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트하우스
욘 포세 지음, 홍재웅 옮김 / 새움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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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야 욘 포세를 읽는다. 1959년 노르웨이 Haugesund(스칸디나비아 발음 자신 없어 알파벳으로 표기함)에서 경건교도 집안에서 태어난 포세는 10대 시절에 <보트하우스>의 주인공 화자 ‘나’처럼 록 기타리스트의 꿈을 키웠다고 위키피디아에 나온다. 이후 연주 대신 작곡과 작사에 몰두하는 십대 시절을 보냈다. 베르겐 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해 1990년대초부터 전업작가의 길을 걸은 소설가, 극작가. 2023년에 노벨상을 받아 한 방에 세계적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나도 이전까지 포세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다. 자칭 히피로 지내면서 공산주의와 아나키즘에 영향을 받은 기독교 경건주의 가정의 일원. 어린 시절 사고로 인한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 성격 변화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책 딱 한 권 읽었을 뿐이지만, 그랬을 거 같다. 2023년에 하도 선풍적 인기를 끌던 작가라서 열풍이 좀 죽은 다음에 읽기로 마음먹게 했던 작가. 이제 김 좀 빠진 거 같아 읽었다.

  책 판권을 보니 초판이 2020년. 그러니까 이이가 노벨상을 받기 이전부터 우리나라에 소개가 됐던 작가였다. 아뿔싸. 스칸디나비아 반도 출신의 작가들은 대개 폭력, 엽기 살인, 범죄, 스릴러, 기업간의 암투 같은 소설만 쓴다는 선입견에 푹 젖어 있어서, 아마도 포세의 이름을 책등에서 발견했다 해도 아예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지냈을 거 같다. 그러나.

  욘 포세는 2023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같은 노르웨이 작가 프로데 그뤼텐은 <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를 써서 2023년 브라게 문학상을 받았다. 공통점은 빙하가 녹은 골짜기로 바닷물이 들어와 생긴 깊고 좁은 해역을 일컫는 피오르 해안을 무대로 한, 사람과 죽음의 이야기라는 것. 분위기는 놀랍도록 흡사하다. 주인공들의 연령대와 직업, 가족 구성과 친구들이 완전히 다르더라도 피오르 해변을 둘러싸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겠지만, 착 가라앉은 저기압 같은 과하게 차분한 분위기. 자연이 이래서 상당히 오랜 동안 스칸디나비아 반도 주민들의 자살률이 세상에서 제일 높았었나 싶었다. 우리나라가 두각을 나타내기 전까지이기는 하지만.


  <보트하우스>는 시작부터 지독한 반복으로 점철됐다.

  “나는 더 이상 밖에 나가지 않는다. 불안감이 엄습하여 나는 밖에 나가지 않는다. 이 불안감이 엄습해 온 것은 바로 지난 여름이었다. 나는 적어도 10년은 보지 못했던 크누텐과 다시 마주쳤다. 크누텐과 나, 우리는 늘 함께였다. 내게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p.8)

  이 불안감은 신체적 이상으로도 표시가 되는데, 왼팔과 손가락이 쑤시는 증상이다. 화자 ‘나’는 이 불안감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특별하게 하는 일 없이 시민무도회 같은 곳에서 기타리스트로 나이든 지역 중학교 교사 토르셸이 아코디언 연주에 반주를 맞춰주면서 몇 푼씩 벌기도 했다. 그것 말고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오고, 어머니 대신 장 보고, ‘나’의 방인 다락방에서 몇 장 되지 않는 음반을 듣고, 책도 읽으며, 가끔 배를 타고 피오르에 가서 낚시를 했다. 물론 요리는 어머니가 했다. 어머니? 그렇다. 서른 살이 훌쩍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산다. 어머니의 영토는 1층의 침실과 거실과 주방과 식당 등이고 ‘나’는 2층에서 별 일 없으면 나가지 않는다. 책에는 한 마디도 없지만, 이렇게 사는 건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게 아니라 “늙은 어머니에게 얹혀 사는 것”이며, 이런 형태를 캥거루 증후군이기도 하고, 히키코모리라고도 하는 형태와 매우 유사하다. 수입의 대부분은 어머니가 매달 받는 연금으로 충당하니 더욱 그러하다. 어머니는 연금을 받고, 장 보고, 음식을 만들고, 전기료, 전화요금 등 고정비용을 지불하고, 집을 깔끔하게 정돈하고, ‘나’의 옷을 세탁하지만 ‘나’는 어머니가 “대부분의 시간은 투덜거”린다고 불만이다. 한 마디로 ‘나’는 마이너리티다. 아예 집 밖에서 독자적으로 살아본 적이 없다. 피오르 지역에서 나가본 적도 없다. 여행도 싫어한다는데 정말 싫어하는 건지, 여행할 돈을 벌어본 적이 없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둘 다일 수도 있다. 연애? 한 번의 사정을 위하여 원나잇 같은 걸 해본 적은 있겠지만 심각한 사랑하고는 인연이 없다.


