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핌·오렌지빛이랄지
이상우 지음 / 민음사 / 202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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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프리즘》 읽고 눈이 번쩍 떴다. 벌써 3년 반 전이다. 하여튼 세월 정말 빠르다. 당시 <중추완월>은 곱게 늙어가고 있는 내 입장에선 과한 누아르였지만 다른 작품들은 아,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전위가 이런 형태의 작품일지 모른다 싶을 정도로 인상 깊었다. 이상우의 이름을 기억하고, 눈에 보이면 탁 골라 읽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3년 반이 넘어서야 이이의 책을 읽은 건 역시 그동안 내 눈에 이상우의 다른 책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동네 도서관에 연두색 책 한 권이 올려져 있었다. 한 밤에 바이크를 타는 짧지 않은 노출시간으로 찍은 작은 사진이 있는 책. 표지엔 제목도 쓰여 있지 않았고, 오직 책등에만 작고 검은 글씨체로 제목이 박인 수수한 책. 수수를 넘어 촌스럽기도 하고, 도무지 팔아먹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책. 그래서 책 나오고 2년이 가까워서야 도서관 신간 코너에 전시될 수 있었던 책. 그게 이상우의 《핌 ∙ 오렌지빛이랄지》였다.
독후감을 쓰기 위하여 이 책을 검색해봤더니, 세상에나, 원래 책은 화려무비한 이미지를 앞뒤로 삽입한 양면 책 커버를 자랑한 거 같다. 도서관에 책을 진열하려면 바로 그 양면 책 커버를 관리하기 힘이 들 것이라 여겨 그걸, 출판사가 심혈을 기울여 조잡하게 만든 양면 커버를 제거하고 알몸의 책만 진열해 놓은 것이었다. 민음사도 이건 몰랐을 걸?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곤혹스러웠던 건 이상우의 표현 방식이나 조사를 많이 생략한 문법이나, 의도적으로 길고 길게 쓴 문장이나 뭐 그런 것보다도, 오후 세시에 약속한 치과에 가서 임플란트 시술을 위하여 뼈 이식 받고 꿰맨 실을 뽑는 거였다. 시간에 맞게 도착하려면 《핌 ∙ 오렌지빛이랄지》를 다 읽을 수 없을 터인데, 첫눈에 보면 분명 단편집이라, 정해진 시간 안에 가장 효과적으로 많은 분량을 읽기 위하여, 아무 생각 없이 읽는 순서를 앞뒤로 왔다리갔다리 해가며 읽었다는 거였다. 책을 다 읽고 든 생각은, 제일 바보 같은 짓이었다는 거. 이게 말로만 작품집이지, 책 표지 어디에서도 단편집이다, 연작 장편이다, 장편이다, 단편이기는 한데 (만일 이런 장르가 있다면)연작 단편이다, 이 비슷한 설명 한 줄이 없다. 다만 책 뒤에 여섯 작품을 발표한 지면과, 두 작품은 미발표임을 밝히는 페이지가 있을 뿐. 그러나 책 속에서 인물은 작품들의 여기저기에 출몰하며 서로 관계를 이어간다. 즉 소설집이긴 한데 이왕이면 책에 실린 순서대로, 될 수 있으면 앉은 자리에서 한 방에 읽어 치우는 게 대빵이란 말씀이다.
그리고 또 곤란했던 점은 《프리즘》에 비해 내게는 너무 높은 진입장벽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음악도 랩과 비밥 등 내가 단 한 번도 즐기지 못했던, ‘않았던’이 아니라 전혀 친해질 수 없어서 즐기지 못했던 장르인 것이 확실하고, 따라서 뮤지션 역시 이하동문이며, 약물과 소통의 공간과, 다양한 이름을 가진 인물과, 세상 곳곳을 무대로 하는 확장. 작가는 특히 <핌>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알린다.
“이 소설은 웹 플랫폼 인터렉티브 형식 소설을 청탁받아 쓰였다.”
