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 멜빌 - 선원, 빌리 버드 외 6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7
허먼 멜빌 지음, 김훈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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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멜빌의 중단편집.
 그래 책은 이렇게 만들어야 하는 거다. 이 책에 실린 두 번째 작품 <베니토 세레노>가 132쪽, 마지막 <선원, 빌리 버드>가 128쪽. 엔간한 출판사에서 이 분량이면 넉넉히 세 권은 만든다. 기막힌 편집으로 페이지 수 팍팍 늘려가며. 저번에 윌리엄 트레버에서 잠깐 거론했는데, 앞으로 외국 단편집을 고를 땐 현대문학의 ‘세계문학 단편선’을 제일 먼저 고려하기로 결심한 바 있다. 그리하여 허먼 멜빌을 이번에 읽었으며, 몇 주 후에 진 리스의 단편집을 또 읽을 예정이다. 몇 달 후엔 윌리엄 포크너, 그레이엄 그린 단편집도 일단 골라놓았다.
 멜빌의 단편집에서 기대했던 건 역시 아직도 읽지 않고 버텼던 <바틀비>와 <선원, 빌리 버드> 두 작품. 책의 첫 번째와 마지막을 장식하는 두 중단편이다. 읽어보니 이 두 개하고 두 번째 작품 <꼬끼오! 혹은 고귀한 수탉 베네벤타노의 노래>도 재미있었다.
 멜빌의 생몰이 1819~1891년. 당대로 치면 일흔두 살까지 살았으니 장수한 편이지만 일생을 그리 재미있게 보내진 못한 거 같다. 쓰는 글은 절대 안 팔리고, 심지어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해야 마땅한 걸작 <모비딕>은 서점에서 수산업 관련 코너에 쑤셔 박히는 지경을 당했을 정도였으며, 큰 아들은 자살 비슷하게, 둘째 아들은 폐결핵으로 먼저 보내야 했고, 온갖 불행에 점점 우울증은 심해지는 와중에도 먹고 살기 위해 세관원으로 근무해야 했으니 거참. 그렇다고 초년 운이 좋았던 것도 아니어서 일곱 살에 성홍열에 걸려 평생 나쁜 시력을 가져야 했는데, 아버지가 사업을 하느라 온갖 동네에서 빚을 얻어 쓰다가 일찍 저 세상으로 가는 바람에 열세 살부터 식구 부양을 위해 잡일을 전전해야 했단다. 그러니 사람이란 건 어쨌거나 사주팔자가 중요한 거다. 생각해보라. 같은 인간이긴 하지만 당신 팔자가 좋겠어, 이건희 씨 외아들 팔자가 좋겠어.
 멜빌은 안 좋은 별자리를 타고 태어나서 그렇다 치고, 존 클래거트라고 하는 선임위병 부사관이란 인간은 뭐야?


내가 살아생전 한 번도 갖추지 못했던
아름다움, 용모, 선함!
난 나면서부터 타락의 세상 속에서만 살았어!
그 속에서 찾은 평화는 지옥의 율법 위에 있었다고.....
벨리포텐트 호의 선임위병 부사관, 나 존 클래거트는 권력을 가지고 있단 말이다.
반드시 널 파멸시키고 말리라!

 

화질은 별로지만 당대의 보탄이었던 제임스 모리스의 노래로 골랐다.


