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끝까지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6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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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태 루이스 세풀베다를 잘못 알고 있었다. 아마존 밀림에서 난폭한 한 재규어를 사냥하는 <연애소설 읽는 노인>만 읽고 왜 이 작품을 쓴 작가를 그렇게 높이 상찬을 하는지 조금 의아해했다. 얼마나 큰 고통을 참을 수 있는 지를 보여주려고 강을 따라 들어온 술 취한 발치사한테 앞니 다섯 대를 뽑아버리는 원주민 청년 이야기도 기억난다. 맞다. 읽고나서 11년이 지났어도, 짧은 소설이었지만 작품 속 자잘한 에피소드를 여태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 인상깊게 읽지 않았나 싶다. 물론 재규어 사냥이 라틴아메리카 각국의 정체政體를 상징하는 측면이 있더라도 그렇게 특징적이지 않아서, 이후에도 세풀베다의 이름을 자주, 곳곳에서 들어볼 수 있었으나 크게 관심을 쏟지는 않았다. 괜히 그랬다. 진작에 이이의 작업을 쫓아볼 것을.


  <역사의 끝까지>에서 ‘역사’는 무엇일까? 20세기 역사이다. 러시아의 차르가 처형당하고 들어선 볼셰비키. 이 정권에 대항해 자신들의 독립국, 아니면 적어도 자치령 정도는 확보하고자 하는 카자흐족. 크게 이야기하지 말고 이 마지막 카자흐족의 아트만(책에서는 ‘아타만’) 즉 최고 지도자 미겔 크라스노프의 예만 드는 것이 좋겠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고 채 2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백군과 카자흐족의 아트만인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크라스노프에 의하여 포위되어 있었다. 이 두 부대에 강력하게 저항해 끝까지 수도를 지키고 급기야 카자흐의 아트만을 포로로 잡은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 우리가 ‘트로츠키’로 알고 있는 지도자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승리자의 넓은 아량으로 자신의 한 목숨을 건지려 하는 간곡한 호소를 듣고 있었다. 크라스노프 스스로 예카네리노슬라프에서 50여 명의 노동자들을 한 줄로 목매달아 죽인 적이 있거늘 한 무리의 지도자가 어찌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할 수 있을까? 그러나 트로츠키는 다시는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 그를 풀어주고 혁명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비겁한 아트만 같은 이를 순교자로 만드는 것은 도리어 반혁명 세력을 강화시킬 뿐입니다. 반대로 그들을 약화시키려면 이처럼 치욕적인 패배만큼 좋은 방법도 없지요.”

  이후 크라스노프 가문은 자기에게 협력하면 카자흐 공화국을 세우는 데 적극 협조하겠다는 히틀러의 꼬임에 넘어가 독일군 복장을 입고 2차 세계대전 속으로 자진해 들어갔으며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어, 연합군, 특히 미군 상륙 이후 북부로 밀리자 그곳에서 히틀러의 약속대로 조그마한 땅덩이를 얻어 잠시 자신들의 나라를 세워 보기도 했다. 히틀러가 패망하자 갈 곳이 없어진 카자흐. 많은 카자흐 사람들은 그래도 고향을 찾아 우크라이나 동쪽 카자흐 지역으로 돌아갔고, 크라스노프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은 고향으로 가봐야 좋은 꼴이 기다리지 않을 것이 확실해 독일인 전범자들과 함께 라틴아메리카로 향했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볼셰비키 혁명군에게 저항하고, 나치 파시즘 쪽에 서서 숱한 사람을 학살하고 고문하는 것. 아마도 저 앞의 표트르 크라스노프의 손자 정도 되는 미겔 그라스노프는 칠레에 들어와, 아옌데 정권을 몰락시킨 피노체트 측에 붙어 정치범 고문과 살해로 세상에서 둘도 없는 악명을 떨친 비아 그리말디 형무소에서도 가장 악랄한 고문과 강간과 살인을 밥 먹듯 자행했다.

  저자 루이스 세풀베다도 결국 이 시절을 견디지 못하고 조국 칠레를 탈출해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를 거쳐 파리, 독일, 최종적으로 북부 스페인에 정착해 그곳에서 가족과 한 평생을 살았다.


  작중 주인공이자 화자 ‘나’ 후안 발몬테는 칠레를 탈출해 소비에트 기갑부대 소속 로디온 말리놉스키 군사학교에 들어가 강도 높은 게릴라 훈련을 받았다. 훈련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위 “인간병기”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넘겨 짚으면 된다. 이 가운데 ‘나’는 주인공이니까 당연히 가장 우수한 재원 가운데 한 명으로 특히 저격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해 스나이퍼로 특별하게 육성하는 과정을 밟았다.

  ‘나’가 이곳에 오기 전에 칠레에서의 사랑. 동지이기도 했던 베로니카. 아옌데 피살 후 쿠데타에 반대하기 위한 작은 내전 또는 저항운동에 참가했다가 공권력에 검거되어 드높은 악명을 즐기는 비아 그리말디에 수감되어 갖은 고문을 당했다. 그래도 끝까지 한 명의 이름도 대지 않아 결국 호흡을 멈춘 베로니카는 옷이 벗겨진 채 다른 시신들과 함께 쓰레기장에 그냥 버려졌다. 마침 이곳을 지나던 아니타라는 이름의 아주머니가 시신들을 보더니, 베로니카가 아주 약하게 숨을 쉬고 있는 것을 발견해 용감하게도 자기 집으로 데려가 보살펴 주었지만 실어증에 걸리고 말았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후 ‘나’는 파라과이 혁명을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각국의 게릴라전에 참여해 명성을 쌓은 후 독일 함부르크로 옮겨 활동을 이어갔는데 이유는 오직 하나, 덴마크에 있다는 고문 후유증 전문 치료 병원에서 베로니카를 돌보는 것이었다. 베로니카는 이 병원에서 무려 18년간 치료를 받아, 상당히 개선되었지만 실어증은 여전했다.

