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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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시아 벌린은 내가 아는 모든 작가 가운데 유일하게 알래스카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그것도 미국이 대공황 중이던 1936년 11월에. 그렇다고 알래스카가 벌린의 고향이라고는 할 수 없다. 아버지가 광산 엔지니어로 주로 광산의 안정성을 진단하는 폐광 전문 엔지니어였던 모양이다. 확실하지 않다. 책에서 그렇게 나오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것일 뿐. 루시아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어렸을 적 부터 가족은 아버지의 직업을 위하여 전국 각지의 광산을 따라 이사를 다녔다. 위키피디아에 나오는 곳으로 아이다호, 몬태나, 애리조나, 텍사스 엘파소, 그리고 칠레.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루시아의 아버지가 참전을 했고, 이 기간 동안 가족이 텍사스에 있는 외갓집에 머물렀지 않았을까 싶다.

  외갓집은 나름대로 괜찮게 먹고 살았던 것처럼 보인다. 비록 알코올 중독자이긴 했지만 외할아버지는 동네 치과의사로 의치 만드는 손기술 하나는 일대에 따라올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빼어났다고. 알코올에 푹 전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부실한 잇몸. 외할아버지는 자기 잇몸에 딱 맞는 근사한 의치틀, 또는 틀니를 만들어놓고 입안의 이를 뽑기로 결심한다. 당연히 환자가 오지 않는 일요일을 골라. 그러기 위하여 위스키를 잔뜩 마시고 펜치를 든 채 거울 앞에서 입을 하마처럼 벌리고 이를 쥐어 뜯어야 하지만 중이 제 대가리 깎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어? 그래 외손녀를 불러 손에 펜치를 쥐어주고 어금니부터 뽑게 만드는데, 아이고, 고통을 잊을 정도로 술을 마셔야 했으니 술냄새와 침냄새, 위장 속 헬리코박터균에서 뿜어져 나오는 악취, 치석 썩은 냄새, 늙은이 몸냄새까지 온갖 냄새의 경합 속에서 펜치를 불끈 쥐고 뽑긴 뽑았는데, 그러고 나니까 한 번에 쏟아지는 피. 그게 흘러 할아버지의 가슴팍과 루이스의 치마까지 막 튀고, 흐르고, 뿜어진 피, 이걸 어린 꼬마가 우짤까?

  외할아버지의 알코올 중독 증상 형질은 자연스럽게 유전적으로 내리물림해, 친절하고 루시아를 누구보다도 배려해주고, 보호해준 존 외삼촌 역시 알코올 중독 증상으로 며칠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하면 동네 파출소 유치장이요, 몇 달 안 보이면 엘파소 구치소에서 재판 대기, 몇 년 안 보이면 텍사스의 모처에 웅장하게 지은 교도소 안에서 빵 생활하고 있는 거였다. 루시아의 일생에서 언제나 기댈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의지처 존 외삼촌이.


  또 비슷한 형질이 루시아 벌린의 어머니를 뛰어넘어 격세유전, 큰 키의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으며, 17세에 시작해 세 번 결혼해 네 명의 자식을 두는 루시아 벌린 본인한테 이어졌다. 당시엔 술과 담배가 임신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연구를 겨우 진행하고 있던 시기라 임산부도 줄창 술과 담배를 마시고 피우던 때. 술, 담배보다 임신중 마약 복용으로 태어난 아기들의 유전적 결함이 더 눈에 들어왔을 터였다. 그건 나중에 벌어질 일이고, 그냥 스웨덴인으로 불리는 스칸디나비아 이민 계열의 큰 키임에도 불구하고 척추측만증이 있어 무겁고 딱딱한 교정기를 등에 달고 다녀야 했던 어린 루시아 벌린은, 칠레의 광산 지역까지 가서 몇 년을 살아야 했다. 이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닌 것 같다. 당연히 개신교를 믿는 미국인이 칠레의 수녀들이 가르치는 학교를 다녀야 했으니 좀 갈등이 있었겠지? 맞다. 오해가 생겨 한 수녀를 민 것이 그만 뒤로 넘어졌으며, 수녀는 이 일을 폭행이라고 교장에 고발해 루시아 벌린은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이외에도 숱한 에피소드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뉴멕시코, 멕시코, 뉴욕, 남부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등지에서 약 3,142번 이사를 다니며 고등학교 기간제 교사, 전화 교환수, 병동 사무원, 가정집 청소부, 내과 간호보조 같은 비 문학적 잡일을 하다가, 1990년 초까지 샌프란시스코 카운티 교도소 내 수감자를 대상으로 창작 글쓰기를 가르쳤고, 노오오오력 끝에 티베트 불교가 뉴멕시코에 창립한 나로파 대학의 잭 캐루악 시창작 연구실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기도 했다. 병원의 나이든 환자들을 인터뷰하며 글감을 모으기도 했고.

  척추측만증으로 달고 다니던 교정기가 폐를 찔러 1994년부터 죽을 때까지 산소 공급을 받아 숨을 쉬어야 했으며, 이 병 때문에 모든 일에서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자식농사는 제대로 지었는지 병이 폐암으로 전전해 항암치료까지 받아 재산까지 몽땅 말아먹게 되자 로스엔젤레스에 사는 아들이 엄마를 콜로라도에서 데려와 죽을 때까지 함께 살며 어머니와 아들들(넷 다 아들이었던 모양이지?)의 정을 돈독히 하면서, 68번째 생일날, 루시아 벌린이 제일 좋아하는 책을 손에 쥔 상태에서 길고 고단한 생의 숟가락을 놨단다.


  왜 이리 작가 루시아 벌린의 삶을 자세하게 소개하느냐 하면, 이 장면들이 거의 다 책의 본문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43편의 단편소설 속에 그래서 자주 비슷한 내용이 등장인물의 이름만 바꾸어 나오기도 한다. 이이가 살면서 모두 76편의 단편소설을 썼다는데 이 가운데 43편을 실었으니 이 한 권으로도 벌린을 충분히 기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이는 살아생전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지만, 정작 이름을 낸 것이 2015년에 이 작품집 《청소부 매뉴얼》이 나온 이후라고 한다. 사후 출판한 이 책이 뉴욕 타임스 북 리뷰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고, 몇 주 연속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고. 다만 이미 작가가 죽었기 때문에 수상 대상에서는 빠져 작가상을 받지 못했단다.

  2024년에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21세기” 100대 도서 리스트에서 79번 자리를 꿰찬 책이다. 그래서 나도 읽게 되었던 거다.



  이 책을 읽을까 말까 그래도 오래 머뭇거리게 만든 건, 책 좀 읽는 사람들은 이름 대신 ‘공땡땡’이라 불렀던 역자 때문이었다. 오해하지 마시라. 예전 한 시절에 그랬다는 말이다. 지금은 안 그러겠지. “한 시절”의 임팩트가 좀 컸다. 아니다. 됐다. 그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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