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 이기영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20
이기영 지음, 이상경 책임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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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에 중등교육을 마친 나는 이기영이란 작가의 이름을 그저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 유행하던 카프 문학에 종사한 인물, 이 정도로만 알았다. 예비고사, 본고사에 카프 문학에 대한 문제는 절대로 나오지 않으니 사실 이름마저 거의 잊고 지내다 이번에야 읽어봤는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노동쟁의와 소작쟁의를 다룬 <고향>이 문제제기의 범위와 해결 방법에 다양한 한계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자본주의의 변화 속에서 몰락해가는 대부분의 농민계급과, 재빨리 신문물의 흐름에 편승해 단번에 상위계급으로 상승하는 일부 자본가를 그리는 리얼리즘적 성취가 매우 놀라운 수준이라는 걸 직접 확인하게 됐다. 이런 작품과 작가가 단지 휴전선을 넘었다는 이유 하나로 (내가 경험한)국어시간 현대문학사 강講에서 소홀히 지나쳤다는 건 대단히 큰 손실이었던 것 아니었겠나 싶었다. 적어도 내가 읽기로는, 이기영의 3년 선배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을 쓴 이광수의 어떤 작품보다 <고향>이 더 낫다.
  <고향> 첫머리는 김희준이라는 양반 찌끄레기가 5년간의 동경유학을 마치고 고향 원터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이는 보통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열네 살, 말이 열네 살이지 만으로 열 셋도 되지 않아 할머니 회갑을 맞아 두 살이 더 많은 복임이한테 싫은데도 억지로 장가를 들었다. 큰누이 같고 못생긴 아내하고는 정 없이 살다가 도무지 버틸 수가 없어서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을 했던 터. 그래도 그냥 내빼지는 못했던지 5년 만에 집에 와보니, 이런, 네 살 먹은 아들 정식이가 있어 생전 처음으로 한 번 안아 보았던 것.
  실제의 이기영을 보자면, 나이 열네 살을 먹어 조모의 회갑을 더욱 경사롭게 만들기 위해 열여덟 살 처녀 조병기와 결혼하고 기영이 혼인하느라 쌓인 빚에 가세가 쪼들려 다니던 학교를 중도 퇴학하기에 이른다. 이 혼인을 아내 조병기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열여덟 먹은 처녀에게 열네 살 소년이 서방이라고? 아이고 이를 어째. 거기다가 보통학교를 다니고 있었으니 머리통을 밀어 발간 중대가리일 테고, 첫날밤은커녕 오줌이나 안 쌌으면 다행이라 생각했을 터. 하여간 이기영은 어찌어찌 변통을 해서 학교를 다시 다녔는지 소학교를 졸업하고 반 년 간 잠업강습소에 다녔다 하며, 이이의 고향인 충남 아산군 배방면 인근에 동방방적이라는 방적회사가 있어서 (지금은 없어졌다. 이후 아산과 천안 인근의 가장 큰 규모의 ‘동방마트’를 거쳐 지금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나중에 노동쟁의가 벌어지는 장소를 인조견 생산 공장으로 특정하지는 않았을까 싶다. 주인공 김희준 속에서 다양한 이기영의 모습을 발견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기는 하다.
  김희준은 5년간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도시에서 하다못해 펜대 잡고 월급 받는 일을 하지 않고 대신 농촌 현장에 들어가 스스로 소작농이 됨으로써 농민들을 의식화시키고 이들이 지주와 마름에게 타당한 권리를 요구하게 만든다. 이 책을 흥미롭게 읽은 건, 그렇다고 농민, 소작인들이 김희준의 뜻에 맞을 정도로 의식화되느냐 하면 그게 천만의 말씀이라는 것. 이 부분이 러시아 작가들, 한 번 마음먹었다 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죽음과 고문 따위도 겁내지 않고 오직 투쟁과 혁명의 선두에 서길 마다하지 않는 막심 고리키,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 지난주에 읽은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의 작품 속의 영웅적 투사들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기영이 만든 대부분의 소작인들은 쟁의 중에도 자그마한 이득을 위해 같은 소작인들끼리 주먹질하고, 혹시 소작이 떼인다든지 하는 일신상 불이익이 닥치지는 않을까 불안해한다. 배고파 우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못해 쟁의규약을 충분히 어길 수도 있는 선 위에서 갈팡질팡하여 이의 해결을 위해 쟁의 지도자 김희준은 기적 같은 행운과 만나야 한다. 그러다 결국 쟁의를 승리로 이끌게 하는 무기는 큰 희생을 담보로 한 지주 또는 지주의 대역인 마름과의 투쟁이 아니라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만 볼 수 있는 지주의 사생활과 연관된 불명예로 협박하는 것이다.