 무대는 18세기 말, 혁명 후 5인 집정관이 이끄는 프랑스 해군과 대치상태에 있는 지브롤터 부근의 영국 전함 벨리포텐트 호. 전임 부사관이 노령으로 은퇴를 하고 새로 마흔 살이 넘은 선임위병 부사관이 배를 탔는데, 이 인간이 어찌 된 일인지 아름다움과 선함만 봤다하면 알레르기 현상이 벌어진다. 프랑스의 인권과 자유사상이 들어오는 걸 바라지 않았던 영국 왕실과 귀족, 부르주아들은 집정제를 택한 프랑스와 한 판 전쟁을 벌이기 위해 마구잡이로 징병을 해, 불만에 가득 찬 젊은이들을 육군과 해군에 배치하기에 이르고, 포화상태에 이른 징병자들이 두 번에 걸쳐 해상반란을 일으킨 뒤끝이다. 이런 시기에 하필이면 클래거트 같은 인간이 있는 전함에, 잘생기고 천성이 선하고,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주변이 화목해지게 되는 그런 청년 빌리 버드가 오르게 된다. 사건이 터지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 마련된 것.
 선임위병 부사관이란, 예전 말로 군대의 군기를 담당하는 부사관. 유럽에서 화약무기를 쓰기 전엔 뭐 칼이나 단도 같은 무기 사용법을 가르쳐주는 일을 했지만 18세기 말 영국해군의 주력무기는 16세기 말의 조선처럼 경쟁국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월한 대포였다. 그래 선임위병 부사관이란 이제 별로 할 일이 없어서 지나가는 사병들 세워놓고 단추를 목까지 채웠네, 안 채웠네, 흰색 바지에 줄이 제대로 잡혔네, 안 잡혔네, 이따위를 따지면서 해당 병사한테 엎드려뻗쳐, 일어나, 엎드려뻗쳐, 일어나, 앞으로 취침, 기상, 뒤로 취침, 어 이거 동작(반 박자 쉬고) 봐라, 뒤로 취침, 앞으로 취침, 자동, 이따위 짓이나 하면서 국민들 세금이나 축내고 있는 작자였단다. 그러니 클래거트도 나름대로 자만심이 상할 대로 상했을 수 있었겠지. 그러나 멜빌이 주장하고자 하는 건 그런 자격지심이 아니라, 혈관을 타고 흐르는 선함에 대한 본능적 거부. 선과 악이 특정 환경 아래에서 부딪혀 어떻게 결말을 맺는지에 관한 탐구다.
 <모비딕>을 쓴 세관원 멜빌답게 장황한 서술을 동반하지만 인간 본성에 관한 집중적인 모색을 시도한 <선원, 빌리 버드>는 세월이 흐르더라도 언제나 읽어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벤자민 브리튼이 작곡한 오페라 <빌리 버드>의 원작인데, 두 가지가 원본과 다르니 ① 빌리가 탄 배 이름을 인도미터블Indomitable 호로 바꾸었고, ② 용감하고 현명한 함장 비어 대령의 노년이 완전히 다르다. 어떻게 다른지는 뭐 아셔도 그만, 모르셔도 그만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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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3-14 09: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현대문학 세계 단편선 가격대비 정말 훌륭한 책입니다. 웬만한 단편집에 있는 작품들은 다 수록되어 있고요. 번역질도 괜찮은 편이고... 전 이 시리즈 거의 다 갖고 있는데, 재미나게도 멜빌 단편선은 안 샀어요. ㅋㅋㅋ <필경사 바틀비>를 다른 책으로 읽은 터라 그랬나봐요. ㅎㅎ

Falstaff 2019-03-14 10:16   좋아요 0 | URL
예. 전 <윌리엄 트레버>로 이 시리즈를 읽기 시작했는데, 와, 다른 출판사에서 찍었으면 그 책도 아마 세 권은 넉넉하게 나왔을 겁니다. 참 좋은 시리즈예요.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말입니다.
전 포크너가 잠자냥 님하고 비슷한 이유로 갈등 중입니다. ㅜㅜ

잠자냥 2019-03-14 10:51   좋아요 0 | URL
포크너 이 양반, 참 넘어서기 어려운 양반이긴 해요. 포크너 단편집도 몇 작품만 읽고 일단 모셔두고 있어요. 이 양반은 단편도.... ㅋㅋㅋㅋㅋㅋ <소리와 분노>도 읽다 말았는데, 언젠가는 꼭 전작을 다 읽어야 할 작가이긴 하죠;;; 음.....

2019-03-14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14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14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목나무 2019-03-14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정말 단편집하면은 이제는 현대문학 단편집 이렇게 됩니다! ㅎㅎ
제법 되는 두께로 인해 가지고 다니지는 못한다는 게 단점이지만.... 근데 그게 참 양심적으로 다가와서 이 출판사와 이 시리즈는 믿음이 가더라구요. ㅎㅎ
앞으로도 이 시리즈는 계속 나왔으면 좋겠어요. ^^
<허먼 멜빌>은 <필경사 바틀비> 책을 따로 갖고 있지만서도 <선원, 빌리 버드>때문에 구입해 두었는데 이참에 저도 읽어봐야겠습니다!

