시집 《하동》에는 한 줄 또는 두 줄로 그저 생각나는 파편을 글로 써서, 이게 시다, 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시가 특별히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짧은 시 가운데 맨 앞에 놓여 있어서 하나 소개한다.


  오리알 두개


  갈숲이 자라는 곳에 오리알 두개

  오리는 어디갔나

  갈숲이 대신 품어주는 곳에 따스한 오리알 두개 (전문. p.12)


  시인이 갈대 숲을 지나다가 땅에 놓인 오리알을 보고 쓴 시다. 시라고 주장한다. 시인의 시선이 땅에 놓인 어쩌면 얼룩덜룩했을 오리알을 그대로 원고지, 아니지, 랩탑 화면 위에 문자로 써 놓고 시라고 주장하는 걸, 독자는 읽고 있다. 심지어 일행시도 있다.


  산길


  밤새워 고라니가 파놓은 흙 위에 흰 눈이 소복이 싸이셨다 (전문. p.21)


  아마도 시 가운데 제일 쓰기 힘든 시가 일행시 아닐까 싶은데 이것 역시 헛심만 쓴 거 같아 안타깝다. 시집은 당연하게도 이렇게 짧은 시들로만 짜여있지 않다. 주로 시인이 65년 이상 살면서 겪은 옛 시간들의 기억과 만남을 마치 수필처럼 쓰고 있다. 왜 그런 것들을 시로 썼을까? 산문집이라는 형식으로 내면 안 될까?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무수한 만남과 이별 가운데 이런 이별도 시로 썼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생각함


  임종이 임박했다는 새벽 전화를 받고 고려병원에 달려갔을 때의 일이다. 황달이 퍼져 샛노란 눈빛의 김남주가 주변을 돌아보며 외쳤다. “개 같은 세상에 태어나 개처럼 살다가 개처럼 죽는다. 부탁한다. 남은 너희들은 절대로 이렇게 살지 마라!” 그의 숨이 끊어지고 난 뒤 병실 복도에 나와 나는 나에게 다짐했다. 빗방울 하나에도 절대 살해되어서는 안되겠다고!* (전문. p.14)

  *  김남주가 옮긴 브레히트의 시 <아침저녁으로 일기 위하여>의 마지막 행을 차용함


  김남주. 불행한 우리나라 현대사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그런데 죽음의 침상에서 마지막으로 저렇게 일갈하고 죽었다고? 아오, 실망이네. 나는 김남주처럼 살지도 못했지만 김남주처럼 죽기는 싫다. 좋건 싫건 살다가 갔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꼭 저런 말을 하고 싶었을까? 그것도 마지막 남기는 말로. 이 시집을 냈을 때 이시영의 나이가 나보다 위였을 텐데, 그 나이를 먹었으면서 이시영은 김남주의 마지막 말을 꼭 문자로, 활자로, 시 한 편으로 남기고 싶었을까? 세상이 개 같았을 지 모르지만, 정말로 개 같았지만, 세상이나 인간에 대한 미움이야말로 정말로 개 같은 것이란 걸 알았을 텐데. 김남주에 대해 억하심정이라도 있었나?

  물론 시들이 다 이런 건 아니다. 제일 앞에 소개한 시의 제목이 <귀래사를 그리며>. 귀래사? 도연명이 쓴 <歸去來辭>? 아니, 그거 말고 그냥 절 이름이 “귀래사”다. 귀례歸來. 돌아옴. 전문을 옮긴다.


  귀래사라는 절이 어디 있더라? 하여간 이 지상 어딘가에 있긴 있겠지. 이제 그만 그곳에 닿고 싶다. 가서 나무를 해도 좋겠고 머리가 허옇게 세었다고 싸리비로 절 마당이나 쓸라고 하면 그 또한 좋겠지. 늙으신 보살이 차려준 공양을 정성껏 비운 뒤 뒷산 남새밭에 가서 하루 종일 잡풀들과 일하리라. 가끔 일어서서 허리를 곧추세워 독수리눈으로 하늘을 보리라. 청청히 텅 빈 하늘, 그리고 목화 송이처럼 흐르는 구름들. 저녁을 마치면 골방에 틀어박혀 잡서를 읽으리라. 그리고 세상과 등을 지고 나와 대면하리라.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부모님 생각이 간절하겠지만 그 또한 잠깐의 인연. 훨훨 털고 텅 빈 벽에 바짝 붙어 단잠을 자다 소변을 눈 뒤 절 뒤꼍 해우소 근처에서 오래 서성이리라. 텅 텅 울리는 새벽 종소리가 아픈 무릎에 스밀 때까지 (전문. p.10)


  왕년의 참여시, 운동시를 쓴 시인. 1970~80년대 리얼리즘 진영의 대표주자이며 소위 이야기시를 반대하여 마치 하이쿠 같은 한줄, 두줄 시를 생산한 시인의 이야기시. 이런 하드웨어적 접근이 아니라 내가 인상 깊었던 것은, 시집을 관통하는 구례지역의 현대사, 여순사건과 파르티잔, 민주화 운동 당시의 과거 동지들과의 후일담과 어울리지 않는 시라는 점. 말이 “귀래”일 뿐, 귀래, 시를 읽으며 돌아와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면서, 아오, 이게 왕년에 내가 알던 이시영이라는 말이지? 여전히 좌파 진보진영의 일원이라는 말을 하고, 듣고 싶지만 사는 건 부르주아로 살고 싶은 소위 강남좌파 아녀?

  나이 들어 작으나마 절에나 들어가 마당 쓸고, 풀 뽑으며, 날 새면 아주머니가 해주는 밥이나 먹고 책도 좀 읽고 하는 일상을 살겠다고? 음하하하…. 좋겠다. 그렇게 살겠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으니. 나이 들어 이 빠지고 무릎 쑤시고, 삭신이 결딴나도 최저임금 받으며 아파트 경비라도 서야 하는 노년이 아닌 것을 축하해야 할 밖에. 이시영씨, 그런 노인들한테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네요.

  가끔 허리를 곧추세우고 독수리눈으로 하늘을 보겠다? 대놓고 이야기해서 세상을 향해 기회가 있으면 “마지막 봉사”라는 핑계로 세상일에 참견을 하겠다는 말 아냐? 독수리의 눈? 우습다. 한 번 귀래, 돌아왔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무슨 미련이 있어서 세상을 독수리의 눈으로 또다시 바라봐야 직성이 풀리실까? 제발 그러지 마시라. 그 눈깔 확 뽑아버리고 사시라. 세상은 젊은이들한테 맡겨 놓고 그냥 하동 근처에 나지막한 집 한 채 짓고, 아니면 있는 집 리노베이션 해서 잘 자시고 잘 살다가 곱게 세상 뜨면 될 일이다. 일 하지 않고 노년을 보낼 수 있는 것에 고마워하면서 말이지.

  내가 뭐 잘난 거 있다고, 이렇게 살지 말라는 게 아니라, 한때 좌파면 좌파답게, 왕년에 진보였고 지금도 진보라 주장하고 싶으면, 적어도 이렇게 살겠다고 세상에 내놓고 떠들지만 말라는 거다. 그렇게 못 사는 노년이 노년인구의 9할이 넘는 세상인데.