  이 내용을 고리키나 오스트롭스키가 썼다면 소작인들은 차돌처럼 단단하게 단결하여 죽창을 들고 마름의 집에 쳐들어가 눈에 보이는 족족 무릎을 꿇리고 승리를 얻어낸 다음, 장검과 소총으로 무장한 동네 헌병한테 전부 총 맞아 죽었을 거다. 고리키, 오스트롭스키를 폄하하는 뜻이 아니다. 러시아나 식민지 조선이나 당시 사회주의 계열의 작가들이 당면했던 가장 큰 문제는 노동자, 농민을 계몽하는 것이었으리라. 러시아 작가들은 계몽적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접근방식이 과하게 혁명적이라서 오히려 비과학적일 정도로 리얼하지 않았던 반면에 이기영은 보다 실제적이라 리얼하기는 하지만 덜 교화적이라는 건데, 이제 세월이 지나 이기영의 작품이 더 나아 보인다는 뜻 정도.
  계몽의 정도도 이광수의 <흙>에서 보는 무결점의 허숭과 비교하면 김희준은 사회운동의 뜻을 실천으로 옮기는 실천가이기는 하지만 못생기고 자기보다 두 살이 많아 도무지 여자 같아 보이지는 않는 아내를 두고 읍내에서 술집을 하는 과부의 막내딸 음전이의 덜퍽진 엉덩이가 눈에 꽂혀 허리를 한 번 부르르 떨기도 하고, 어린 시절 감꽃을 따 소꿉장난을 하던 갑숙이, 그러나 실생활에서는 자신의 진정한 적수인 민참판댁 마름인 안승학의 맏딸을 여전히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사람 냄새가 난다. 등장인물들한테.
  다만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부자인 민참판댁 마름 안승학과 읍내에서 포목, 잡화상에 고리대금까지 하는 권상철 두 명은 개전의 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 악질로 묘사했다. 하긴, 정의의 사회주의자의 이름으로 무찔러야 할 상대가 조금이라도 선한 면이 있으면 그들의 투쟁이 타당하게 보이지 않을 수 있어서이기는 하겠지만.
  아쉬운 점을 조금만 더 들자면, 1930년대 당시 장편소설은 대개 신문연재를 하는 편이었고, <고향>역시 1933년부터 약 일 년 동안 조선일보에 연재했기 때문에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 그리하여 소작인 거개가 문맹이라 그랬던지 소작쟁의는 그나마 자유롭게 쓸 수 있었겠지만 노동쟁의 부분은 며칠 연재분량을 통째로 편집 당해 어떻게 전개가 됐고 승리했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고향>은 거의 완전히 조선 사람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고 풀린다. 이것 역시 검열 때문이겠지만 ‘개명’을 수반하는 식민주의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 또한 크게 우회하여 설명할 뿐 (검열을 당해 삭제되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직접적인 반反식민, 그게 불가능했다면 우회적인 반反식민적인 메시지도 전혀 포함하지 않았다는 점. 심지어 5년간 일본 유학을 한 김희준이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한 경호더러 방으로 들어오라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오하이리나사이.おはいりなさい.”
  이외에도 무수한 일어 표현이 등장하는데, 자꾸 이이를 비교해서 유감이긴 하나, 일어 표현이 이광수보다 더 잦다.
  <고향>은 위에서 이야기한 아쉬운 한계, 또는 문제점이 있음에도 내가 읽어본 우리나라의 현대 고전 가운데 제일 재미있고 흥미로운 작품으로 꼽을 수 있겠다. 이런 책을 이제야 읽다니 참으로 만시지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뜻이 있으면 한 번 읽어보시라고 작품의 스토리는 거의 다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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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4-09 10: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이 작품 읽고 염상섭의 그 지루한 <삼대>보다도 훨씬 잘 쓰인 작품인데, 왜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안타까웠던 적이 있었지요. 아마 폴스타프 님 말씀처럼 이기영이 월북한 인사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Falstaff 2020-04-09 11:09   좋아요 2 | URL
그죠, 그죠? 이 책 괜찮지요?
월북에다가 이광수처럼 북송 도중 죽지도 않고 기어이 영웅 칭호까지 받아 특별한 묘역에 묻혔을 정도니 남쪽 사람들이 읽기를 허락하지 못했겠지요.
근데 이기영의 본처가 낳은 맏아들의 자손들이 아직 아산에서 살고 있다는데 살면서 무슨 불이익 같은 건 안 받았는지, 참 안쓰럽습니다. 받았을 것 같아서요.

