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이.
토머스 핀천 지음, 설순봉 옮김 / 민음사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자가 빽빽하게 배열된 8백 페이지에 이르는 장편소설. 이 책을 선택하면서, 이이의 작품을 읽는 행위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잊었다. <브이.> 150쪽까지 읽어가다가, 일단 책을 덮고, 잠깐 고민한 다음 (이걸 읽어? 말아?),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이번엔 옆에 노트와 볼펜을 꺼내놓았다. 핀천은 역시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독자인 내게 매우 높은 단계의 집중을 요구했으며, 작은 글씨로 노트 다섯 장 반을 메모하게 했다. 이러니 읽는 속도가 나지 않을 수밖에. 그러나 토머스 핀천을 고르는 순간, 독자 스스로 고난의 행군을 견디겠다는 암묵의 동의를 한 것이므로, 이런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게 된 팔자를 원망해야지 결코 작가나 작품 탓을 하지는 못하리라.
  무엇이 ‘책 좀 읽는’ 나로 하여금 150쪽까지 읽다가 다시 첫 페이지로 되돌아오게 만들었느냐 하면, 무수하게 많은 등장인물들이, 인생이 그렇듯 다 나름대로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는 것까지는 이해하겠지만 핀천 선생의 많은 등장인물들은 아버지 때부터 서로 얽히고설킨 내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 연루에 동참하지 못하는 인물들 역시 먹고, 마시고, 행위하고, 즐기고, 돈을 버는 일상을 일일이 다 소개해, 독자로 하여금 드디어 자신의 뇌 용량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양의 메모리를 쏟아내기 때문이다. 서두부터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결국엔 어느 한 사건이나 장면으로 엮이게 구성되었을 것이란 점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만, 엮이는 과정이 매우 복잡해, 일단 도입부에서 실타래가 한 번 엉크러졌다 하면 미노타우로스가 사는 미노스의 미궁에서 결코 빠져나오지 못한 채 결국 반인반수의 정찬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150쪽이 무슨 대수랴. 250쪽까지 읽었더라도 깨끗하게 포기하고 다시 제일 앞으로 돌아가 모자란 뇌 용량 대신 메모를 해가며 읽는 게 좋다면 그렇게 해야지. 어쨌건 나는 그렇게 했다. 그리하여 꼬박 8일이라는 날짜를 투자해 이제 막 읽기를 마치고, 완독을 자축하기 위해 피처럼 진한 와인 한 잔을 하려 했으나, 아직 오정도 되지 않아 축배는 저녁으로 미루고 독후감을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이 놀랍게도 토머스 핀천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핀천. 이 양반의 삶 자체가 대단히 특징적이어서 누군가 혹은 핀천 스스로 이이/자신의 일생을 소설로 써도 매우 재미있는 작품이 될 정도로 기발한 일생을 살고 있다. 덧니에 뻐드렁니를 합한 치아와 악골을 가진 작가에 대해, 나는 작가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심정에서 하나도 소개하지 않겠다. 작가는 ‘자기공개기피증’이라 역자 설순봉이 명명한 질환에 걸려 있어서 <중력의 무지개>로 큰 상을 받을 때에 이르러 열여덟 살 때 찍은 사진을 처음 공개한 이력이 있고, 심지어 신경질을 내며 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 하니 어찌 작가소개를 생략함이 예의가 아니겠는가.
  책은 1955년의 크리스마스이브에서 출발한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베니 프로페인. 슐레밀이자 요요인간이다. 슐레밀Schlemiel은 중동부 유럽에 살던 아쉬케나지 유대인들의 말인 이디시어에서 온 단어로, 일이 잘 꼬이는 불운한 인간이란 뜻이란다. 주변에 간혹 이런 사람들 보인다. 멀쩡하게 생기고 학력도 괜찮은데 이상하게 면접만 봤다하면 떨어지고, 가게만 차리면 망해먹는 사람들. 외가 쪽으로 당숙 되시는 분이 이런 부류였는데,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해 빌빌대다가 개인택시도 아니고 회사택시 운전하더니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연락도 안 된다. 멀쩡하고 허여멀겋게 잘 나게 생기기까지 했음에도. 이게 인생이지 뭐. 공부 잘 했다고 인생까지 잘 되면 재미없잖아. 물론 당하는 입장에서는 참담하겠지만.
  근데 이 슐레밀인 프로페인은 자신 스스로가 슐레밀인줄 안다. 그래서 그나마 다행이다. 미 해군에 입대해 구축함 USS스캐폴드 호의 승선원으로 있다가 말뚝 박는데 실패하고 제대해 줄곧 도로 인부로 일을 했다. 그러다가 이젠 길이라면 꼴도 보기 싫어 때려치우고 일 년 반 동안 미국 동해안을 요요처럼 오르락내리락 하는 바람에 ‘요요인간’이란 타이틀까지 차지했다. 어쨌든 첫 무대는 미국 버지니아 주 노포크 시에 있는 ‘세일러스 그레이브’라는 옥호의 술집. 프로페인이 승조원이었을 때 단골로 다니던 집으로 서빙하는 아가씨들 모두는 ‘비어트리스’ 단테 알리기에리에게 구원의 여신 역할을 했던 여인의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는 “모든 술집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비어트리스가 되어야 한다.”는 모토로 영업을 하는 비어트리스 버포 부인의 철학을 기원으로 한다. 