Falstaff 2019-03-14 11:31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정말 좋은 시리즈예요.
교정 교열도 상당한 수준이고요. 현대문학이 사실 전통이 있는 책가게 아닙니까. 월간지가 먼저 떠올라서 그냥 잡지사거니, 해서 그렇지요. ^^

slobe00 2019-03-14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드하우스를 도서관에서 빌려봤는데 어찌나 두껍던지요~

한 권씩 사 모으는 중인데 다음 타자로 멜빌 찜해둬야겠어요^^

Falstaff 2019-03-14 12:33   좋아요 0 | URL
ㅎㅎ 하여간 흥미로운 시리즈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고맙기도 하고요.
<윌리엄 트레버>도 아주 좋게 읽었습니다. ^^
 
일곱 박공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2
너대니얼 호손 지음, 정소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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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읽은 호손의 장편소설. <주홍 글자>와 <블라이드데일 로맨스> 보다 더 재미있게 읽었다. 완전히 내 입장에서 발언하는 건데, 더 재미있게 읽은 건 비교한 두 작품보다 훨씬 ‘덜’ 종교적이라는 의미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일찌감치 미국으로 건너와 뉴잉글랜드 지역의 광활한 밀림지역을 차지한 핀천 가문. 이들 가운데 야심과 욕심이 넘치고, 활달하며 매사 (지나치게) 적극적이고 그래서 공격적인 핀천 대령이 있었다. 대강 17세기 중엽 아닐까 싶고, 프랑스 군과의 전투에 참전해서 대령 계급장을 달았단다. 당시는 유럽에서도 마녀사냥이 가장 유행하는 스포츠였으며, 이런 유행은 신대륙에서 청교도적 맹신으로 한층 심화 발전시켜 마녀, 마법사 비슷하기만 하면 바로 인간사냥을 벌였던 모양이다. 이런 과도한 청교도적 분위기는 <주홍 글자>에서도 본 바 있으니 그런가보다 하면 된다. 하여간 그런 시절에 핀천 대령의 거대한 땅 노란 자위 부위엔 맑은 물이 퐁퐁 솟아나는 샘이 있었는데, 샘을 둘러싼 농토 몇 마지기를 직접 개간해 살고 있는 농부이자 목수인 매슈 몰이 또한 있었다. 원래 가진 자의 욕심이란 건 끝이 없어서 어떻게 하면 몰 가족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다 저택을 지어 자손만대 잘 먹고 잘 살게 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핀천 대령은 자신의 재산권을 당연하게도 양보하려 하지 않는 매슈를 어떻게 처리할까 몇날 며칠을 끙끙 앓더니 에라 모르겠다, 마법사로 몰아 목을 매달아버린다. 마법사 소유의 땅은 당연히 치안판사를 겸했던 핀천 대령이 꿀꺽 해 잡수시고. 그리하여 드디어 샘가 옆 비옥한 검은 땅 위에다 집을 짓는데, 당시만 해도 지역의 랜드 마크가 될 정도로 큰 저택으로 박공이 무려 일곱 개에 달하는 뻑적지근한 저택이었다. 핀천 대령이 얄궂은 것이 하필이면 집을 짓는 목수로, 자기 손으로 목매단 매슈 몰 씨의 아들 토마스 몰을 대목장 비슷하게 임명했다는 거. 매슈 몰의 목에 밧줄이 감길 때, 마지막 유언으로 그는 손가락으로 핀천 대령을 지목하면서 큰 소리로 “신이 저자에게 피를 마시게 할 것이다.”라고 저주까지 했는데 말씀이야. 그래서 그랬나, 맑은 물이 퐁퐁 샘솟던 샘은 일곱 박공의 집이 들어서자마자 검은 색으로 바뀌었으며, 동물이 이 물을 마시면 꼭 탈이 나기 시작했으니, 미국 판 <마농의 샘>? 하여간 매슈 씨의 아들 토마스는 오직 직업과 일과 보수만 여기고 어차피 지난 과거를 굳이 들출 필요는 없다는 생각으로 아주 탄탄하게 주문대로, 자손만대 잘 살 수 있는 집을 지어주었다. 당연하지, 돈을 받았으니까. 근데 오직 그것만?
 그리하여 이른바 오픈 하우스. 테이프 커팅을 하는 날, 대령의 집엔 통구이한 암소 두 마리와 돼지 여섯 마리, 삶은 개 열 마리를 준비해 부지사를 비롯한 상류계급을 물론이고 동네 천것들 까지 모두 불러 성대하게 잔치를 벌였는데, 내가 벌써, 여러 번 얘기한 바와 같이, 문학작품에서 불길한 예언은 언제나 들어맞는다는 소설작법 제 2강 15조에 의거하여, 이 좋은 날 테이프 커팅 시간이 되도 대령은 등장하지 않는 거다. 열 받은 부지사. 그깟 대령이 계급이라고 이게 날 초대해놓고 코빼기도 안 보여, 무슨 일이 있어도 열지 말라는 제2 응접실의 문을 벌컥 여니, 대령은 안락의자에 앉아 커다란 흰 넥타이를 피로 물들이며 죽어 있는 거였다. 오픈 하우스가 파투난 건 당연하고, 아마 뇌졸중 가운데 한 현상 같은데, 이런 병증으로 대령의 자손 가운데 바로 이 장소에서 적어도 두 명은 더 죽어나가게 된다. 물론 책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죽음만 두 명이고 나머지 그냥 흐지부지 넘어간 죽음은 더 될지 호손은 밝히지 않았다.