유부만두 2020-04-09 15:27   좋아요 1 | URL
아... 전 삼대 재밌게 읽었는데요;;; 주말 드라마랑 도스토예프스키 저리 가라다 했는데 이기영 작품은 또 얼마나 대단한 걸까요!
그나저나 삼대 그 불륜 치정 내용이 고등학교 필독서 였으니 참...

유부만두 2020-04-09 15: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황석영이 엮은 한국단편선에 이기영의 북측 가족을 만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이남의 가족은 고초를 겪다 조용히 생을 마쳤다고 나오고요.

Falstaff 2020-04-09 15:49   좋아요 1 | URL
예. 이기영의 북쪽 가족은 월북해서 만난 여자가 아니라 네 살 위 아내 조병기하고 도무지 살 수 없어 서울에서 동거하던 신여성 사이에서 생긴 가족이라 하더군요.
아마 거기 태생 아들(인가 손자)이 좀 높은 공무원 계급으로 지금도 잘 살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근데 북한 같은 전체주의 체제에서 죽을 때까지 김일성 찬양 같은 것만 써야 했으니 작가로서는 행복하지 않았을 거 같습니다.
 

 

 

 

  어제 불초한 서재를 방문하신 분의 글을 읽고, "오정희 컬렉션"이란 이름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한 그이의 책 다섯 권을 박스 세트로 발매한다는 걸 알았다.

 

 

 차례로 작품집 《불의 강》, 《유년의 뜰》, 《바람의 넋》, 《불꽃놀이》, 중편소설 <새>를 한 박스에 담았다.

  오정희. 이이의 작품을 처음 읽은 것이 아마 제2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작품집에서 대상작인 <저녁의 게임>이었을 거다. 1979년? 하여간 70년대 후반이다. 오정희를 읽기 전까지 문학, 특히 소설이라고 하는 건 현대를 살아가는 건강한 시민이 그저 교양의 하나로 간혹가다가 읽어주는 예술의 한 형식 정도라고 인식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이의 첫 단편집 《불의 강》을 읽게 된다. 오정희를 기점으로 나는 문학과 소설이라는 재미의 중독에 빠져 본격적으로 책을 읽게 되지는 않았을까.

 책장을 뒤지면 그 시절에 산 오정희의 책이 다 있다. 취중에 책장을 조금 뒤져 불의 강》과 《바람의 넋》을 찾았다. 한 번 보자.

 

 

《불의 강》은 동네 서점에서 산 건데, 당시 책방 사장은 책을 꼭 비닐로 싸서 팔았다. 처음엔 좋았다. 하지만 오래 보관하면 보시듯이 책 전체가 우글쭈글해진다. 책은 나이를 먹어 조금씩 붓는 반면, 화학물질인 폴리에틸렌은 전혀 변하지 않으니 쭈그러질 수밖에.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함으로써 오정희의 데뷔작이 되는 <완구점 여인>이 제일 마지막에 실려 있다. 독특하게도 작품을 쓴 역순으로 만들었다. 1968년 신춘문예니까 작품은 1967년 11월 말에 신문사로 발송했을 것. 이때 이이의 나이 만 이십 세를 넘긴지 한 20일쯤 됐을 때다. 놀랍게도 여성간 동성애를 은유한 작품이면서, 섬뜩한 느낌이 난다.

  내 책장의《불의 강》은 1977년 초판본. 그래 본문은 이렇게 생겼다.

 

 

  세로쓰기. 작은 활자. <미명未明>이란 단편인데 이 작품이 좋아서가 아니라 가운데 쯤에 있어서 사진 찍기 편해 우연히 걸린 것. 책 주위의 갈변은 훨씬 심하다. 사진으로 찍으니 갈변 현상이 두드러지지 않는데 진짜로는 심각한 수준이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 오정희에게 빠져버린 건 유명한 <중국인 거리>가 실린 작품집 《유년의 뜰》을 읽고나서다. 괜히 이이의 작품이 이러니 저러니 따따부따할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몇몇 이웃을 비롯해 나를 아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좋은 단편소설을 추천해달라면 당연히 《유년의 뜰》을 이야기한다. 읽어보고 마음에 들면 오정희의 모든 단편소설을 섭렵해보라고,

 내가 가지고 있는 오정희는 위의 "오정희 컬렉션" 다섯 권 모두하고, 도서출판 나남이던가에서 나온 《야회》를 비롯해 《옛 우물》, 《돼지꿈》, 동화책 <송이야 문을 열면 아침이란다> 등이다. 인정한다. 나는 '오정희 빠'다.