  역시 황지우가 갑이다. 시는 이십대에나 쓰는 거라는 진리를 이미 체득한 현명한 시인 말이지.

  쓰다 보니 함부로, 그리고 험하게 말을 쏟기도 했다. 시인과 그를 좋아하는 팬들에게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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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9-17 05: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밤새워 고라니가 파놓은 흙 위에 흰 눈이 소복이 싸이셨다˝
염병. 흰 눈이 소복이 쌓였는데, 그래서 땅이 보이지도 않을 텐데, 그 땅을 밤새 고라니가 팠는지, 멧돼지가 팠는지, 아니면 불여우 한 마리가 작년에 묻어놓은 인간 해골을 파 먹었는지 그걸 어떻게 알았어 그래?

케이 2025-09-17 12:08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웃겨요. 사실 눈이 소복이 쌓이면 거기가 파인 자리인지 아닌지 모를 때가 많죠.

바람돌이 2025-09-17 1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남주 시인의 이야기는 진짜일까요? 좀 묘한 마음이 드네요. 어떻게 나이드느냐가 중요하다는걸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Falstaff 2025-09-17 16:02   좋아요 1 | URL
비슷하게 말하고 죽었다고 봐야 옳지 않겠습니까. 이시영이 따옴표까지 써서 인용했는데 설마 거짓이야 했을려고요. 다만 좀 과장이 있을 수도... 하여간 다양하게 거시기합니다. ㅋㅋㅋ

케이 2025-09-17 1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이 리뷰 제 속이 다 후련합니다. 정말로.
특히 아주머니가 차려주시는 밥 먹으면서 이 부분 너무 공감합니다.
절이든 교회이든 결국은 중년 아줌마들의 노동력을 갈취해서 유지되는 것 아니겠어요.
같이 절앞에 버려졌는데 여자애는 학교도 안보내고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밥지으라고 시키고 남자애는 중이랍시고 여자가 차려준 밥 먹고 너무 불합리 합니다.
제가 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를 위해서도 애들을 위해서도 아니예요. 가난하게 태어나서 가난하게 계시는 저희 친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하면 답이 없기 때문이예요. ㅜㅜㅜㅜ 그렇다고 아버지가 절대 밉진 않습니다. 사회 구조상 가난하게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가난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나이 들어서 무슨 선비마냥 곱게 살면서 죽겠다는 타령 보면 팔스타프님과 같은 이유로 기가 찰때가 많습니다. 하루 세끼 밥값 걱정하는 노인이 90% 이상일텐데 말이죠.
근데 정말 김남주 시인이 죽기 직전에 저런 말을 했을까요? 보통은 죽기 직전이면 무슨 말할 정신이 없을 텐데요. 아니면 이미 며칠전부터 잠든 상태이거나.... 하여튼 좀 궁금하네요.

Falstaff 2025-09-17 16:05   좋아요 1 | URL
그죠, 그죠? 그냥 아무 말 하지 않으면 될 것을 굳이 어떻게 살고 싶네 우짜네 저짜네... 참 밉습니다.
강조하건데, 제가 그렇게 살지 말아라, 하는 게 아니고요, 그렇게 떠들고 다니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충정에서 쓴 독후감이란 거..... 흑흑흑...
 
푸줏간 소년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패트릭 맥케이브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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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일랜드의 북쪽, 북아일랜드 페르마나 카운티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작은 마을 클론에서 1955년에 태어난 패트릭 매케이브는 더블린 북쪽에 있는 세인트 패트릭 칼리지를 졸업하고 17세에 런던으로 이사해 교사로 일했다고 하는데, 세인트 패트릭 칼리지가 초등교육에 강점을 갖는 학교라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지 않았나 싶다. <푸줏간 소년>을 감안하면 이런 이력은 중요하지 않다, 그냥 넘어가자. 교사를 하며 소설을 써서 1992년에 <푸줏간 소년>으로, 1998년에 <명왕성에서의 아침식사>로 두 번 부커상 최종심까지 올라가는 등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후, 두 딸과 아내 퀸 여사와 함께 작고 가난한 고향 클론으로 돌아와 살고 있다. 잘했다. 20세기에 작고 가난한 마을이라는 것이지, 2010년대 이후 아일랜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GDP(2021년 기준 8만4천 유로)를 누리는 나라이다. 수백년 동안 가난하고 찌질했던 아일랜드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하여 잉글랜드로 이주했지만 이젠 잉글랜드 사람들도 (식민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라 아니라) 일자리와 복지를 위하여 기꺼이 해협을 건넌다니까. 하여튼 부커상 숏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푸줏간 소년>은 후에 극작가와 협업해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했고, <명왕성에서의 아침식사>는 영화로 만들기도 했다니 올해 일흔살에 접어든 매케이브는 어쩄든 고향의 푸른 들판 위에서 여유롭고 편안한 노년을 지내고 있을 듯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여유롭지도 않고 편안하지도 않은 듯. 나는 <푸줏간 소년>이 처음 읽은 매케이브라서 뭐라할 수 없으나,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것 가운데, “폭력, 광기 등 잔혹한 이야기만 쓴다는 일부 비판”(출판사 제공 책 소개)이 있으며 이 또한 당연한 것 같아, 폭력과 광기 같은 것이 취향에 맞지 않는 독자를 당혹시키는 모양이다. <푸줏간 소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일랜드 작가들처럼 구름 끼고 바람 부는 초원 같은 쓸쓸함을 배경으로, 더구나 매케이브의 고향인 클론 마을은 아일랜드 북쪽에 있어서 춥고, 비 많이 오고, 가을부터 개울이 꽁꽁 얼어버리고, 전국에서도 가장 가난한 마을 가운데 하나라서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더욱 강조되는데, 그곳에 신경정신과 쪽으로 유전적인 문제가 있는 소년 프랜시스(프랜시) 브래디가 심각하게 비정상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점점 부적응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을 그렸으니, 읽는 내내 불안과 안타까움이 점증하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버나드(베니) 브래디 씨는 클론 마을 역사상 최고의 음악가, 트럼펫 주자였다. 195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한 영국의 트럼페티스트 에디 캘버트를 만나기 위해 해협을 건너기도 했다니까, 비록 책에서는 트럼펫 연주 장면이 한 번도 나오지 않더라도 그건 사실이었던 것 같다. 베니도 그리 편하게 산 건 아니다.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가장 가난한 지역에 살던 할아버지 앤디 브래디는 아빠 베니와 앨로 삼촌을 벨파스트의 추레한 여관에 남겨놓고 종적을 감추었다. 형제는 소정의 절차를 거쳐 천주교 신부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라게 됐으며, 이곳에서 베니의 성격이 결정적으로 망가졌다, 라고 매케이브는 주장한다. 이후 베니는 하나밖에 없는 친동생 앨로를 집요하게, 프랜시의 말에 의하면 “세월이 많이 지나도 앨로 삼촌에게 개처럼 달려”들었다.

