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정소영 옮김 / 엘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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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에 읽은 시그리드 누네즈의 작품 <그해 봄의 불확실성>과 마찬가지로 1인칭 화자 ‘나’는 작가 자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결혼하지도 않고 자식도 낳은 적 없이 노년에 접어든 여성 작가. 다분히 여성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으나 남녀 대립으로 치닫지 않고 서로의 다름을 기꺼이 인정해 읽기가 많이 부드럽다. 동시에 기후위기에 관한 지구적 의식과 실행을 바라고 있다. 아쉽게도 기후는 이미 원래 상태로 돌이킬 수 없는 단계까지 접어들었으나 이에 관해 관심 없는 극우파 권력이 미국과 유럽을 점령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누네즈의 관심은 죽음이다. 죽어도 잘 죽는 것. 소위 ‘웰 다이잉’이라는 것. 그리하여 암에 걸려 시간이 별로 남지 않은 친구를 등장시킨다. 20대 초반에 같은 문학잡지사에 근무하면서 알게 됐고, 이후 각자 글을 써서 ‘나’는 작가이자 학교 교수를 하고 있다. 친구도 거의 비슷한 경로를 걸었지만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싫어했다. 싫어했다니까 가르쳐 보기는 했다는 뜻이다. 지금 암에 걸려 방사능 치료까지 다 마쳐 극적으로 건조한 피부, 근소실, 탈모 상태로 진행했으나 책에서 처음 ‘나’가 입원한 친구를 만나러 갔을 때는 그나마 치료가 효과를 보여 일단 생존율이 상당한 수준으로 좋아졌을 때였다.

  부르주아라고 하지는 못하겠지만 상당한 수준의 중산층에서 외동딸로 태어난 친구는 어린 시절부터 부족한 것을 모르고 살았다. 매사에 부모의 지원이 있었고, 그렇다고 버릇없는 사춘기를 지내지는 않았다. 그때부터 누구나 다 그러하듯이 부모의 결정이 친구의 결정에 영향을 끼치는 일이 확연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 평범한 같은 반 남학생과 사귀었지만 한 번도 그를 사랑하거나 사랑 비슷한 감정을 느껴보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남들 다 하는 섹스를 기피한 것도 아니다. 졸업할 시기가 와서 이제 잠시동안 섹스를 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소위 이별 섹스를 했는데, 하필이면 마지막 섹스에서 덜커덕 임신해 딸을 낳았다.

  부유한 집에서 외동딸을 낳았으니 외동딸은 당연히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우고 엄마는 대학 공부를 마쳤다. 육아의 부담이 없었으니 대학원 과정도 마쳤고, 글을 썼고, 천성이 정력적이라 점점 작가와 강연자로 이름을 날렸다. 하다보니 미국의 전국구 작가요 전국구 강연자가 됐다.

  그러나 딸과의 관계는 처음부터 빗나가 있었다. 딸이 소녀 시절을 지낼 때부터 모녀 사이에 파란만장한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딸의 유년시절에 엄마에 관한 기억이 없었으니 애초에 다른 가정과 비슷한 모녀관계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딸이 사춘기를 시작하자 서로가 서로에게 뼈 있는 말 또는 날이 새파랗게 선 말을 무차별 난사하는데 이골이 나버렸다. 당연히 가족 앨범을 들춰봤을 것이고, 딸은 먼 시절 자기의 생물학적 아빠의 사진도 발견했을 터, 아빠의 부재는 사진 속 젊은 모습의 아빠를 실재보다 훨씬 거대한 존재, 용감한 군인으로 여겼으니, 얼마나 로맨틱한 아빠였느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친구가 만나는 모든 남자에게 딸은 깊고 강한 적개심을 가졌다. 그러지 않은 경우가 딱 한 번 있었다. 이 때는 대신 엄마의 남자, 양아버지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지만, 하여간 엄마의 남자를 유혹해 기어이 엄마로부터 가로채 버렸다. 이제 엄마가 암에 걸려 삶과 죽음이 5대 5의 확률로 떨어지니 모녀간의 긴장도 조금 누그러진 것 같다. 하지만 딸은 엄마의 죽음에 깊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처음 암 진단을 받은 친구는 활달하고 정력적인 성격과 달리 고생스럽게 암을 치료하거나 수술받지 않고 조용히 고통 치료만 받으며 생을 접겠다고 선언했다. 아직 그렇게 생을 포기할 정도로 늙지 않았다고 생각한 의료진은 수술과 치료를 권했다. 이때 딸이 엄마를 만나러 병원에 왔다. 딸의 의견은 전적으로 엄마의 뜻, 엄마의 선택에 달렸다는 것. 죽거나 말거나. 이런 과정을 거쳐 친구는 1차 암 제거 수술을 받아 어마어마한 병실료를 내면서도 1인용 독실에 입원해 있었고, 그리하여 ‘나’의 첫번째 면회가 이루어진 거였다.