  지난 여름에 적어도 10년 만에 만난 친구 크누텐과는 늘 함께 했던 친구 사이다. 열 살을 넘기자마자 죽이 맞아 록 밴드를 결성하기로 마음먹고 정말로 실행에 옮기려고 애쓴 ‘나’와 크누텐. 청소년회관의 젊은 관리인 한테 마이크 스탠드로 사용할 수 있는 낡은 전시대를 선물 받아 그것을 둘 공간을 찾던 중 피오르 가에 방치된 보트하우스가 생각나 그곳으로 무거운 전시대를 가지고 갔던 것도 ‘나’와 크누텐이었다. 보트하우스에서 오래되어 삭아버린 면 그물을 조각내 포대 안에 쑤셔 넣어 소파를 만들어 아지트로 삼기도 했던 곳. 그러나 여간해 찾아오지 않던 성질 고약한 거구의 늙은 스베이넨 씨, 동네 과수원과 보트하우스의 주인으로 자기 과수원에서 사과나 배를 서리하다 잡히기만 하면 거의 반죽음을 만들어 놓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 스베이넨 씨가 갑자기 보트하우스의 문을 열어 그가 다시 돌아갈 때까지 먼지 가득한 어두운 구석에서 숨을 참으며 숨어 있던 기억까지 공유한 친구.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피오르를 떠났다. 대학을 졸업해 음악교사가 되었으며, 한갓진 피오르 지역의 기준으로 치면 대단한 미모를 지닌 아내와 결혼해 두 딸을 두었다. ‘나’는 그가 피오르를 떠난 이후 지난 여름에 처음 다시 만날 때까지 십년 동안 보지 못했다. 어릴 때 나를 떠난 친구. 소리쳐 불렀지만 그냥 몸을 돌려 가버렸고, 돌아왔을 때는 음악교사였으며, 더 이상 연주는 하지 않았고, 아름다운 여자의 남편이자 예쁜 두 딸의 아버지였다. 그를 만난 이후에 ‘나’는 불안감이 엄습했고, 일상적 일을 하지 못하기 시작했으며 왼팔과 손가락에 쑤시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불안감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들어, 지금 쓰고 있는 거였다.

  지난 여름 이후 ‘나’는 스스로 다락방에 갇혀 있다. 전에는 장도 보고, 도서관에 가서 책도 빌려 오고, 배 타고 피오르에 나가 낚시도 하고, 가끔 청소년센터에서 열리는 무도회에서 토르셸 이중주단의 일원으로 연주해주고 적지만 돈을 얻기도 했지만 이제는 다락방에서 불안감을 다스리기 위하여 이 글만 쓰고 있다. 전에 어머니는 ‘나’더러 “너도 직장을 알아봐야지, 기타를 퉁기며 다락방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잖니.”라고 말했으나, 지금은 “너는 글 쓰는 걸 당장 멈추어야해. 그래야 나가서 장도 봐 오고, 어디라도 다녀야지 이렇게 어떻게 살겠니.”라고 말한다. 여전히 대부분의 시간동안 투덜거린다.


  지난 여름에 책을 빌리려 가는 중에 십년 만에 크누텐 가족을 만났다. 반가웠을 거 같지? 크누텐의 아내는 그렇게 생각하는 거 같았다. 음악교사를 하는 크누텐은 이제 아내와 두 딸이 있다. 교사라는 직업이 휴가가 길다. 그러나 알려진 좋은 휴가지에 가서 오래 지낼 만큼의 보수는 받지 못한다. 그것보다는 일단 숙박비와 체류 고정비의 상당액을 어머니에게 덮어 씌울 수 있는 고향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 하지만 다 좋지는 않다. 십년 이상 전혀 연락이 없다가 단박에 기억 속의 친척, 친구, 이웃을 만나야 한다. 십년 전의 관계는 휘발되었거나 여전히 남아 있어도, 그렇다고 기억을 끄집어 내기도 쉽지 않다. 관계라는 것이 언제나 좋았던 건 아니니까. 그누텐은 고향 사람들을 만나는 게 반갑지 않다. 어린 시절 정말로 록 밴드를 만들어 주말마다 이곳저곳의 청소년센터 강당을 빌려 공연을 하고, 맥주를 마시고 담배도 피우다가 여자 애들도 만나던 때, ‘나’와 함께 어울린 또래 여자들도 마찬가지.

  크누텐의 아내가 남편의 생각과는 달리 ‘나’를 집에 초대한다. 이날 저녁 때가 되자 ‘나’는 배를 타고 피오르에 나가 낚시를 하러 가면서 크누텐의 집 근처 쪽으로 둘러 간다. 아마도 크누텐의 아내가 창에서 ‘나’를 본 거 같다. 크누텐의 아내는 노란 우의를 입고, 옆집의 플라스틱 재질로 만든 배를 빌려 ‘나’의 배 옆으로 온다. ‘나’는 커다란 대구 한 마리를 잡았지만 대구가 얼마나 힘이 좋은지 배 선창에서 튀어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 조금 후, 이번엔 크누텐의 아내가 거의 비슷한 크기의 대구를 낚아챘고, 어쩔 줄 모른다. ‘나’는 그녀를 도와 대구를 잡고, 숨통을 끊은 다음 몸에서 피를 뺀다. 안 그러면 대구가 상할 수 있어서. 이제 돌아가려 할 때, 크누텐의 아내가 피오르 안에 솟은 작은 섬이 어떻게 생겼는지 가보자고 제안한다. 그걸 받아들여 ‘나’와 그녀 단 둘이 아무도 없는 외딴 섬에 오르고, 이 광경을 저 멀리 해안가에서 크누텐이 지켜보고 있다. 저 섬엔 아무도 살지 않는데, 둘이 저곳에 무엇을 하러 들어가는 걸까? 크누텐은 속이 뒤집어진다. 부부는 좋은 관계가 아니었고, 크누텐은 조금의 의처증 비슷한 편집 증상이 있었으며, 아내의 초청을 받아 집에 들른 ‘나’와 아내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의심했다.