  왜 그랬을까? 베니는 애니를 만나 사랑을 하고, 외아들 프랜시를 낳았지만 이후 심한 알코올 의존증 단계로 접어들면서 수시로 애니에게 “너를 만난 것이 최대의 실수”였다고 악다구니를 쓰고, 가뜩이나 신경이 약한 애니는 아마도 유전적 형질이 있었을 것 같은데, 신경발작을 일으켜 몇 번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등 자신의 생활이 막장으로 떠밀릴수록 잘 사는 동생 앨로에 대한 공격이 더욱 심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앨로는 그의 말에 따르면 20년 전부터 캠든 타운에서 사는 런던 사람이다. 적수공권에서 시작해 입신양명한 우러러볼 만한 사람은 아니고, 자기보다 스무 살이 더 많은 여자와 결혼해 결혼과 동시에 죽을 때까지 일할 필요가 없어졌을 정도로 부를 즐기고 있다. 핏줄이라고는 웬수 같은 형과 조카 프랜시 이렇게 딱 둘뿐이라 아무리 웬수 같아도 크리스마스 시즌 동안에 런던에서 배 타고 아일랜드 클론 고향집에 찾아온다. 원래는 두 주 동안 머물렀던 모양이지만 이제 형제 사이가 극적으로 갈라져 그저 딱 하룻밤을 지내고 돌아간다. 아버지는 술이 취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악랄한 단어만 취합해 가장 모욕적인 말을 만들어 자신의 친동생에게 쏟아 붓는다. 그래도 명절이라고 형네 집을 찾는 앨로 삼촌, 보살이다, 보살.

  이 정도면 대강 짐작하시겠지? 당시가 아마도 1960년대로 보이는데, 세계에서 알코올 의존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로 추운 소비에트와 폴란드를 꼽았는데, 아마 가난한 아일랜드가 이들을 능가했거나 적어도 어깨를 나란히 했을 것이다. 베니 브래디의 알코올 남용은 마을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엄마 역시 가끔 신경발작을 일으켜 그때마다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는데, 엄마는 이때마다 “정비소”에 다녀온다고 말했다. 이런 집안에 딱 하나, 당연히 마땅한 돌봄을 받아야 하는 소년이지만 돌봄을 받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날마다 부모의 극한 언쟁과 눈물과 아우성을 들으며 자라야 했던 소년이 주인공 프랜시스 브래디였다. 프랜시 역시 엄마 쪽에서 물려받은 신경정신과적 병질과 아빠 쪽에서 넘어온 알코올을 포함한 약물 오남용 가능성을 풍부하게 지닌 상태로 태어났다…는 것이 작 후반에 드러난다.


  프랜시가 초등 고학년일 때였다. 런던에서 살다가 부모의 고향이 이곳이라 가족이 함께 살기 위하여 이사 온 전학생, 누전트 가문의 외아들 필립. 필립 혼자 런던의 사립학교에 다니다 온 거 같다. 아니라고 보기에는 누전트 부처가 이 북쪽 시골마을을 너무 잘 안다. 하긴 중요한 거 아니다.

  프랜시는 지난 겨울에 유일한 친구 조를 사귀었다. 중산층 가구의 외아들인 조는 프랜시가 어떤 집의 아들인지, 학교에서도 어떤 아이인지 잘 알면서도 한 마디로 말해, 처한 처지에 관계없이 꽝꽝 언 개울 위에서 얼음을 깨며 놀다가 친구가 되었다. 조의 입장에서 비슷한 부류인 전학생 필립의 집에 놀러가는 건 아무 문제가 없어서, 프랜시도 함께 묻어 갔다. 놀다가 당연히 나중에 돌려줄 생각이었지만 필립의 만화책 한 세트를 슬쩍 들고 나와, 프랜시의 방에서 조와 재미있게 봤다. 물론 정말 돌려줄 생각이었는지, 필립이 돌려달라고 해야 그렇게 했을지, 그건 모르겠다. 이걸 누전트 부인이 알았다. 그래서 누전트 부인이 프랜시의 집으로 찾아와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오지도 않은 채 프랜시의 엄마한테 말했다.

  “부인, 아비가 아침부터 밤까지 주점에 널브러져 아예 집에 안 들어오는 집에서 달리 무엇을 기대하겠어요? 그런 아버지는 돼지보다 나을 게 없어요.”

  독일에서 죽고 싶은 마음이 들면, 지나가는 스킨헤드족을 세워놓고 그에게 “Schwein!”이라고 한 마디만 하면 이 말을 들은 스킨헤드가 당신의 소원을 즉각 들어준다. Schwein. 돼지라는 뜻이다. 세계대전 때마저 독일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아일랜드에서도 ‘돼지’가 최고의 모욕적인 욕이었을까?

  하여간 이 일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 이제 암퇘지가 된 엄마는 식탁에 올라가 아버지의 전선을 목에 감고 매달리려 했다가 천국의 즐거움을 찾아가지 못하고 대신 정신병원으로 실려가는 일이 벌어졌다.

  며칠 후, 동네를 지나가던 누전트 여사와 필립 누전트를 발견한 프랜시. 느긋한 걸음으로 여사 앞에 선 그는 부인에게 이 길을 지나가고 싶으면 세금을 내라 요구했다. 이른바 “돼지 통행세.” 한 번에 1실링. 부인이 프랜시를 밀치고 지나가려 하지만 프랜시는 조금도 밀리지 않는다. 그가 말한다.

  “망할 놈의 세금. 그런 걸 내야 한다니 너무 하죠?”

  프랜시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오늘은 처음이니까 특별히 무료로 지나가게 해준다.

  며칠만에 정비소,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엄마.

  “우리는 누전트 식구들처럼 되면 안 돼. 그 인간들을 닮으면 절대 안 돼! 우리가 그 인간들한테 본때를 보여줄 거야, 그렇지 프레시?”

  이제 프랜시가 누전트 가족, 특히 누전트 여사를 겨눈 악감정은 절대 사라질 수 없다. 엄마가 퇴원하면서 사 들고 온 레코드를 건다. 이 노래의 제목이 <푸줏간 소년>. 2절 가사만 옮긴다.


  그는 이층으로 올라가서 문을 부쉈어

  그녀가 밧줄에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지

  그는 칼을 꺼내서 줄을 자르고 그녀를 내려주었어

  그녀의 주머니 속에 이런 말들이 있었어


  프랜시는 누전트 가족이 집에 없는 사이에 담을 넘어 들어가 첫번째 사고를 쳐서 소년원 정도의 시설에서 반년을 지내고 온다. 노래 가사의 방식으로 죽는 일에 실패한 엄마는 결국 강바닥에서 건져 올려지고, 돌이킬 수 없이 알코올 의존증에 빠져버린 아버지와 먹고 살기 위하여 정말 “푸줏간 소년”이 되어 호텔의 음식쓰레기를 수거하고, 돼지 도살장에서 진짜 돼지한테 충격 총을 발사하는 프랜시스 브래디. 자신이 저지른 비행으로 소년원을 다녀오고, 이 사이에 필립과 친해진 절친 조와 눈에 띄게 사이가 벌어져, 조의 부모도, 조 자신도 더 이상 프랜시와 가까이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그럴수록 조와의 관계에 집착하는 프랜시.

