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7일 토머스 페인의 <상식>으로 시작해서 백민석의 <공포의 세기>까지 백 일 넘게 읽은 책 가운데 (당연히)제 기준으로 재미있게, 공감하면서, 즐겁게 읽은 책들을 골라 짧은 소감을 첨부합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면서 덩달아 몇 권을 골라 감상하신 후의 느낌은 제가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별거 없는 소감을 읽어주시는 분들의 책 선택에 조금 도움이 된다면 기분이 조금 좋아질 거 같습니다. (원래 알라딘 서재에 독후감 올리는 것이 다 저 좋아 하는 지랄이거든요.) 순서는 책 읽은 날짜순입니다.





1.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 <모히칸 족의 최후>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개척자들>의 전편. <개척자들>이 솔직히 말해 읽기 지겨운 면이 있지만 이건 하나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다. 초기 미국 동부의 광활한 원시림에서 펼쳐지는 모히칸 족 최후의 왕자와 명사수 네티 범포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 죽음의 이야기.



2. 오노레 드 발자크, <13인당 이야기>

 

 인간살이에 있어 제일 재미난 이야기는? 애정. 그 중에서도 치정 이야기. 맞지? 거기다가 지금 기준으로는 소프트한 잔혹극까지 섞여 있으니 이 정도면 말 다 한 거 아냐? 빚을 갚기 위해 하루 열네 시간씩 소설을 썼다는데 이 수준이면 발자크, 이 영감, 진짜 천재 아냐?



3. 에밀 졸라, <쟁탈전>

 

 루공-마카르 총서 가운데 두 번째. 문학동네에서 나오는 <돈>이 <쟁탈전>의 후속이니까 당연히 이 책을 먼저 읽어야할 것. 졸라가 만든 주인공들의 혈관 속에 든 편집증과 극도의 몰입이 이 책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는데 이번엔 주식과 사업에 쏠려있다.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사기행각의 저 먼 꼭지점.



4. 김태정,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누군들 가슴 속에 쓸쓸한 나뭇잎 하나 휘날리지 않을까. 그러나 진짜 쓸쓸함을 만져보고, 맛보고, 바라보기 위해선 이 시집의 일독이 필요하다. 마흔여덟에 서울을 떠나 해남 미황사 앞 작은 방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시인의 소박한 꽃바구니. 그게 시인의 삶이었으리라.



5. 서머싯 모옴, <인생의 베일>

 

 자칭 최고의 2류 소설가가 중국을 무대로 쓴 작품. 이렇게 간단히 얘기하니 별 거 없이 보이시지? 천만에. 최고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가끔 스스로 최고의 인격도 가지고 있다고 오해를 하고는 하는데 사실을 알고 보면 천박한 짐승 같은 작자인 거, 이런 거, 모옴이 정말 잘 그려낸다.



6. 비키 바움, <그랜드 호텔>

 

 모든 일이 벌어지지만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곳. 바로 그랜드 호텔. 들어올 때는 회전문을 통해 들어오지만 나갈 때는 회전문 또는 뒷문의 시멘트 계단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곳. 오직 돈에 의하여 사람의 등급을 측정하는 속물들의 파노라마. 신신애 말씀이, “인생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



7. 사바하틴 알리,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최고의 신파. 역시 재미에 관한 한 신파가 제일이다. 지금은 왕창 찌그러진, 첫사랑에 실패한 한때 부유했던 남자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 왕년에 실연 한 번 안 당해본 사람 없을 터, 당신이 그 ‘왕년에 실연 한 번 당해본 인간’이면 책 읽다가 목 놓아 엉엉 울어버리고 싶은 순간이 분명 올 터. 이난아의 번역 한국말도 매우 좋다.



8. 리온 포이히트방거,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

 

 18세기 유럽. 중세가 말살되지 않고 온전히 남아있던 고리타분한 지역 스페인. 그곳의 궁정화가 고야. 왕가와 귀족들의 구미에 맞는 초상화를 그리다가 인정을 받고, 드디어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는 감히 왕의 일가를 그린 대작에 심술궂고, 멍청하고, 허영 덩어리로 그들을 묘사하기에 이른다. 아쉬운 건 이 책이 1부에 그치며 2부를 쓰지 않고 갔다는 점.



9. 뮤리얼 스파크,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있는 마샤 블레인 여학교에 재직한 진 브로디 선생에 관한 재미난 이야기. 똘똘한 학생들을 골라 1학년부터 졸업할 때까지, 심지어 졸업한 다음에도 자기 군대로 키운 여자. 그러나 학생들은 해마다 성장해가고, 자연스럽게 브로디 선생의 본질을 이해하게 되는데, 하여간 신기한 캐릭터의 여자를 구경한다. 난 묘하게도 B사감이 생각났지 뭐야.