  1990년대 후반, 문창과 학생과 문학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벌써 오정희를 읽는 학생이 없다고 했다. 어떻게 단편소설을 쓰려하는 학생이 이이를 거치지 않을 수 있을까가 굉장히 궁금했다. 같은 단편소설이라도 나는 오정희가 다른 어떤 단편 작가들보다 더 좋다. 한 시절, 오정희 때문에 절망에 빠져 소설 써볼 꿈을 접은 젊은이가 한 두명이 아니었다. 그이가 전성기 시절에 쓴 작품들을 모아 컬렉션이 나왔다니 어찌 영업글을 쓰지 않을 수 있을까보냐.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꺼내 본 오정희, 그리고 《불의 강》. 이 책의 뒷면엔 오정희의 20대 모습이 담겨있다. 세월이 참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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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리 2020-04-29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지 <저녁의 게임>을 한글자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고스톱을 배웠습니다. 물론 글로요.

Falstaff 2020-04-29 16:29   좋아요 0 | URL
진짜 화투로 고스톱을 쳐보셔도 재미있습니다. 빠지지만 않으면요. ^^
 
그날이 오면 범우문고 277
심훈 지음 / 범우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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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남도 당진 시로 들어가는 초입에 예부터 줄다리기로 이름난 고을이 하나 있었으니 기지시다. 기지시리로 가자면 당진 행 왕복 이차선 도로로 당진읍내 거진 가다가 왼쪽 오른쪽 작은 로터리가 나오면 바로 거기가 거긴데, 로터리를 넘지 말고 근방에다 일단 차를 세운 후 가게 앞에 의자를 내놓고 앉은 영감님한테 냉장고 속 시원한 사이다 병이나 하나 들이밀고 ‘필경사’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묻는 편이 좋다. 그래 골목을 뒤져 이젠 왕복 일차선의 농로를 따라 야트막한 언덕(이랄 것도 없는 오르막)을 따라 가면 송림 입구에 흐트러진 초막이 한 채 있으니, 붓으로 밭을 가는 필경사筆耕舍라. 이제 서해안 시대를 맞아 송악 IC로 가기 위해 34번 국도에서 38번으로 갈아타면 얼마 가지 않아 왼편 언덕배기에 고동색 표지에 흰 글씨로 ‘필경사’라 씌어 있으니 얼마나 편한 세상인가.
  필경사. 서울 노량진에서 태어나 경성일고, 지금의 경기고등학교를 다니다 3.1 만세운동에 가담하여 장렬하게 퇴학을 맞은 후 중국 유학을 한 댄디보이 심훈이, 만년에, 그래봐야 만 35세에 요절을 해 만년이랄 것도 없지만, 하여간 죽기 4년 전이니까 만년은 만년 아닌가 싶어서, 그때 이미 서울 생활을 접고 당진에 정착한 부모님을 따라 멀고 먼(그러나 지금은 맘만 먹으면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할 수 있는) 당진으로 내려가 붓으로 세상의 밭을 가는 필경사를 짓고 글을 썼으니, 이 집에서 쓴 대표작이 바로 조선의 대표적 브나로드 문학작품인 <상록수>. 내가 유일하게 읽어본 심훈. 그것도 어느 새 40년이 훨씬 넘었다. 어휴, 세월이란 대체.

 

​심 훈


  나는 한 번도 심훈을 시인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신문기자 출신의 소설가일 뿐이라고 여겨왔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가 쓴 시 <그날이 오면>을 읽을 기회가 있어서, 이후 언젠가는 심훈의 시집을 한 번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참 오랜 세월 끝에 드디어 이이의 시집을 들춰보게 된 것. 심훈. 옛 사진에 포토 샵으로 포장한 반半 초상화를 보면, 역시 부잣집 도련님, 거기다가 댄디보이의 모습이라 이이가 그리 억센 울분과 갈망과 염원을 지니고 있었는지는 몰랐었다. 그러니 이쯤에서 <그날이 오면>을 한 번 읊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 끊지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처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 1930.3.1. (첫 번째 연 넷째 줄 ‘끊지기’는 ‘끊어지기’나 '끊기기'의 고어, 또는 시어, 아니면 출판사 오식인 것 같습니다.)



  심훈 역시 시인으로서 자신의 은밀한 사생활의 모습도 시어를 통해 고백하기도 하지만, 예상 외로, 거의 대부분의 시가 식민지 조선인으로 살아가는 어두운 광경과, 독립을 향한 애절한 갈망,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스러진 선후배 동지들에 관한 애절한 안쓰러움 같은 것들이다. 놀라운 사실이었지만 이 독후감을 읽는 분은 아시고 계셨을 듯하니 나는 반성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이겠다. 예를 들어 <만가輓歌>라는 노래의 일부를 보자.



  궂은 비 줄줄이 내리는 황혼의 거리를
  우리들은 동지의 관을 메고 나간다.
  만장도 명정도 세우지 못하고
  수의조차 못 입힌 시체를 어깨에 얹고
  엊그제 떼메어 내오던 옥문을 지나
  철벅철벅 말없이 무학재를 넘는다.


