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 이기영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20
이기영 지음, 이상경 책임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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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에 중등교육을 마친 나는 이기영이란 작가의 이름을 그저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 유행하던 카프 문학에 종사한 인물, 이 정도로만 알았다. 예비고사, 본고사에 카프 문학에 대한 문제는 절대로 나오지 않으니 사실 이름마저 거의 잊고 지내다 이번에야 읽어봤는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노동쟁의와 소작쟁의를 다룬 <고향>이 문제제기의 범위와 해결 방법에 다양한 한계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자본주의의 변화 속에서 몰락해가는 대부분의 농민계급과, 재빨리 신문물의 흐름에 편승해 단번에 상위계급으로 상승하는 일부 자본가를 그리는 리얼리즘적 성취가 매우 놀라운 수준이라는 걸 직접 확인하게 됐다. 이런 작품과 작가가 단지 휴전선을 넘었다는 이유 하나로 (내가 경험한)국어시간 현대문학사 강講에서 소홀히 지나쳤다는 건 대단히 큰 손실이었던 것 아니었겠나 싶었다. 적어도 내가 읽기로는, 이기영의 3년 선배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을 쓴 이광수의 어떤 작품보다 <고향>이 더 낫다.
  <고향> 첫머리는 김희준이라는 양반 찌끄레기가 5년간의 동경유학을 마치고 고향 원터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이는 보통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열네 살, 말이 열네 살이지 만으로 열 셋도 되지 않아 할머니 회갑을 맞아 두 살이 더 많은 복임이한테 싫은데도 억지로 장가를 들었다. 큰누이 같고 못생긴 아내하고는 정 없이 살다가 도무지 버틸 수가 없어서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을 했던 터. 그래도 그냥 내빼지는 못했던지 5년 만에 집에 와보니, 이런, 네 살 먹은 아들 정식이가 있어 생전 처음으로 한 번 안아 보았던 것.
  실제의 이기영을 보자면, 나이 열네 살을 먹어 조모의 회갑을 더욱 경사롭게 만들기 위해 열여덟 살 처녀 조병기와 결혼하고 기영이 혼인하느라 쌓인 빚에 가세가 쪼들려 다니던 학교를 중도 퇴학하기에 이른다. 이 혼인을 아내 조병기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열여덟 먹은 처녀에게 열네 살 소년이 서방이라고? 아이고 이를 어째. 거기다가 보통학교를 다니고 있었으니 머리통을 밀어 발간 중대가리일 테고, 첫날밤은커녕 오줌이나 안 쌌으면 다행이라 생각했을 터. 하여간 이기영은 어찌어찌 변통을 해서 학교를 다시 다녔는지 소학교를 졸업하고 반 년 간 잠업강습소에 다녔다 하며, 이이의 고향인 충남 아산군 배방면 인근에 동방방적이라는 방적회사가 있어서 (지금은 없어졌다. 이후 아산과 천안 인근의 가장 큰 규모의 ‘동방마트’를 거쳐 지금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나중에 노동쟁의가 벌어지는 장소를 인조견 생산 공장으로 특정하지는 않았을까 싶다. 주인공 김희준 속에서 다양한 이기영의 모습을 발견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기는 하다.
  김희준은 5년간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도시에서 하다못해 펜대 잡고 월급 받는 일을 하지 않고 대신 농촌 현장에 들어가 스스로 소작농이 됨으로써 농민들을 의식화시키고 이들이 지주와 마름에게 타당한 권리를 요구하게 만든다. 이 책을 흥미롭게 읽은 건, 그렇다고 농민, 소작인들이 김희준의 뜻에 맞을 정도로 의식화되느냐 하면 그게 천만의 말씀이라는 것. 이 부분이 러시아 작가들, 한 번 마음먹었다 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죽음과 고문 따위도 겁내지 않고 오직 투쟁과 혁명의 선두에 서길 마다하지 않는 막심 고리키,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 지난주에 읽은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의 작품 속의 영웅적 투사들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기영이 만든 대부분의 소작인들은 쟁의 중에도 자그마한 이득을 위해 같은 소작인들끼리 주먹질하고, 혹시 소작이 떼인다든지 하는 일신상 불이익이 닥치지는 않을까 불안해한다. 배고파 우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못해 쟁의규약을 충분히 어길 수도 있는 선 위에서 갈팡질팡하여 이의 해결을 위해 쟁의 지도자 김희준은 기적 같은 행운과 만나야 한다. 그러다 결국 쟁의를 승리로 이끌게 하는 무기는 큰 희생을 담보로 한 지주 또는 지주의 대역인 마름과의 투쟁이 아니라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만 볼 수 있는 지주의 사생활과 연관된 불명예로 협박하는 것이다.