10. 조르주 페렉, <잠자는 남자>

 

 소통하지 않는 한 인간의 일상을 컴퓨터 단층 촬영을 하듯 세밀하게 쪼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일. 이런 책들은 거의 예외 없이 드라이하기 이를 데 없어 함부로 추천했다가는 귀싸대기 한 대 얻어맞기 십상. 난 이런 책 좋아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읽은 다음의 감동이나 동감은 책임 안 짐.



11. 조인선, <시>

 

 안성에서 소 키워 팔아 생활하는 시인. 애당초 시 써서 돈 벌기 무망함을 자각하여 소 키우는 부모한테 비볐을 뿐 처음부터 시를 쓴 인간이라서, 이이의 직업에 속지 마시라. 확실한 초현실주의자. 난 초현실주의 문학을 경원한다. 그러나 시집 속에 숨은 삶의 시들이 참 정 있고 재미도 있다.



12. 홍성원, <남과 북>

 

 문학과지성사는 하루 빨리 이 책을 복간해야 한다. 한국전쟁 전반을 다 조망하는 기념비적 작품. 기존의 빈부, 귀천 등 사회질서를 깡그리 전복시킨 한국사 최초이자 최후의 전환기를 마련한 한국전쟁. 누가 있어 이 전쟁의 근본 성격까지 홀랑 까발린 작가가 있었는가.



13.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새엄마 찬양>

 

 베드 씬 혹은 어린 아이와 새엄마 사이의 과한 성적 표현을 들어 이 작품을 재수 없다 얘기하지마시라. 열 살 먹은 귀여운 악동이자 천사이며 천의무봉한 알폰소의 정체가 바로 사랑의 신 쿠피도 또는 아모르이기 때문. 하여튼 요사의 성적 묘사는 아예 끝장을 본다니까.



14. 막스 갈로,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참전 하사관이자 우파 사회민주당원에 의하여 소총 개머리판에 뒤통수를 강타당하고, 역시 참전 중위의 권총으로 확인사살을 당한 후 시신까지 국경의 운하에 던져져 몇 달 후에 떠오른 여류 혁명가. 평생의 애인이자 동지였던 레오 요기헤스, 스파르타쿠스 당의 수뇌이며 같은 날 함께 처형당한 카를 리프크네히트 등의 혁명적 일생. 이름 자체로 전설인 여성의 한 생애.



15. 윌리엄 트레버, <윌리엄 트레버 - 그 시절의 연인들 외 22편>

 한 편, 한 편이 다 절절한 단편선. 이번 가을에 읽어보시면 정말 좋을 책. 쉽게 이런 말 안 하는데, “강추!” 스물세 편을 관통하는 쓸쓸함이라니. 넘치는 것도 없고 모자란 것도 없이 꽉 짜인 긴밀한 구성. 그러나 구성 따위는 버리고 그냥 문장 속의 아름다운 황량함만 봐도 좋다.



16. 레몽 장, <카페 여주인> 

 재미있고 가볍다. 하룻밤 동침하면 10억 원 줄게. 이렇게 제의하는데 버티는 여자 있어? 있다. 10억 원이 아깝지 않을(그렇게 생각하는 놈팡이가 있을) 아름다운 얼굴과 외모의 소유자. 제의를 받은 아멜리가 친한 친구한테 “너만 알고 있어.”라는 단서 조항을 걸고 속삭이는데, 세상에 비밀이 있어?



17. 박서원, <아무도 없어요> 

 

 시인한테 문제가 있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 무능한 어머니, 성폭행, 발작, 안수기도, 정신병, 기면증, 결혼과 이혼. 정말로 아픈 시인이 쓴 아픈 시. 시를 읽는 독자도 함께 아프지 않을 도리가 없을 정도의 고통. 박서원은 다른 시인들을 몽땅 엄살쟁이로 만들어버리고 먼저 갔다.



18.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엄청나게 시끄러웠던 2차 대전 말기 연합군에 의한 드레스덴 폭격과 2001년 여객기에 의한 뉴욕 무역센터빌딩 폭파 테러가 알고 보면 믿을 수 없게 가까운 곳에 자리했던 한 가족의 이야기. 여기에 히로시마 원폭까지 더해 폭력에 의한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을 애도하는 소설.