  오직 더욱 심각한 오해와 집착과 사고만 남아 있는 저 먼 북국의 쓸쓸하고 잔인한 일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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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25-09-16 1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닐조던이 감독한 영하로도 있는데 원작 소설이 있었군요. 본 영화는 아니지만, 관객들에게 평이 꽤 좋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영화 포스터에 어떤 소년이 칼들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무래도 슬픈 결말이겠지요.
서른 살때 더블린에 딱 한번 가봤는데 식당에서 시킨 음식을 거의 못먹고 나온 기억이 납니다. 배고픈 상태였는데, 제가 절대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데, 도저히 못먹을 음식이었지요. ㅜㅜ
어디선가 아일랜드 사랃믈이 너무 가난하게 살아서 음식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다는 글을 봤는데 못살긴 우리나라도 못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거 참.... 아일랜드 시민들이 불쌍했어요. 그런 음식을 평생 먹어야 한다니.
콧대높은 런던 사람들에 비해 엄청나게 친절했던 기억은 납니다. 나름 서울에서 직장생활 하던 저에게는 더블린이 우리나라 지방 도시 처럼 한적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그런데 저런 소외된 소년이 벌이는 범죄의 심각성이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게 무섭네요.
어느 시대나 비슷한 걸까요.

Falstaff 2025-09-17 05:50   좋아요 1 | URL
위키피디아에 연극버전이 있다고 해서 그런 줄만 알았는데 영화로도 만들었군요. 근데 볼 마음은 나지 않습니다. 인상 깊은 작품이긴 하지만 스트레스가 만만하지 않더군요. 이제는 그런 영화 사양입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친절하군요. 오호. 저도 아일랜드한테 괜한 호감이 있습니다. 빨간 머리 뉴욕 깡패들. ㅋㅋㅋ 지금은 세상에서 제일 부자 나라라는데 먹는 것 좀 나아지지 않았을까요? 나아진 것이 그 수준이었나, ㅋㅋㅋ
 
핌·오렌지빛이랄지
이상우 지음 / 민음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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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집 《프리즘》 읽고 눈이 번쩍 떴다. 벌써 3년 반 전이다. 하여튼 세월 정말 빠르다. 당시 <중추완월>은 곱게 늙어가고 있는 내 입장에선 과한 누아르였지만 다른 작품들은 아,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전위가 이런 형태의 작품일지 모른다 싶을 정도로 인상 깊었다. 이상우의 이름을 기억하고, 눈에 보이면 탁 골라 읽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3년 반이 넘어서야 이이의 책을 읽은 건 역시 그동안 내 눈에 이상우의 다른 책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동네 도서관에 연두색 책 한 권이 올려져 있었다. 한 밤에 바이크를 타는 짧지 않은 노출시간으로 찍은 작은 사진이 있는 책. 표지엔 제목도 쓰여 있지 않았고, 오직 책등에만 작고 검은 글씨체로 제목이 박인 수수한 책. 수수를 넘어 촌스럽기도 하고, 도무지 팔아먹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책. 그래서 책 나오고 2년이 가까워서야 도서관 신간 코너에 전시될 수 있었던 책. 그게 이상우의 《핌 ∙ 오렌지빛이랄지》였다.

  독후감을 쓰기 위하여 이 책을 검색해봤더니, 세상에나, 원래 책은 화려무비한 이미지를 앞뒤로 삽입한 양면 책 커버를 자랑한 거 같다. 도서관에 책을 진열하려면 바로 그 양면 책 커버를 관리하기 힘이 들 것이라 여겨 그걸, 출판사가 심혈을 기울여 조잡하게 만든 양면 커버를 제거하고 알몸의 책만 진열해 놓은 것이었다. 민음사도 이건 몰랐을 걸?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곤혹스러웠던 건 이상우의 표현 방식이나 조사를 많이 생략한 문법이나, 의도적으로 길고 길게 쓴 문장이나 뭐 그런 것보다도, 오후 세시에 약속한 치과에 가서 임플란트 시술을 위하여 뼈 이식 받고 꿰맨 실을 뽑는 거였다. 시간에 맞게 도착하려면 《핌 ∙ 오렌지빛이랄지》를 다 읽을 수 없을 터인데, 첫눈에 보면 분명 단편집이라, 정해진 시간 안에 가장 효과적으로 많은 분량을 읽기 위하여, 아무 생각 없이 읽는 순서를 앞뒤로 왔다리갔다리 해가며 읽었다는 거였다. 책을 다 읽고 든 생각은, 제일 바보 같은 짓이었다는 거. 이게 말로만 작품집이지, 책 표지 어디에서도 단편집이다, 연작 장편이다, 장편이다, 단편이기는 한데 (만일 이런 장르가 있다면)연작 단편이다, 이 비슷한 설명 한 줄이 없다. 다만 책 뒤에 여섯 작품을 발표한 지면과, 두 작품은 미발표임을 밝히는 페이지가 있을 뿐. 그러나 책 속에서 인물은 작품들의 여기저기에 출몰하며 서로 관계를 이어간다. 즉 소설집이긴 한데 이왕이면 책에 실린 순서대로, 될 수 있으면 앉은 자리에서 한 방에 읽어 치우는 게 대빵이란 말씀이다.

  그리고 또 곤란했던 점은 《프리즘》에 비해 내게는 너무 높은 진입장벽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음악도 랩과 비밥 등 내가 단 한 번도 즐기지 못했던, ‘않았던’이 아니라 전혀 친해질 수 없어서 즐기지 못했던 장르인 것이 확실하고, 따라서 뮤지션 역시 이하동문이며, 약물과 소통의 공간과, 다양한 이름을 가진 인물과, 세상 곳곳을 무대로 하는 확장. 작가는 특히 <핌>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알린다.


  “이 소설은 웹 플랫폼 인터렉티브 형식 소설을 청탁받아 쓰였다.”


  웹 플랫폼까지는 어떻게 이럭저럭 알아듣겠는데 ‘인터렉티브 형식 소설’에 와서 대략 난감. 어떤 의미인 줄 알지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좋아져 검색해봤다. 내가 이해한 바는 관객, 독자가 함께 참여하는 소설 형식쯤 된다. 근데 문학에서 그게 가능할까? <핌>은 2021년에 웹플랫폼 “dddd”의 청탁을 받고 쓰긴 썼는데 발표하지 않은 작품이다. 이게 소설 형식으로 어떻게 가능할까? 예를 들어

  ①금 간 유리창 / ② 문 / ③낙서된 의자 / ④벽 / ⑤녹슨 봉

  이렇게 해 놓고 페이지를 넘기면

  “아무래도 홀로그램 같은 눈송이였는데 온천으로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를 이마로 받아 내어 눈 감는 원숭이들의 표정이 눈처럼 쌓이는 꿈을 떠올리면서 쌓이고 날리듯이 소음이 흔들리는 바닥으로부터 기다랗게 앞 칸과 이어지는 복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지린내 묻은 좌석들 너머 덜컹거리는 통로를 지나 앞 칸의 빈 좌석들이 보이고, 코너 따라 조금씩 휘어지는 전철의 창밖으로 바람소리와 빌딩들이 무너져 빌딩의 높이로 날아가는 몇 자기부상순찰차들의 불빛이 폐쇄된 시가지를 훑고 지나갔다.” (p.60)

  이런 문장이 뒤를 잇는다.

