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불초한 서재를 방문하신 분의 글을 읽고, "오정희 컬렉션"이란 이름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한 그이의 책 다섯 권을 박스 세트로 발매한다는 걸 알았다.

 

 

 차례로 작품집 《불의 강》, 《유년의 뜰》, 《바람의 넋》, 《불꽃놀이》, 중편소설 <새>를 한 박스에 담았다.

  오정희. 이이의 작품을 처음 읽은 것이 아마 제2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작품집에서 대상작인 <저녁의 게임>이었을 거다. 1979년? 하여간 70년대 후반이다. 오정희를 읽기 전까지 문학, 특히 소설이라고 하는 건 현대를 살아가는 건강한 시민이 그저 교양의 하나로 간혹가다가 읽어주는 예술의 한 형식 정도라고 인식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이의 첫 단편집 《불의 강》을 읽게 된다. 오정희를 기점으로 나는 문학과 소설이라는 재미의 중독에 빠져 본격적으로 책을 읽게 되지는 않았을까.

 책장을 뒤지면 그 시절에 산 오정희의 책이 다 있다. 취중에 책장을 조금 뒤져 불의 강》과 《바람의 넋》을 찾았다. 한 번 보자.

 

 

《불의 강》은 동네 서점에서 산 건데, 당시 책방 사장은 책을 꼭 비닐로 싸서 팔았다. 처음엔 좋았다. 하지만 오래 보관하면 보시듯이 책 전체가 우글쭈글해진다. 책은 나이를 먹어 조금씩 붓는 반면, 화학물질인 폴리에틸렌은 전혀 변하지 않으니 쭈그러질 수밖에.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함으로써 오정희의 데뷔작이 되는 <완구점 여인>이 제일 마지막에 실려 있다. 독특하게도 작품을 쓴 역순으로 만들었다. 1968년 신춘문예니까 작품은 1967년 11월 말에 신문사로 발송했을 것. 이때 이이의 나이 만 이십 세를 넘긴지 한 20일쯤 됐을 때다. 놀랍게도 여성간 동성애를 은유한 작품이면서, 섬뜩한 느낌이 난다.

  내 책장의《불의 강》은 1977년 초판본. 그래 본문은 이렇게 생겼다.

 

 

  세로쓰기. 작은 활자. <미명未明>이란 단편인데 이 작품이 좋아서가 아니라 가운데 쯤에 있어서 사진 찍기 편해 우연히 걸린 것. 책 주위의 갈변은 훨씬 심하다. 사진으로 찍으니 갈변 현상이 두드러지지 않는데 진짜로는 심각한 수준이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 오정희에게 빠져버린 건 유명한 <중국인 거리>가 실린 작품집 《유년의 뜰》을 읽고나서다. 괜히 이이의 작품이 이러니 저러니 따따부따할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몇몇 이웃을 비롯해 나를 아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좋은 단편소설을 추천해달라면 당연히 《유년의 뜰》을 이야기한다. 읽어보고 마음에 들면 오정희의 모든 단편소설을 섭렵해보라고,

 내가 가지고 있는 오정희는 위의 "오정희 컬렉션" 다섯 권 모두하고, 도서출판 나남이던가에서 나온 《야회》를 비롯해 《옛 우물》, 《돼지꿈》, 동화책 <송이야 문을 열면 아침이란다> 등이다. 인정한다. 나는 '오정희 빠'다.

  1990년대 후반, 문창과 학생과 문학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벌써 오정희를 읽는 학생이 없다고 했다. 어떻게 단편소설을 쓰려하는 학생이 이이를 거치지 않을 수 있을까가 굉장히 궁금했다. 같은 단편소설이라도 나는 오정희가 다른 어떤 단편 작가들보다 더 좋다. 한 시절, 오정희 때문에 절망에 빠져 소설 써볼 꿈을 접은 젊은이가 한 두명이 아니었다. 그이가 전성기 시절에 쓴 작품들을 모아 컬렉션이 나왔다니 어찌 영업글을 쓰지 않을 수 있을까보냐.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꺼내 본 오정희, 그리고 《불의 강》. 이 책의 뒷면엔 오정희의 20대 모습이 담겨있다. 세월이 참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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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리 2020-04-29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지 <저녁의 게임>을 한글자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고스톱을 배웠습니다. 물론 글로요.

Falstaff 2020-04-29 16:29   좋아요 0 | URL
진짜 화투로 고스톱을 쳐보셔도 재미있습니다. 빠지지만 않으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