  2017년 9월 셋째 주. ‘나’는 에어비엔비를 통해 숙소를 얻었다. 남편과 사별하고 은퇴도 한 전직 도서관 사서가 호스트인 작은 아파트의 맨 꼭대기 층이다. 친구가 입원한 병원과 3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시간상 친구 병문안 이후이지만 작품 순서로 치면 제일 먼저 ‘나’는 이곳 대학 강의실에서 저녁 시간에 있을 다른 지역 대학교수의 강연을 들으러 간다. 국제적인 상을 받은 유명 작가이다. 처음부터 말해버리자. 한 시절 ‘나’와 연애도 하고 동거도 하던 남자. 오래 전이라 이젠 헤어질 때 누구나 품게 마련인 조금 또는 일정 분량의 미움과 증오 그리고 혹시 모를 저주는 다 무뎌져 그저 편하게 강연을 들을 수 있었다. 객석에 옛 여자가 앉아 있는 걸 알면 조금 버벅거릴까봐 뒷줄 구석 자리를 잡았지만, 강사도, 숙소의 호스트도 자기가 강연을 들었다는 걸 다 안다.

  이 강사, 옛 애인이 강연에서 주장한 것이 기후변화. 기후변화를 막기엔 이미 시기적으로 글렀다는 거다. 이미 다 끝났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우리가 저질러온 참담한 실수를 제 시간에 만회하기에는 우리 사회가 이미 너무나 파편화되었고 제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지구가 나날이 뜨거워지고 있는데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탄소 클럽에서 탈퇴를 선언했다. 탄소배출을 극단적으로 꺼려해 비행기를 타지 않는 툰베리는 아메리카에서 열리는 탄소 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스웨덴에서, 오직 자신 한 명의 참가를 목적으로 물론 돛도 달렸겠지만 상당한 만큼은 엔진의 힘으로 항해하는 커다란 요트 한 척을 끌고 온다.

  옛 애인은 강연에서 심지어 더 이상의 출산도 미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아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어마어마한 고통 말고 별로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찌 아이를 만들 수 있느냐고. 이 주장을 펼칠 때 객석은 잠시 요동치고 부글거린다. 그러나 질의응답조차 받지 않겠다는 강사의 강연이 끝났어도 청중의 태도는 온순하다. 분명히 마땅하지 않은 기색이다.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자신들의 미래는 암울하고, 자식 세대의 미래는 더 암울하다는데 강연이 마음에 들 턱이 없다. 심지어 강사는 이렇게 주장하기도 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지금 임신한 여성들이 모두 임신중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중략) 아이들이 사는 동안 지구가 전혀 살 수 없는 곳이 되진 않더라도, 황량하고 무시무시한 곳으로 변할 가능성이 농후한데, 그런 세상으로 한 인간을 불러내는 일이 어쩌면 잘못인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나’의 첫번째 병문안은 이렇게 끝난다. 비싼 1인용 병실에 누워 있는 친구의 상태가 “당장은 파티장을 떠나지 않아도 될” 수준인 것을 확인한 후에, 옛 애인의 강연을 듣고 와, 다음날 아침 돌아오는 것으로.


  강연장에서 ‘나’를 알아본 옛 애인은 ‘나’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내 다시 둘 사이에는 건조하지만 세월 덕분에 친밀한 감정이 살아나 계속 전화와 메일, SNS를 통한 연락이 이어진다. 그리고 친구는 갑자기 암이 여기저기로 전이되어 이제 생존율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그리하여 다시 그 병원으로 친구를 보러 가야 했고, 이번엔 에어비앤비 대신 작은 호텔에 짐을 풀었다.

  친구는 마지막을 생각하고 있다. 몸에 꽃혀 있는 무수한 관과 튜브를 다 제거하고 퇴원하려 한다. 이제 차분하게 죽음을 기다리겠다는 심정. 그러나 호스피스 요양원에서 볼품없이 죽어가기 싫어 어둠의 경로를 통해 짧고 안락하게 죽는 약을 손에 넣는데 성공했다. 친구는 ‘나’에게 요구한다. 자신과 함께 마지막을 보낼 수 있는 곳으로, 거기가 어디든지 간에, 가서 드디어 때가 됐다고 생각, 결정을 하면, 어떤 식으로든지 몸에 약이 들어가 죽어갈 때, 자기 옆에 있어달라고.