  이 내용을 고리키나 오스트롭스키가 썼다면 소작인들은 차돌처럼 단단하게 단결하여 죽창을 들고 마름의 집에 쳐들어가 눈에 보이는 족족 무릎을 꿇리고 승리를 얻어낸 다음, 장검과 소총으로 무장한 동네 헌병한테 전부 총 맞아 죽었을 거다. 고리키, 오스트롭스키를 폄하하는 뜻이 아니다. 러시아나 식민지 조선이나 당시 사회주의 계열의 작가들이 당면했던 가장 큰 문제는 노동자, 농민을 계몽하는 것이었으리라. 러시아 작가들은 계몽적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접근방식이 과하게 혁명적이라서 오히려 비과학적일 정도로 리얼하지 않았던 반면에 이기영은 보다 실제적이라 리얼하기는 하지만 덜 교화적이라는 건데, 이제 세월이 지나 이기영의 작품이 더 나아 보인다는 뜻 정도.
  계몽의 정도도 이광수의 <흙>에서 보는 무결점의 허숭과 비교하면 김희준은 사회운동의 뜻을 실천으로 옮기는 실천가이기는 하지만 못생기고 자기보다 두 살이 많아 도무지 여자 같아 보이지는 않는 아내를 두고 읍내에서 술집을 하는 과부의 막내딸 음전이의 덜퍽진 엉덩이가 눈에 꽂혀 허리를 한 번 부르르 떨기도 하고, 어린 시절 감꽃을 따 소꿉장난을 하던 갑숙이, 그러나 실생활에서는 자신의 진정한 적수인 민참판댁 마름인 안승학의 맏딸을 여전히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사람 냄새가 난다. 등장인물들한테.
  다만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부자인 민참판댁 마름 안승학과 읍내에서 포목, 잡화상에 고리대금까지 하는 권상철 두 명은 개전의 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 악질로 묘사했다. 하긴, 정의의 사회주의자의 이름으로 무찔러야 할 상대가 조금이라도 선한 면이 있으면 그들의 투쟁이 타당하게 보이지 않을 수 있어서이기는 하겠지만.
  아쉬운 점을 조금만 더 들자면, 1930년대 당시 장편소설은 대개 신문연재를 하는 편이었고, <고향>역시 1933년부터 약 일 년 동안 조선일보에 연재했기 때문에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 그리하여 소작인 거개가 문맹이라 그랬던지 소작쟁의는 그나마 자유롭게 쓸 수 있었겠지만 노동쟁의 부분은 며칠 연재분량을 통째로 편집 당해 어떻게 전개가 됐고 승리했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고향>은 거의 완전히 조선 사람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고 풀린다. 이것 역시 검열 때문이겠지만 ‘개명’을 수반하는 식민주의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 또한 크게 우회하여 설명할 뿐 (검열을 당해 삭제되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직접적인 반反식민, 그게 불가능했다면 우회적인 반反식민적인 메시지도 전혀 포함하지 않았다는 점. 심지어 5년간 일본 유학을 한 김희준이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한 경호더러 방으로 들어오라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오하이리나사이.おはいりなさい.”
  이외에도 무수한 일어 표현이 등장하는데, 자꾸 이이를 비교해서 유감이긴 하나, 일어 표현이 이광수보다 더 잦다.
  <고향>은 위에서 이야기한 아쉬운 한계, 또는 문제점이 있음에도 내가 읽어본 우리나라의 현대 고전 가운데 제일 재미있고 흥미로운 작품으로 꼽을 수 있겠다. 이런 책을 이제야 읽다니 참으로 만시지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뜻이 있으면 한 번 읽어보시라고 작품의 스토리는 거의 다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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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4-09 10: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이 작품 읽고 염상섭의 그 지루한 <삼대>보다도 훨씬 잘 쓰인 작품인데, 왜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안타까웠던 적이 있었지요. 아마 폴스타프 님 말씀처럼 이기영이 월북한 인사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Falstaff 2020-04-09 11:09   좋아요 2 | URL
그죠, 그죠? 이 책 괜찮지요?
월북에다가 이광수처럼 북송 도중 죽지도 않고 기어이 영웅 칭호까지 받아 특별한 묘역에 묻혔을 정도니 남쪽 사람들이 읽기를 허락하지 못했겠지요.
근데 이기영의 본처가 낳은 맏아들의 자손들이 아직 아산에서 살고 있다는데 살면서 무슨 불이익 같은 건 안 받았는지, 참 안쓰럽습니다. 받았을 것 같아서요.

유부만두 2020-04-09 15:27   좋아요 1 | URL
아... 전 삼대 재밌게 읽었는데요;;; 주말 드라마랑 도스토예프스키 저리 가라다 했는데 이기영 작품은 또 얼마나 대단한 걸까요!
그나저나 삼대 그 불륜 치정 내용이 고등학교 필독서 였으니 참...

유부만두 2020-04-09 15: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황석영이 엮은 한국단편선에 이기영의 북측 가족을 만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이남의 가족은 고초를 겪다 조용히 생을 마쳤다고 나오고요.

Falstaff 2020-04-09 15:49   좋아요 1 | URL
예. 이기영의 북쪽 가족은 월북해서 만난 여자가 아니라 네 살 위 아내 조병기하고 도무지 살 수 없어 서울에서 동거하던 신여성 사이에서 생긴 가족이라 하더군요.
아마 거기 태생 아들(인가 손자)이 좀 높은 공무원 계급으로 지금도 잘 살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근데 북한 같은 전체주의 체제에서 죽을 때까지 김일성 찬양 같은 것만 써야 했으니 작가로서는 행복하지 않았을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