19. 메릴린 로빈슨, <홈> 

 

 

 아 씨. 어쩌자고 사람의 심금을 이리도 저며 놓는단 말인가. 사랑에 실패하고 직장까지 놓아버린 막내딸과 천생 문제아였던 셋째 오빠가 비슷한 시기에 오늘 낼 하고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다. 수십 년 만에 만난 남매간의 어색한 관계가 다시 따뜻한 배려로 이어지고, 또다시 헤어짐으로. 돌아가 잠시 머리를 누일 수 있는 곳, 옛집.



20. 귀스타브 플로베르, <순박한 마음> 

 

 세 편의 단편소설을 담은 책. 그중에 표제작 <순박한 마음>이 단연 돋보인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애에 대한 성찰이 와 닿는다. 이 작품 속에서 도무지 찾지 못했던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발견한 것도 재밌다. 그렇다고 <구호성자 쥘리앵의 전설>과 <헤로디아>가 재미없다는 얘기 절대 아님.



21. 리처드 프래너건,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행복한 사람에겐 과거가 없고, 불행한 사람에겐 과거만 있다. 과거가 남은 인생에 가장 큰 장애로 남을 사람에게 보내는 진혼곡. 시암-버마 간 철도 가설에 동원된 오스트레일리아 포로와 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질병과 굶주림의 실황중계. 진정한 결산을 하지 못한 태평양 전쟁의 비극. 인간 참상에 관한 리얼한 보고서. 필독서.



22. 이언 매큐언, <칠드런 액트> 

 

 

 여성과 아내로서의 위기에 몰린 초로의 재판관에 닥친 소년법 사건. 사흘 안에 수혈을 받지 않으면 사망할 수 있는 17세 9개월의 소년. 아이와 부모는 종교적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지만 판사는 수혈하도록 명령을 내려 아이의 목숨을 구한다. 그러나 과연 생명을 구해주면 그걸로 책임이 다 끝이 날까? 필력 하나는 끝내주는 이언 매큐언의 화법을 감상하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만족.



23. 레이라 슬리마니, <달콤한 노래> 

 

 그동안 사이 안 좋았던 공쿠르 상과의 관계를 다시 돈독하게 만든 책. 초장부터 어린 아이 둘의 잔혹한 죽음과, ‘어미늑대’처럼 울부짖는 엄마 등장. 망상성우울증에 시달려왔던 능력 있는 보모 겸 가사도우미. 그녀 평생 외로움에 둘러싸여 있다는 걸 몰랐던 엄마와 아빠. 사는 게 다 그렇지. 그리도 가까웠던 사이에서 또다시 외로워지기 시작하는 보모.





 한 숨 돌리고 다시 읽어봤다.

이런,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 <푸코의 진자>와 <프라하의 묘지>도 빠지고, 무라카미 하루키도 빠지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 앙드레 말로의 <희망>도 이 리스트엔 없다. 프리모 레비, D.H.로렌스도 없다.

이이들? 실수로 뺀 거 아니고 정말로 내 마음에 들지 않아 빠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아마추어다.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러나, 아무리 예수님의 초등학교 동창이 쓴 작품이라도 내가 싫다면, 싫.은.거.다.

 

세상의 모든 작가는 나 한 명을 위해 태어나, 쓰다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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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0-08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랜드 호텔>은 읽다 말았는데 다시 읽어야겠네요.

요사스러운 요사샘의 새 책은 더 이상 왜 나오지
않는지... 대선 후보로도 나섰다는데 말이죠.

한 때 분더킨트로 불렸지만, 오버레이팅된 작가라는
조너선 사프란 포어, 새 책이 더 이상 나오지 않나
보네요.

Falstaff 2018-10-08 15:08   좋아요 0 | URL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책은 한 권 더 읽어보려합니다. 뭐 오버레이팅이 되건 말건 저 좋으면 좋은 거고, 안 맞으면 안 읽는 거고 그렇지요. ^^
위키피디어 검색해보면 요사가 제일 나중에 쓴 책이 2016년 <이웃>이란 작품이고, 그거 말고도 꽤 많네요. 저도 시중에 요사가 보이면 무조건 구입하고 보는 편입니다만 여간해서 눈에 띄지 않네요. 품절, 절판된 거라도 얼른 다시 찍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박똘 2018-10-08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운 글입니다...😊

Falstaff 2018-10-09 18:54   좋아요 0 | URL
좋게 읽어주셔서 제가 더 고맙습니다.

까리 2021-02-05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이렇게 재미있게 본 건 처음이네요, 댓글도 처음 달아봅니다. 도움이 많이 되었고 꼭 읽어보고 싶은 작품들은 캡쳐해서 장바구니 넣어두려구요! 감사합니다😊

Falstaff 2021-02-05 14:01   좋아요 0 | URL
즐겁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
 
공포의 세기
백민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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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을 읽고 백민석에 관해 상당한 호기심이 돋았었다. 그래서 <공포의 세기>를 아무 거리낌 없이 집어 들었다. 표지가 좀 수상하다. 제임스 앙소르의 “낯선 가면들 strange masks".