  ‘나’는 그렇게 하기로 한다. 이렇게 말기 암환자인 친구와 ‘나’는 죽을 자리를 향해 떠난다.

  펜데믹 시절을 다룬 <그해 봄의 불확실성>보다 재미있게 읽었으나 인상 깊지는 않았다. 나는 긴 병에 학을 뗀 사람이라 잘 죽는 것에 무지하게 관심이 있다. 생각도 많다. 이 책을 읽는 일도 그런 생각 가운데 하나 정도. 그렇지 뭐.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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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5-09-11 1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그 날이 오면 잘 죽고 싶은데 상황이 어찌될지.. 어둠의 경로로 어떻게 약을 구하고 싶은 마음 굴뚝이네요-_-;;;

Falstaff 2025-09-12 03:24   좋아요 1 | URL
어둠의 경로를 아는 사람이라면 나중에 어떻게 될 지 몰라도 일단 구하고 보겠네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ㅎㅎ

케이 2025-09-12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죽는 법이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냥 하늘에서 점지해주는 방법 외에는 없는 것 같아요.
돈을 싸들고 가서 해외에서 편안하게 죽는다한들 시신은 누군가가 비행기로 들여와야 하잖아요.
엊그제 장례식장 다녀온 남편에게 말했어요. 나도 78살에 죽고 싶다고. (고인이 78세에 돌아가심)
문득 우리 친아버지, 시부모님이 늙으면 난 어찌되는 건가 생각하면 가슴이 턱 하고 막힙니다.
어떤 여행객이 울릉도 여행가서 택시 탔는데 택시 기사님이 필승 자살법 알려줬다며 동영상 올린 걸 봤는데 그 분 말씀으로는 복어독 먹으면 절대 실패확률 없다네요 ㅋㅋㅋㅋ 심폐소생술이고 뭐고 다 필요없이 바로 죽는다는 ㅋㅋㅋ
근데 복어독을 빼내는 것도 위법이겠죠. 결국 내가 복어를 잡는 방법 밖에는 없어요 ㅋㅋㅋ
와 정말 쉽지 않네요!! 웰다잉이라는 거.
그냥 하늘에 빌어보렵니다. 알맞은 나이에 편히 죽게 해달라고.

Falstaff 2025-09-12 15:33   좋아요 1 | URL
요즘엔 복어 독 먹어도 재수 없으면 살더라고요. TV에서 가끔 보던 현석이라는 연기자도 복어 먹고 저 세상 가까이 갔다가 살았잖아요. 근데 문제는 회복된 후에 빌빌빌빌...
세상에서 제일 맛나는 음식이 복어 내장탕이랍니다. 앞뒤 가리지 않고 걍 쓸개만 빼고 아 고향맛이야, 다시다 좀 뿌리고 청양고추 팍팍 넣어 매운탕 끓여 먹으면 장땡인데요.....
이건 제 어머니가 마산 피난 가서 이런 방식으로 손주들 키우는 할매가 손주들과 함께 세상 하직했던 방법이라고 가르쳐주시고 떠났습니다. ㅋㅋㅋㅋ 참 괜찮은 어머니셨어요.
정 죽기가 희망이면 어시장 가서 생물복 사면 됩니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진짜 중요한 건 정말로 그 복어 내장 매운탕을 먹을 수 있느냐, 하는 겁지요.

Falstaff 2025-09-12 15:34   좋아요 1 | URL
아이고 참. 지금 취중 댓글입니다. 세상에나....

케이 2025-09-12 15:46   좋아요 1 | URL
생물 복어도 기능사가 있어야 살 수 있나봐요. 남편이 어디 사연 보니까 복어 독 빼고 팔아야 하는데 독 있는거 팔았다고 수산업자가 신고해서 그 지역 경찰들 다 위치 추적하고 난리 부르스 해서 결국 독있는 복어 사간 사람을 버스에서 찾은 사건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저희 어머니 돌아가실 때 보니 연명치료거부라는 것도 산소호흡기 떼주고 그런 수준의 적극적 안락사 수준은 아니더라고요. 결국 저 지경까지 가야 연명치료거부도 해주는 거구나. 싶어서 좀 무서워졌답니다.
복어 먹고도 살 수 있다니. 거 참. 그렇군요. 필승 자살법 아니네요 그럼 ㅋㅋㅋ
어떤 사람은 살고 싶어도 별 것도 아닌걸로 죽고 또 어떤 사람은 죽어라 죽으려고 해도 살고.
그래도 건강하세요! 낮술은 좀 줄이시고.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