  그해 여름에 크누텐을 십년 만에 만난 후에 불안감에 휩쓸려 신체적으로도 왼팔과 손가락이 쑤실 정도인 ‘나’. 불안감을 다스리기 위하여 글을 쓰게 되었지만, 다락방에 갇혀 집 밖으로 여간해 나갈 수 없게 되는 일. 길고 긴 낮과 길고 긴 밤이 지속되는 땅. 얼음처럼 차갑고 깊지만 좁은 바다를 둘러싼 지역. 여름이라도 싸늘한 바람과 인적이 드문 외진 동네. 그런 이야기.

  나는 잘 읽었다. 읽은 다음에 스마트폰의 책읽기 앱 북적북적에 별 네 개 반을 평점으로 매겼다. 그러나 조심하시라. 취향 차이가 독자마다 심할 책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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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1-20 2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헉! 욘 포세~~~
인용한 문장만 봐도 멜랑콜리아의 문장들이 연상되네요...ㅋㅋㅋ
어후야~~~ㅎㅎ

그나저나 뽈스타프님은 욘 포세를 계속 읽으시겠습니다! 별4개면...
별5개도 분명히 취향차이가 존재한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오래된 빛>은 완전히 대실망이었거든요~~ㅎㅎ

Falstaff 2025-11-21 05:0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오래된 빛>에 실망하셨으면 포세도 힘드실 거 같은데요.
휴대폰 앱에는 별 넷반이라니까요. 다섯은 아무래도 과하다 싶어 넷에서 멈춘 겁니다.
<멜랑콜리아>에 비하면 문장이 아주 순한, 순하디 순한 맛입니다!

yamoo 2025-11-21 10:19   좋아요 0 | URL
포세는 절대 안 읽을 거에요...절대!!

Falstaff 2025-11-21 15:27   좋아요 0 | URL
저도 ˝앞으로는 안 읽을 것이다,˝라고 하도 여러번 말했다가 부도를 낸 바람에... 디킨스, 워튼 같은 사람이요, 야무 님 다짐도 반 만 믿겠습니다. ㅎㅎ
 
흥분이란 무엇인가 대산세계문학총서 144
장웨이 지음, 임명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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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생은 잔나비띠라서 그런지 재주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중국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라, 중국인도 마찬가지인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가까운 산둥성 퉁커우시에서 출생한 장웨이도 그랬던 거 같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 인민은 끊임없는 도취적 이상국가로의 전진사업에 희생되었다. 대약진운동, 반우파운동,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정점을 이룬 문화혁명. 장웨이도 유소년 시절에 이 과정을 거쳤다. 옌롄커, 위화 등 이 또래 많은 작가들이 이 시절, 그리고 이후의 천민자본주의의 해일 속 생존담을 작품화 했다. 그러나 이 책 《흥분이란 무엇인가》는 다르다. 아예 도시생활 징면을 볼 수 없다. 저 다싱안링 산맥과 하얼빈 일대를 무대로 잔잔하게 사람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츠쯔젠을 읽고 중국 소설에 이런 작가도 있었구나, 하고 놀랐던 것처럼, 이 책을 읽으면서 장웨이라는 좋은 작가를 알게 되어 마음이 흡족했다.

  1981년부터 1989년까지 쓴 단편소설 스무 편을 실은 소설집. 평소 제일 신뢰하던 대산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된 책이라 관심이 있었지만 제목 《흥분이란 무엇인가》 때문인지 선뜻 손을 대지 않게 되던 책. 아주 오래 머뭇거렸건만 왜 이 책이 내가 은퇴한 이후에 내 돈을 내고 구입한 첫번째 책이 되었는지는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뒷방으로 물러난 이후에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으로 산 유일한 책이 《흥분이란 무엇인가》이다. 사 놓고 몇 년 만에 읽었다. 마음이 기껍다. 내 마음에 차는 책을 골랐고, 국민연금을 받기도 전에 사서, 책장 속에서 적당히 묵혔다가, 느즈막하게 꺼내 읽어도 좋을 만한 책이라서. 옌롄커나 위화 과가 아니다. 츠쯔젠과 더 비슷하다. 츠쯔젠이 다싱안링 산맥과 하얼빈에 집중했다면, 장웨이는 역시 자기 태가 묻힌 산둥성 룽커우 지역을 흐르는 강 루칭허(蘆靑河)에 각별한 관심을 두었다. 이 책의 많은 작품이 루칭허 하류와, 강이 바다에 이르는 연안 해역, 그리고 해변지역을 무대로 한다. 그리고 이들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서로 어울려 사는 모습.


  무엇보다 지방색이 풍부하다. 오랜만에 도시적 냉정과 투쟁성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 작품들을 읽으니 마음도 편안해진다. 당연히 사람 사는 일이라 이들 사이에도 시기도 있고, 질투도 있고, 자잘한 싸움도 있으나, 내가 그동안 읽은 중국 50~60년대 작가들의 주요 활극처럼 독하지 않다. 자연의 폭력 말고 사람 간의 폭력도 없고, 따라서 살상이나 능욕 같은 자극적인 장면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말로 사람 사는 일 같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좀 지난 스타일”처럼 읽힐 수도 있겠다. 우리나라로 치면 한국전쟁 이전의 순수문학처럼. 그동안 얼마나 강박한 세월을 지내왔는지, 아무리 오래 전 스타일이라 할지언정 이런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것만 가지고도 얼마나 마음이 따뜻해지는지. 이 정도 이야기했으니 책과 책에 실린 작품들의 성격을 짐작하실 수 있을 터.