  그럼 위의 ①~⑤가 웹플랫폼 “dddd” 혹은 참여자가 제시했거나 작품을 시작하고나서 끼어들어와 툭 던져놓은 단어들일까? 아니면 이상우가 직접 다섯 가지 단어를 나열하고 이에 맞는다고 생각하는 긴 문장을 쓴 것일까? 그럼에도 나의 근본적인 물음은 “웹 플랫폼 인터렉티브 형식 소설”이 어떤 형태일까, 하는 점이었다.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런 경우가 또 있었다. 빅토르 펠레빈의 작품 <스너프>, 리처드 파워스의 <갈라테아 2.2>를 읽으면서도 이 책에 못지 않는 진입장벽에 고생한 기억이 있다. 그러나 <스너프>와 <갈라테아 2.2>에서의 장벽은 과학용어에 대한 장벽이었던 데 반해, 이상우의 《핌 ∙ 오렌지빛이랄지》 앞에 거대하게 가로놓인 장벽은 문화와, 표현방식을 포함한 의식 또는 세대 차이의 장벽이었던 것이고, 그리하여 펠레빈이나 파워스의 경우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이제 내 세대는 확실하게 뒷방으로 꺼져 드려야 하는 시간이다. 뒷세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알아서 즉각 꺼져주어야 하는 게 앞세대의 미덕이다.

  그렇다고 정말로 뒷방으로 꺼져서 숨만 쉬며 살 수는 없는 일. 아직 이상우 같이 글을 쓰지 않는 작가가 더 많으니 당분간은 이상우 성향의 작가만 피해 읽어보는 방향으로 하자.

  누구?


  이 책 《핌 ∙ 오렌지빛이랄지》의 113페이지에 쓰인 책 제목들.

  ① 인터내셔널의 밤

  ② 가정법

  ③ 모든 것은 영원했다

  ④ 담배와 영화

  ⑤ IMF 키즈의 생애

  이런 것을 쓴 작가들. 순서대로 박솔뫼, 오한기, 정지돈, 금정연, 안은별.

  이 페이지를 보면서 조금 놀랐는데, 이상우는 아직도 후장사실주의 사람들과 문학적 교류를 하고 있는 모양이지? 하긴 인터넷 책광고를 보면 박솔뫼의 극찬이 붙어 있기는 하지. 나는 ①~③까지 읽어봤다. 이 책들 읽으면서는 《핌 ∙ 오렌지빛이랄지》만큼 난감하지 않았었는데…. 혹시 아직까지는 이상우만 그런 거 아닐까 싶기도 하고.

  하여간 그렇다. 내가 읽기에는 과하게 큰 장벽이 놓였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리 말한다고 작가여, 언짢게 생각하지 마시라. 이렇게 문학은, 예술은 발전하는 것이라는 걸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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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15 1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Falstaff님이 이정도 난감한 장벽이면 저는 뭐 시도도 안하렵니다. 저는 아직도 서사가 좋은 책이 좋네요. ^^

Falstaff 2025-09-15 19:36   좋아요 1 | URL
아휴, 바람돌이 님도 참. 제가 뭐라고요. 걍 팍 읽어보셔요. 읽는 시간도 별로 걸리지 않습니다. 다만... 내돈내산하자면 좀 그러니까 도서관 가셔서.... ㅎㅎㅎ
 
역사의 끝까지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6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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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태 루이스 세풀베다를 잘못 알고 있었다. 아마존 밀림에서 난폭한 한 재규어를 사냥하는 <연애소설 읽는 노인>만 읽고 왜 이 작품을 쓴 작가를 그렇게 높이 상찬을 하는지 조금 의아해했다. 얼마나 큰 고통을 참을 수 있는 지를 보여주려고 강을 따라 들어온 술 취한 발치사한테 앞니 다섯 대를 뽑아버리는 원주민 청년 이야기도 기억난다. 맞다. 읽고나서 11년이 지났어도, 짧은 소설이었지만 작품 속 자잘한 에피소드를 여태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 인상깊게 읽지 않았나 싶다. 물론 재규어 사냥이 라틴아메리카 각국의 정체政體를 상징하는 측면이 있더라도 그렇게 특징적이지 않아서, 이후에도 세풀베다의 이름을 자주, 곳곳에서 들어볼 수 있었으나 크게 관심을 쏟지는 않았다. 괜히 그랬다. 진작에 이이의 작업을 쫓아볼 것을.


  <역사의 끝까지>에서 ‘역사’는 무엇일까? 20세기 역사이다. 러시아의 차르가 처형당하고 들어선 볼셰비키. 이 정권에 대항해 자신들의 독립국, 아니면 적어도 자치령 정도는 확보하고자 하는 카자흐족. 크게 이야기하지 말고 이 마지막 카자흐족의 아트만(책에서는 ‘아타만’) 즉 최고 지도자 미겔 크라스노프의 예만 드는 것이 좋겠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고 채 2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백군과 카자흐족의 아트만인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크라스노프에 의하여 포위되어 있었다. 이 두 부대에 강력하게 저항해 끝까지 수도를 지키고 급기야 카자흐의 아트만을 포로로 잡은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 우리가 ‘트로츠키’로 알고 있는 지도자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승리자의 넓은 아량으로 자신의 한 목숨을 건지려 하는 간곡한 호소를 듣고 있었다. 크라스노프 스스로 예카네리노슬라프에서 50여 명의 노동자들을 한 줄로 목매달아 죽인 적이 있거늘 한 무리의 지도자가 어찌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할 수 있을까? 그러나 트로츠키는 다시는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 그를 풀어주고 혁명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비겁한 아트만 같은 이를 순교자로 만드는 것은 도리어 반혁명 세력을 강화시킬 뿐입니다. 반대로 그들을 약화시키려면 이처럼 치욕적인 패배만큼 좋은 방법도 없지요.”

  이후 크라스노프 가문은 자기에게 협력하면 카자흐 공화국을 세우는 데 적극 협조하겠다는 히틀러의 꼬임에 넘어가 독일군 복장을 입고 2차 세계대전 속으로 자진해 들어갔으며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어, 연합군, 특히 미군 상륙 이후 북부로 밀리자 그곳에서 히틀러의 약속대로 조그마한 땅덩이를 얻어 잠시 자신들의 나라를 세워 보기도 했다. 히틀러가 패망하자 갈 곳이 없어진 카자흐. 많은 카자흐 사람들은 그래도 고향을 찾아 우크라이나 동쪽 카자흐 지역으로 돌아갔고, 크라스노프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은 고향으로 가봐야 좋은 꼴이 기다리지 않을 것이 확실해 독일인 전범자들과 함께 라틴아메리카로 향했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볼셰비키 혁명군에게 저항하고, 나치 파시즘 쪽에 서서 숱한 사람을 학살하고 고문하는 것. 아마도 저 앞의 표트르 크라스노프의 손자 정도 되는 미겔 그라스노프는 칠레에 들어와, 아옌데 정권을 몰락시킨 피노체트 측에 붙어 정치범 고문과 살해로 세상에서 둘도 없는 악명을 떨친 비아 그리말디 형무소에서도 가장 악랄한 고문과 강간과 살인을 밥 먹듯 자행했다.