  비는 퍼붓듯 쏟아지고 날은 더욱 저물어
  가등街燈은 귀화鬼火 같이 껌벅이는데
  동지들은 옷을 벗어 관 위에 덮는다
  평생을 헐벗던 알몸이 추울 상싶어
  얇다란 널조각에 비가 새들지나 않을까 하여
  단거리 옷을 벗어 겹겹이 덮어준다.  (부분) - 1927. 9.



  동지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모진 고생을 하다 거의 죽어 나왔나보다. 출옥한지 불과 며칠 만에 세상을 등진, 수의조차 입히지 못한 알몸을 그냥 얇은 관에 담아 비가 오는 황혼에 몇 명의 동지들이 비를 맞으며 서대문 형무소 근방의 무악재 고개를 넘어가는 모습이다. 비가 온다니 땅이 언 겨울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추울까봐, 옥 속에서 엄동의 세월을 보내고 이제 자유를 찾은, 넋이 떠난 동지가 추울지도 몰라 동지들이 자기 옷을 벗어 관을 덮어줄 때 가로등은 도깨비 불 같이 껌벅이던 어스름 녘.
  반면에 슬픈 희망의 노래도 있다. <어린이 날>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해마다 어린이날이면 비가 내립니다.
  여러분의 행렬에 먼지 일지 말라고
  실비 내려 보슬보슬 길바닥을 축여 줍니다.
  비바람 속에서 자라난 이 땅의 자손들이라,
  일 년의 한 번 나들이에도 깃이 젖습니다그려.


  여러분은 어머님께서 새 옷감을 매만지실 때 물을 뿜어 주름살 펴는 것을 보셨겠지요?
  그것처럼 몇 번만 더 빗발이 뿌리고 지나만 가면 이 강산의 주름살도 비단 같이 펴진답니다.


  시들은 풀잎만 얼크러진 벌판에도 붐이 오면은
  하늘로 뻗어 오르는 파란 싹을 보셨겠지요?
  당신네 팔다리에도 그 싹처럼 물이 올라서
  지둥치듯 비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말라고 비가 옵니다.
  높이 든 깃발이 그 비에 젖습니다.  - 1929.5.5. (전문)