  장웨이는 산둥성 룽커우 시의 가난한 집, 아니면 한 시절 소지주라고 불리는 가정에서 태어나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대신 고무공장 현장직원으로 일하며 습작을 시작했다. 작품을 보면 아마 (조)부모가 소지주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 어릴 때부터 책을 볼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나이가 좀 차니, 반우파운동 같은 것에 치여 부모는 물론이고 자신도 동네 또래들에게 욕을 듣고, 구타도 당하고 했던 것 같다. 그의 학력은 후에 사농(四農)연합중학과정을 마치는 것으로 끝난다. 이후, 농農 자가 들어가는 중학을 졸업한 이력으로 포도원과 조림지 또는 다른 농업과 어업 관련 일을 했는데, 이때의 경험을 1980년 이후 작품활동을 하는 동안 중요한 문학적 경험으로 활용할 수 있었을 것. 사는 게 다 그렇다. 다 좋을 수 없는 것처럼 몽땅 나쁠 수도 없다.

  1980년에는 옌타이 사범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산둥성 자료관에 근무해 처음으로 ‘펜대’ 잡는 직업을 얻는다. 이 전에도 습작과 단편을 창작하여 교내지 같은 곳에 발표했으나, 1981년에 이 책에도 실린 <대추나무 지킴이> 같은 작품 등으로 산동문학창작상을 받으면서 조금씩 이름을 알린다. 이어 82년에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고 전업작가로 나서며 본격적인 프로 작가의 길을 걸어온 소설가.

  대표작으로 10권에 달하는 장편소설 <그대는 고원에>를 들지만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되지는 않았다. 분량 때문에 접근성이 만만하지 않아 쉽게 번역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찍은 <어신을 찾아서>가 있다. 동네 도서관에 내가 희망도서 신청해 한 권 비치되어 있다. 이 단편집 《흥분이란 무엇인가》하고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장웨이라고 해서 루칭허 하류의 강변과 해변을 무대로 한 지방 사람들의 순박하고 자연적인 삶만 노래하지는 않았겠지. 다만 이 책은 그런 작품들만 모은 소설집이다. 《흥분이란 무엇인가》. 기회가 닿으면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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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 문학과지성 시인선 230
진동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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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전북 고창에서 나 전북대 국문과와 전주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해 국어와 미술 교사로 일한 조금 특별한 쌤이었다. 학부를 두 번 다녀서 그런가, 시인 등단은 33세였던 1978년 “시와 의식”을 통해서 했다. 한국예술인단체총연합회 전주지부 회장을 아직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전주 일대, 즉 전북지방에 대한 애착이 가득한 시들을 많이 쓴 거 같다. “~거 같다.”라고 표현한 건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이 내가 처음 읽은 진동규의 시집이기 때문이다.

  독후감을 쓰려고 시집을 검색해보니 오래 전 TV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주연을 했던 현빈이 이 시집을 들고 몇 컷을 찍은 적이 있나 보다. 몇 명이 그림을 보고, 현빈이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으니 꽤 좋은 시집인가비여? 해서 사 읽었더니, 생짜 초보한테는 그리 만만하지 않았을 터. 우짤꼬? 막 복잡한 한자가 쓰여 있기도 하고, 이미 천몇백년 전에 죽은 왕의 이름도 나오고, 어질어질 했겠지. 나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상병욱선생께서 부여 사람이었는데 쌤을 통해 처음으로 견훤이라는 인물을 알았다. 문경군 가은 사람으로 고려의 장수였다가 후백제를 세워 초대 황제로 등극한 천하장사. 한 때는 왕건도 벌벌 떨게 만든 맹장, 용장, 지장이지만 덕장이 아니라서 결국 왕건에게 귀화한 인물. 이 정도로 알고 있었다.

  후백제가 주로 터를 잡았던 것이 완주군 일대. 삼국시대에는 완주에서 문경까지 곳곳의 벌판에서 아주 활발하게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그래 진동규가 전주시 덕진연못에서 연꽃을 보고 이런 노래를 지었다.



  눈썹 끝에 연꽃 피는

                  ― 德津採蓮


  젊은 장수 견훤은 반월성 짓고 눈 지그시 앉아 눈썹 끝자리쯤 해서 연못을 팠습니다. 말 한마디 없이 해낸 일이고 보면 그 속 헤아릴 수야 없겠습니다만, 선화 공주랑 배 띄우고 놀았던 서동의 미륵사 연뿌리 옮기어 꽃피게 하였던 것을 보면 글쎄, 아마도 무왕 대에 현신하지 않은 미륵을 당신은 꼭 보리라 믿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야심찬 대왕님 그때 반월성은 흔적도 없고 아스라한 세월의 눈썹 끝자리 철 찾아 연꽃 흐드러지게 피고 지고 그러는 걸 보면 고개 숙이는 그대 진정 선화 공주이려니 싶어 가슴 두근거리고 그럽니다. (전문. p.11)