  저자 루이스 세풀베다도 결국 이 시절을 견디지 못하고 조국 칠레를 탈출해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를 거쳐 파리, 독일, 최종적으로 북부 스페인에 정착해 그곳에서 가족과 한 평생을 살았다.


  작중 주인공이자 화자 ‘나’ 후안 발몬테는 칠레를 탈출해 소비에트 기갑부대 소속 로디온 말리놉스키 군사학교에 들어가 강도 높은 게릴라 훈련을 받았다. 훈련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위 “인간병기”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넘겨 짚으면 된다. 이 가운데 ‘나’는 주인공이니까 당연히 가장 우수한 재원 가운데 한 명으로 특히 저격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해 스나이퍼로 특별하게 육성하는 과정을 밟았다.

  ‘나’가 이곳에 오기 전에 칠레에서의 사랑. 동지이기도 했던 베로니카. 아옌데 피살 후 쿠데타에 반대하기 위한 작은 내전 또는 저항운동에 참가했다가 공권력에 검거되어 드높은 악명을 즐기는 비아 그리말디에 수감되어 갖은 고문을 당했다. 그래도 끝까지 한 명의 이름도 대지 않아 결국 호흡을 멈춘 베로니카는 옷이 벗겨진 채 다른 시신들과 함께 쓰레기장에 그냥 버려졌다. 마침 이곳을 지나던 아니타라는 이름의 아주머니가 시신들을 보더니, 베로니카가 아주 약하게 숨을 쉬고 있는 것을 발견해 용감하게도 자기 집으로 데려가 보살펴 주었지만 실어증에 걸리고 말았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후 ‘나’는 파라과이 혁명을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각국의 게릴라전에 참여해 명성을 쌓은 후 독일 함부르크로 옮겨 활동을 이어갔는데 이유는 오직 하나, 덴마크에 있다는 고문 후유증 전문 치료 병원에서 베로니카를 돌보는 것이었다. 베로니카는 이 병원에서 무려 18년간 치료를 받아, 상당히 개선되었지만 실어증은 여전했다.

  이후 ‘나’는 베로니카를 퇴원시켜 늙은 부하 페드로 데 발디비아와 함께 파타고니아가 바라보이는 칠레 남단 푸에르토 카르멘에서 평화롭게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예순여섯 살까지는.


  1970년대 중반에 악명을 날리던 미겔 크라스토프는 산티아고 코르디예라 교도소에 120년 이상의 형기를 받아 수감되어 있었으며 여전히 여죄에 대한 재판이 진행중이었다. 이때 마치 볼쇼이 발레단의 의상과 비슷한 차림을 한 카자흐 사람들이 대통령 궁에 들어가 칠레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1973년 피노체트 쿠데타에 반대한 이유로 감옥에 갇혀 살해당한 아르투로 미겔 마르티네스 공군장군의 딸인 바첼레트 대통령은, 마지막 카자흐 아트만인 악당 미겔 크라스토프를 석방하여 카자흐로 보내달라는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이것저것 봐주기에는 크라스토프의 죄질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시 모인 어제의 용사들. 누구인지 모르는 한쪽 편 계승자의 제안으로 칠레계 두 러시아인 에스피노사와 살라멘디, 그리고 세 명의 카자흐 병사를 칠레로 잠입시켜 코르디예라 형무소를 폭파해 마지막 아트만이자 카자흐의 영웅이라 알려진 악마 미겔 크라스토프의 탈옥 작전에 돌입했다. 그러자 반대쪽은, 이미 팍 늙어버린 소련의 군사학교 시절 두 명의 교관을 대표로 ‘나’ 후안 벨몬테에게 이 작전 수행자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긴다. ‘나’ 후안 벨몬테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 차마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는 ‘나’는 푸에르토 카르멘을 떠나 무더운 2월의 산티아고에 도착해 불과 며칠만에 이들의 행방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자신이 노출되었음을 알게 된 적들은 그날로 소음기를 단 소총으로 거친 카자흐 병사 셋의 이마에 구멍을 내고 SUV를 몰아 집을 나서다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잠복하고 있던 ‘나’를 만난다. 차의 창문을 내리고 눈이 마주치자 비록 30년만에 만나는 옛 동료였더라도 한눈에 알아본다. 하지만 엄연히 적대적 상대이다.

  살라멘디가 말한다. “실력이 여전하군, 벨몬테. 다시 만나서 반갑네, 동무.”

  ‘나’도 대답한다. “이고르, 자네도 마찬가질세. 이 부근에 잘 아는 클럽이 있는데, 거기서 와인이나 했으면 좋겠군.”

  에스피노사가 소음기를 단 우지 자동소총을 든 채 다시 대답한다. “지금은 급해서 안 되겠어. 하지만 언젠가 시간이 나겠지.”


  언젠가 시간이 나겠지? 그렇다. 시간이 난다. 이들은 벌써 체코의 고위 정보기관 소속 정보원을 통해 ‘나’ 후안 벨몬테의 모든 사생활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으며, 따라서 다음날 아니타 아주머니 집으로 피신한 베로니카와 페드로를 인질로 잡아 버리는데 성공한다.

  이제 어떻게 될까? 아마도 당신 생각과 완전히 다른 쪽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것이다. 루이스 세풀베다가 이야기하는 “역사의 끝”이 무엇인지는 이 책을 다 읽은 사람만 알게 되도 좋다. 아쉬운 건 벌써 품절도 아니고 절판이라는 거. 어쩔 수 없이 헌책방이나 도서관을 찾아야 세풀베다의 매력적인 마지막 장편소설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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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12 0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을 진짜 어렵게 읽었었어요. 읽기가 쉽지 않았던....너무 묵직하기도 했고요. 그래도 뭐라도 썼나 살펴봤더니 밑줄긋기만 했네요. 너무 무거워서 어떻게 리뷰를 쓰야 할지 잘 몰랐던거 같은데 덕분에 이 책을 다시 소환해서 보네요.

