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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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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파리에서 태어난 에르베 르 텔리에가 졸업한 최종 학교는 파리 저널리즘 대학원이다. 과학 저널리스트로 일하다 1991년 소설가로 데뷔했다. 이후 언어에 관한 현상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언어학자, 소설가, 시인, 저널리스트라고 위키피디아에 나와있다. 1991년에 데뷔하고 92년에는 울리포(Oulipo: 잠재적 문학 워크숍 모임)의 멤버로 들어간다. 이 울리포 그룹의 주요 멤버로 <지하철 소녀 쟈지>의 작가 레몽 크노, 이름만 대도 묵지근한 조르주 페렉, 이탈로 칼비노 그리고 처음 이름을 들어보지만 서양에선 날리는 작가들 자크 루보, 장 레스퀴르, 해리 매튜스 등이 있단다. 이 책 광고글을 보면 마치 텔리에가 이 사람들과 동시대에 활약한 것처럼 오해할 수 있지만 나이 차이가 얼만데, 그건 아니고 울리포 그룹이 그만큼 특히 프랑스 문학계에서 방귀 깨나 뀐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텔리에는 이런 권위있는 워크숍 그룹의 네번째 회장을 지냈는지, 지금도 회장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4대 회장이란다. 울리포 멤버들의 이름값은 빵빵하건만 이 단체 회원 중에서 유일하게 공쿠르상을 받은 작품과 작가가 에르베 르 텔리에의 <아노말리>라는 것도 특이하긴 하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첫 씬의 주인공 블레이크(이후 “B”로 씀)가 등장한다. 타인들의 죽음으로 자신의 삶을 꾸리는 전문가. 이름하여 살인청부업자. B가 소년이었을 때, 엄마가 퓌조Peugeot(우리가 흔히 “푸조”라고 하는 프랑스산 승용차)를 운전해 보르도 인근 지방도로를 달리다가 콜리종 개와 충돌한 적이 있었다. 콜리가 대형 견종이라 차량 헤드라이트가 부서지는 충격을 받았지만, 개도 순식간에 심한 타격을 입어 피를 흘리며 서서히 죽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었다. 엄마는 사체 앞에서 얼어붙었다. B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약간 슬픔을 흉내 내보았지만, 사실은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B가 엄마한테 한 첫 마디는, “엄마, 축구교실에 늦겠어요.” 죽음을 보고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 사람. 우리는 이들을 일컬어 사이코패스라고 한다.
B는 스스로 살해의 능력을 타고난 것처럼 여겼다. 샤를 삼촌이 사냥을 갈 때 B와 함께 간 일이 종종 있었는데, 이때마다 B는 살해에 필요한 모든 능력을 발견했다. 총 세 발에 토끼 세 마리. 노루의 목을 따거나 토끼의 각을 뜨는 일도 아주 좋아했다. 하지만 부상한 동물의 목숨을 끊는 것은 재미없었다. 재미있는 건 기술적인 손놀림이 핵심. 반복을 거듭해 물 샐 틈 없이 완벽한 루틴을 유지하는 일이었다고.
스무살의 B는 리포브스키, 파르사티 또는 마르탱 같은 이름으로 알프스 근처 소도시의 호텔학교에 들어갔다. 요리를 배우면서 전자공학과 프로그래밍을 좋아했고, 총명한 두뇌는 독학과 딱 3개월의 런던 어학연수만으로 영어를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요리와 영어 습득은 훗날 시신 처리와 살인청부에 관한 국제적 명성에 보탬이 됐고. 견습요리사로 음식점에서 일하고 있는데 술에 만취한 남자가 들어와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여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0’이 네 개 붙은 금액을 지불할 용의가 있노라는 얘기를 듣고, B는 블레이크를 만들어냈다. 앤서니 홉킨스가 출연한 영화 <레드 드래곤>을 보고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집을 읽었는데 마음에 딱 드는 시가 있어 ‘블레이크’라는 이름을 단 것.