  德津採蓮은 덕진채련. 덕진(연못)에서 연꽃을 따다, 라는 뜻이다. 훗날 백제의 무왕이 되는 젊은 서동이 역시 훗날의 선덕여왕의 여동생 선화공주가 그리 예쁘다는 말을 듣고 서라벌로 잠입해 들어가 동네 꼬마들에게 군것질거리 마를 주고 노래를 지어 부르게 했으니, “선화공주님은 밤마다 서동을 남몰래 방으로 끌고 들어가 얼레리 꼴레리.”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결국 선화공주는 서동을 따라가 훗날 무왕의 비가 되었으나, 막강한 남편 무왕이 문경 근방의 벌판에서 조국 신라와의 전투에서 용감하게 전사해버려 졸지에 과부가 되어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지.

  진동규는 옛 백제땅이며,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전이 있는 전주를 왔다갔다 하다 덕진연못에 들러 때마침 활짝 핀 연꽃을 보며 그곳에 지었다 하는 반월성과 덕진연못의 주인 견훤과, 무왕, 선화공주 모두를 불러모았던 거다. 옛 왕조의 왕들과 왕비를 불렀으니 시인의 가슴이 두근거릴 수밖에.

  진주 출신 가운데 애매한 사람이 있다. 정여립鄭汝立. 인망이 높은 이이를 흠모해 주위에 사람이 많았다는데, 그러면 몸 조심을 좀 해야지. 금강 상류인 전북 진안에 죽도라고 있었다. 그곳에 서실을 차리고 대동계를 모았다. 당시 선비들이 자발없이 뜀박질하지 않고 근사하게 할 수 있는 스포츠가 국궁 말고 거의 없었다. 그래서 활을 쏘며 지화자, 관중이요, 웃고 노래하고 술 마셨을 터. 선조 때 기축옥사로 화를 입은 정여립의 집 건너마을 이름이 ‘댁건너’란다. 당연히 ‘댁’은 정여립 영감 댁을 말하겠지. 대수리는 다슬기의 방언이고. 그럼 제목은 이해가 되렸다.



  댁건너 대수리를 잡습니다.

                          ― 月岩撈摸


  살던 집은 텃자리까지 파버렸습니다. 그 이웃까지 뒤집어 파서 앞내 끌어 휘돌아 가게 하였습니다. 깊고 깊은 소를 만들어버렸지만 그때 그 집 주인이 반역했다고, 그래서 전주천 물이 거꾸로 흐른다고, 북으로 흐른다고 소문내고 그런 속셈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댁건너 마을 사람들은 上竹陰 下竹陰하면서, 서방바우 각시바우 애기바우 그 피울음을, 상댁건너 하댁건너 점잖던 자기 마을 이름 위에 불러보기도 해보지만, 어떻게 변명 말씀 한번 엄두를 못내고 죽어 지내왔습니다.

  그 집 뒷산 월암에 달이 뜨면 댁건너 사람들은 월암 아래 소에 들어 대수리를 잡는답니다. 관솔불들을 밝히고, 주춧돌 기둥뿌리 항아리 깨진 것, 뭐 그 집 주인 뼛속까지 빨아 먹고 자란 대수리들을 잡는답니다. 일삼아 잡아내고 그런답니다.  (전문. p.12)



  서인이 동인의 씨를 말리려고 정여립과 관련한 인물들은 남자, 여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도륙을 낸 모양이다. 그게 이 동네 댁건너 사람들까지도 피해가 갔겠지. 근데 “전주천 물이 거꾸로 흘러 북으로 흐른다는 소문”이 무엇인고? 정여립이 난을 일으켜, 전주천의 물이 한강까지 올라가면, 지리학에 전혀 배움이 없어서 금강이 어떻게 한강수로 흘러가는지는 관계하지 않고, 겨울이 올 때 한강이 꽝꽝 얼 것이고, 이때 말에 오른 정여립이 전라와 경상에 있는 자기 지지군을 모아 한양으로 짓쳐 올라가 왕상을 도륙낸다는 유언비어를 말한다. 이런 야만의 시절이었으니 어찌 정여립이 명을 보전할 수 있었겠는가. 다 억울한 죽음이고 한낮 정치싸움이었을 뿐인 것을. 하긴 요즘 보면 큰 정당 하나 완전히 골로 갈 것 같긴 하다만. 역사는 흐른다? 큭큭큭.

  이렇게 시집의 1부는 진동규가 터 잡고 사는 전라북도 전주시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의 역사를 노래하고 있다. 명색이 한국예술인단체총연합회 전주지부 회장을 역임했으니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일 수도 있고. 김유정문학관장을 지낸 전상국도 그의 소설집 《굿》에서 김유정에게 두 편을 헌정한 적이 있으니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될 것이다.


  생활인으로서의 진동규. 내내 개인주택에 살다가 편한 아파트로 이사를 한 모양이다. 개인주택에는 별 생각도 못한 공간에 완전히 잃어버린 기억 속의 예상치 못한 물건들도 어딘가에 모아져 있다. 정말 상상도 못한 것들. 직업이 교사이고 시인이었으니 당연히 발표하지 않은 원고도 있고, 그리다 남은 캔버스도 있고 그랬겠지.