 그로부터 약 2세기가 지난 19세기 초중반이 작품의 시간적 공간이다. 그럼 여태까지는? 들어가는 내용이다.
 일곱 박공의 집은 이제 세월의 때가 잔뜩 묻어 비가 새고 정원엔 잡초가 무성해 겉으로 봐도 퇴락할 대로 퇴락한 상대다. 집엔 근시가 심해 항상 얼굴을 찡그려야 해서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누가 보면 언제나 화가 잔뜩 난 것처럼 보이는 늙은 헵지바 핀천이 고독하고 가난하게 살고 있다. 30년 전에 삼촌이 죽으면서 모든 재산을 헵지바의 사촌 오빠 재프리 핀천에게 유증하면서 시집도 못 간 헵지바가 불쌍하니 그녀가 죽을 때까지 일곱 박공의 집에서 살게 하라고 해 이날까지 묵고 있지만, 사촌 오라비이자 지역 판사이며 유력한 차기 도지사 후보인 핀천 판사께서 먹고 사는 일에 별로 도움을 주지 않아(도와주긴 했다. 충분하지 않아서 그렇지), 일곱 박공 가운데 하나를 홀그레이브란 이름의 은판 사진사에게 사글세로 내주었고, 그것도 모자라 귀족 신분으로서는 매우 굴욕적으로 일곱 박공의 집 한쪽에 상점을 내 영업을 하기로 결정한다. 가게를 여는 날이 장편소설 <일곱 박공의 집>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날. 늙기는 했지만 귀족 처녀가 평민들한테 물건을 판다? 되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서 헵지바는 굴욕적이고 비사회적이고 적응불가능 상태에 빠져 허둥대다가 시간이 되자마자 문을 닫아버린다. 대강 그림이 그려지실 것. 그런데 난데없이 집 앞에 포장마차가 서더니 밀짚모자가 먼저 보이고 깡총, 소녀 하나가 마차에서 내려서 헵지바 앞에 등장하는 것. 친척 조카 피비. 아빠가 죽고, 이제 엄마가 다른 남자한테 시집을 가기 때문에 자기를 돌봐줄 가장 가까운 친척을 찾아온 것. 여기서 눈치 빠른 독자들은 탁, 알아채실 것. 그렇다, 이 어린, 아니, ‘어린’ 까지는 아니고 젊은 처녀가 쇠락할 대로 쇠락한 일곱 박공의 집에 활력을 주기 시작한다.
 아쉽지만 내용은 여기까지. 이제 본격적인 사건이 벌어지니 그 앞에서 멈춰야지 그렇지 않으면 스포일러가 되기 십상이리라.
 재미있다. 이 책이 나온 것이 1851년.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당신의 눈높이를 19세기 중반으로 낮추어야 함은 물론이다. 눈 빠른 독자들은 중간 정도 읽으면 사건이 어떤 결말로 끝날지 훤히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장황한 서술에 책을 덮을까 말까 고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초간 바로 전 해에 생을 마감한 오노레 발자크의 “인생극” 편편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다. 내 읽기에 역자 정소영이 대단한 공력을 기울여 번역 작업을 한 것처럼 긴 문장을 잘 읽히게 우리말로 만들었으며 교정 수준도 보통 이상이다. 여기다가 제일 앞에서 얘기했듯, 호손의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 훨씬 덜 종교적이라 나처럼 지옥의 유황불을 예약한 인간들도 별로 캥기지 않고 읽을 수 있다. 이 책은 원래 읽지 않으려 했던 작품이었으나, 에잇, 마지막 호손으로 한 권만 더 읽어보자, 했다가, 나로 하여금 앞으로도 호손은 계속 읽기로 작정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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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아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9
알프레드 드 뮈세 지음, 김미성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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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프레드 드 뮈세가 프랑스 시인이란다. 번역시에 관심이 없는 내가 그의 이름을 알 턱이 있겠나. 그것도 19세기 전반기에 대표작을 쓴 시인이라니. 그가 유일하게 남긴 완성품 장편소설이 바로 <세기아의 고백>. 1836년 2월. 뮈세의 나이 25년 3개월 때 일이었다.