 

 

 어째 으시시하시지?


 아니나 달라, 아 씨. 첫 장章부터 극도의 폭력. 그것도 총보다 더 기분 나쁜 매우 잘 드는 칼을 사용한 잔인한 폭력.
 읽기는 끝까지 다 읽었다. 좀 힘들었다. 거기다가 나는 영화도 잔인한 장면 나오는 건 안 본다. 이 책이 얼마나 문학적 성가를 누리는지, 얼마나 좋은 평을 듣는지 모른다. 관심도 없다. 확실한 건, 나하고 정말 맞지 않는 책이라는 것.
 백민석 팬들은 분명 좋아할 거 같기는 하다. 어쨌든 나와 맞지 않는 책을 다른 분께 읽어보십사 권할 수는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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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노래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방미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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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공쿠르 상 수상작이라 해서 선택한 책. 솔직히 말하면 헌책방에서 발견하지 않았어도 구입했을까는 조금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공쿠르 상 수상작 가운데 내 수준으로는 과도한 문학성 또는 전위적 작품들이 비교적 많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서, 이 상 수상작들하고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 상 수상작들을 많이 읽어봤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세상사가 다 그렇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 거. 공쿠르 상에 관해서는 내가 선무당이었나 보다.
 60억 현생인류가 복닥복닥 모여 사는 지구에는 참 다양한 성격들이 모여 있다. 루이즈라는 이름의 여성이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었다. 적당한 키에 마른 몸매의 금발 중년. 우리나라 사람들 하는 이야기로 사주에 ‘고’가 끼었다라고 한다. 여기서 ‘고’란 외로울 고孤를 의미한다. 이런 팔자로 대표적인 건 “깊은 밤에 소복 입고 베 짜는 사주.” 청상과부의 사주다. 이 책의 주인공 루이즈는 소복 입고 베 짜는 것하고는 종류를 좀 달리해야 할 거 같다. 어려서부터 부모하고 별 인연 없이 살다가 스물다섯 살에 덜컥 임신을 한 몸으로 치매노인 쥬느비에브 노파를 간병하던 중, 노파의 화가 아들 프랑크의 친절한 주선으로 중절수술을 할 예정(당신 같은 처지라면, 독신에 겨우 밥벌이를 하는 그런 상황이면 말이에요, 보통은 아이를 낳지 않아요. 문란한 당신 사생활은 내가 상관할 바 아니에요. 하지만 삶은 파티가 아니라고요. 아기를 낳아서 어떻게 하려고요?)으로 프랑크 씨가 비용까지 다 지불하였으나, 약속한 날 잠에서 깨지 못하고 약속을 놓쳐버려 딸 스테파니를 낳았다. 스테파니는 엄마가 보모, 가사도우미를 하던 집의 주선으로 좋은 고등학교로 전학했지만 불성실한 학교생활과 도무지 적응을 하지 못해 땡땡이를 연이어 치는 바람에 퇴학 처분을 받고 만다. 딸 하나 둔 상태로 자크란 남자와 결혼했지만 자크는 뒤뜰에 심어놓은 콩나무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금은보화를 가져오는 대신 경마를 비롯한 도박에 손을 대 빚만 잔뜩 만들어놓고 세상을 뜨는 바람에 집도 은행에 뺏겨버리고 만다. 이젠 텅 빈 손으로 차이나타운의 가장 지저분한 원룸 아파트에 유일한 ‘백인’ 입주민으로 떨어진 상태. 스테파니는 일찌감치 가출을 해버려 완전히 연락을 끊고 산다. 성격도 남들과 어울려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활기차게 지내는 대신 자신의 모든 내적, 외적으로 거의 완벽한 벽을 둘러 쳐놓고 스스로 외로운 처지로 떨어지고 만다. 실제로 언젠가 앙리-몽도르 병원의 의사가 루이즈에게 “망상성 우울증”이 있다고 판정한 바 있다.
 뛰어난 엘리트 둘이 서로 사랑해 가정을 이루었으니 여자는 변호사 미리암이고 남자는 음악 프로듀서 폴. 둘이 결혼했으니 건강한 부부 사이에서 자연스레 딸 밀라를 낳고, 산후 우울증에 잠깐 시달리다가, 아무래도 하나만 키우면 너무 외로울 거 같아서 아들 아당을 또 낳는다. 결과는, 심각한 산후우울증에 빠져버리는 미리암. 아직 부부 가운데 누구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단계도 아니고, 경력을 이어가지 못한 채 그냥 전업주부로 머물고 있는 미리암에게 일을 권하는 로펌도 나타날 확률이 없었다. 자꾸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미리암. 심각한 자존감의 결여로 하루하루 사는 게 미칠 지경일 찰라, 길가에서 우연히 만난 대학 동기생 파스칼이 자기와 함께 일 해볼 생각 없느냐고 제의를 한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채용할 의사가 있다는 것. 대학 동기인 파스칼은 미리암이 얼마나 총명하고 추진력이 있는 사람인줄 알고 있었으니까. 미리암은 날아갈 것 같은 기분에 취했고, 남편 폴이 집에 오자마자 보모를 들이자고 이야기를 꺼내 시답지 않은 긍정을 얻어낸다. 그리하여 이력서, 자기소개서, 추천서를 완벽하게 구비한 보모를 고용하니 이이가 바로 위에서 얘기한 우울녀, 루이즈.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책을 검색하면 첫 장면이 소개되어 있다. 나도 소개한다.