  불꽃


  아이들 편하다고

  아파트를 얻어가는데

  이사 옮길 때마다 웬만한 것들

  눈 딱 감고 버리고 그랬는데

  토요일 한나절을 또 불 처지른다

  학교 다닐 때 썼던 원고 뭉치도 나오고

  용머리 고개 호리꾼 시절도 나온다

  다락에 쌓아둔 그림 속에서는 지난 겨울

  쥐 한 가족이 살림을 차리고 갔다

  내 자화상 어깻죽지를 새김질해서

  새끼랑 키우고 나간 모양이다.

  꽃 피고 낙엽 지고

  눈 쌓이던 동네 고샅 고샅

  한 귀퉁이씩 다 새겨놓았다

  싸잡아 내친 캔버스가 텃밭 한 귀

  얼키고설키며 내 키를 넘는다

  이렇게 활활 타는 불꽃이면

  얼마나 후련한 것을

  안 풀리던 세월

  지글지글 기름을 태우며 떠난다

  너울거리며 너울거리며 간다  (전문. p.44~45)



  쉬운 시라서 척 읽으면, 탁 알겠다. 그냥 이사하면서 별의 별 거 다 나왔고, 그 중에 버릴 건 버리고, 쓰레기봉투에 담으려면 봉투 값이 아까울 것들은 아예 마당 귀퉁이에서 태워 버렸는데, 얼마나 많았던지 불길이 키를 넘는 모습. 태우는 마음이 좋기도 힘들다. 물건만 타는 게 아니고 거기에 묻은 누추한 시절의 짠한 추억까지 타버리는 거라서. 한번쯤 겪어 보셨을 테니 이해하실 듯.

  근데 이 시집은 시인 근처에 사는 독자는 재미나게 읽겠는데, 나처럼 떨어져 있는 사람한테는 좀 실감이 덜 날 정도로 전라북도 전주와 완주 근방에 (아이 씨, 이렇게 쓰면 까칠한 분이 영어로 한다고 한 마디 안 하시려나) 전주와 완주 근방에 오리엔티드 되어 있다. 1부에서는 지형과 그곳에 담긴 역사. 뒤로 가면 사람들, 1999년 현재 鵲村(작촌) 조병희 선생처럼 살아 있는 사람도 있고 이미 가버린 삼례의 김춘식 씨, 이평 아전을 했던 판소리의 보존자 신재효 선생 등등.. 6부로 가면 예전에 있었지만 지금은 볼 수 없는 것들까지. 참 알뜰하게 모았다.

  그렇다고 이 시집 하나 들고 전주와 완주 거리를 어슬렁거릴 수도 없는 거잖아? 왜 안 돼? 한 번 해볼까? 아서라, 기름값 엄청 올랐더라. 연금생활자 주제에… 쩝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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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11-18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빨리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5-11-18 15:38   좋아요 0 | URL
흥, 안 갈겁니다. 넘 추워요. ㅎㅎㅎ

잠자냥 2025-11-18 16:01   좋아요 0 | URL
주말에 다시 기온 올라갑니다! ㅋㅋㅋㅋㅋ

페넬로페 2025-11-18 1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금생활자는 그래도 일종의 행복한 삶에 속하지 않습니까!

Falstaff 2025-11-18 15:41   좋아요 1 | URL
아휴, 국민연금 얼마나 된다고요. 여태까지 살던 규모를 팍 줄일 수 있으면 그럴 수 있겠습니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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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태. 1985년에 우리나라에서 UFO가 가장 빈발하게 발견되는 강원도 W시에서 출생해 고려대 언론학부를 졸업했다. 37세 때인 2022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무겁고 높은>이 당선하여 데뷔했다. 대학 졸업 후부터 데뷔할 때까지 설마 그냥 놀았겠어? 취직해서 직장생활을 했거나, 사업을 했거나 그랬겠지.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 실린 단편소설 아홉 편의 발표시기를 보면, 데뷔작을 포함한 2022년 네 편, 2023년 네 편, 2024년 한 편. 그러니까 분기별로 한 편가량 꾸준히 발표를 한 셈이다. 그동안 습작했던 걸 다시 고쳐 발표했을 수도 있고, 직장 또는 직업 때려 치우고 본격적으로 전업작가 생활로 접어들었을 수도 있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작품들이 흥미롭다. 소설집의 제목을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으로 뽑은 것처럼, 작가는 기본적으로 왼쪽 성향을 가졌다. 그러나 주변에서 지겹게 발견하는 투쟁적 유아독존의 왼쪽은 아니고, 흔히 오른쪽의 상징이랄 수 있는 자본이나 학력 같은 권력에서 소외된 마이너리티 사이의 삶을, 이렇게 말해도 좋을 지 모르겠지만, 따듯하게 그리고 있다. 그래서 독자는 이 마이너리티들의 어울림을, 예전 자녀 교육 문제 때문에 어수선했던 고위 공무원이었고 지금은 한 정당의 총수가 말했듯이, 시냇가의 가재, 붕어, 개구리들이 자기들끼리 분수를 알고 나름대로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재, 붕어, 개구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계급 탈출/타파 노력은 사실 시냇물 속에서 벌어지겠지만, 진짜로 사람들이 사는 사회 속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이들은 기껏해야 다 들으려면 몇 시간이나 걸리는 전세계 각국의 언어로 녹음한 인터내셔널가를 유튜브를 통해 들을 뿐이다. 어디서 본 거 같지? 나만 그런가? 혁명은 되지 않고 방만 바꾸어 버린 김수영 같지 않아?