그리하여 버포 부인은 발포 고무로 만든, 유방 모양의 맥주 빨아먹는 꼭지를 제작해 해군 월급날에 맞춰 오후 여덟 시부터 아홉 시까지 한 시간 동안 ‘수유시간’을 제정했는데, 이 발포 고무 맥주 빨개를 향해 몰려드는 수병들이 몇 백에 달해 근 백 대 일의 경쟁을 뚫어야 겨우 한 모금을 마시는 행운이 걸리는지라 월급날마다 싸움 그치지 않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왜 지금 소설 줄거리와 거의 상관이 없는 곁가지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게 책의 1장 몇 절에 소개하는 에피소드인데, 독자 입장에선 과연 비어트리스 버포 여사가 나중에 중요 인물로 등장할지, 안 할지 모르고, 매우 독창적인 캐릭터로 해군장화를 신은 키가 150센티미터 밖에 안 되는 악동, 풍치로 이를 전부 뽑고 (군인이니까)세금으로 새로 해 넣은 인조 이를 줄로 날카롭게 갈아 세일러스 그레이브에서 비어트리스들의 엉덩이를 깨무는 습관이 생긴 플로이 역시 나중에 중요 등장인물인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이나 행위가 재미있으니 기억하게 되며, 결국 이 딱 한 번의 등장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란 걸 알 때쯤엔 대신 다른 중요한 등장인물을 기억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길까, 안 생길까. 그건 당신이 직접 읽어보시고 판단하시라.
  프로페인은 술집에서 옛 동료이자 무단으로 외출 나온 피그 보딘을 만나 갑판장 호드 영감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호드 영감이 45세일 때 지중해, 시칠리아 섬에서 일곱 시 반 위치에 있는 몰타의 명망가 열여섯 살 아가씨 파올라 마이스트랄과 결혼을 해 미국으로 함께 온 일로 연결되고, 파올라가 호드 영감하고 별거에 들어갔으며 지금 세일러스 그레이브에서 비어트리스로 일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 사실은 나중에 중요한 것임이 드러나는데, 절반은 가톨릭이고 엄마가 유대인이라서 일관된 도덕관이 없는 프로페인이 어찌어찌 해서 파올라와 한 침대에 들었다가 관계를 맺지 못하고 눈 내리는 밤에 정처 없이 (남의)집을 나서 피그 보딘의 지저분한 집에서 숙박한 다음 뉴욕으로 흘러들어오게 된다. 그러니 적어도 피그 보딘과 파올라는 끝까지 주인공 프로페인의 곁을 지킨다는 거 아닌가. 물론 아직까지 독자는 파올라가 나중에 그렇게도 중요한 등장인물로 상향조정될지는 꿈에도 모르고 있을 터이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니 1901년생, 그러니까 언필칭 20세기 인간, 로버트 스텐슬. 아버지 시드니 스텐슬은 전직 영국 외무부 공무원이었다고 하나 사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만날 외국으로만 나가 다니는 동안 자신이 태어났고 자랐으며, 아버지는 죽었다. 현금이나 부동산 재산 하나 남기지 않고. 혹시 모르지 엄마가 다 떼어 먹었는지. 이 로버트 스텐슬을 프로페인과 연결시켜주기 위해 핀천은 이들 가운데 부잣집 따님이자 털털하고 완전 서민적 풍모로 무장한 의리의 여인 레이철을 등장시킨다. 레이철은 TV 시리즈 각본을 쓰는 라울, 산발적으로 작업을 하는 화가 슬램, 기타 연주자이자 진보적인 포크 송을 노래하는 멜빈 등과 함께 뉴욕의 젊은 예술가들과 ‘영혼의 동반’을 하고 있으니 이 동아리를 ‘모든 병든 족속들’이라 칭했다. 이 족속 가운데 가장 연장자로 스텐슬이 들어온다. 그의 타이틀은 ‘세계적인 모헙가.’
  이 때쯤, 혹은 책을 열 때부터 “V."가 무엇인지 독자는 V.의 정체 찾기에 골몰하고 있을 듯하다. 프로페인은 V.와 거의 관련이 없고 이 스텐슬, 아들인 로버트 스텐슬이 V.와 더욱 밀접한데, 그게 뭘까. 나는 첫 장부터 V.의 정체에 거의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서 심지어 ‘세일러스 그레이브’의 여급들 이름으로 나온 베아트리스도 혹시 Beatrice가 아닌 Veartice, 즉 ‘V.’ 아닐까? 했을 정도다. 그건 아닌 게 확실하고, 그럼 파올라가 살던 몰타의 수도 발레타Valleta? 그러나 V.에 대한 최초의 문자적 기록은 로버트의 아버지 시드니가 1899년 4월에 피렌체에서 남긴 기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V.의 배후와 내부에는 우리 중 누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비밀이 숨어 있다. 그것은 ‘누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올바를 것이다. 그녀는 과연 무엇일까? 제발 내가 그 답을 적지 않아도 되기를 기원할 뿐이다. 이 기록에서나 공적인 기록에서 거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아도 되기를 바란다.”
  이것을 보면 V.가 분명히 ‘그녀’라고 되어 있으니 한 여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서양 사람들, 특히 영국인이 여인을 ‘무엇’이라고 했을까? 구체적으로 ‘빅토리아Victoria’라는 이름의 여성을 가리키는데 정말 이 여자가 V. 맞아? 스텐슬이 생각하는 V.로 말할 거 같으면, 난봉꾼에게는 벌린 다리가 V.이고, 조류학자에겐 이동하는 새의 무리가 V.이며, 촬영기사에겐 쓸만한 기계, 예를 들어 잘 빠진 삼각대 다리가 V. 아니겠느냐는 건데 혹시 V.라는 것이 특정한 형태를 갖지 않은 <황금가지>나 <백색여신>같은 정신적 모험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애매한 생각도 가지고 있다. 물론 끝까지 읽어보면 핀천이 이렇게 쓴 게 틀림없이 독자를 헛갈리게 만들 의도였음이 드러나긴 하지만, 아 그래도 도대체 V.가 뭐냐고! 아니면 누구냐고!
  글쎄. 그걸 알려드리면 곤란하지 않을까? 8백 페이지에 달하며, 읽기가 상당히 난감해 지독하게 진도가 나가지 않는 책을 읽은 보람이 없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안 알려드림.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oolcat329 2020-09-20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어떤 글일지 상상이 안가지만 이 책은 v의 정체를 밝혀내는게 목표인가보네요. 정자세로 8일 동안 읽으셨는데 저라도 안 가르쳐 줄거같아요. 근데 읽을 엄두가 안나니 영영 v는 알 수 없네요.ㅎㅎ