 “아기가 죽었다. 단 몇 초 만에. 고통은 없었다고 의사가 분명하게 말했다.”


 첫 문장이 어디서 본 거 같다. 전에 어느 프랑스 작가는 이렇게 첫 문장을 썼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상당히 임팩트 있는 첫 문장.
 시작부터 루이즈가 미리암-폴 부부의 아들 아당을 심하게 폭행해서 뼈마디가 비틀어진 채 시체처리용 검은 비닐에 들어가게 하고, 큰 아이 밀라 하고는 “사나운 짐승처럼 맞서” 싸운 끝에 말랑한 손톱 아래 살점이 박히고, 폐 또는 목에 칼을 맞아 목구멍에 피가 가득한 상태로 숨을 꿀럭이다가 운송 도중 죽음에 이르게 해버린다. 경악스러운 결말을 작품의 제일 앞에 배치하여 독자로 하여금 루이즈가 이 가족의 (천사 같지는 않지만 순진무구한)두 아이에게 저지른 살인을 강조하는 것.
 그러나 독자는 책을 읽어가며 아동 살인이라는 가공할 범죄를 저지른 루이즈가 거대 사회에서 점점 고립되는 장면을 똑바로 바라보게 된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살인의 죄가 조금이나마 경감되는 건 아니지만 언제나 외롭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격리처분 받는 것 같은 느낌을 숨기지 못하는 개인을 향해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의 시선이 가 있음을 발견한다. 전남편, 은행, 원룸 아파트 소유주, 이웃, 같은 보모 그룹 등등과 심지어 바로 얼마 전까지는 자기 가족의 범위 안에 흔쾌히 루이즈를 받아들이던 미리엄-폴 가족들로부터 그녀는 단 한 뼘의 자기가 설 곳을 찾지 못하는 모습을 독자는 책을 읽어감에 따라 순서대로 발견하게 된다.
 망상성 우울증을 앓고 있는 루이즈가 이들 가족의 범위 안에 계속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리엄과 폴 사이에 다른 아이가 새로 태어나는 것 말고는 없다고 단정해버린다. 오직 유일하게 자신이 찾을 수 있었던 탈출구.
 물론 나와 다른 방식으로 책을 읽을 수도 있다. 바로 옆에 도사린 커다란 위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렸다고 생각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작품. 해석은 언제나 독자의 몫이니까. 공쿠르 상 수상작 치고는 참 쉽고 흥미로운 시선이다. 그래서 얼른 읽히기도 한다. 작가가 모로코 출신의 젊은 여성. 공쿠르 상치고는 아주 드물게 여성을 수상자로 뽑았다 해서 약간의 구설에도 올랐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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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18-10-04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ㅠㅠㅠㅠ 이 책.. 정말... ㅠㅠㅠ할많하않..입니다.

Falstaff 2018-10-05 09:05   좋아요 0 | URL
저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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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제목을 “칠드런 액트”라고 했을까. 그냥 “소년법”이라고 하면 좀 촌스럽나?