  같은 중학교를 졸업한 권진주와 김니콜라이. 권진주는 대학에 진학했지만 학교 다니는 내내 편의점, 생과일주스 가게, 무한리필 돼지갈비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졸업을 했고, 그러면 뭐해, 두어 군데 사무실에 취직을 했지만 수당 없는 초과근무와 급여 지연, 갑질, 성희롱에 학을 떼고 이마트인 것이 틀림없을 대기업의 비정규직원으로 취직해 식품 쏜살배송 팀에서 근무하고 있다. 김니콜라이는 특성화고에 들어가 선반, 밀링 같은 쇠 가공 쪽으로 자격증을 몇 개 땄지만 자격증과 전혀 관계없는 식품공장을 시작으로 이러저러한 공장을 전전하다가, 경기도 남동쪽 도시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그래도 중학교 동창, 그것도 반창이니 반가웠겠지? 이들은 곧 전화번호를 교환해서 진주가 먼저 삼겹살에 소주를 사고, 다음엔 한국 태생 고려인 3세 니콜라이가 감자탕에 소주를 사는 등 어울리다가, 비정규직의 직장생활이 길어질 수는 없는 법이라서 비슷한 시기에 경기도 남서쪽으로 옮겨 아예 한 집에 살기로 한다. 니콜라이가 귀화를 하려면 먼저 영주권을 따야 하는데 우리나라 국민 평균 수입의 일정 수준에 해당하는 재외국인에게만 영주권이 주어지는 조항에 의거하여, 이때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연수입이 3천8백은 되어야 한다. 꿈 깨야지 뭐. 근데 한국인과 결혼하면 곧바로 영주권을 얻고, 즉시 귀화를 위한 절차를 밟을 수 있다나? 어쩌셔? 진주하고 결혼신고만 하면 될 거 아냐? 근데 그게 쉽게 되겠어? 세상 사는 일 마음 같지 않아서 그저 유튜브 틀어놓고 인터내셔널가만 겁나 부르는 거지,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어 버리는 것처럼.


  처음 읽는 김기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 아마 첫 소설집일 걸? 그러면 처음 읽는 것이 당연한데, 마음에 든다. 시선이 과격하지 않고, 꽤나 진보적 성향이지만 웅변하지 않는다. 별로 꾸미지 않는 문장으로 작품을 쓴 것처럼 보이는데,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섬세하게, 실핏줄 같이 쓸 수 있다는 걸 아주 잠깐씩 팍, 보여주기도 한다. 서른일곱 살까지 습작을 했다면, 공력이야 말해 뭐하겠어. 엉겁결에 후다닥 등단하는 행운을 잡은 몇몇 로또들 보다 많이 윗길이다.

  근데 이미 꼰대의 대열에 들어간 내게 김기태의 작품 속에는 작가가 생각도 못한 허들이 놓였다는 건 몰랐겠지. 나는 TV를 거의 보지 않는다. 그래서 드라마, 예능프로그램, 21세기도 아니고 1990년 이후에 나온 국내/해외 대중음악에 관해서는 완전 깡통이다. 반면에 김기태는 대학에서 언론학부를 졸업했다니 예전 방식으로 말하자면 신문방송학과 맞지? 성시경이 졸업했다는 과. 그래서 TV 프로그램과 K-팝, 걸그룹, 보이그룹 등등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 그걸 진짜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김기태의 단편 몇 개가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다는 건 아니지만 좀 갑갑했던 건 사실이다. 제일 앞에 실린 <세상 모든 바다>는 물론이고, “짝짓기 프로그램”이란 걸 묘사하는 두번째 실린 작품 <롤링 선더 러브>도 정말 그런 짝짓기 프로그램이 있었고, 출연한 사람들한테 그렇게 무도한 작업을 하라고 했다고?

  왜 내가 <1박2일>이나 예전 MBC에서 비슷한 시간에 하던 오락 프로그램을 딱, 끊어버렸느냐 하면, 단지 해당 프로그램에 나온다는 거 하나 가지고, 방송이라는 권력이 출연진, 소위 방송인, 강호동, 이승기, 엠씨몽, 이수근, 유재석, 박명수, 하하, 기타 등등 한테 온갖 창피스러운 꼴을 당하게 해서 그랬다. 연예인이라는 거 하나 가지고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망가뜨려놓고 낄낄거릴 수 있어?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그렇지. 에구, 다른 말이 너무 길어졌네.


  제일 앞에 실린 <세상 모든 바다>는 발단에서 K-팝 그룹 ALL THE SEAS OF THE WORLD, 세상 모든 바다, 약칭 “세모바” 또는 “SMB” 공연이 잠실운동장에서 있는데, 공연이 끝난 후 세모바가 공연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야외에서 게릴라 라이브를 할 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 그걸 보기 위해 14만 명이 몰린다. 이곳에서 한국에 유학 중인 ‘일본으로 귀화한 재일 거류민 3세의 아들’ 하쿠가, 경북 해안 지역에 있는 해진군에서 콘서트 때문에 올라온 중학생 영록을 만나고, 곧 헤어진다. 자취집으로 돌아온 하쿠가 14만명이 운집한 잠실에서 몇 명이 죽는 사고가 난 것을 TV를 통해 알게 되고, 사망자 명단에 해진군의 중학생 영록도 포함되어 있는 걸 발견한다.