Falstaff 2020-09-20 16:56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절대 추천하지 않을 겁니다. 그냥 핀천이 좋은 몇 몇 이상한 독자들은 즐길 수 있을까요? 하하하...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잠자냥 2020-09-20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어떤 대작을 읽으시기에 리뷰가 뜸한가 했더니 이 책을 읽고 계셨군요! ㅎㅎ 저도 이 책, 올해 안에는 읽는 게 목표입니다.

Falstaff 2020-09-20 16:56   좋아요 1 | URL
에휴,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이 이 책에 비하면 이도 안 난 수준이더라고요. 포스트 모던? 염병이나 하면 좋겠어요. ㅋㅋㅋㅋㅋ

xiwangmoo 2024-10-03 1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장부터 핀천 애호가답네요. 끝까지 읽으셨다는데 경외감이.....

Falstaff 2024-10-04 04:43   좋아요 0 | URL
고비만 넘기면 훅 빨려 들어갑니다. 도전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친애하는 서재 친구 hnine 님께서 내소사에 다녀오셨다는 글을 읽고, 퍼뜩 생각나는 잡문이 있었다.  맞아, 나도 내소사에 몇 번 다녀왔고 한 25년 전에 쓴 짧은 기행문도 있어! 그걸 창피하나마 소개한다. 아래 사진 역시 hnine 님의 서재에서 허락도 안 받고 쌔벼온 거다. hnine 님의 하해와 같은 이해심을 바랄 밖에.

 

 

 

 

 

내소사, 시간과 관능의 사이 



  만일, 만에 하나, 절간을 여인네에 비유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내소사는 더할 수 없이 암컷스런 여인이다. 내소사에 들어 절간을 한 번 휘둘러보면, 평소 사모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던 여인이 우연한 기회에 은쟁반 가득 주절이 주절이 달린 청포도 송이를 내 무릎 앞에 내려놓을 때, 단정하지만 풍성한 여름 옷섶 사이로 언뜻 언뜻 내비치는 뽀얀 젖가슴을 슬그머니 쳐다보면서 어뜩하니 휙 돌아가는 어질머리와 가슴의 두방망이질을, 똑 그만큼의 고양된 감정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할 만큼 새침해서 그 많은 백야(白夜)를 보내게 만들었던 여인네가 눈을 내리깔고 다소곳이, 그러나 의도적이기 때문에 결코 다소곳하지 않게시리 젖가슴을 슬쩍 제공하는 모습을.
  천왕문에 기대 서서 절마당과 종각과 대웅전을 거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눈길을 찬찬히 돌리면 우선 착 가라앉은 무채(無彩)로 인하여 이 절집이 모시 옷을 잘 차려입은 여인의 모습을 하고 차분하니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리를 옮겨 대웅전에 다가가서 유명한 이 절집의 꽃잎 문양 문살, 그 옛스럽게 창연, 아니, 처연한 문살을 쓰다듬다가 문득 천정을 올려다보면, 이 절의 무채는 누백년의 시간이 단청을 거의 벗겨내 이제 알몸의 나무만 남아있어서인 것을 알게된다. 대웅전 내부에는 옛적의 화려했던 금가루 단청이 아직 군데군데 남아 있어 호사했던 지난 날을 짐작하거라 하지만, 어디 옛적의 금가루 호사가 누백년 지난 다음 켜켜이 우려져 나오는 시간의 고즈넉과 비교가 될까.
  아, 세월이 흐르면서 추해지는 것은 사람살이 뿐이구나. 뙤약볕 떨어지는 절마당에 서서 고개를 들어 멀찍하니 바라보면, 절을 둘러싸고 있는 산자락들, 바람과 별빛과 안개에 닳고 닳아 이제 부드러운 곡선만 남고, 그것도 모자라 당초에는 땅 속 깊은 곳에 있었던 바위들이 무른 흙이 닳아 없어진 곳으로 군데군데 부드럽게 솟아, 산자락이 마치 꽃잎 모양으로 벌려있는 모습이 시간의 영광을 위해 꽃으로 복무하길 기꺼워하는 듯하다. 산이건 절집이건 시간은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어 가꾸길 마다하지 않고 그리하여 이 무채의 절집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내밀해질 수 있었을 터이다.
  장인의 손길은 여기에도 있다. 큰 목수도 천년 전 변산과 바닷가에서 세월의 부드러운 손길을, 그 내밀함을 알았을 터. 그는 마침내 꽃잎으로 벌어진 산자락 사이에 용의 눈을 그려넣듯 난만한 다산성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절을 둘러싸고 있는 산자락, 대웅전과 설선당, 절마당의 느티나무와 보리수. 넓은, 그러나 결코 넓어보이지 않는 절터에 적절히 자리잡은 옹기종기함, 큰 목수는 요조하면서도 난만하고, 정숙한 가운데의 다산성이라는 절명의 절창을 하고 세상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는 얼마나 행복한가. 한 번 한 번의 망치질, 대패질을 목숨을 걸고 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천년 후의 나그네가 그의 손길을, 그의 절창을 쓰다듬으면서, 바라보면서 한여름 팔뚝에 소름까지 돋아내며 감동해마지않으니.
  다시 천왕문에 돌아와 앉아 절마당을 바라보노라니 나도 이왕 죽는다면 일생의 절창을 한 번 쏟아내고, ‘내소사 앞마당에 수국으로 피어나 / 꽃잎이 질 때까지 묵언정진 하고나서’¹더 노래할 건덕지 없는 낳고 죽는 고리를 이제는 툭 끊고 싶어진다.
  내소사는 꽃이다. 하필이면 고기압이라서 청명한 하늘이 보장된다면, 그런 날의 내소사는 꽃잎을 한껏 젖히고 흰 꽃잎으로 자신이 요조함을 시위하며, 아무 말 하지 않고 자랑스레 자신의 음부를 활짝 펴보이는 그런 꽃이다. 푸른 공기가 움직일 때마다 자신의 몸냄새를 조금 조금씩 실어보내면서도 결코 그런 태를 내지 않는 꽃, 진하지 않은 몸냄새만으로도 온갖 이야기를 조근조근하게 펼치는 꽃이다.