“위험한 세상으로 나는 뛰어 들었지 / 무력하게, 벌거벗은 채, 빽빽 울면서 / 구름 속에 숨은 악마처럼”
견습요리사 B는 며칠 후 사내에게 블레이크의 연락처를 건네고 기다렸다. 제네바의 웹카페에 등록한 이메일 주소 blake.mick.22. 메일 보내지 마시라. 이런 메일 주소 없다. 사흘 후에 정말로 사내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고객의 주문은 살해당할 남자가 “자연스럽게 죽은 것처럼 보이게” 해달라는 것. 죽음의 형태를 주문할 경우 가격이 두배이며 실행기간은 한 달을 요구했다. 청부살인 처음 해보는 작자가 이 정도. 태중에서부터 프로페셔널 킬러였던 것이 맞다.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표적인 50대 남자를 정밀 관찰하고, “자연스럽게 죽은 것처럼 보이게” 살해하는 상세 묘사가 이어진다. 이 때쯤에 내 마음은 혹, 한다. 무척 재미있다. 오랜만에 읽는 범죄 스릴러 소설이다. 정말 죽여주는데, 이거!
그러나 다음 장으로 넘기면 틀림없이 심각한 우울증 증세가 있는 소설가이자 번역자인 빅토르 미젤이 등장해 “나는 내 존재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불멸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라는 문장이 들었는지 아닌지 애매모호한 소설 <아노말리> 원고를 편집자에게 보내고 아파트 발코니에서 스스로 자유낙하, 세상을 등진다. 이때가 2021년 4월 22일 정오.
또 다음 장의 주인공은 뤼시 보게르. 아들 하나를 혼자 키우는 젊은 여성이다. 영화 영상처리 관련 직업을 가지고 있다. 삼 년 전에 한 파티에서 프랑스 유수의 건축사무소 대표로 있는 앙드레 바니에를 만나 연애를 하고 있다. 그러나 앙드레가 얼마나 뤼시의 만족에 집착하는지 이제 싫증이 난 상태. 앙드레가 업무상 3월 초에 뉴욕 실버 링 건설현장으로 출장 갈 일이 있어 이때 뤼시도 동행했다.
이 다음 장까지만 이야기하자. 주인공 데이비드. 미국인으로 에어 프랑스의 조종사로 근무하는 베테랑. 주로 파리-뉴욕 노선에 투입되어 보잉787기를 조종한다. 데이비드의 동생 폴은 뉴욕의 마운트 시나이 병원에 의사. 데이비드의 눈 흰자위 색깔이 좀 수상쩍어 정밀검사를 받아보라 제의했고, 그래서 정밀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췌장암 판정을 받았다. 근데 그건 나중 일이고, 2021년 3월 프랑스에서 출발해 뉴욕으로 비행하는 도중, 여태 경험하지 못한 극심한 난기류를 만나 말 그대로 죽을 고생을 하고 가까스로 JFK 공항에 착륙했다. 그런데 3개월 후, 다시 데이비드가 조종하는 보잉787기가 극심한 난기류를 뚫고 JFK에 착륙했는데, 승객들도 전부 같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전부” 같은 사람은 아니다. 한 명. <아노말리>를 쓴 소설가 미젤은 자살해버렸으니까 없을 거 같지? 근데 3개월 후인 6월에 뉴욕에 착륙한 비행기 안에는 살아있는 빅토르 미젤이 있는 거다. 3월 난기류 때와 딱 같은 상태. 다른 사람들은 이제 DNA는 물론이고 모든 과거의 경험을 공유하는 또다른 나가 등장한 셈이다. 살인청부업자, 건축가, 영화 영상기사, 여객기 조종사도.
이 현상을 해석하기 위하여 물리학자, 수학자, 종교지도자 기타 등등이 모여 미국의 안보를 수호하는 기관과 숱하게 토의하지만 성과도 없다. 한 번 이런 현상이 발생했으니 후에, 어쩌면 3개월 뒤에 또다른 보잉787기가 뉴욕에 착륙할지 그걸 누가 알아?
이중 나선 구조를 보는 것 같은 작품. 책 뒤에 실린 역자의 말을 굳이 심각하게 여길 필요 없이 그냥 즐기기만 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읽는 사람에 때라 SF적 차원이동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책의 편집도 널럴해 후딱 읽힌다. 책을 덮자마자 이이의 다른 작품이 또 뭐가 있나 봤더니, 없다.
공쿠르상 수상 작품도 요즘엔 재미있는 책이 제법 많군. 전에는 공쿠르 상을 받기 위해서는 독자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작품을 써야 한다고 믿은 시절도 있었는데. 세상은 변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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