  그러나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비분강개의 시 몇 수를 빼고, 심훈의 시를 상찬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 더 솔직하게 고백하자. 나는 시를 잘 모른다. 이이가 더 오래 살아 한 여든 살 쯤에도 시를 썼다면 내게 훨씬 와 닿는 작품을 많이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하여튼 서른 몇까지 젊은 심훈의 울분과 갈망, 격정과 슬픈 희망과 깊은 애도의 시편들에 나는 공감할지언정, 어쩐지 조금은 미숙하고 거친 것 같다. 이이의 정 반대편에 선 글 좋은 미당의 시를 읊고 바로 뒤에 읽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런 내 의견이 옳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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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조지 웰스 - 눈먼 자들의 나라 외 3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6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최용준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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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버트 조지 웰스, H.G. 웰스의 책은 <투명인간>과 <모로 박사의 섬> 두 권을 읽었다. 그 외에도 <우주전쟁>이나 <타임머신>같은 과학 추리극, 혹은 과학적 픽션, 자칭 ‘SF 소설의 아버지’다운 작품이 있으나 장편이라면 읽은 두 권으로 만족하겠다. 그래 현대문학사의 세계문학‘단편선’이 아니었다면 그냥 넘어갔을 작가이지만 과연 SF의 아버지가 쓴 단편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 읽어보게 됐다. 물론 33편의 작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읽을 수 있다는 유혹도 큰 몫을 했고.
  조지 웰스의 흥미는 과학, 우주, 지적인 우주생명체, 생체학, 생물학, 심지어 심령학까지 인간의 섬세한 감정의 선을 따라가는 기존 문학이 해왔던 것들을 빼면 나머지 거의 모든 분야에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첫 작품 <퇴짜 맞은 제인>은 자기하고 연애하던 배달부 윌리엄이 상점에서 판매원으로 승격을 하고, 당연히 이에 따라 급여가 올라가니 생각이 달라져 다른 여성과 결혼한 것에 열을 받아, 결혼식이 끝나고 ‘신랑 신부 행진’ 이후 교회 밖에서 하객들이 딸 아들 많이 낳으라고 쌀을 뿌릴 때, (자신을 걷어찬 신랑이 아니라) 신부를 향해 장화를 던졌지만 엉뚱하게 불쌍한 신랑의 눈두덩에 맞은 일은 코믹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 작품은 어째 조지 웰스치고는 조금 낯설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상적 사건이어서 조금 의아하기는 했다. 그러나 두 번째로 실린 <원뿔>에 이르러 자신의 아내와 불륜관계를 맺어오다가 내일 야반도주를 획책하는 오랜 친구를 유인해 제철소의 용광로 부근에 던져버림으로써 처참하게 태워 죽이는 리얼 묘사를 읽으면, 역시 웰스, 라는 말이 비로소 나오게 된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한 뻥쟁이 생물학자가 위조 추천장을 들고 자신을 방문한 자에게 푸른색의 작은 병 속에 든 것이 살아있는 콜레라균이라고 했다가 방문객이 알고 보니 테러리스트이어서 병을 훔쳐 달아난다. 긴박한 마차 추격전 끝에 급박한 처지에 이른 테러리스트가 콜레라균을 마셔버려 스스로 생물학전 병기가 되어버리는 사건. 그러나 병 속에 든 건 전염병 콜레라가 아니라 온 몸을 푸르게 만드는 정체불명의 병원체였다는 <도둑맞은 세균>으로 초반부부터 자신이 직접 자기 작품을 골라 만든 단편집에 기름칠을 한다.
  이어서 동물의 의식을 혼란하게 만드는 향기를 내뿜은 후 촉수를 뻗어 피를 빨아 먹는 아름다운 흡혈 식물, 보르네오 섬에 있는 천문대에 날아든 희귀한 큰 날 원숭이(large flying ape) ‘클랑우탕’과의 혈투, 지표 아래서 300년 전에 살던 괴조 ‘아이피오르니스’의 알 세 개를 발견해 이 가운데 하나를 부화시켰다가 새끼 상태에서 벗어나자 어쩔 수 없이 새와 생사가 걸린 혈투를 벌여야 했던 이야기, ‘공간의 뒤틀림’ 현상으로 매우 좁은 시야만 갖게 된 한 남자가 런던에서 남극의 현장 중계를 보게 되는 이야기, 자신을 학대하는 발전기 기사를 바로 그 발전기로 감전시켜 태워서 죽이는 아시아 흑인 이야기, 자신의 집에 밤을 틈타 들어온 거대 나방이 일으킨 망상, 환각상태 이야기, 스페인 보물이 묻힌 밀림 속에서 황금 덩어리를 발견하지만 지도에 중국어로 표시되어 있는 방식으로 죽음을 맞는 탐험가 이야기, 머리 좋은 천애 고아이자 건장한 젊은이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유증하는 뛰어난 정신과학자의 불멸 이야기, 수술을 받다가 간 문맥이 절단당해 죽음에 이르러 저 세상을 구경했다가 살아나는 이야기, 하플로테우시스라는 이름의 해저 두족류(오징어, 문어, 낙지, 주꾸미, 꼴뚜기 같은 종류)와의 치열한 한 판 승부 등등 실로 신기한 소재들의 만찬이 독자 앞에 벌어진다.
  저자 서문에서 허버트 조지 웰스는 이렇게 말한다. 책의 뒤편에도 씌어있다.
  “나는 이 책이 신사의 서재보다는 요양소 침대나 치과의 응접실, 기차에 있었으면 좋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꺼번에 읽는 것보다는 잠깐 읽고 또 잠깐 읽고 했으면 좋겠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꾸며 낸 이야기들의 모음집이며, 상당수는 쓰는 동안 무척 즐거웠다. 운운.”