  하쿠는 영록을 잊지 못해 낙후된 해진군을 방문한다. 거의 망가져가는 도시. 군청 앞에 작은 테이블을 차려놓고 한 아주머니가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원래는 여러 명이 모여 시작을 했지만 날도 춥고, 유동인구도 없어서 점점 작은 규모로 이어가다가 그래도 시위를 멈출 수 없어 오늘은 한 명만 서 있게 된 모양이었다. 시위의 주장은, 경북도와 해진군의 원안대로 이 지역에 원자력발전소를 지어 달라는 내용이었다. 주변에 산업도 없고, 제대로 된 어항도 없으며, 그저 작은 온천지대 하나뿐이라 해진군은 점점 낙후되고 있어서 원자력발전소를 유치하려 하지만 환경단체의 반대로 몇 년씩이나 중단 또는 연기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쿠는 자기라도 원전유치 청원에 서명하려다가, 일본인이기도 하고, 자기 정보 노출 문제도 있고, 원전을 굳이 찬성하는 입장도 아니어서, 마침 차가 왔다는 핑계로 그냥 서울로 돌아오고 만다.


  원전에 반대하는 입장은 이해하겠다. 세상의 모든 원자력은 나쁘다? 자주 나쁘지만 어떤 때는 덜 나쁘다. 아주 가끔은 그래도 써야 한다. 원전이 석탄발전에 의한 지구 온난화를 조금이라도 지연시킬 수 있으며 경제적이다. 아직 태양광을 비롯한 자연 발전은 원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낮은 효율을 낼 뿐이다. 자연발전을 고집하기 위해서는 매우 비싼 전기요금을 감수해야 한다. 열배, 혹은 50배? 어쩌면 미친 트럼프의 비자 수수료처럼 한 방에 100배.

  원자력발전 반대, 지구 온난화 반대를 주장하시는 분. 올 8월 전기요금 얼마 내셨나 궁금하다. 내가 먼저 밝히겠다. 8월 사용량 264KWh, 요금 38,750원. 9월엔 182KWH, 28,500원. 다른 집보다 많이 썼는지, 적게 썼는지 모른다. 우연히 책상 위에 놓여 있길래 그냥 써본 거다.

  찬 태양광, 반 원전과 관련해서 내가 제일 관심있는 것은 원전을 쓰지 않으면 당연히 전기 가격이 치솟을 텐데 도시 빈민이 에어컨을 ‘원하는 만큼’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가동 시간만큼’ 사용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7월 말에, 에어컨이 없으면 여름을 견디기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싶어서 3일 동안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고 지내보겠다고 했다가, 딱 하루 버티고 에어컨 다시 틀었다. 그러고나서 지금 세상은 에어컨 없으면 살기가 쉽지 않다고 결론 냈다. 앞으로는 전기 자동차, 전기 버스, 전기 화물트럭, 전기 화물선박, 전기 비행기까지 만들어 써야 하는 시절이 바로 코 앞에 닥쳤다. 동시에 지구가 더 더워지지 않기 위하여 대량으로 탄소를 배출하는 화석에너지를 이용한 전기 생산은 당장 멈추어야 한다. 이 상황에서 여전히 태양광을 비롯한 자연 에너지 발전을 주장하는 분들 보기가 좀 민망하다. 당신들은 열배, 오십배 비싼 전기료를 감당할 수 있다고 쳐도, 없는 사람은 어쩌라고? 당신이 정말 좌파라면, 진보진영이라고 자부한다면 계급도 생각했으면 좋겠다. 원자력 결사반대 주의자였던 다와다 요코와 오에 겐자부로 같은 반 원자력 운동가들의 한달 전기 사용량이 얼마나 되는지는 왜 궁금할까?

  핵 에너지를 반대하는 환경주의자의 주장도 다각도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리 환경주의자라지만 싫어도 써야 하는 필요악도 있어서, 이걸 원자력 발전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주장에 현혹되는 순진한 분도 있는 법이다. 과학을 배제하는 진보, 나는 이것을 인정할 수 없다. 나는 원자력 발전에”는” 찬성하는 친환경주의자이다. 자연발전이 비약적으로 도약하여 원전보다 전기 생산 가격이 조금만 비싸지거나, 같아지거나, 저렴해질 때까지라는 조건이다. 아무 조건 없이 반원전을 외치는 분들, 귀댁의 8월 전기 사용량이 궁금하다. 내 집 사용량보다 당연히 훨씬 적을 것으로 믿는다. 강조하는데, 마침 8월, 9월 아파트 관리비 청구서가 앞에 있어서 하는 말이다.


  김기태가 또 책을 내면 그것도 틀림없이 읽어볼 생각이다. 이 책은 내가 희망도서 신청을 하긴 했지만 바로 5분 전에 누군가 먼저 신청을 해서, 입고가 됐고, 이후 무수한 이용객들이 예약을 하는 바람에 5월에 나온 책을 이제야 읽었다. 바라건대 뚝심 잡고 제대로 장편 한 편 써 보면 어떨까?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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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의 사랑 거장의 클래식 6
딩옌 지음, 오지영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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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도 4반세기가 지났는데, 이렇게 소설 쓰기, 있기, 없기? 앙가슴이 무너질 용의가 없으면 아예 책을 열지도 마시라. 여전히 손짓 하나로 심리 묘사가 가능하다는 말이지? 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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