 59세, 조금 있으면 60세 생일을 맞을 피오나와 잭 메이 부부에게 난데없이 파도가 몰아친다. 잭에게 멜러니라는 이름의 젊은 여자가 생긴 것. 나이가 들고 고등법원 판사인 아내가 워낙 바빠 건조한 사랑의 단계에 접어든지 벌써 오래. 잭은 아직 열락과 흥분을 필요로 하는 반면 피오나는 샤워실에서 스스로의 알몸을 비춰보면서 자신에게 흥분을 느낄 남성은 세상에 한 명도 존재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잭은 여전히 피오나를 사랑하지만 내세가 있다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혼상태를 유지한 상태에서 멜러니를 통해 열락과 흥분을 즐기고 싶다고 과감하게 고백해버렸다. 이 상태를 묘사하는 몇 페이지, 참 재미있다.
 추석을 맞아 아이들이 와서 밥상 앞에서 이 이야기를 했다. 여든 넘어서도 소위 열락과 흥분을 원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 노년에도 그런 상태를 유지하는 건 저주받은 일이라고 의견을 같이 했다. 잘 생긴 이성을 보면서도 흥분하지 않는 단계가 되면 세상이 건조한 대신 얼마나 편한 줄 모른다. 근데 그 나이가 돼서까지 습식 사랑(열락과 흥분)을 원하면, 게다가 잭 메이 선생처럼 그걸 만족시킬 대상이 적법하지 않거나 대상 자체가 없는 노인이면 얼마나 불행하겠는가. (이야기가 좀 더 심화 확대되어) 가족은 공창제도의 긍정적인 면을 조명했으며, 아내는 어떤 매춘부의 경우 주로 노인과 장애인들에게만 성 매매를 한다면서 인도적 견지에서 공창제도에 찬성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들은 피오나 메이 판사는 곧바로 남편 잭 메이 교수를 내쫓아버린다. 어, 이러다 멜러니한테 진짜로 가버리는 거 아냐, 후회하면서. 이러니 골이 지끈지끈 아픈 건 당연하겠지. 딱 이런 상태에서 법원 당직 서기한테 전화가 걸려온다. 긴급을 요하는 판결 건이 병원으로부터 접수되었다고.
 만 17세 9개월짜리 청소년. 석 달 차이로 아직 칠드런 액트, 즉 소년법을 적용받아야 하는 애덤이란 소년이 긴급 백혈병에 걸려 입원치료 중인데, 사흘 안에 혈액을 투여하지 않으면 사망. 극적으로 치료가 잘 되어 만일 산다고 해도 눈이 멀거나, 폐에 피가 차거나, 평생 혈액투석을 해야 하거나, 급성 뇌졸중으로 식물인간이 될 확률이 많단다. 문제는 환아 애덤과 그의 부모인 헨리 부부조차 수혈을 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것. 1945년, 뉴욕 브루클린의 한 건물에서 성경의 몇 귀절을 해석하다가 전 신도에게 수혈을 거부할 것을 명령한 여호와의 증인 교도였던 거다. 그래 사안이 화급하니 당장 내일 오후에 첫 번째 심리가 열겠다고 재판 당사자에게 통보하라 하면서 소설은 본격적인 줄거리를 잡아간다.
 가뜩이나 철없는 남편 때문에 골 아파 죽겠는데 하필이면 이때 당직이라 골치 아픈 결정을 해야 하는 피오나. 병원 측은 위에서 쓴 것과 같이 만일 수혈을 하지 않을 경우 가까운 시간 안에 벌어질 일들을 설명하며 병원에게 환자와 환자의 보호자 의견과 관계없이 수혈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요구하고, 인권과 신념과 개인의 결정권을 들어 수혈을 거부하는 환자와 보호자. 이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다. 마그나카르타의 나라 영국 가정법원 판사 피오나 메이는 환자가 수혈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 소년 스스로, ‘진정한 의미에서’ 스스로 그렇게 결정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심리를 중단시키고 직접 병원에 방문해 한 시간 가량 애덤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대화뿐이랴. 마침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애덤의 반주로 노래도 하나 한다. 예이츠의 시 <버드나무 정원을 지나>에 벤저민 브리튼이 곡을 붙인 노래.


 

 강변의 들판에 내 사랑과 나는 서 있었지.
 기울어진 내 어깨에 그녀가 눈처럼 흰 손을 얹었네.
 강둑에 풀이 자라듯 인생을 편히 받아들이라고 그녀는 말했지.
 하지만 나는 젊고 어리석었기에 이제야 눈물 흘리네.


 피오나는 완전히 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 노래의 가사에 영감을 받는다. 그리고 매스컴에 공개한 재심리에서 이렇게 판결한다. 그 중 일부를 옮긴다.