 도대체 세기아가 뭘까. 물론 사람 이름이겠지. 이렇게 생각했다. Sègiat 정도? 그래 혹시 비슷한 말이 있나 네이버 사전 검색해보니 seguia, ‘북아프리카의 관개용수로’를 일컫는 말이란다. 거참. 일단 책을 넘겨보자. 책을 쓴 시기가 1835년 쯤 됐을 터. 서론 부분에 당시 시각으로 프랑스 현대사, 1793년 루이 16세의 처형부터 프랑스 혁명이 사실상 종결되는 1814년 보나파르트가 엘바 섬으로 추방당할 때까지, 사학자의 시선이 아니라 다분히 시인의 눈길로 고찰을 하고, 이후에 진정한 새로운 세기, 즉 19세기가 개막한다고 주장한다. 새롭게 펼쳐지는 19세기 초반. 프랑스 젊은이들을 거의 깡그리 몰살시켰던 나폴레옹 시대 이후에 새롭게 대두된 시대. 비록 왕정복고와, 21세기까지 프랑스 시민들의 유구한 전통이 될 바리케이드를 동반한 폭동이 일어났지만 대체적으로 평화적이고 비종교적인 자유사상이 젊은이들에게 유입되기 시작한 새로운 세기, 그 19세기의 아이, 총아를 ‘세기아世紀兒’라고 칭했던 거였다. 작가 알프레드 드 뮈세가 1810년 12월 출생. 본인 자신이 세기아임은 당연하다. 세기아, 유럽 말이 아니라 역자가 한자를 이용해 만든 단어. 좀 웃겼다.