  맞다. 위에 내가 소개한 것들을 보시라. 참으로 기묘한 이야기가 망라되어 각기 한 편씩 읽으면 실로 흥미가 솟을 만한 작품들이다. 그런데 내가 책을 읽는 방식은 한 권 잡으면 다 읽을 때까지 다른 책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편. 그래 한 방에 이 책도 다 읽었는데, 이틀 반 걸렸다, 처음엔 정말 재미있게, 몰두해가며 읽었으나, 틀림없이 보통의 사람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할 너무도 낯선 이야기가, 너무도 자주, 무려 서른 세 번이나 나오니까 작품의 효용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과학, 지적인 우주 생명체, 생물학, 변종 포유류부터 듣도 보도 못한 해저동물에서 흡혈식물을 거쳐 유령과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 망라되는 모든 것이, 한 300쪽 넘어가면 점점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바뀌어 가는 것을 독자 스스로 느끼게 된다. 설마? 의심스러운 분은 직접 나처럼 무식하게 읽어보시라.
  어쨌든 이 작품집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위에 인용한 작가의 말대로 하는 것이리라. 그리하면 적어도 일 년 동안은, 보름에 한 편 정도를 읽는다면, 엽기발랄한 한 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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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할 것인가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88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끼 지음, 서정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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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는 1828년 사라토프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교에 다니다가 자퇴하고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역사, 철학, 언어학을 배운다. 이후 본격적으로 유물론에 빠져, 자연스레 자유사상과 혁명에 집중하게 된다. 당연히 이로 인해 1862년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수용소에 투옥되고, 이 때 수용소에서 대표작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집필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1889년까지, 러시아가 얼마나 넓은지 감안하시기 바라는데, 전국의 수용소를 전전하며 무려 27년간 수용생활을 하다가 61세에 석방이 되고, 곧바로 죽는다. 수용소에서 무슨 병이 들었는지, 아니면 갑자기 환경이 바뀌면서 면역력이 약해져 급사를 했는지는 책 뒤에 쓰인 연보만 가지고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책의 내용은 당연히 19 세기 중반, 로마노프 왕조 치하에서 읽을 수 있는 최고의 의식화 교재다. 이거, 다른 사람들 눈에는 모르겠으나 내 의견으로는 소설이 아니다. 소설을 빙자해 독자로 하여금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꿈꾸게 만드는 전향 권유 책자다. 그래 이 책의 열혈 독자를 꼽아도 목록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프로 혁명꾼 플레하노프를 위시하여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 미야코프스키 등등. 심지어 레닌은 책꽂이에 체르니셰프스키의 전집을 장만해놓았을 정도라니 소련에서는 아마 대를 이어 필독서 목록에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소설의 외양을 갖추기는 했지만, 소설로 읽어도 차라리 19세기 초반, 야박하게 얘기하자면 18세기 후반에나 어울릴 서사구조와, 등장인물의 정형화된 성격을 가졌다(라고 나는 읽었다).
  물론 스토리 자체는 재미있다. 역자가 번역을 하면서 스토리 라인의 시간적 공간을 헷갈렸는지, 원작 자체가 그런지 모르겠지만 날짜 자체가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앞에서 말 한 날짜와 장소가 뒤에서 다시 얘기하는 때와 곳이 다르기도 하고, 연도가 다르기도 한데, 이 정도는 봐주자. 작가가 다른 곳도 아니고 수용소에서 썼다니까 낮엔 노동하고 밤에 틈을 내서 끼적이는데 완벽한 퇴고는 불가능했을 수도 있으니.
  그럼 이야기의 시작 부분만 좀 들춰보자.
  프롤로그. 첫 문장부터 헷갈리기 시작한다.
  “1856년 7월 11일 아침 모스끄바 철도역 근처에 있는 뻬쩨르부르그에서 가장 큰 한 호텔의 종업원들이 약간 겁을 먹은 듯 부산을 떨고 있었다.”
  종업원들이 기겁을 한 날이 1856년 7월 11일 아침이 아니라 7월 21일 임은 421쪽 부근에 가면 알 수 있는데 말 그대로 프롤로그니까 아직 독자는 그런 건 눈치를 챌 방법이 없고, 다음 구절을 보면 ‘모스끄바 철도역 근처에 있는 뻬쩨르부르그에서 가장 큰 호텔’이라면 호텔이 있는 장소는 어디일까. 나는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큰 호텔 근처에 모스크바로 가는 열차를 위한 역이 있다, 따라서 호텔은 페테르부르크에 있다고 확정하고 읽기 시작했다. 이것 역시 저 뒤로 가면 모스크바 철도역 부근에 있는 모스크바에서 제일 큰 메트로폴 호텔(아는 게 그거밖에 없어서)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아니다, 다음 문맥상 호텔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모스크바 행 역이 맞다. 왜냐하면 호텔에 숙박한 신사가 새벽 두시 반 경 (당시의)임시다리 리찌야나 교에서 권총으로 머리통을 쏜 뒤 (네베로 보이는) 강에 빠져 북해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하여간 한 젊은 신사가, 평소 안하던 짓인 최고급 호텔, 페테르부르크에서 제일 큰 호텔에 들어 룸서비스로 저녁을 거하게 차려 먹고, 물론 마지막 만찬이었겠지만, 새벽에 자신의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 넣은 채 네바 강에 빠져 죽은 건, 일단 ‘공식적으로’ 사실이다.