 “저는 A의 정신, 견해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A는 아동기 내내 강력한 하나의 세계관에 단색으로, 중단 없이 노출된 채 살아왔고, 그런 배경이 삶의 조건을 좌우하지 않았을 수는 없습니다. 고통스럽고 불필요한 죽음을 감수하는 것, 그리하여 신앙을 위해 순교자가 되는 것이 A의 복지를 도모하는 길은 아닐 것입니다. (중략) 요컨대 저는 A와 그의 부모, 회중의 장로들이 본 법정이 가장 중시하는 A의 복지에 해로운 결정을 내렸다고 판단합니다. A는 그런 결정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합니다. A는 그의 종교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병원의 손을 들어줬다. 애덤은 순순히 수혈을 받아들였으며, 애덤의 부모, 헨리 부부는 병실 밖에서 눈물을 철철 흘리며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애덤은 나중에야 알아차린다. 부모가 운 이유는 아들이 더러운 타인의 피를 수혈 받아서가 아니라, 아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여기까지만 들어보면 이야기는 끝난 거 같다. 그러나 작가가 다른 이도 아니고 이언 매큐언이다. 이 정도로 끝낼 사람이 애초부터 아니었다. 이제야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올 차례. 본격적인 이야기는 여기서 꺼내지 않겠다.
 심지어 늦바람 난 잭 메이 선생이 어떻게 됐는지는 아무 말도 보태지 않았잖은가. 직접 읽어보시라는 뜻에서. 이렇게 변죽만 울리고 중도에서 뚝 그치는 심통이, 생각보다 재미있는 거, 그거 아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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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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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사람에겐 과거가 없고, 불행한 사람에겐 과거만 있다.” (15쪽)


 주인공이자 외과의사이며 퇴직 대령인 도리고 에번스는 이것이 어디서 읽은 말인지, 스스로 만들어낸 말인지 도무지 알아내지 못한다. 여태까지 세상의 모든 소설 가운데 “긴 터널을 지나자 그곳은 설국이었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작품의 첫 문장.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그러나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첫 문장을 고르라면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니나>를 들어야 하리라.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박형규 역, 문학동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연진희 역, 민음사)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으로 불행하다.” (이명현 역, 열린책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윤새라 역, 펭귄클래식 코리아)


 정말 숱한 소설이 이 문장을 인용 또는 변용한다. 이 문장을 변용한 “행복한 사람에겐 과거가 없고, 불행한 사람에겐 과거만 있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은 과거가 앞으로의 인생을 좌우할 정도로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진혼곡이다. 주인공 도리고 에번스는 두 가지 과거를 지니고 있는 인물. 한때 고모부였던 키스Keith의 두 번째 아내 에이미. 굳이 관계를 따지자면 움고모다. 우연히 책방에서 만나 얼굴을 읽힌 에이미. 아미-아망트-아무르 ami-amant-amour 친구-연인-사랑을 뜻하는 단어들의 연상시키는 이름 에이미. 옛 고모부가 운영하는 호텔에 들러 우연히, 그리고 극적으로 재회하자마자 둘은 급격하게 친해지고, 사랑하게 되고, 몸을 섞는다. 첫 관계는 두 번째 불륜을 쉽게 만들고, 태평양전쟁 참전을 앞둔 에번스는 타는 갈증으로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에이미를 향해 달려간다. 약혼녀 엘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의 밀접한 관계를 이미 알고 있는 늙은 고모부의 마음은 어땠을까. 고모부 키스가 자기 처, 에이미에게 자신이 알고 있었음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심정을 고백하는 기분은. 전쟁에 뛰어들기 전에 약혼 상태에서 우연히 만난 치명적인 사랑에 대한 과거. 나중에 알게 된 고모부 호텔에서의 가스 폭발 사건으로 에이미는 에번스의 가슴에 깊은 낙인을 찍어버리고 영원히 과거로 남게 된다.
 다른 과거는 트라우마. 자바 섬에서 일본군 포로로 잡힌 군의관 에번스 대령. 그는 900명의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포로와 함께 시암(타이)과 버마(미얀마) 국경을 연결하는 철도 공사를 위해 밀림으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만난 포로 수용소장이자 철도 건설대장 나카무라 소령.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은 서양인답게 노래하고, 휘파람 불며, 약식 연극 <워터루 다리: 우리나라 개봉은 ‘애수’>를 가설무대에 올려 로버트 테일러와 비비안 리를 흉내 내기도 하지만, 긴 행군과 열악한 급식, 가혹한 구타와 노동으로 점차 활기를 잃어간다. 일왕을 위한 철도 가설.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예전에 국제극장에서 본 데이비드 린 감독의 <콰이강의 다리>가 얼마나 형편없게 미화시킨 작품이었는지 화가 났다. 그렇다. 화가 나더라.
 영화에서는 경쾌한 ‘보기 대령 행진곡’을 깔고 콰이 강에 철도를 놓기 위해 작업장으로 절도 있게 행진해 들어가, 영국군과 영국인과 조지 4세를 위해 씩씩하게 일치단결된 힘을 다해 다리를 놓고 철길을 닦는 군인들을 자랑스럽게 그려놓았다. 실제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철도 가설을 위해 투입된 군인들은 앞에서 썼듯이 열악한 급식, 구타와 극한의 노동, 그것도 모자라 말라리아, 콜레라, 이질, 뎅기열, 부종, 각종 감염증으로 숱한 인원이 희생됐고, 살아남은 자들도 영양실조로 앙상하게 뼈만 남은 상태였다. 전쟁이 끝나 구조된 오스트레일리아 포로들의 모습과 영화 <콰이 강의 다리>에서 포로로 등장하는 인물들을 비교해보자. 