웹 플랫폼까지는 어떻게 이럭저럭 알아듣겠는데 ‘인터렉티브 형식 소설’에 와서 대략 난감. 어떤 의미인 줄 알지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좋아져 검색해봤다. 내가 이해한 바는 관객, 독자가 함께 참여하는 소설 형식쯤 된다. 근데 문학에서 그게 가능할까? <핌>은 2021년에 웹플랫폼 “dddd”의 청탁을 받고 쓰긴 썼는데 발표하지 않은 작품이다. 이게 소설 형식으로 어떻게 가능할까? 예를 들어
①금 간 유리창 / ② 문 / ③낙서된 의자 / ④벽 / ⑤녹슨 봉
이렇게 해 놓고 페이지를 넘기면
“아무래도 홀로그램 같은 눈송이였는데 온천으로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를 이마로 받아 내어 눈 감는 원숭이들의 표정이 눈처럼 쌓이는 꿈을 떠올리면서 쌓이고 날리듯이 소음이 흔들리는 바닥으로부터 기다랗게 앞 칸과 이어지는 복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지린내 묻은 좌석들 너머 덜컹거리는 통로를 지나 앞 칸의 빈 좌석들이 보이고, 코너 따라 조금씩 휘어지는 전철의 창밖으로 바람소리와 빌딩들이 무너져 빌딩의 높이로 날아가는 몇 자기부상순찰차들의 불빛이 폐쇄된 시가지를 훑고 지나갔다.” (p.60)
이런 문장이 뒤를 잇는다.
그럼 위의 ①~⑤가 웹플랫폼 “dddd” 혹은 참여자가 제시했거나 작품을 시작하고나서 끼어들어와 툭 던져놓은 단어들일까? 아니면 이상우가 직접 다섯 가지 단어를 나열하고 이에 맞는다고 생각하는 긴 문장을 쓴 것일까? 그럼에도 나의 근본적인 물음은 “웹 플랫폼 인터렉티브 형식 소설”이 어떤 형태일까, 하는 점이었다.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런 경우가 또 있었다. 빅토르 펠레빈의 작품 <스너프>, 리처드 파워스의 <갈라테아 2.2>를 읽으면서도 이 책에 못지 않는 진입장벽에 고생한 기억이 있다. 그러나 <스너프>와 <갈라테아 2.2>에서의 장벽은 과학용어에 대한 장벽이었던 데 반해, 이상우의 《핌 ∙ 오렌지빛이랄지》 앞에 거대하게 가로놓인 장벽은 문화와, 표현방식을 포함한 의식 또는 세대 차이의 장벽이었던 것이고, 그리하여 펠레빈이나 파워스의 경우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이제 내 세대는 확실하게 뒷방으로 꺼져 드려야 하는 시간이다. 뒷세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알아서 즉각 꺼져주어야 하는 게 앞세대의 미덕이다.
그렇다고 정말로 뒷방으로 꺼져서 숨만 쉬며 살 수는 없는 일. 아직 이상우 같이 글을 쓰지 않는 작가가 더 많으니 당분간은 이상우 성향의 작가만 피해 읽어보는 방향으로 하자.
누구?
이 책 《핌 ∙ 오렌지빛이랄지》의 113페이지에 쓰인 책 제목들.
① 인터내셔널의 밤
② 가정법
③ 모든 것은 영원했다
④ 담배와 영화
⑤ IMF 키즈의 생애
이런 것을 쓴 작가들. 순서대로 박솔뫼, 오한기, 정지돈, 금정연, 안은별.
이 페이지를 보면서 조금 놀랐는데, 이상우는 아직도 후장사실주의 사람들과 문학적 교류를 하고 있는 모양이지? 하긴 인터넷 책광고를 보면 박솔뫼의 극찬이 붙어 있기는 하지. 나는 ①~③까지 읽어봤다. 이 책들 읽으면서는 《핌 ∙ 오렌지빛이랄지》만큼 난감하지 않았었는데…. 혹시 아직까지는 이상우만 그런 거 아닐까 싶기도 하고.
하여간 그렇다. 내가 읽기에는 과하게 큰 장벽이 놓였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리 말한다고 작가여, 언짢게 생각하지 마시라. 이렇게 문학은, 예술은 발전하는 것이라는 걸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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