 ※  ¹: 정호승 시집 「사랑하다 죽어버려라」가운데 ‘희방폭포’에서 따옴. 원작은 ‘희방사 앞마당’.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20-09-20 0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Falstaff님께서 자그마치 25년전 기록을 찾아 올리신 글을 읽을 수 있으니, 제가 내소사 다녀온 사진 몇장이나마 올린 보람이 더해졌습니다. 이런 글은 맘먹고 쓰신 글 맞죠? 얼마나 공들여 쓰셨는지 한줄 한줄마다 느껴집니다. 서정주 시인의 시가 문득 연상되기도 하고요.
음, 몇번 더 읽어봐야겠습니다.

Falstaff 2021-09-19 11:07   좋아요 0 | URL
먼저.... 사진 무단 도용, 죄송합니다. ^^;;
사진 보자마자 반가운 김에 덜컥 올리긴 올렸는데 멋만 부린 조잡한 글을 나인 님께서 이리 상찬을 해주시니, 솔직하게 말씀드려, 매우 기분이 좋네요. 하하하....
 
[수입] 림스키 코르사코프 : '5월의 밤'
Relief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 뭐 지휘 좋고, 연주 좋고, 성악가들도 좋은 빼어난 녹음입니다. 음질이 약간 빠지고, 리브레토가 러시아 말로만 있어서 구체적 묘사를 알 수 없어 별 점 하나 뺐습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선율감이야 말로 하면 뭐하겠습니까.



  이 서정적이고 낭만스러운 오페라는 고골의 <오월의 밤>에서 영감을 얻어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직접 대본을 엮었다고 한다. 그가 훗날 자신의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나중에 아내가 될 나데트다 포우르골드, 라는 아가씨에게 청혼을 한 날 함께 고골리의 작품을 읽었으며, 그 순간 이 작품을 새로 구성하여 오페라로 만드리라는 영감에 사로 잡혔노라고 했다니 작곡가 자신의 일생에서도 가장 로맨틱한 시절에, 가장 로맨틱한 감정으로 작곡한 것이 바로 이 오페라가 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감상자는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직접 썼다는 대본이 얼마나 보고 싶겠는가. 근데 함께 들어있는 리브레토가 불행하게도 러시아 어로만 적혀있다. 거기다가 나는 당연하게도 러시아 언어를 해독할줄 모른다. 노래 소리에 따라갈 정도 밖엔 안되는데....  이런.

 

  하여간 막이 올라간다. 당연하다. 막이 오르지도 않고 오페라를 시작할 수 없으니까.

  그러면 일련의 러시아 오페라가 그러하듯이 떠들썩하게 동네 젊은이들이 모여 춤을 추며 노래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절 오월을 맞아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또다른 작품 <눈 아가씨>에서도 5월을 사람이나 곡식이나 간에 씨를 뿌리는 계절로 설정해놓았다는 거. 추운 나라라서 5월 자체를 찬미했으며 그 전통은 동구의 오페라에서 보듯이 남근을 상징하는 듯한 깃대를 세워놓고 그 꼭대기 까지 빨리 올라가는 총각한테 제일 아름다운 아가씨가 상을 주는 메이 폴, 그리고 메이 퀸을.

  젊은 사람들이 모두 모여 즐거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지만 한 청년 만이 이들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고독을 질겅질겅 씹고 있으니, 바로 오늘의 주인공 레브코 되시겠다. 청년 레브코는 동네의 영주의 외아들이다. 가만히 보니 혼자서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듯하다. 누구 생각하느냐고? 여인숙을 운영하는 아름다운 아가씨 한나를.

  원래 오페라에서 뭐 하나를 깊이 깊이 생각하고 있으면 아리아 하나는 나오는 법이다. 그래서 오페라 공식에 충실한 부자집 외동아들 레브코는 우크라이나의 밤과 별빛을 반가이 맞는 아름다움에 관해, 꿈결같은 호수에서 전해오는 부드러운 속삭임에 관해 아리아를 한 방 때린다.

  아.. 이럴 때 아쉽다. 그 대사를 좀 알았으면 좋겠구만서도....

  아리아가 끝날 때 까지 무대 뒤에서 끈질기게 참고 또 참았던 한나, 드디어 무대로 뛰어 들어오면서 레브코의 품에 납짝 안긴다. 그리하여 이중창, 정말 아름다운 사랑의 이중창이 쏟아지는데,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지 몰라서 안타깝기는 이하동문.

  그저 수시로 한나가 뱉는 말, 루블류 테뱌.... 이 말을 우리말로 하면 "난 겁나게 당신을 사랑허요!"라서, 아, 시방 서로가 너무 사랑해 죽고 못살겠다는 이중창을 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할 뿐이지, 내용을 요약해놓은 짧은 글에서도 이 이중창에 관해선 꿀먹은 벙어리다.

 

  이중창이 끝나면 잠시 한 숨을 돌린다. 그러다가 한나가 레브코한테 조르기를, 호숫가 언덕 위에 음산하게 자리잡은 성을 가리키면서, 저 성에 대해서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 이야기나 좀 해달라고 조른다. 레브코는 그 무서운 얘길 왜 들으려느냐고, 넌 그 얘기를 들으면 무서워 오줌을 질금거릴 거라고 여간해서는 말해주지 않으려 한다.

  바보같은 레브코. 무서워 하는 척하면서 공식적으로 레브코 품에 한 번 더 안기려는 한나의 깊은 속을 헤아리지 못하겠다니, 그래가지고 연애를 하겠다고?

  원래 생각보다 질긴 것이 여자 고집이고, 세상에 여자 고집을 이기는 지극히 극소수의 남자를 영웅이라고 부르는데, 우리의 주인공 레브코가 영웅의 반열에 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그리하여 전설을 이야기해주기 바로 전까지의 씬.

 

   근데 오페라의 대본은 그리 훌륭한 편이 되지는 못한다.

  레브코가 한나한테 전설 이야기를 하는 거, 내용이 이렇다.