 

 위는 영화 <콰이 강의 다리>, 아래는 강제노역소에서 해방되어 나름대로 영양 보충을 받고 몸단장도 한 상태에서의 오스트레일리아 포로들


 감독이 철도 공사에 동원된 포로들의 사정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차치하고, 실상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실제 포로들만큼 출연진들에게 체중을 감량을 요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들이 겪은 참상에 관해서는 더 쓰지 않겠다.
 작가 플래너건이 인도차이나의 철도 가설에 동원된 오스트레일리아 포로들만 묘사한 것은 아니다. 수용소 또는 가설부대에 속한 일본인 장교와 병사, 징병 조선인, 만주국에서의 일본인에 의하여 벌어진 학살과 생체실험, 일본 내에서 이루어진 포로들에 의한 노예 상태의 노동, 그리고 전후 전범 처리까지 다양하게 태평양 전쟁에서 있었던 비인간적 행위와, 소련과 또 다른 전쟁을 염두에 둔 미국의 적당한 타협 등을 파헤쳐 놓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핵심은 철도 가설 부대 내의 가혹행위와 노예상태, 동서(일본-오스트레일리아) 문화의 이질성에서 오는 포로에 대한 개념 차이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책은 궁극적으로, 제일 앞에 인용했듯이, 세월이 가도 과거가 삶의 중심에 틀을 잡고 앉아 행위를 조정하게 된 불행한 인간들을 위안할 목적으로 쓰였다. 그리하여 작가는 헌사에 이렇게 써 놓았다.
 “335번 포로에게”
 책 앞날개에 의하면 “실제로 이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전쟁포로였던 아버지에게 이 책을 바쳤다”고 한다. 여기에 전쟁 참가 여부와 관계없이 숱한 사람들이 가슴 속 화인으로 찍힌 옛 사랑에 대한 사랑으로의 과거를 첨가해 가을에 읽기 좋은 책 한 권을 만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인물이 한 명 있었다. 가즈오 이시구로. 2017년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일본계 영국인 소설가. 그가 쓴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의 주인공 마스지 오노. 마스지는 제목대로 탐미주의 화풍을 지닌 화백으로 2차 세계대전 후 전쟁당시에 저지른 모종의 행동으로 국가적 따돌림의 대상이다. 전쟁을 찬미하고 기꺼이 일왕을 위해 젊은 목숨을 바칠 것을 강요했던 예술행위 때문이었다. 전쟁으로 무수한 젊은이가 죽어나가 자기 딸의 결혼이 여의치 않고, 자신과 어울리는 계급으로부터 은근한 따돌림을 받자, 오직 딸의 결혼을 위해서 전쟁 중 자신의 행위는 잘못됐다는 취지로 ‘반성한다’는 발언을 한다. 그러나 곧바로 이렇게 선언한다.

 

 “저는 이 점(과거 잘못된 행동)을 깨끗하게 인정합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 당시 제가 선한 믿음에서 행동했다는 것뿐입니다. 저는 친애하는 동포를 위해 선한 일을 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제가 실수했다는 것을 이제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 푸른 들판 위의 독야청청한 소나무 같던 화가가 끝내 잘났다고 버티다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면서 하는 고백이다.
 이런 인간이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에서도 나온다. 시암-버마 철도 건설의 총책임을 맡고 있던 고타 대령. 초급장교 시절 만주에 주둔할 때 차고 다니던 군도로 중국인의 목을 벤 이후 얼마나 숱하게 사람의 목을 베었는지 '참수의 미학'을 깨달은 인물. 전후 조선인 하사관 최성민은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교수형에 처해졌으나 현장에서 벌어졌던 모든 학살과 폭행, 노예노동의 책임이 있는 고타는 혈액은행의 중역이 되어 105세까지 천수를 누린다. 이 고토 대령이 왜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에서 나오는 화가 마스지 오노와 겹쳐 보였을까. 고토 대령도 죽기 전에 기회가 있었으면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참회했을 것이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 당시 제가 선한 믿음에서 행동했다는 것뿐입니다. 밀림에 뼈를 묻은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병사들의 원혼이 어떻게 되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독을 추천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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