 다시 한 번 강조. 뮈세가 최고의 전성기를 이룬 시기가 20대 초반. 이 정점에 <세기아의 고백>을 썼다. 뮈세 자신이 펄떡펄떡 뛰는 청년이었다. 뭐 아무 때나 펄떡펄떡 뛴다는 말이 아니라, 시야에 외모가 괜찮은 여자, 기혼 미혼, 과부, 이혼녀 등을 망라하고 하여간 여자만 앞에 있으면 그런 상태가 되는 시기였다는 뜻. 청년 시대에 전성기를 마감한 ‘19세기’ 작가의 가장 큰 주제는 역시 사랑과 질투, 복수, 결투가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터이다. 거기다가 젊은 뮈세에겐 특이한 전력이 있었는데 책을 쓰기 한 삼 년쯤 전에 애 둘 달린 이혼녀 조르주 상드와 불꽃 튀는 연애를 하다가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는데, 어딘가에서 병이 들어 그들을 진료하던 의사에게 상드를 빼앗겼다나 어쨌다나. 난 남의 상열지사에 관해 별로 관심이 없어서 (진짜?) 잘 모르겠지만 사내가 그때 일을 잊지 못하고 쪼잔하게 장편소설을 써서 만천하게 드러낸 작품이 바로 이 <세기아의 고백>이다.
 모두 5부로 되어 있는 작품. 1부는 맛보기. 전형적인 룸펜 부르주아 약골 주인공, 도(C)에서 시(B)까지의 음역을 일컫는 이름을 가진 옥타브가 애인과 함께 가면무도회를 즐기고 만찬 자리에 참석을 했는데 밥을 잘 먹다가 그만 젓가락 한 짝을 떨어뜨리고 만다. 아무 것도 아닌 일 같지? 천만의 말씀. 젓가락을 주우려 고개를 숙이니까 식탁 커버 아래, 바로 눈앞에 보이는 애인의 다리가, 근엄한 척하며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를 올려다보는 남자의 다리와 서로 엉겨 있는 거 아닌가 말이다. 화들짝 놀라기는 했지만 만인이 좌정한 앞에서 열을 낼 수는 없고, 그냥 덤덤하게 만찬을 끝낸 다음 집에 돌아오며 생각해보니 이거 질투가 나서 살 수가 없는 거다. 그래 친구를 대동하고 다음날 새벽에 신사도 규칙에 맞는 결투를 하다가 오른 팔에 총알 하나를 기념으로 박아두게 된다. 그러고 나서도 깨끗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우리의 옥타브. 결국 결투에 이은 자신의 부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되는 애인의 더블데이트를 알고 2부에선 친애하는 동네 형이자 자유주의자이며 사회주의자인 데주네의 인도와 지도편달 아래 본격적으로 도박과 매춘 등 환락에 빠져들게 된다. 외아들 하나 남은 것이 이렇게 논다니로 놀아나니 아빠 마음이 편하겠나. 그것이 병이 되어 고향의 아버지가 어느 날 뇌출혈이 발병해 파리에서의 엽색행각이 마감하는 것으로 2부까지 끝.
 고향에 돌아온 3부에서 드디어 유사 조르주 상드로 분장한 여주인공 브리지트를 만나게 되는데, 여기부터는 내가 더 말 못하지. 직접 사서 읽어보시라는 뜻에서.
 내용은 뻔하다. 위에서 얘기한대로 스물넷 먹은(출간이 스물다섯 해 두 달이니까) 작가가 제일 자신 있게 쓸 수 있는 분야는 바로 연애와 배신과 질투와 실연 기타 등등이란 건 앞에서 이미 말했다. 거기다 조르주 상드에게 실연당한 전력이 있었으니 얼마나 재미있게 쓸 수 있었겠는가 말이지. 하나 더 보태자면 뮈세 자신이 소설가이기 이전에 뛰어난 시인이었다는 걸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솔직히 말해서, 책의 내용은 20대 시절에 사랑과 실연과 질투를 겪어본 (같은 남자) 입장에서 하나도 새롭거나 호기심을 동하거나 특이한 건 거의 찾아볼 수 없었지만, 나는 이 책의 일독을 당신에게 권하니, 그건 문장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비틀어 말하면 구태의연하고 장식적이며 상투적인 문장의 만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더 뒤틀어 아예 뒤집어 말씀드리옵자면, 이젠 영원히 볼 수 없고 쓸 수도 없는 예스럽고 화려하고 유려하며 고색창연한 아라베스크를 보는 듯한 문장들에 눈이 부실 터이다. 만날 이런 문장을 읽으라면 정말 고역이겠으나 길고 긴 독서생활 가운데 어쩌다 한 번 이런 글을 읽으니 오히려 색다른 맛을 느낄 기회가 되더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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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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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괄량이 길들이기>, <좋으실 대로>, <십이야>와 더불어 ‘셰익스피어 4대 희극’으로 불린다는데, 왜 여태 나는 셰익스피어한테 ‘4대 희극’이란 것이 있었는지도 몰랐을까. 이 목록은 ‘출판사 제공 책 소개’라는 글에서 처음 읽었다. 암만해도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것 같다. 왜냐하면, 흔히들 이야기 하는 ‘셰익스피어 4대 비극’ <햄릿>, <리어왕>, <맥베스>, <오셀로>는 대단히 탄탄한 구성과 복잡한 인간 내면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반면 <말괄량이 길들이기>와 이번에 읽은 <한여름 밤의 꿈>에 국한해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해보자면, 아직은 걸작을 만들어낼 역량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한 상태였다, 라고 할 수밖에 없겠기 때문이다.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셰익스피어의 초기 작품으로, 예전에 읽고 천하의 셰익스피어도 날 때부터 걸작을 줄줄이 쏟아냈던 건 아니라는 진리를 알게 되어, 초기 작품은 될 수 있으면 읽지 않으려 했었다가, 존 파울즈가 쓴 <블레이크 씨의 특별한 심리치료법> 안에 이 작품 <한여름 밤의 꿈>이 거론되는 것을 보고, 그래, 언젠가 한 번은 읽어야 한다면 이번에 읽자고 마음을 먹어 구입해서 읽은 거다.