Falstaff 2025-09-12 15:36   좋아요 1 | URL
묵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재미난 걸요. 장담하건대 다시 읽으시면 그런 생각 안 드실 겁니다. ^^

yamoo 2025-09-12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ㅎㅎ 별 5개 출현! 그럼에도 세풀베다는 제가 애정하는 작가라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세풀베다 책은 다 모았습니다..ㅎㅎ 23년 이후에 발간된 책은 아직 소장하고 있진 못하지만요..ㅎㅎ 세풀베다 소설작품은 거진 다 읽었는데 열린책들에서 많이 출간해 줘서 열린책들 판본은 다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저는 감상적 킬러의 고백이 가장 재밌었습니다. 블랙 코미디적인 면이 아주 좋았다는..
세풀베다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이 아주 탁월한 작가인듯해요. 헌데 가벼운 듯한 플롯 속에 담긴 주제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세풀베다는 제게 주제의 진정성을 이야기로 쉽게 풀어내는 작가로 각인되어 있어요. 그래서 아주 좋아라 합니다..ㅎㅎ

Falstaff 2025-09-12 15:38   좋아요 0 | URL
제 휴대폰 앱 북적북적에서는 4.5인데요 차마 4별은 넘 아쉽다, ㅋㅋㅋ 이런 수준이었습니다.
야무님 핑계로 세풀베다 집중 탐구 들어갈 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정소영 옮김 / 엘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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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에 읽은 시그리드 누네즈의 작품 <그해 봄의 불확실성>과 마찬가지로 1인칭 화자 ‘나’는 작가 자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결혼하지도 않고 자식도 낳은 적 없이 노년에 접어든 여성 작가. 다분히 여성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으나 남녀 대립으로 치닫지 않고 서로의 다름을 기꺼이 인정해 읽기가 많이 부드럽다. 동시에 기후위기에 관한 지구적 의식과 실행을 바라고 있다. 아쉽게도 기후는 이미 원래 상태로 돌이킬 수 없는 단계까지 접어들었으나 이에 관해 관심 없는 극우파 권력이 미국과 유럽을 점령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누네즈의 관심은 죽음이다. 죽어도 잘 죽는 것. 소위 ‘웰 다이잉’이라는 것. 그리하여 암에 걸려 시간이 별로 남지 않은 친구를 등장시킨다. 20대 초반에 같은 문학잡지사에 근무하면서 알게 됐고, 이후 각자 글을 써서 ‘나’는 작가이자 학교 교수를 하고 있다. 친구도 거의 비슷한 경로를 걸었지만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싫어했다. 싫어했다니까 가르쳐 보기는 했다는 뜻이다. 지금 암에 걸려 방사능 치료까지 다 마쳐 극적으로 건조한 피부, 근소실, 탈모 상태로 진행했으나 책에서 처음 ‘나’가 입원한 친구를 만나러 갔을 때는 그나마 치료가 효과를 보여 일단 생존율이 상당한 수준으로 좋아졌을 때였다.

  부르주아라고 하지는 못하겠지만 상당한 수준의 중산층에서 외동딸로 태어난 친구는 어린 시절부터 부족한 것을 모르고 살았다. 매사에 부모의 지원이 있었고, 그렇다고 버릇없는 사춘기를 지내지는 않았다. 그때부터 누구나 다 그러하듯이 부모의 결정이 친구의 결정에 영향을 끼치는 일이 확연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 평범한 같은 반 남학생과 사귀었지만 한 번도 그를 사랑하거나 사랑 비슷한 감정을 느껴보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남들 다 하는 섹스를 기피한 것도 아니다. 졸업할 시기가 와서 이제 잠시동안 섹스를 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소위 이별 섹스를 했는데, 하필이면 마지막 섹스에서 덜커덕 임신해 딸을 낳았다.

  부유한 집에서 외동딸을 낳았으니 외동딸은 당연히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우고 엄마는 대학 공부를 마쳤다. 육아의 부담이 없었으니 대학원 과정도 마쳤고, 글을 썼고, 천성이 정력적이라 점점 작가와 강연자로 이름을 날렸다. 하다보니 미국의 전국구 작가요 전국구 강연자가 됐다.

  그러나 딸과의 관계는 처음부터 빗나가 있었다. 딸이 소녀 시절을 지낼 때부터 모녀 사이에 파란만장한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딸의 유년시절에 엄마에 관한 기억이 없었으니 애초에 다른 가정과 비슷한 모녀관계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딸이 사춘기를 시작하자 서로가 서로에게 뼈 있는 말 또는 날이 새파랗게 선 말을 무차별 난사하는데 이골이 나버렸다. 당연히 가족 앨범을 들춰봤을 것이고, 딸은 먼 시절 자기의 생물학적 아빠의 사진도 발견했을 터, 아빠의 부재는 사진 속 젊은 모습의 아빠를 실재보다 훨씬 거대한 존재, 용감한 군인으로 여겼으니, 얼마나 로맨틱한 아빠였느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친구가 만나는 모든 남자에게 딸은 깊고 강한 적개심을 가졌다. 그러지 않은 경우가 딱 한 번 있었다. 이 때는 대신 엄마의 남자, 양아버지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지만, 하여간 엄마의 남자를 유혹해 기어이 엄마로부터 가로채 버렸다. 이제 엄마가 암에 걸려 삶과 죽음이 5대 5의 확률로 떨어지니 모녀간의 긴장도 조금 누그러진 것 같다. 하지만 딸은 엄마의 죽음에 깊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처음 암 진단을 받은 친구는 활달하고 정력적인 성격과 달리 고생스럽게 암을 치료하거나 수술받지 않고 조용히 고통 치료만 받으며 생을 접겠다고 선언했다. 아직 그렇게 생을 포기할 정도로 늙지 않았다고 생각한 의료진은 수술과 치료를 권했다. 이때 딸이 엄마를 만나러 병원에 왔다. 딸의 의견은 전적으로 엄마의 뜻, 엄마의 선택에 달렸다는 것. 죽거나 말거나. 이런 과정을 거쳐 친구는 1차 암 제거 수술을 받아 어마어마한 병실료를 내면서도 1인용 독실에 입원해 있었고, 그리하여 ‘나’의 첫번째 면회가 이루어진 거였다.


  2017년 9월 셋째 주. ‘나’는 에어비엔비를 통해 숙소를 얻었다. 남편과 사별하고 은퇴도 한 전직 도서관 사서가 호스트인 작은 아파트의 맨 꼭대기 층이다. 친구가 입원한 병원과 3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시간상 친구 병문안 이후이지만 작품 순서로 치면 제일 먼저 ‘나’는 이곳 대학 강의실에서 저녁 시간에 있을 다른 지역 대학교수의 강연을 들으러 간다. 국제적인 상을 받은 유명 작가이다. 처음부터 말해버리자. 한 시절 ‘나’와 연애도 하고 동거도 하던 남자. 오래 전이라 이젠 헤어질 때 누구나 품게 마련인 조금 또는 일정 분량의 미움과 증오 그리고 혹시 모를 저주는 다 무뎌져 그저 편하게 강연을 들을 수 있었다. 객석에 옛 여자가 앉아 있는 걸 알면 조금 버벅거릴까봐 뒷줄 구석 자리를 잡았지만, 강사도, 숙소의 호스트도 자기가 강연을 들었다는 걸 다 안다.

  이 강사, 옛 애인이 강연에서 주장한 것이 기후변화. 기후변화를 막기엔 이미 시기적으로 글렀다는 거다. 이미 다 끝났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우리가 저질러온 참담한 실수를 제 시간에 만회하기에는 우리 사회가 이미 너무나 파편화되었고 제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지구가 나날이 뜨거워지고 있는데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탄소 클럽에서 탈퇴를 선언했다. 탄소배출을 극단적으로 꺼려해 비행기를 타지 않는 툰베리는 아메리카에서 열리는 탄소 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스웨덴에서, 오직 자신 한 명의 참가를 목적으로 물론 돛도 달렸겠지만 상당한 만큼은 엔진의 힘으로 항해하는 커다란 요트 한 척을 끌고 온다.