  그 성에는 홀아비가 어여쁜 딸 하나와 둘이 살고 있었다. 근데 계모가 들어왔으니 바로 그 계모가 마녀였던 거다. 계모는 한나를 지극히 미워하여 기어코 집에서 쫓아내 버린다. 딸은 슬픔에 겨워 물에 빠져 죽으려고 호수에 몸을 던졌지만, 그녀의 영혼은 하늘로 귀천하지 못하고 호수의 인어로 변해버리고 만다.

  그녀의 슬픈 이야기를 들은 인어 친구들이 마녀 계모를 꼬드겨 호숫가로 나오게 했고 물에다 빠뜨려 죽이려는데, 그 순간 마녀인 계모는 마법을 사용해 죽기 바로 전에 스스로도 인어가 되어버렸다. 근데 마법이 어찌된 일인지, 아가씨 인어는 계모 마녀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게 만들어 계모를 인어 사회에서 추방할 수도 없어서 오늘 이때 까지 계모 마녀의 끈질긴 복수에 시달리고 있다는 거다.

 
  거기다가 이 여관 주인 아가씨 한나를 사랑하는 남자가 하나 더 있다. 누구냐 하면, 바로 레브코의 아빠, 영주님이다. 영주님 또한 홀아비로 새장가를 들려고 하는데 그 상대로 바로 한나를 찍고 있던 참이다. 영주님은 그러나 자기 아들하고 한나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절대로 한나와 아들을 짝지워주지 않으려는 참이다. 영주님이 젊은이들의 축제판에 나타나서 한나한테 하는 꼴을 옆에서 보고 있던 레브코는 아버지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으리라고 작심을 한다.

  어느날 밤에 친구들하고 모여서 어깨에 큼지막한 도리깨를 들고 자기 집엘 쳐들어가 온갖 난장판을 부려버린다. 하지만 그 사건의 주범이 레브코라는 걸 안 영주님은 자기 아들이라도 파렴치한 짓을 했으니 찾아내 혼구멍을 내주리라 작심을 하게 된다.

  레브코가 호수 옆에 도망가서 한 번 더 깊은 시름을 하는데, 인어들이 나타나 군무를 추는 와중에 전설에서 나온 아가씨 인어가 레브코 한테 마녀 계모가 변한 인어를 물리쳐달라고 부탁을 한다. 레브코가 척 보니, 이상하게 보이는 인어가 한 마리 있는지라 그 인어를 손가락질하며 꾸짖는 순간 마녀 인어는 호수 밑에 쳐박혀 싱겁게 죽고 만다.

  그랬더니 은혜를 갚는답시고 아가씨 인어가 레브코한테 편지 한 장을 쥐어주고는 너네 아빠한테 보이라고 한다. 레브코가 편지를 들고 집구석으로 들어가자마자 아버지가 크게 지랄을 하면서 저놈을 당장 포박하덜 못할꼬! 난리를 피우는 순간, 레브코가 편지를 펼쳐보이니 뭐라고 씌여있느냐 하면,

  바로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 보낸 건데, "이 편질 읽자마자 작은 고을의 수령은 편지를 읽자마자 얼른 레브코와 한나를 결혼시켜버려라!"

  그리하여 레브코와 한나는 남은 세월 동안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다는 내용.

 

