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7일 토머스 페인의 <상식>으로 시작해서 백민석의 <공포의 세기>까지 백 일 넘게 읽은 책 가운데 (당연히)제 기준으로 재미있게, 공감하면서, 즐겁게 읽은 책들을 골라 짧은 소감을 첨부합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면서 덩달아 몇 권을 골라 감상하신 후의 느낌은 제가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별거 없는 소감을 읽어주시는 분들의 책 선택에 조금 도움이 된다면 기분이 조금 좋아질 거 같습니다. (원래 알라딘 서재에 독후감 올리는 것이 다 저 좋아 하는 지랄이거든요.) 순서는 책 읽은 날짜순입니다.





1.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 <모히칸 족의 최후>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개척자들>의 전편. <개척자들>이 솔직히 말해 읽기 지겨운 면이 있지만 이건 하나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다. 초기 미국 동부의 광활한 원시림에서 펼쳐지는 모히칸 족 최후의 왕자와 명사수 네티 범포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 죽음의 이야기.



2. 오노레 드 발자크, <13인당 이야기>

 

 인간살이에 있어 제일 재미난 이야기는? 애정. 그 중에서도 치정 이야기. 맞지? 거기다가 지금 기준으로는 소프트한 잔혹극까지 섞여 있으니 이 정도면 말 다 한 거 아냐? 빚을 갚기 위해 하루 열네 시간씩 소설을 썼다는데 이 수준이면 발자크, 이 영감, 진짜 천재 아냐?



3. 에밀 졸라, <쟁탈전>

 

 루공-마카르 총서 가운데 두 번째. 문학동네에서 나오는 <돈>이 <쟁탈전>의 후속이니까 당연히 이 책을 먼저 읽어야할 것. 졸라가 만든 주인공들의 혈관 속에 든 편집증과 극도의 몰입이 이 책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는데 이번엔 주식과 사업에 쏠려있다.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사기행각의 저 먼 꼭지점.



4. 김태정,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누군들 가슴 속에 쓸쓸한 나뭇잎 하나 휘날리지 않을까. 그러나 진짜 쓸쓸함을 만져보고, 맛보고, 바라보기 위해선 이 시집의 일독이 필요하다. 마흔여덟에 서울을 떠나 해남 미황사 앞 작은 방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시인의 소박한 꽃바구니. 그게 시인의 삶이었으리라.



5. 서머싯 모옴, <인생의 베일>

 

 자칭 최고의 2류 소설가가 중국을 무대로 쓴 작품. 이렇게 간단히 얘기하니 별 거 없이 보이시지? 천만에. 최고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가끔 스스로 최고의 인격도 가지고 있다고 오해를 하고는 하는데 사실을 알고 보면 천박한 짐승 같은 작자인 거, 이런 거, 모옴이 정말 잘 그려낸다.



6. 비키 바움, <그랜드 호텔>

 

 모든 일이 벌어지지만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곳. 바로 그랜드 호텔. 들어올 때는 회전문을 통해 들어오지만 나갈 때는 회전문 또는 뒷문의 시멘트 계단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곳. 오직 돈에 의하여 사람의 등급을 측정하는 속물들의 파노라마. 신신애 말씀이, “인생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



7. 사바하틴 알리,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최고의 신파. 역시 재미에 관한 한 신파가 제일이다. 지금은 왕창 찌그러진, 첫사랑에 실패한 한때 부유했던 남자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 왕년에 실연 한 번 안 당해본 사람 없을 터, 당신이 그 ‘왕년에 실연 한 번 당해본 인간’이면 책 읽다가 목 놓아 엉엉 울어버리고 싶은 순간이 분명 올 터. 이난아의 번역 한국말도 매우 좋다.



8. 리온 포이히트방거,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

 

 18세기 유럽. 중세가 말살되지 않고 온전히 남아있던 고리타분한 지역 스페인. 그곳의 궁정화가 고야. 왕가와 귀족들의 구미에 맞는 초상화를 그리다가 인정을 받고, 드디어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는 감히 왕의 일가를 그린 대작에 심술궂고, 멍청하고, 허영 덩어리로 그들을 묘사하기에 이른다. 아쉬운 건 이 책이 1부에 그치며 2부를 쓰지 않고 갔다는 점.



9. 뮤리얼 스파크,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있는 마샤 블레인 여학교에 재직한 진 브로디 선생에 관한 재미난 이야기. 똘똘한 학생들을 골라 1학년부터 졸업할 때까지, 심지어 졸업한 다음에도 자기 군대로 키운 여자. 그러나 학생들은 해마다 성장해가고, 자연스럽게 브로디 선생의 본질을 이해하게 되는데, 하여간 신기한 캐릭터의 여자를 구경한다. 난 묘하게도 B사감이 생각났지 뭐야.