  이후 ‘나’는 베로니카를 퇴원시켜 늙은 부하 페드로 데 발디비아와 함께 파타고니아가 바라보이는 칠레 남단 푸에르토 카르멘에서 평화롭게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예순여섯 살까지는.


  1970년대 중반에 악명을 날리던 미겔 크라스토프는 산티아고 코르디예라 교도소에 120년 이상의 형기를 받아 수감되어 있었으며 여전히 여죄에 대한 재판이 진행중이었다. 이때 마치 볼쇼이 발레단의 의상과 비슷한 차림을 한 카자흐 사람들이 대통령 궁에 들어가 칠레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1973년 피노체트 쿠데타에 반대한 이유로 감옥에 갇혀 살해당한 아르투로 미겔 마르티네스 공군장군의 딸인 바첼레트 대통령은, 마지막 카자흐 아트만인 악당 미겔 크라스토프를 석방하여 카자흐로 보내달라는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이것저것 봐주기에는 크라스토프의 죄질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시 모인 어제의 용사들. 누구인지 모르는 한쪽 편 계승자의 제안으로 칠레계 두 러시아인 에스피노사와 살라멘디, 그리고 세 명의 카자흐 병사를 칠레로 잠입시켜 코르디예라 형무소를 폭파해 마지막 아트만이자 카자흐의 영웅이라 알려진 악마 미겔 크라스토프의 탈옥 작전에 돌입했다. 그러자 반대쪽은, 이미 팍 늙어버린 소련의 군사학교 시절 두 명의 교관을 대표로 ‘나’ 후안 벨몬테에게 이 작전 수행자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긴다. ‘나’ 후안 벨몬테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 차마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는 ‘나’는 푸에르토 카르멘을 떠나 무더운 2월의 산티아고에 도착해 불과 며칠만에 이들의 행방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자신이 노출되었음을 알게 된 적들은 그날로 소음기를 단 소총으로 거친 카자흐 병사 셋의 이마에 구멍을 내고 SUV를 몰아 집을 나서다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잠복하고 있던 ‘나’를 만난다. 차의 창문을 내리고 눈이 마주치자 비록 30년만에 만나는 옛 동료였더라도 한눈에 알아본다. 하지만 엄연히 적대적 상대이다.

  살라멘디가 말한다. “실력이 여전하군, 벨몬테. 다시 만나서 반갑네, 동무.”

  ‘나’도 대답한다. “이고르, 자네도 마찬가질세. 이 부근에 잘 아는 클럽이 있는데, 거기서 와인이나 했으면 좋겠군.”

  에스피노사가 소음기를 단 우지 자동소총을 든 채 다시 대답한다. “지금은 급해서 안 되겠어. 하지만 언젠가 시간이 나겠지.”


  언젠가 시간이 나겠지? 그렇다. 시간이 난다. 이들은 벌써 체코의 고위 정보기관 소속 정보원을 통해 ‘나’ 후안 벨몬테의 모든 사생활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으며, 따라서 다음날 아니타 아주머니 집으로 피신한 베로니카와 페드로를 인질로 잡아 버리는데 성공한다.

  이제 어떻게 될까? 아마도 당신 생각과 완전히 다른 쪽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것이다. 루이스 세풀베다가 이야기하는 “역사의 끝”이 무엇인지는 이 책을 다 읽은 사람만 알게 되도 좋다. 아쉬운 건 벌써 품절도 아니고 절판이라는 거. 어쩔 수 없이 헌책방이나 도서관을 찾아야 세풀베다의 매력적인 마지막 장편소설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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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12 0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을 진짜 어렵게 읽었었어요. 읽기가 쉽지 않았던....너무 묵직하기도 했고요. 그래도 뭐라도 썼나 살펴봤더니 밑줄긋기만 했네요. 너무 무거워서 어떻게 리뷰를 쓰야 할지 잘 몰랐던거 같은데 덕분에 이 책을 다시 소환해서 보네요.

Falstaff 2025-09-12 15:36   좋아요 1 | URL
묵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재미난 걸요. 장담하건대 다시 읽으시면 그런 생각 안 드실 겁니다. ^^

yamoo 2025-09-12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ㅎㅎ 별 5개 출현! 그럼에도 세풀베다는 제가 애정하는 작가라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세풀베다 책은 다 모았습니다..ㅎㅎ 23년 이후에 발간된 책은 아직 소장하고 있진 못하지만요..ㅎㅎ 세풀베다 소설작품은 거진 다 읽었는데 열린책들에서 많이 출간해 줘서 열린책들 판본은 다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저는 감상적 킬러의 고백이 가장 재밌었습니다. 블랙 코미디적인 면이 아주 좋았다는..
세풀베다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이 아주 탁월한 작가인듯해요. 헌데 가벼운 듯한 플롯 속에 담긴 주제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세풀베다는 제게 주제의 진정성을 이야기로 쉽게 풀어내는 작가로 각인되어 있어요. 그래서 아주 좋아라 합니다..ㅎㅎ

Falstaff 2025-09-12 15:38   좋아요 0 | URL
제 휴대폰 앱 북적북적에서는 4.5인데요 차마 4별은 넘 아쉽다, ㅋㅋㅋ 이런 수준이었습니다.
야무님 핑계로 세풀베다 집중 탐구 들어갈 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