 근데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을까? 영주님 아드님하고 여관집 딸이? 봉건시대에 말이지. 하여간 그건 나중 일이고 작품의 끝은 그랬다....는 말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보 대산세계문학총서 159
엔도 슈사쿠 지음, 김승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다작으로 이름이 난 엔도의 책은 두 권밖에 읽어보지 못했지만, 종교에 관한 담론을 거북하게 여기는 내가 읽기에도 이이의 작품 속에 함의되어 있는 기독교는 별 부담 없이 읽는다. 기독교 소설이라면 학을 떼는 증상은 이청준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를 다 읽고 책을 덮은 즉시 생긴 거 같다. <당신들의 천국>에서 기독교적인 취향은 조금은 알아봤지만, 이청준이 누군가. 가히 20세기 후반의 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해도 시비 걸만 한 사람 한 명 없을 대가 수준이잖은가 말이지. 그런 이가 <낮은 데로....>에서 그냥 노골적으로 자신의 종교를 찬양하는데, 읽긴 다 읽었지만, 이후 우리나라 기독교 문학은 완전 손절했다.
  근데 엔도를 읽었느냐고? 그렇다. 제일 처음에 <깊은 강>을 읽었다. 책을 사서 읽을 때도 분명히 삶과 죽음과 영혼과 위로와 안식과 용서와 화해와 그리움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작가가 일본의 대표적인 기독교 작가라는 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글 속에 감화, 감동이 가득했더란 것. 열두 살 때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귀의하고, 스물일곱 살 때, 정작 유럽인들은 기독교와 결별하기 시작할 무렵 프랑스로 유학해 현대 프랑스 가톨릭 문학을 공부한 이력이 있는 작가는, 기독교에 아는 바가 없는 검은 양으로서는 도무지 알아챌 수 없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 같은 것인지 뭔지, 하여튼 일찍이 나를 질리게 했던 이청준과는 많이 다른 방식으로 “즐길 수 있는” 기독교적 체험을 하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내게 두 번째 엔도였던 <바다와 독약>을 고를 때 기꺼운 마음으로 책을 사 읽게 해주었다. 그리고 역시 책에 만족했다.
  이러니 이번에 대산세계문학총서에서 낸 <바보>를 어찌 읽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겠는가 말이지. 엔도가 쓴 이 책의 중요한 출연진으로 또 다른 엔도가 나온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호시노 파派 야쿠자 그룹에서 살인청부업자로 활약하고 있는 아직은 근육질인 결핵환자. 그에 관해서는 이 독후감에 등장하지 않을 것이니 그만 넘어가고 본격적으로 작품 이야기를 해보자.
  프랑스 남동부, 이탈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알프스 지역인 사부아 출신으로 대강 1930년대 초반 출생인 가스통 보나파르트라는 얼굴이 긴 거구의 남자가 있었다. 원래 프랑스 사람들이라면 저 유명한 갈리아의 대 로마 독립전쟁 영웅 베르생제토릭스처럼 늠름한 기상과 기골이 장대한 족속이었으나,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수없이 많은 전쟁을 겪느라 씨알 굵은 것들은 싹 죽어 자빠지고 자잘한 것들만 남아, 인구 유지를 위해 그거만 밝히는 현대의 프랑스 남자들이 발생했다는, 불문과 교수들의 발생학적 의견도 있었던 바이지만, 그래도 같은 프랑스 인들이 보더라도 커다란 덩치의 사내의 집안 내력을 보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마리아 발레프스카 부인 사이의 소생이 이 가문의 시작이라니 산 같은 가스통의 덩치 하나는 땅딸보 나폴레옹에서 물려받은 건 아닌 게 분명한 듯하다.
  그런데, 작품의 제목 ‘바보’는 일본말로 “おべカさん:오바카상”이란다. 역자의 해설을 보면 ‘오바카상’은 바보라는 뜻의 ‘바카’에다 존칭 ‘오’를 앞에다 붙이고, 뒤엔 ‘님’ 정도의 경칭인 ‘상’을 붙인 것으로, 우리말 ‘바보’, 청맹과니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좋기만 해서 늘 손해만 보는 이” 또는 “어머니가 어리숙해 보이는 자기 아이가 귀여운 나머지 부르는 경우”에 쓰는 말로, 경멸의 명칭이 아니라 애정과 안쓰러움을 품고 있다고 한다. 뒤표지에서도 이 가스통 보나파르트를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에 나오는 미쉬낀 공작을 연상시킨다고 했을 뿐, 지적장애를 가진 또는 지적장애에 준하는 사람을 일컫지는 않는다.
  가스통 보나파르트는 어려서부터 덩치만 컸지 형제들, 친구들 사이에서 언제나 웃음거리가 되거나 바보 취급을 받는 데 익숙한 인물. 사부아 지방에선 가스통 같은 친구들을 ‘포플러나무’라고 호칭했으니, 포플러의 최대 활용처가 성냥개비의 재료일 뿐으로 결코 재목이나 집의 기둥 같은 곳에는 쓸 수 없는, 허우대만 좋은 나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스통 스스로는 지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다 나폴레옹처럼 영리하고 강하지는 않을 것이며, 그런 사람들만 위한 곳도 아닐 터이라서,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약하고 슬픈 사람에게도 무언가 보람 있는 삶의 방법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런 그가 왜 일본에 그토록 가고 싶었는지는 모른다. 독자들도 모른 채 끝난다. 하지만 일찍이 포교신학교(布敎神學校)애서 낙제를 세 번이나 할 정도로 나쁜 머리를 가지고도 일본을 향한 꿈을 꺾지 않아, 끈으로 주둥이를 묶는 자루 같이 생긴 가방 하나를 메고 말레이 반도의 싱가포르에서, 8년 전에 펜팔로 알게 된 일본인 남자 다카모리에게 프랑스 선적 여행선 ‘베트남 호’를 타고 20일 후에 요코하마 항에 도착한다는 두툼한 편지를 보내, 이를 일요일 아침, 똑똑한 여동생 도모에가 달달한 늦잠을 즐기고 있는 다카모리를 깨워 이를 전해주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이 작품은 1959년 신문에 연재했던 소설이라 한다. 1959년에 중산층 정도의 삶을 살던 주인공의 집에도 라디오로 뉴스를 들을 뿐, TV가 없던 시절이니 신문소설의 위상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주말 드라마 정도로 장안의 화재를 몰고 다닐 수 있었을 것. 그러니 엔도의 <바보>는 앞서 읽었던 <깊은 강>이나 <바다와 독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엔도 나름의 경쾌한 걸음을 걸으며 시작한다.
  기분파인 오빠 다카모리와 현실파 동생 도모에가 요코하마 항에서 기다리고 기다려도 나오지 않아 결국 배에 직접 들어가 가스통을 찾아보니 4등실, 배 밑창에 간단한 메트를 깔고 화장실 냄새가 풀풀 풍기는 곳에서 깡똥한 바지를 입은 거구의 가스통을 찾아, 그를 데리고 점심을 먹으로 초밥집에 가는 장면이 초장에 나온다. 가스통이 너저분한 가방에서 마르세유에서 일본인 선원에게서 얻은 ‘일본식 냅킨’을 꺼내 목에 척 걸치는 순간, 남매를 제외한 식당의 모든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렸으니, 그게 냅킨이 아니라, 예전 일본 남자들이 사타구니를 가리던 훈도시였던 거다.
  어머니와 도모에 등 집안의 여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장인 다카모리의 주장에 의하여 홈스테이를 하게 된 가스통은 도쿄 관광을 하라고 해도 그저 사찰 한 곳에 앉아 새들과 개와 아이들을 구경할 뿐, 도쿄 타워도, 가마쿠라의 대불大佛도 도무지 구경하려 하지 않는다. 왜 왔을까? 그는 결코 자신이 왜 일본에 왔는지 말하지 않고, 물을 때마다 “네?” 또는 “네에?” 하고 반문만 할 따름이다. 일주일 후, 가스통은 다카모리의 집에서 나가기로 했다. 그리하여 이 집에 들어올 때 자신을 따라왔던 늙은 떠돌이 개와 함께 홀연히 도쿄의 시내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한 밤에 도쿄의 신주쿠 방면으로 접어들게 된 가스통은 일본의 온갖 하층 시민들, 하층도 하층 나름인데, 가장 낮은 쪽에 있는 사람들과 접촉을 시작해, 매춘부, 이들에게 성을 사는 남자들, 벌집 같은 여인숙 등을 경험하며 매춘부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절도에 자신도 모른 채 연루되기도 하고, 매춘부들에게 도움을 받아 주린 배를 채우기도 하고, 전직 교장선생이었다고 주장하는 점쟁이 노인의 방에서 이와 벼룩에 물려가며 밤을 보내기도 한다.
  이렇게 시간은 간다. 점쟁이 노인의 옛 제자가 저 위에서 말한 엔도. 작가와 같은 이름의 폐병쟁이 살인청부업자. 결국 이자와 맺어져 또다시 도쿄를 떠나 북서쪽 산골로 향하게 되는데, 그는 과연 누구일지, 이 선량한 바보를 통해 어떤 아름다움을 소개하기 위해 엔도 슈사쿠는 지중해와 수에즈 운하, 홍해, 인도양, 태평양을 거쳐 프랑스 사람을 도쿄에까지 끌어들이게 되었는지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이니까, 당신이 직접 확인해보시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음. 나는, 세상은 결코, 결코 이렇게 선량하게 따뜻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꿈은 그냥 꿈일 때가 제일 아름다운 법이라서.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0-09-14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폴스타프 님 이거 리뷰 제목이 너무 시(詩) 아닙니까!
˝알프스에서 막 도착한 포플러나무˝라니........

