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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평점 :
“행복한 사람에겐 과거가 없고, 불행한 사람에겐 과거만 있다.” (15쪽)
주인공이자 외과의사이며 퇴직 대령인 도리고 에번스는 이것이 어디서 읽은 말인지, 스스로 만들어낸 말인지 도무지 알아내지 못한다. 여태까지 세상의 모든 소설 가운데 “긴 터널을 지나자 그곳은 설국이었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작품의 첫 문장.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그러나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첫 문장을 고르라면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니나>를 들어야 하리라.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박형규 역, 문학동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연진희 역, 민음사)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으로 불행하다.” (이명현 역, 열린책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윤새라 역, 펭귄클래식 코리아)
정말 숱한 소설이 이 문장을 인용 또는 변용한다. 이 문장을 변용한 “행복한 사람에겐 과거가 없고, 불행한 사람에겐 과거만 있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은 과거가 앞으로의 인생을 좌우할 정도로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진혼곡이다. 주인공 도리고 에번스는 두 가지 과거를 지니고 있는 인물. 한때 고모부였던 키스Keith의 두 번째 아내 에이미. 굳이 관계를 따지자면 움고모다. 우연히 책방에서 만나 얼굴을 읽힌 에이미. 아미-아망트-아무르 ami-amant-amour 친구-연인-사랑을 뜻하는 단어들의 연상시키는 이름 에이미. 옛 고모부가 운영하는 호텔에 들러 우연히, 그리고 극적으로 재회하자마자 둘은 급격하게 친해지고, 사랑하게 되고, 몸을 섞는다. 첫 관계는 두 번째 불륜을 쉽게 만들고, 태평양전쟁 참전을 앞둔 에번스는 타는 갈증으로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에이미를 향해 달려간다. 약혼녀 엘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의 밀접한 관계를 이미 알고 있는 늙은 고모부의 마음은 어땠을까. 고모부 키스가 자기 처, 에이미에게 자신이 알고 있었음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심정을 고백하는 기분은. 전쟁에 뛰어들기 전에 약혼 상태에서 우연히 만난 치명적인 사랑에 대한 과거. 나중에 알게 된 고모부 호텔에서의 가스 폭발 사건으로 에이미는 에번스의 가슴에 깊은 낙인을 찍어버리고 영원히 과거로 남게 된다.
다른 과거는 트라우마. 자바 섬에서 일본군 포로로 잡힌 군의관 에번스 대령. 그는 900명의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포로와 함께 시암(타이)과 버마(미얀마) 국경을 연결하는 철도 공사를 위해 밀림으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만난 포로 수용소장이자 철도 건설대장 나카무라 소령.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은 서양인답게 노래하고, 휘파람 불며, 약식 연극 <워터루 다리: 우리나라 개봉은 ‘애수’>를 가설무대에 올려 로버트 테일러와 비비안 리를 흉내 내기도 하지만, 긴 행군과 열악한 급식, 가혹한 구타와 노동으로 점차 활기를 잃어간다. 일왕을 위한 철도 가설.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예전에 국제극장에서 본 데이비드 린 감독의 <콰이강의 다리>가 얼마나 형편없게 미화시킨 작품이었는지 화가 났다. 그렇다. 화가 나더라.
영화에서는 경쾌한 ‘보기 대령 행진곡’을 깔고 콰이 강에 철도를 놓기 위해 작업장으로 절도 있게 행진해 들어가, 영국군과 영국인과 조지 4세를 위해 씩씩하게 일치단결된 힘을 다해 다리를 놓고 철길을 닦는 군인들을 자랑스럽게 그려놓았다. 실제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철도 가설을 위해 투입된 군인들은 앞에서 썼듯이 열악한 급식, 구타와 극한의 노동, 그것도 모자라 말라리아, 콜레라, 이질, 뎅기열, 부종, 각종 감염증으로 숱한 인원이 희생됐고, 살아남은 자들도 영양실조로 앙상하게 뼈만 남은 상태였다. 전쟁이 끝나 구조된 오스트레일리아 포로들의 모습과 영화 <콰이 강의 다리>에서 포로로 등장하는 인물들을 비교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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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영화 <콰이 강의 다리>, 아래는 강제노역소에서 해방되어 나름대로 영양 보충을 받고 몸단장도 한 상태에서의 오스트레일리아 포로들
감독이 철도 공사에 동원된 포로들의 사정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차치하고, 실상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실제 포로들만큼 출연진들에게 체중을 감량을 요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들이 겪은 참상에 관해서는 더 쓰지 않겠다.
