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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ㅣ 앨리스 먼로 컬렉션
앨리스 먼로 지음, 서정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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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먼로. 실패하지 않는 선택을 원하면 먼로의 책을 읽으면 된다.
1931년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시골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앨리스 레이드로. 이 아이의 아버지는 여우와 밍크 목장을 운영했다. 짐승들의 먹이를 구하기 위하여 부상을 입었거나 늙어서 이젠 안락사를 시켜야 하는 큰 덩치의 가축들, 예컨대 말 같은 짐승을 사들여 창고에서 총을 쏴 죽이고 각을 뜨기도 했겠지. 훗날 웨스트 온타리오대학 동창인 제임스 먼로와 결혼해 앨리스 먼로가 되어 글을 쓰고자 했을 때, 남편이 아이들 뒷바라지도 하고 요리도 하며 앨리스를 나름대로 돕기도 했지만 1931년생 시절의 여성으로 그리 쉽게 살림살이 내버려둘 수는 없었겠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단편소설에 집중하는 것이었다고. 네 아이를 낳고, 한 아이는 낳자마자 죽었지만, 21년의 결혼생활을 끝냈다. 4년 후에 다시 프렘린씨와 결혼해 37년을 살다가 과부가 된 해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문학상 받은 것을 빼고 이런 앨리스 먼로의 생 가운데 있었음직한 장면이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에 등장한다.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 먼로가 내겐 어머니뻘인데, 이런 사람하고 한 번 살아봤으면, 부부가 아니라 모자지간이라도 좋고, 숙모나 외숙모라도 좋은, 한 세대 윗사람으로 내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관계였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거였다. 앨리스 먼로처럼 소설을 쓰는 직업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그냥 그 시절 여성들이 늘 그랬듯 가정주부여도 좋고, 헛헛한 세월 먹고 살기 위하여 생선가게나 배추장사 아니면 칼국수 장사를 해도 좋으며, 운이 닿아 정여사처럼 공부를 할 수 있어서 펜대 굴리는 직업여성이라도 좋았을 텐데.
이렇게 써놓고 보니 어쩌면 이런 생각이 앨리스 먼로를 위한 최고의 찬사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자면, 이 책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아홉 편의 중단편 속에서, 한 편도 빼놓지 않고, 먼로의 눈과 입술은 모질지 않다. 어느 한 구석 등장인물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들의 삶에 대하여 냉소를 흘리지도 않고, 아니꼬운 눈꼬리를 짓지도 않으며, 결코 질투도 없이, 그냥 그렇게, 너는 잘 살고 있는 거야, 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맞아, 네가 하는 일, 네가 품고 있는 타인에 대한 욕정 같은 것도 살면서 다 그럴 수 있는 일이지. 정말로 일을 벌이고 나서, 그걸 굳이 고백해 평온한 삶을 크게 뒤바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뭐 그것도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그렇게 어깨를 토닥이는 것 같다.
이 책이 2001년에 나왔다. 이때 먼로가 70세. 살만큼 살았고, 겪을 만큼 겪었으며, 명성도 누릴 만큼 누린 노년. 먼로만큼 현명하게 늙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는 세상을 관조하고 포용할 수 있는 시점이지만 정말로 넉넉한 품을 가진 노인은 많지 않다. 앞으로 남은 생이 20년도 넘는다는 것을 이 때는 몰랐을 것이고, 세상에서 제일 큰 문학상을 받을지도 아마 몰랐을 것. 그리하여 이제 새삼스레 큰 욕심도 부리지 않으며 틈나는 대로, 하지만 기억이 예전 같지 않아 가물가물한 저 오래 전의 이야기를 회상하며 쓴 글 같이 보이는 작품들. 이런 기억의 매력은 연륜을 더한 사실의 왜곡에 있는 지도 모른다.
당연히 책에 실린 모든 작품이 다 좋았던 건 아니다. 그럼에도 도무지 어느 하나를 골라 소위 “깔” 수 없었다. 다른 독자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나는 그렇게 먹먹한 심정으로 읽었다.
사는 건 어렵다. 노년에 이런 시각으로 삶을 바라보는 건 더 어려울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먼로 같은 사람하고 한 번 살아볼 기회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부부나 연인 말고 한 세대 위, 그래서 내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이로. 하긴, 나 한테 그런 행운이 어디 있었겠어? 또 모른다. 내가 눈이 어두워 못 보고 지났으면서 이제 와서 애먼 지청구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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