 책을 열면 첫 번째 대사를 하는 인물이 놀랍게도 아테네의 왕자로 일찍이 크레타 섬에 잠입해 미노타우로스를 쳐 죽이고, 괴물의 동복이부 동생 아리아드네를 버린 전적이 있는 테세우스다. 상대역 히폴리타는 우리가 알고 있는 헤라클레스가 쳐 죽인 여인 무사가 아니라 좀 변형된 전설에서 나온 인물로, 한쪽 유방이 없는 여인 전사들인 아마조네스를 이끌고 테세우스와 싸우다 부상을 당해 포로가 된 다음 테세우스의 아들 히폴리투스를 낳은 전설 속 인물. 아직 테세우스와 히폴리타가 히폴리투스를 만들기 위해 모종의 작업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둘이 결혼식을 올리기 전날부터 당일까지 약 36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또 극에 드라마틱한 전환점을 만드는 역할은 요정의 왕 오베론과 요정여왕 티타니아, 그리고 그들의 종복인 퍽이 담당한다. 이들은 각기 그리스 로마 전설과 (역자 해설을 보니) <보르도의 휴온>에서 따왔다 하니 작품의 주연으로는 함량 미달.  그때나 지금이나 극에서 가장 재미있는 소재는 역시 남녀관계다. 그중에서도 한 커플이 순조롭게 연애하고, 조금 갈등하는 척하다가 결혼에 골인 하는 건 16세기나 21세기나 관객들이 똑같이 진부하게 여기기 때문에 좀 복잡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만든 구성이, 드미트리우스는 헬레나와 약속한 사이지만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허미아를 사랑하게 되고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허미아의 부친 이지우스의 마음을 확실하게 잡아버렸다. 허미아는 그러나 라이샌더와 열렬히 사랑하는 사이. 당시 아테네에서는 결혼에 관해서 아버지의 결정에 따르지 않는 처녀에게 주어지는 것은 딱 두 개. 하나는 죽음, 또 하나는 평생 수도원에 들어가 영원한 처녀로 사는 일. 당신과 당신 파트너가 허미아와 라이샌더와 같은 경우를 당했다면 어떻게 할 거 같은가. 그렇다. 이들도 당신 생각과 같은 일을 저질러 버린다. 이름하여, 야반도주.
 여기서 혜성처럼 등장하는 커플이 바로 오베론과 티타니아. 이 요정들은 만나기만 하면 싸운다. 베버의 <오베론>에선 여자와 남자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진실한 사랑을 하는가 가지고 난리굿을 펴더니, 이 책에선 훔쳐온 미소년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두고 신경전을 펴다가 오베론이 약효가 평생을 가는 사랑의 묘약을 만들기에 이른다. 그래 종복 퍽을 시켜 티타니아와, 인간들의 원만한 행복을 위해 드미트리우스의 눈에 바르라고 시켰는데, 명령문이 참으로 애매해서 (아테네 복장을 한 잘생긴 젊은 남자 눈꺼풀에다가 발라버려!) 퍽은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아테네 남자 라이샌더의 눈꺼풀에다 묘약을 덕지덕지 발라버린다. 그래 티타니아는 나귀로 변신한 ‘바틈Bottom’이란 장사꾼에게 한눈에 반해버리고, 라이센더는 눈을 뜨자마자 함께 야반도주를 한 허미아가 키가 작다는 걸 이유로 “가 버려, 이 난쟁이야. 성장억제 풀 먹은 초왜소 생명체야. 이 염주 알, 도토리야.”라고 거친 말을 퍼붓고는 곧바로 헬레나에게 열정적인 사랑을 호소한다.
 그 다음 이야기는 안 알려줌.
 또 재미난 것이 <한여름 밤의 꿈>에서 ‘극중극play-within-a-play’을 연출한다는 것. 극중극 도중 당대의 권력자 테세우스와 히폴리나, 그리고 주인공들이 숱하게 끼어들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역자의 의견으로는 그 극중극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씨앗일 수도 있단다. 그러나 너무 기대하지 마시라. 그만큼 재미있지는 않으니.
 <햄릿>, <리어왕>, <오셀로>, <맥베스> 등을 읽고 셰익스피어에 대한 기대를 한껏 끌어올린 독자들은 그냥 기념 삼아 한 번 읽어보실 만하다. 난 이제 정말로 그의 초기작품은 읽지 않겠다. 그것들 말고도 읽을 책은 많고 많거든. 안 그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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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창비시선 421
임경섭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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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5부로 되어 있는 시집. 목차가 끝나면 나오는 1부의 제목이 “아내는 나에게 얘기하지 않았지만 / 나에게 아내는 얘기하고 있었다”. 이거 뭐지? 말장난? 요즘 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도의 속임수 또는 암호를 경험하게 되는 건 아닐까, 조금 불안해하며 첫 번째 시를 읽는다.



