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창비시선 421
임경섭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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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5부로 되어 있는 시집. 목차가 끝나면 나오는 1부의 제목이 “아내는 나에게 얘기하지 않았지만 / 나에게 아내는 얘기하고 있었다”. 이거 뭐지? 말장난? 요즘 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도의 속임수 또는 암호를 경험하게 되는 건 아닐까, 조금 불안해하며 첫 번째 시를 읽는다.



 크로아티아 비누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신혼여행지에서 산 비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의 고향에선 볼 수 없던 대리석 문양의 비누였다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신혼여행지에서 산 비누를 바라보며 그곳의 짙푸른 해안선을 한참이고 떠올렸다 그곳은 시간을 두고 촘촘히 흘러내린 비누의 마블링 같은 섬들로 가득했다


 (중략)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아내 없이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해 고민하며 욕실 나무 선반 위의 비누를 바라보았다 비누는 몸집이 부쩍 작아져 있었지만 아내는 살아 있는 한 닳지는 않을 거란 생각에 나카타는 안도했다


 그리하여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닳아 없어지지 않을 아내를 생각하며 아내만큼 소중한 크로아티아 비누를 매만졌다 아낄수록 비누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10~11 쪽)



 흠. 낯설다. 도대체 시인은 무엇에 관하여 노래하고 있을까. 아니, 노래는 사라져버렸다. 혹시 임경섭은 시를 통해 한 스토리를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뭐 이국풍경이라고 할 수도 있고. 일단 판정을 보류하고 다음 시를 읽는다. 이 시집 전체를 감상하기 위해 아주 중요한 모멘트가 되는 작품이라 길지만 전문을 인용한다.



 플라스마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그의 아내에게 오로라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가 나고 자란 고장에선 오로라를 볼 수 없었다
 같은 고장에서 나고 자란 아내 역시 한번도 보지 못한 그것을 끔찍이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결혼 3주년이 되던 날 근교로 나간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멀찍이 샛노란 해넘이가 한눈에 들어오는 카페 테라스에 앉아 아내에게 말했다
 죽기 전에 너에게 오로라를 보여주고 싶어
 그러자 아내는 검붉은 가을 수수밭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의 아내 혼자서 오로라가 보이는 곳으로 가도 된다는 말이야?
 아내의 질문에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한쪽 머리가 아파왔다


 그렇지 나는 분명 아내에게 오로라를 보여주고 싶었지
 그렇지만 일찍이 스스로 오로라를 보고 싶단 마음도 갖고 있었어
 그렇다면 내 말은 내가 오로라를 보기 위한 수단으로 아내를 이용하겠단 뜻일까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꼬았던 다리를 반대로 다시 꼬는 동안 상체를 아내 쪽으로 은근히 숙이며 말했다
 죽기 전에 너와 오로라를 보러 가고 싶어
 그러자 아내는 푸르르 떨리는 진보랏빛 유성 같은 입술로 물었다
 당신은 오로라가 보고 싶은 거야, 오로라가 보이는 곳으로 가고 싶은 거야
 아내의 질문에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래 오로라를 보는 일은 검색으로 가능한 일이지
 그래도 나는 태양의 입자와 지구의 자기장이 부딪는 곳에 서서 그것들의 발광을 목격하고 싶은 마음이었어
 그래서 내 말은 오로라가 보이는 곳으로 가되 거기서 오로라를 보지 못해도 된다는 뜻일까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의자에서 일어나 아내에게로 돌아가 그녀의 팔걸이에 걸터앉으며 다시 말했다
 죽기 전에 오로라가 보이는 곳으로 가 너와 함께 오로라를 바라보고 싶어
 그러자 아내는 북극점으로부터 불어오는 텅 빈 바람 같은 눈빛으로 물었다
 생애 단 한번 맞이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왜 당신과 함께해야 하지? 지치도록 평생을 함께할 당신과 말야
 아내의 말에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한 손으로 자신의 무릎을 내리치며 웃기 시작했다


 다시없을 이 밤 아내와의 귀갓길은 그에게 아프지도 않았고 기쁘지도 않았고 허전하지도 않았고 가득하지도 않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헤르베르트 그라프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지나가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12~14쪽)



 이 시를 읽고 나서야 1부의 제목이 “아내는 나에게 얘기하지 않았지만 / 나에게 아내는 얘기하고 있었다”인 것을 이해할 수 있었고, 첫 번째 시의 주인공 나카타와 두 번째 시의 주인공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모두 시인의 다른 모습일 뿐이란 걸 눈치 챘다. 그런데 ‘나카타’는 일본의 국가대표 축구선수? 헤르베르트란 이름을 쓰는 요즘 독일 사람은 별로 없다. 독일 라이프치히를 장소로 하는 시들이 등장하고 게반트하우스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임경섭은 서양 고전음악을 좋아한다고 봐도 무방하니, 혹시 헤르베르트란 이름은 카라얀에서 가져온 건 아닐까. 성姓 ‘그라프’? 저 뒤에 보면 테니스 월드 스타 슈테피 그라프가 등장하니 그녀의 이름에서 슬쩍 따왔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시인이 스포츠팬인 것이 거의 분명하다. 우리나라 이민 2세로 미국 프로야구 선수로 행크 콩거(별명, 본명 ‘최현’)란 젊은이가 있다. 그를 슬며시 등장시켜 투수가 공을 던지고 타자가 배트를 휘두르는 순간까지의 짧은 시간을 그리는 시가 있고, 슈테피 그라프와 숙적이었던 나브라틸로바까지 등장시킬 정도. 그 외에도 작가, 작품의 등장인물 등도 시 속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니 이런 능청스러움이라니.
 위의 시 <플라스마> 역시 헤르베르트 그라프와 그의 처 사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 속에서, 언어로 하는 의사소통의 불명확성을 이야기하며, 사실 그와 같은 대사는 그라프 부부  자리에 이수일과 심순애, 노미호와 주리혜, 철수와 영희를 가져다 놔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잖은가. 이때쯤, 한국 시에 한 이종 또는 변종이 태어났다고 양 입술을 한 번 찢어 가볍게 웃을 줄 아는 것도 괜찮은 일일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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