작가 플래너건이 인도차이나의 철도 가설에 동원된 오스트레일리아 포로들만 묘사한 것은 아니다. 수용소 또는 가설부대에 속한 일본인 장교와 병사, 징병 조선인, 만주국에서의 일본인에 의하여 벌어진 학살과 생체실험, 일본 내에서 이루어진 포로들에 의한 노예 상태의 노동, 그리고 전후 전범 처리까지 다양하게 태평양 전쟁에서 있었던 비인간적 행위와, 소련과 또 다른 전쟁을 염두에 둔 미국의 적당한 타협 등을 파헤쳐 놓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핵심은 철도 가설 부대 내의 가혹행위와 노예상태, 동서(일본-오스트레일리아) 문화의 이질성에서 오는 포로에 대한 개념 차이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책은 궁극적으로, 제일 앞에 인용했듯이, 세월이 가도 과거가 삶의 중심에 틀을 잡고 앉아 행위를 조정하게 된 불행한 인간들을 위안할 목적으로 쓰였다. 그리하여 작가는 헌사에 이렇게 써 놓았다.
“335번 포로에게”
책 앞날개에 의하면 “실제로 이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전쟁포로였던 아버지에게 이 책을 바쳤다”고 한다. 여기에 전쟁 참가 여부와 관계없이 숱한 사람들이 가슴 속 화인으로 찍힌 옛 사랑에 대한 사랑으로의 과거를 첨가해 가을에 읽기 좋은 책 한 권을 만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인물이 한 명 있었다. 가즈오 이시구로. 2017년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일본계 영국인 소설가. 그가 쓴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의 주인공 마스지 오노. 마스지는 제목대로 탐미주의 화풍을 지닌 화백으로 2차 세계대전 후 전쟁당시에 저지른 모종의 행동으로 국가적 따돌림의 대상이다. 전쟁을 찬미하고 기꺼이 일왕을 위해 젊은 목숨을 바칠 것을 강요했던 예술행위 때문이었다. 전쟁으로 무수한 젊은이가 죽어나가 자기 딸의 결혼이 여의치 않고, 자신과 어울리는 계급으로부터 은근한 따돌림을 받자, 오직 딸의 결혼을 위해서 전쟁 중 자신의 행위는 잘못됐다는 취지로 ‘반성한다’는 발언을 한다. 그러나 곧바로 이렇게 선언한다.
“저는 이 점(과거 잘못된 행동)을 깨끗하게 인정합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 당시 제가 선한 믿음에서 행동했다는 것뿐입니다. 저는 친애하는 동포를 위해 선한 일을 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제가 실수했다는 것을 이제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 푸른 들판 위의 독야청청한 소나무 같던 화가가 끝내 잘났다고 버티다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면서 하는 고백이다.
이런 인간이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에서도 나온다. 시암-버마 철도 건설의 총책임을 맡고 있던 고타 대령. 초급장교 시절 만주에 주둔할 때 차고 다니던 군도로 중국인의 목을 벤 이후 얼마나 숱하게 사람의 목을 베었는지 '참수의 미학'을 깨달은 인물. 전후 조선인 하사관 최성민은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교수형에 처해졌으나 현장에서 벌어졌던 모든 학살과 폭행, 노예노동의 책임이 있는 고타는 혈액은행의 중역이 되어 105세까지 천수를 누린다. 이 고토 대령이 왜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에서 나오는 화가 마스지 오노와 겹쳐 보였을까. 고토 대령도 죽기 전에 기회가 있었으면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참회했을 것이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 당시 제가 선한 믿음에서 행동했다는 것뿐입니다. 밀림에 뼈를 묻은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병사들의 원혼이 어떻게 되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독을 추천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