 크로아티아 비누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신혼여행지에서 산 비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의 고향에선 볼 수 없던 대리석 문양의 비누였다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신혼여행지에서 산 비누를 바라보며 그곳의 짙푸른 해안선을 한참이고 떠올렸다 그곳은 시간을 두고 촘촘히 흘러내린 비누의 마블링 같은 섬들로 가득했다


 (중략)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아내 없이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해 고민하며 욕실 나무 선반 위의 비누를 바라보았다 비누는 몸집이 부쩍 작아져 있었지만 아내는 살아 있는 한 닳지는 않을 거란 생각에 나카타는 안도했다


 그리하여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닳아 없어지지 않을 아내를 생각하며 아내만큼 소중한 크로아티아 비누를 매만졌다 아낄수록 비누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10~11 쪽)



 흠. 낯설다. 도대체 시인은 무엇에 관하여 노래하고 있을까. 아니, 노래는 사라져버렸다. 혹시 임경섭은 시를 통해 한 스토리를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뭐 이국풍경이라고 할 수도 있고. 일단 판정을 보류하고 다음 시를 읽는다. 이 시집 전체를 감상하기 위해 아주 중요한 모멘트가 되는 작품이라 길지만 전문을 인용한다.



 플라스마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그의 아내에게 오로라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가 나고 자란 고장에선 오로라를 볼 수 없었다
 같은 고장에서 나고 자란 아내 역시 한번도 보지 못한 그것을 끔찍이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결혼 3주년이 되던 날 근교로 나간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멀찍이 샛노란 해넘이가 한눈에 들어오는 카페 테라스에 앉아 아내에게 말했다
 죽기 전에 너에게 오로라를 보여주고 싶어
 그러자 아내는 검붉은 가을 수수밭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의 아내 혼자서 오로라가 보이는 곳으로 가도 된다는 말이야?
 아내의 질문에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한쪽 머리가 아파왔다


 그렇지 나는 분명 아내에게 오로라를 보여주고 싶었지
 그렇지만 일찍이 스스로 오로라를 보고 싶단 마음도 갖고 있었어
 그렇다면 내 말은 내가 오로라를 보기 위한 수단으로 아내를 이용하겠단 뜻일까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꼬았던 다리를 반대로 다시 꼬는 동안 상체를 아내 쪽으로 은근히 숙이며 말했다
 죽기 전에 너와 오로라를 보러 가고 싶어
 그러자 아내는 푸르르 떨리는 진보랏빛 유성 같은 입술로 물었다
 당신은 오로라가 보고 싶은 거야, 오로라가 보이는 곳으로 가고 싶은 거야
 아내의 질문에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래 오로라를 보는 일은 검색으로 가능한 일이지
 그래도 나는 태양의 입자와 지구의 자기장이 부딪는 곳에 서서 그것들의 발광을 목격하고 싶은 마음이었어
 그래서 내 말은 오로라가 보이는 곳으로 가되 거기서 오로라를 보지 못해도 된다는 뜻일까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의자에서 일어나 아내에게로 돌아가 그녀의 팔걸이에 걸터앉으며 다시 말했다
 죽기 전에 오로라가 보이는 곳으로 가 너와 함께 오로라를 바라보고 싶어
 그러자 아내는 북극점으로부터 불어오는 텅 빈 바람 같은 눈빛으로 물었다
 생애 단 한번 맞이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왜 당신과 함께해야 하지? 지치도록 평생을 함께할 당신과 말야
 아내의 말에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한 손으로 자신의 무릎을 내리치며 웃기 시작했다


 다시없을 이 밤 아내와의 귀갓길은 그에게 아프지도 않았고 기쁘지도 않았고 허전하지도 않았고 가득하지도 않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헤르베르트 그라프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지나가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12~14쪽)



 이 시를 읽고 나서야 1부의 제목이 “아내는 나에게 얘기하지 않았지만 / 나에게 아내는 얘기하고 있었다”인 것을 이해할 수 있었고, 첫 번째 시의 주인공 나카타와 두 번째 시의 주인공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모두 시인의 다른 모습일 뿐이란 걸 눈치 챘다. 그런데 ‘나카타’는 일본의 국가대표 축구선수? 헤르베르트란 이름을 쓰는 요즘 독일 사람은 별로 없다. 독일 라이프치히를 장소로 하는 시들이 등장하고 게반트하우스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임경섭은 서양 고전음악을 좋아한다고 봐도 무방하니, 혹시 헤르베르트란 이름은 카라얀에서 가져온 건 아닐까. 성姓 ‘그라프’? 저 뒤에 보면 테니스 월드 스타 슈테피 그라프가 등장하니 그녀의 이름에서 슬쩍 따왔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시인이 스포츠팬인 것이 거의 분명하다. 우리나라 이민 2세로 미국 프로야구 선수로 행크 콩거(별명, 본명 ‘최현’)란 젊은이가 있다. 그를 슬며시 등장시켜 투수가 공을 던지고 타자가 배트를 휘두르는 순간까지의 짧은 시간을 그리는 시가 있고, 슈테피 그라프와 숙적이었던 나브라틸로바까지 등장시킬 정도. 그 외에도 작가, 작품의 등장인물 등도 시 속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니 이런 능청스러움이라니.
 위의 시 <플라스마> 역시 헤르베르트 그라프와 그의 처 사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 속에서, 언어로 하는 의사소통의 불명확성을 이야기하며, 사실 그와 같은 대사는 그라프 부부  자리에 이수일과 심순애, 노미호와 주리혜, 철수와 영희를 가져다 놔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잖은가. 이때쯤, 한국 시에 한 이종 또는 변종이 태어났다고 양 입술을 한 번 찢어 가볍게 웃을 줄 아는 것도 괜찮은 일일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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