10. 조르주 페렉, <잠자는 남자>

 

 소통하지 않는 한 인간의 일상을 컴퓨터 단층 촬영을 하듯 세밀하게 쪼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일. 이런 책들은 거의 예외 없이 드라이하기 이를 데 없어 함부로 추천했다가는 귀싸대기 한 대 얻어맞기 십상. 난 이런 책 좋아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읽은 다음의 감동이나 동감은 책임 안 짐.



11. 조인선, <시>

 

 안성에서 소 키워 팔아 생활하는 시인. 애당초 시 써서 돈 벌기 무망함을 자각하여 소 키우는 부모한테 비볐을 뿐 처음부터 시를 쓴 인간이라서, 이이의 직업에 속지 마시라. 확실한 초현실주의자. 난 초현실주의 문학을 경원한다. 그러나 시집 속에 숨은 삶의 시들이 참 정 있고 재미도 있다.



12. 홍성원, <남과 북>

 

 문학과지성사는 하루 빨리 이 책을 복간해야 한다. 한국전쟁 전반을 다 조망하는 기념비적 작품. 기존의 빈부, 귀천 등 사회질서를 깡그리 전복시킨 한국사 최초이자 최후의 전환기를 마련한 한국전쟁. 누가 있어 이 전쟁의 근본 성격까지 홀랑 까발린 작가가 있었는가.



13.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새엄마 찬양>

 

 베드 씬 혹은 어린 아이와 새엄마 사이의 과한 성적 표현을 들어 이 작품을 재수 없다 얘기하지마시라. 열 살 먹은 귀여운 악동이자 천사이며 천의무봉한 알폰소의 정체가 바로 사랑의 신 쿠피도 또는 아모르이기 때문. 하여튼 요사의 성적 묘사는 아예 끝장을 본다니까.



14. 막스 갈로,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참전 하사관이자 우파 사회민주당원에 의하여 소총 개머리판에 뒤통수를 강타당하고, 역시 참전 중위의 권총으로 확인사살을 당한 후 시신까지 국경의 운하에 던져져 몇 달 후에 떠오른 여류 혁명가. 평생의 애인이자 동지였던 레오 요기헤스, 스파르타쿠스 당의 수뇌이며 같은 날 함께 처형당한 카를 리프크네히트 등의 혁명적 일생. 이름 자체로 전설인 여성의 한 생애.



15. 윌리엄 트레버, <윌리엄 트레버 - 그 시절의 연인들 외 22편>

 한 편, 한 편이 다 절절한 단편선. 이번 가을에 읽어보시면 정말 좋을 책. 쉽게 이런 말 안 하는데, “강추!” 스물세 편을 관통하는 쓸쓸함이라니. 넘치는 것도 없고 모자란 것도 없이 꽉 짜인 긴밀한 구성. 그러나 구성 따위는 버리고 그냥 문장 속의 아름다운 황량함만 봐도 좋다.



16. 레몽 장, <카페 여주인> 

 재미있고 가볍다. 하룻밤 동침하면 10억 원 줄게. 이렇게 제의하는데 버티는 여자 있어? 있다. 10억 원이 아깝지 않을(그렇게 생각하는 놈팡이가 있을) 아름다운 얼굴과 외모의 소유자. 제의를 받은 아멜리가 친한 친구한테 “너만 알고 있어.”라는 단서 조항을 걸고 속삭이는데, 세상에 비밀이 있어?



17. 박서원, <아무도 없어요> 

 

 시인한테 문제가 있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 무능한 어머니, 성폭행, 발작, 안수기도, 정신병, 기면증, 결혼과 이혼. 정말로 아픈 시인이 쓴 아픈 시. 시를 읽는 독자도 함께 아프지 않을 도리가 없을 정도의 고통. 박서원은 다른 시인들을 몽땅 엄살쟁이로 만들어버리고 먼저 갔다.



18.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엄청나게 시끄러웠던 2차 대전 말기 연합군에 의한 드레스덴 폭격과 2001년 여객기에 의한 뉴욕 무역센터빌딩 폭파 테러가 알고 보면 믿을 수 없게 가까운 곳에 자리했던 한 가족의 이야기. 여기에 히로시마 원폭까지 더해 폭력에 의한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을 애도하는 소설.