  다음날, 페테르부르크 상류층의 여름별장이 밀집해 있는 바실리예프스키 섬, 까멘노이 오스뜨로프에 있는 방 셋짜리 작은 별장. 어떤 분위기의 집인지 궁금하시면 도스토옙스키의 역작 <백치>를 읽어보시면 단박에 짐작을 하실 수 있을 터인데, 이 집에서 여자 주인공 베라 빠블로브나가 페테르부르크 우체국의 소인이 찍힌 편지를 받고 기겁을 한다. 죽은 남자에게서 온, 그러나 아직 그가 죽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받은 편지.
  “내가 당신 마음의 평안을 해쳤나 보오. 나는 이제 그만 무대에서 사라지려고 하오. 나의 결정에 만족해하고 있소. 당신들 둘을 변함없이 사랑하오. 안녕.”
  이 편지를 옆에 선 젊은 남자가 집어 든다. 그러니 프롤로그에서 딱 봐도 이건 두 남자와 한 여자 간의 삼각관계. 세상에서 제일 재미난 것 세 개만 고르라면, 불구경, 싸움구경, 그리고 삼각관계. 이 책은 다행스럽게도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재미있는 주제 중의 하나에 관한 책이구나, 라고 김칫국물을 벌컥벌컥 들이켰겠습니까, 안 들이켰겠습니까? 일단 프롤로그만 읽은 상태라고 가정을 하면 말씀입니다.
  이어서 본문이 나온다. 첫 번째는 우리의 주인공 베라 빠블로브나. 어려서부터 독한 엄마의 치마 아래 겁나게 고생만 하다가, 엄마가 보기에 꾸미기만 괜찮게 꾸미면 그래도 비싼 값에 팔아먹을 수 있을 거 같아, 불어, 독일어 교습에다가 피아노 레슨에 괜찮은 성악적 재질까지 두루 갖추어 놓고, 점점 자라 열일곱 살 되매, 최고급은 아닐지언정 근사한 드레스에 비싸지 않은 보석으로 치장을 해놓고 보니, 아파트 관리인을 하면서 무급 공직자를 하던 아버지가 근무하는 부서의 늙은 장관이 침을 흘리며 껄떡대기 시작했고, 이어 옆 부서의 또 다른 늙은 장관까지 눈독을 들이는 걸로 봐서 잘 만 하면 한 식구 팔자 고치는 건 시간 문제였단다. 그리하여 가장 괜찮은 배필을 골랐고, 자기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돈 많은 소유주의 아들이자 (작가가 소설을 쓰고 있다고 주장하는 1860년 기준) 현재에는 장교로 복무하고 있는 미하일 이바노비치 스또레쉬니코프.
  그런데 소설을 쓰는 작가가 자유와 혁명에 관한 꿈을 꾸다가 수용소에 처박힌 유물론자인데 주인공을 이런 룸펜 부르주아한테 엣다, 여기 있다, 건네줄 수 있나, 어디. 그리하여 사달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 아름다운 여인은 어디서 책 한 권 변변한 거 읽어본 적도 없고, 관련 수업 한 번 들어본 적도 없지만 구태의연한 여성차별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태생적으로 공동생산, 공동소비, 이익분배 같은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다. 신기한 뇌구조다. 게다가 베라 빠블로브나와 연결이 되는 인텔리겐치아들은 모두 선하고, 체력적으로 건강하고, 키가 크고, 완력이 대단하고, 빠짐없이 사회주의 혁명 사상에 푹 절어 있다. 베라에게 처음 접근하는 인물이 드미트리 세르게이치 로뿌호프. 이어서 역시 대단한 인내심과 천재적, 아니, 수재 이상의 능력을 지닌 의사 알렉산드르 마뜨베이치 끼르사노프. 단호한 성격과 대단한 결단력, 도라이 수준의 집행력을 지닌 엄격주의자 강철 사내 라흐메또프 등등.
  그.러.나. 내가 자주 주장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마르크스의 가장 큰 오류는 그가 인간을 과하게 선한 집단으로 전제한 것. 이 책의 작가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체르니셰프스키는 사회주의적 공동생산과 공동생활과 이익의 공동분배라는 과정이 극단적인 유토피아 적 결과물로 나타나리라고 상상했다. 1권 까지는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며 읽기에 재미가 작지 않았지만, 2권으로 들어가서는 베라 빠블로브나의 개꿈 이야기로 스토리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기색이 보여 언짢기 시작하다가, 심지어 소설의 형식을 깨고 의식화 자료에 준하는 공상적 설명문으로 채우려 한다. 독자는 벌써 21세기도 20년이 지나 까질 대로 까졌는데 말씀이다.
  하나 더. 이 책을 읽으라 하지 못하는 것 가운데 중요한 이유는, 교정, 교열. 이제 글자 좀 틀리고 맞춤법 어긋나고 그런 거 가지고 시비하지 않겠다. 문장이 개떡인 것이 자주 눈에 띈다는 거. 개떡이라는 게 어떤 개떡 수준이냐고? 여태 A는 a의 대문자다, 라고 주장하다가, 주장하고 있으면서 갑자기 다음 문장에 A는 b의 대문자다, 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불행하게 여기서 b가 a의 오식이어서 왜 갑자기 이런 문장이 나왔는지, 이게 무슨 특별한 뜻이 있어서 그렇게 쓴 건지 오리무중일 경우도 몇 번 생긴다. 간단히 얘기해서, 독후감을 읽는 당신은 이 책을 읽지 않아도 만수무강에 전혀 지장이 없으니 굳이 돈과 시간을 써서 이 위대한 사회주의자의 소설을 읽을 필요는 없으리라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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