Falstaff 2020-09-14 11:0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근데 맞잖아요.

coolcat329 2020-09-14 14: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 가스통이란 인물이 <깊은 강>에 나오는 병원 자원 봉사자 가스통하고 굉장히 비슷하네요?그 가스통도 병원에서 약간 바보 취급도 받고 놀림도 당하면서 환자들에게 위로를 주는데, 같은 인물은 아니겠죠?

Falstaff 2020-09-14 14:34   좋아요 2 | URL
아, <깊은 강>에서도 가스통이 나오나요? 읽은지 오래라 기억나지 않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요. <바보>의 가스통도 프랑스에서라기보다 싱가폴에서 출발했으니 오기 전에 인도에 들렀을 수도.... 뭐 걍 짐작, 생각입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0-09-14 15:3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인도에 들른 포플러나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0-09-14 15:5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뭐 드릴 말씀이 없네요. 크... 1:0 졌습니다.

coolcat329 2020-09-14 15: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일본 병원에서 자원봉사자로 나오는데, 스쳐가듯 나오는 인물이지만 좀 신비스러운 데가 있네요.태평양전쟁에서 인육 먹고 괴로워하는 친구 마지막 가는길 함께 해주고 홀연 사라지거든요.
 
영웅들의 꿈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네 번째 읽은 ABC(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책. 카사레스는 스스로 ABC를 써서 서명한다. 그동안 읽은 책이 차례로 <모렐의 발명>, 단편집 두 권 《러시아 인형》과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모렐의 발명>도 해설까지 합해 187쪽에 불과해 장편이라고 하기는 좀 머쓱한 측면이 있는데, ABC하고 친구로 지냈던 보르헤스까지 합해 봐도, 이런 장르, 나는 이런 종류의 작품을 “아몰랑 주의”라고 하는 바, 아몰랑 소설의 형식을 가지고 이 책처럼 작가 서문과 본문까지 근 400쪽에 이르는 긴 글을 쓸 수 있을 수 있을지도, 그걸 또 내가 읽을지도 몰랐다. 솔직히 말해 <모렐의 발명>도 그렇고 단편 작품들도 그렇고 큰 재미를 보지 못했던 관계로, 이 책을 사기로 결정한 것도 나름대로 결심을 하고, ABC하고 좀 친해질 수 있으려나, 기대를 담았던 것인데, 다행스럽다. 어느 정도 화해를 한 거 같다. 흠. 이 말을 더 쉽게 하면, 여태까지 읽은 ABC보다 훨씬 이해하기 수월했다는 뜻도 될까? 아마 그럴 거다.
  ABC라면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 멕시코의 룰포, 쿠바의 카르펜티에르(!)와 더불어 두 번 이야기하면 입 아픈 라틴 아메리카의 대표적인 붐 문학의 선구자. 그리하여 ABC 개인에 관한 건 그냥 넘어가고 곧바로 책 이야기를 하자.
  짧은 장편 <모렐의 발명>과 단편들을 읽으면서 웬만큼 난감했던 건, 작품이 짧다보니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걸 더 압축해야 했을 터이고,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암호풀이에 더 골몰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번엔 호흡을 길게 하니까 거의 끝부분에 가서 작가 스스로 마술적인 광경을 시작한다고 엄포를 놓을 때도 앞에서 뿌려놓은 이삭들을 잘 주워 모았다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충분히 포착할 수 있을 법하다. 문제의 마술적 광경에 관한 엄포 바로 이전에 가볍게, “시간은 한 번 지나가는 것”이란 요지로 이야기하지만, 그리하여 독자는 분명히 지금 한 이 말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란 짐작을 하기만 한다면, 이후 전개되는 소설의 절정을 별로 어려움 없이 즐길 수 있다. 그렇다. 즐길 수 있다. 물론 오르가슴 적 카타르시스까지는 안 된다. 그래도 ABC를 읽으면서 애초에 그런 것까지 기대하지는 않을 터이니 이 정도면 만족할 수 있을 터.
  때는 1927년. 사흘 낮, 사흘 밤에 걸친 카니발이 벌어지는 시기. 주인공인 21세 청년 에밀리오 가우나. 장소는 ‘좋은 환경’이란 뜻을 가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비아우르키사. 에밀리오 가우나가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고 있는데 이발사 마산토니오가 경마 이야기를 하면서 이번 경마에 ‘별똥별’이란 망아지가 굉장히 유력하다고 하도 잔소리를 하는 바람에 수중에 있던 35페소를 걸 수밖에 없었는데, 정말로 별똥별이 별똥별 떨어지는 속도로 달려주는 바람에 35페소를 던져 1,068페소 30센타보를 벌게 된다. 여기서 68페소 30센타보는 이발사에게 팁 또는 사례금으로 주고 주머니에 1천 페소를 넣은 가우나. 이것으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친구들하고 카니발에 가서 몽땅 써버리겠다고 마음먹는다.