19. 메릴린 로빈슨, <홈> 

 

 

 아 씨. 어쩌자고 사람의 심금을 이리도 저며 놓는단 말인가. 사랑에 실패하고 직장까지 놓아버린 막내딸과 천생 문제아였던 셋째 오빠가 비슷한 시기에 오늘 낼 하고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다. 수십 년 만에 만난 남매간의 어색한 관계가 다시 따뜻한 배려로 이어지고, 또다시 헤어짐으로. 돌아가 잠시 머리를 누일 수 있는 곳, 옛집.



20. 귀스타브 플로베르, <순박한 마음> 

 

 세 편의 단편소설을 담은 책. 그중에 표제작 <순박한 마음>이 단연 돋보인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애에 대한 성찰이 와 닿는다. 이 작품 속에서 도무지 찾지 못했던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발견한 것도 재밌다. 그렇다고 <구호성자 쥘리앵의 전설>과 <헤로디아>가 재미없다는 얘기 절대 아님.



21. 리처드 프래너건,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행복한 사람에겐 과거가 없고, 불행한 사람에겐 과거만 있다. 과거가 남은 인생에 가장 큰 장애로 남을 사람에게 보내는 진혼곡. 시암-버마 간 철도 가설에 동원된 오스트레일리아 포로와 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질병과 굶주림의 실황중계. 진정한 결산을 하지 못한 태평양 전쟁의 비극. 인간 참상에 관한 리얼한 보고서. 필독서.



22. 이언 매큐언, <칠드런 액트> 

 

 

 여성과 아내로서의 위기에 몰린 초로의 재판관에 닥친 소년법 사건. 사흘 안에 수혈을 받지 않으면 사망할 수 있는 17세 9개월의 소년. 아이와 부모는 종교적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지만 판사는 수혈하도록 명령을 내려 아이의 목숨을 구한다. 그러나 과연 생명을 구해주면 그걸로 책임이 다 끝이 날까? 필력 하나는 끝내주는 이언 매큐언의 화법을 감상하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만족.



23. 레이라 슬리마니, <달콤한 노래> 

 

 그동안 사이 안 좋았던 공쿠르 상과의 관계를 다시 돈독하게 만든 책. 초장부터 어린 아이 둘의 잔혹한 죽음과, ‘어미늑대’처럼 울부짖는 엄마 등장. 망상성우울증에 시달려왔던 능력 있는 보모 겸 가사도우미. 그녀 평생 외로움에 둘러싸여 있다는 걸 몰랐던 엄마와 아빠. 사는 게 다 그렇지. 그리도 가까웠던 사이에서 또다시 외로워지기 시작하는 보모.





 한 숨 돌리고 다시 읽어봤다.

이런,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 <푸코의 진자>와 <프라하의 묘지>도 빠지고, 무라카미 하루키도 빠지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 앙드레 말로의 <희망>도 이 리스트엔 없다. 프리모 레비, D.H.로렌스도 없다.

이이들? 실수로 뺀 거 아니고 정말로 내 마음에 들지 않아 빠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아마추어다.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러나, 아무리 예수님의 초등학교 동창이 쓴 작품이라도 내가 싫다면, 싫.은.거.다.

 

세상의 모든 작가는 나 한 명을 위해 태어나, 쓰다가, 죽는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8-10-08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랜드 호텔>은 읽다 말았는데 다시 읽어야겠네요.

요사스러운 요사샘의 새 책은 더 이상 왜 나오지
않는지... 대선 후보로도 나섰다는데 말이죠.

한 때 분더킨트로 불렸지만, 오버레이팅된 작가라는
조너선 사프란 포어, 새 책이 더 이상 나오지 않나
보네요.

Falstaff 2018-10-08 15:08   좋아요 0 | URL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책은 한 권 더 읽어보려합니다. 뭐 오버레이팅이 되건 말건 저 좋으면 좋은 거고, 안 맞으면 안 읽는 거고 그렇지요. ^^
위키피디어 검색해보면 요사가 제일 나중에 쓴 책이 2016년 <이웃>이란 작품이고, 그거 말고도 꽤 많네요. 저도 시중에 요사가 보이면 무조건 구입하고 보는 편입니다만 여간해서 눈에 띄지 않네요. 품절, 절판된 거라도 얼른 다시 찍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박똘 2018-10-08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운 글입니다...😊

Falstaff 2018-10-09 18:54   좋아요 0 | URL
좋게 읽어주셔서 제가 더 고맙습니다.

까리 2021-02-05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이렇게 재미있게 본 건 처음이네요, 댓글도 처음 달아봅니다. 도움이 많이 되었고 꼭 읽어보고 싶은 작품들은 캡쳐해서 장바구니 넣어두려구요! 감사합니다😊

Falstaff 2021-02-05 14:01   좋아요 0 | URL
즐겁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