  옛 애인은 강연에서 심지어 더 이상의 출산도 미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아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어마어마한 고통 말고 별로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찌 아이를 만들 수 있느냐고. 이 주장을 펼칠 때 객석은 잠시 요동치고 부글거린다. 그러나 질의응답조차 받지 않겠다는 강사의 강연이 끝났어도 청중의 태도는 온순하다. 분명히 마땅하지 않은 기색이다.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자신들의 미래는 암울하고, 자식 세대의 미래는 더 암울하다는데 강연이 마음에 들 턱이 없다. 심지어 강사는 이렇게 주장하기도 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지금 임신한 여성들이 모두 임신중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중략) 아이들이 사는 동안 지구가 전혀 살 수 없는 곳이 되진 않더라도, 황량하고 무시무시한 곳으로 변할 가능성이 농후한데, 그런 세상으로 한 인간을 불러내는 일이 어쩌면 잘못인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나’의 첫번째 병문안은 이렇게 끝난다. 비싼 1인용 병실에 누워 있는 친구의 상태가 “당장은 파티장을 떠나지 않아도 될” 수준인 것을 확인한 후에, 옛 애인의 강연을 듣고 와, 다음날 아침 돌아오는 것으로.


  강연장에서 ‘나’를 알아본 옛 애인은 ‘나’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내 다시 둘 사이에는 건조하지만 세월 덕분에 친밀한 감정이 살아나 계속 전화와 메일, SNS를 통한 연락이 이어진다. 그리고 친구는 갑자기 암이 여기저기로 전이되어 이제 생존율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그리하여 다시 그 병원으로 친구를 보러 가야 했고, 이번엔 에어비앤비 대신 작은 호텔에 짐을 풀었다.

  친구는 마지막을 생각하고 있다. 몸에 꽃혀 있는 무수한 관과 튜브를 다 제거하고 퇴원하려 한다. 이제 차분하게 죽음을 기다리겠다는 심정. 그러나 호스피스 요양원에서 볼품없이 죽어가기 싫어 어둠의 경로를 통해 짧고 안락하게 죽는 약을 손에 넣는데 성공했다. 친구는 ‘나’에게 요구한다. 자신과 함께 마지막을 보낼 수 있는 곳으로, 거기가 어디든지 간에, 가서 드디어 때가 됐다고 생각, 결정을 하면, 어떤 식으로든지 몸에 약이 들어가 죽어갈 때, 자기 옆에 있어달라고.

  ‘나’는 그렇게 하기로 한다. 이렇게 말기 암환자인 친구와 ‘나’는 죽을 자리를 향해 떠난다.

  펜데믹 시절을 다룬 <그해 봄의 불확실성>보다 재미있게 읽었으나 인상 깊지는 않았다. 나는 긴 병에 학을 뗀 사람이라 잘 죽는 것에 무지하게 관심이 있다. 생각도 많다. 이 책을 읽는 일도 그런 생각 가운데 하나 정도. 그렇지 뭐.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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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5-09-11 1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그 날이 오면 잘 죽고 싶은데 상황이 어찌될지.. 어둠의 경로로 어떻게 약을 구하고 싶은 마음 굴뚝이네요-_-;;;

Falstaff 2025-09-12 03:24   좋아요 1 | URL
어둠의 경로를 아는 사람이라면 나중에 어떻게 될 지 몰라도 일단 구하고 보겠네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ㅎㅎ

케이 2025-09-12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죽는 법이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냥 하늘에서 점지해주는 방법 외에는 없는 것 같아요.
돈을 싸들고 가서 해외에서 편안하게 죽는다한들 시신은 누군가가 비행기로 들여와야 하잖아요.
엊그제 장례식장 다녀온 남편에게 말했어요. 나도 78살에 죽고 싶다고. (고인이 78세에 돌아가심)
문득 우리 친아버지, 시부모님이 늙으면 난 어찌되는 건가 생각하면 가슴이 턱 하고 막힙니다.
어떤 여행객이 울릉도 여행가서 택시 탔는데 택시 기사님이 필승 자살법 알려줬다며 동영상 올린 걸 봤는데 그 분 말씀으로는 복어독 먹으면 절대 실패확률 없다네요 ㅋㅋㅋㅋ 심폐소생술이고 뭐고 다 필요없이 바로 죽는다는 ㅋㅋㅋ
근데 복어독을 빼내는 것도 위법이겠죠. 결국 내가 복어를 잡는 방법 밖에는 없어요 ㅋㅋㅋ
와 정말 쉽지 않네요!! 웰다잉이라는 거.
그냥 하늘에 빌어보렵니다. 알맞은 나이에 편히 죽게 해달라고.

Falstaff 2025-09-12 15:33   좋아요 1 | URL
요즘엔 복어 독 먹어도 재수 없으면 살더라고요. TV에서 가끔 보던 현석이라는 연기자도 복어 먹고 저 세상 가까이 갔다가 살았잖아요. 근데 문제는 회복된 후에 빌빌빌빌...
세상에서 제일 맛나는 음식이 복어 내장탕이랍니다. 앞뒤 가리지 않고 걍 쓸개만 빼고 아 고향맛이야, 다시다 좀 뿌리고 청양고추 팍팍 넣어 매운탕 끓여 먹으면 장땡인데요.....
이건 제 어머니가 마산 피난 가서 이런 방식으로 손주들 키우는 할매가 손주들과 함께 세상 하직했던 방법이라고 가르쳐주시고 떠났습니다. ㅋㅋㅋㅋ 참 괜찮은 어머니셨어요.
정 죽기가 희망이면 어시장 가서 생물복 사면 됩니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진짜 중요한 건 정말로 그 복어 내장 매운탕을 먹을 수 있느냐, 하는 겁지요.

Falstaff 2025-09-12 15:34   좋아요 1 | URL
아이고 참. 지금 취중 댓글입니다. 세상에나....

케이 2025-09-12 15:46   좋아요 1 | URL
생물 복어도 기능사가 있어야 살 수 있나봐요. 남편이 어디 사연 보니까 복어 독 빼고 팔아야 하는데 독 있는거 팔았다고 수산업자가 신고해서 그 지역 경찰들 다 위치 추적하고 난리 부르스 해서 결국 독있는 복어 사간 사람을 버스에서 찾은 사건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저희 어머니 돌아가실 때 보니 연명치료거부라는 것도 산소호흡기 떼주고 그런 수준의 적극적 안락사 수준은 아니더라고요. 결국 저 지경까지 가야 연명치료거부도 해주는 거구나. 싶어서 좀 무서워졌답니다.
복어 먹고도 살 수 있다니. 거 참. 그렇군요. 필승 자살법 아니네요 그럼 ㅋㅋㅋ
어떤 사람은 살고 싶어도 별 것도 아닌걸로 죽고 또 어떤 사람은 죽어라 죽으려고 해도 살고.
그래도 건강하세요! 낮술은 좀 줄이시고.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