  다섯 명의 친구들. 라르센은 선한 마음으로 가우나와 진실한 우정을 쌓는 인물이고 이런 성향은 책이 끝날 때까지 유지된다. 그러나 나머지 것들, 소위 영웅들은 발레르가 박사라는 사람을 마치 중심으로 단단하게 뭉쳐있는 똘마니에 불과하다는 것이 책을 읽어가면서 드러나지만, 이렇게 힌트를 주는 것도 작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조심스럽다. 발레르가 박사라는 인물로 말할 것 같으면, 평소 가우나가 꿈꾸었던 이상적이지만 결코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던 미래를 구현해가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아 가우나 역시 이들 멤버의 일원으로 편입하게 된다. 그래 이들 그룹은 ‘발레르가 박사와 여섯 명의 청년들’로 구성된다.
  이들의 아지트는 바야우르키사의 카페 ‘플라텐세’. 친구들이 모여 가우나의 천 페소 탕진 계획을 듣고 하는 말 좀 보자.
  마이다나 : 기차역에 신문, 잡지 파는 가판대가 마침 매물로 나왔으니 사서 운영을 해라. 비록 다 허물어진 기차역이라 사람도 별로 없지만.
  페고라로 : 북쪽 지역으로 가서 전화 한 대만 놓으면 되니까 사무실을 내고 직업소개소를 차려라.
  안투네스 : 자기 아버지한테 빌려주면 한 달에 네 배, 즉 4천 페소로 불려줄 것이다.
  이렇게 우왕좌왕 하다가 결론으로 발레르가 박사에게 가서 물어보기로 하니, 박사 왈, 카니발에 가서 몽땅 써버리는 것이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노름으로 번 돈은 자비를 베풀어야 마땅하다고 조언을 해 그렇게 결정을 해버린다.
  그래 당장 내일 카니발이 시작되니까, 오늘 밤에 벌써 불 끄고 잠든 우리의 대머리 이발사, 별똥별을 소개해준 마산토니오를 두드려 깨워 친구들과 함께 밤기차를 타고 비야데보토로 향한다. 여기에 빠진 딱 한 명의 친구, 라르센. 만일 주인공 가우나에 모종의 위험이 가까이 온다면 기꺼이 그를 위해 도와줄 수 있는 친구는 카니발 행을 포기했고, 나머지만 해적 차림을 하고 행진하는 가장행렬에 합세해 클럽, 카페 등을 전전하며 술독에 빠진다. 물론 비용 전부는 가우나의 천 페소로 지불하고. 이들이 먹고 마시고 처음 만난 여자들에게 술을 사주고 하는 것을 보니 1927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천 페소가 지금 우리 돈으로 천만 원 이상 가는 것 같다.
  술 잘 마시고 이곳저곳에서 잘 놀았던 것 같은데 이발사 마산토니오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은 얼른,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집에 가야겠다고, 자고 다음 날 가면 아내에게 큰 경을 치게 될 거라고 하더니 어느 순간 대열에서 사라져버린다. 하여간 이들은 카페, 거의 카바레 수준의 카페 ‘아르메논빌’에 입장해 가면무도에 참석하는데, 결정적으로 가우나의 눈에 띄는 포대 같은 옷을 입은 가면 쓴 아가씨. 그는 아가씨한테 접근해 춤을 추다가 당시 가끔 그렇게 했듯이 음악의 절반쯤 지난 후 다른 남자에게 파트너를 인계할 수밖에 없었다. 음악이 끝난 후 그녀를 찾아 카페를 뒤지다가 잔뜩 술이 취한 상태에서 술값을 내고 밖으로 나갔고, 눈을 떠 깨질 것 같이 아픈 머리통을 흔들어보니 벙어리 남자와 세탁부인 듯한 여자가 자신을 보살피고 있었단다. 이 벙어리는 산티아고라는 이름의 건장한 체격으로 5부 리그 축구팀의 관리인으로 있다고 한다. 그런데 가우나는 밤 동안 벌어진 일을 전혀 기억할 수 없다.
  이 사육제의 마지막 날 밤, 우리의 에밀리오 가우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가우나는 사육제가 끝나서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바야우르키사에 돌아와 직장인 람브루스키나 정비소에 다니며 현명한 마법사 타보아다에게 점을 봐, “운명은 강물처럼 미래로 흘러가지. 미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야. 거기서 자네는 지난주에 죽었고, 거기서 영원히 살고 있네. 거기서 자네는 이성적인 인간이 되었고 또한 발레르가가 되었네.”라는 희한한 말도 듣는다. 가우나를 비유하자면 이카타에 돌아온 율리시스나 황금사과를 떠올리는 이아손처럼 무언가 늘 그리워하며 상실감으로 가득한 인간이라나? 이게 무슨 뜻일까. 당연히 가우나도 물어본다. 그러나 현명한 마법사는, 예언할 수 있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며 복채 5페소를 요구하고 입을 다문다. 그래도 가우나는 마법사의 집에서 이 어리둥절한 말 외에도 얻은 것이 있으니, 마법사의 딸 클라라. 둘이 사랑하게 되느냐고? 물론이지. 달빛이 교교한 새해 첫날, 남반구니까 한여름 밤, 나신으로 강물에 몸을 담고 사랑을 나눈 후 결혼까지 하는데 뭘.
  거의 짐작은 하시겠지. 이 작품의 결말은 가우나의 잃어버린 사흘째 되는 밤을 찾은 일이라는 것을. ABC의 작품으로는 쉽게 읽을 만하다. 근데 ABC의 작품은 쉽게 권하는 게 아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20-09-11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에 <모렐의 발명>을 갖고 있는데 몇번 들었다 놓았다 하다 아직 안 읽은 책들 중 한권이지요. 쉽게 권하는게 아니라고 하시니 읽어봐야겠습니다 (청개구리).
리뷰 올리실때 늘 줄거리 요약을 빼놓지 않으시니 대단하십니다. 워낙 집중해서 빨리 읽으시고 바로 리뷰 올리시니 가능한가요? 전 리뷰 쓸때 쯤이면 중간 중간 내용이 벌써 머리속을 빠져나간 경우가 많던데 말입니다.

Falstaff 2020-09-11 12:26   좋아요 0 | URL
<모렐의 발명>이 ABC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책이라더군요. 몽환 자쳅니다. 말이 필요없고 그냥 읽어보시면 ㅋㅋㅋㅋㅋ.
책 읽으면서 주요 내용은 조금씩 메모를 해 둡니다. 나중에 독후감 쓸 때 크게 도움이 되더라고요. 제가 기억력이 꽝이라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쓸 자신이 없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