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서재 친구 hnine 님께서 내소사에 다녀오셨다는 글을 읽고, 퍼뜩 생각나는 잡문이 있었다.  맞아, 나도 내소사에 몇 번 다녀왔고 한 25년 전에 쓴 짧은 기행문도 있어! 그걸 창피하나마 소개한다. 아래 사진 역시 hnine 님의 서재에서 허락도 안 받고 쌔벼온 거다. hnine 님의 하해와 같은 이해심을 바랄 밖에.

 

 

 

 

 

내소사, 시간과 관능의 사이 



  만일, 만에 하나, 절간을 여인네에 비유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내소사는 더할 수 없이 암컷스런 여인이다. 내소사에 들어 절간을 한 번 휘둘러보면, 평소 사모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던 여인이 우연한 기회에 은쟁반 가득 주절이 주절이 달린 청포도 송이를 내 무릎 앞에 내려놓을 때, 단정하지만 풍성한 여름 옷섶 사이로 언뜻 언뜻 내비치는 뽀얀 젖가슴을 슬그머니 쳐다보면서 어뜩하니 휙 돌아가는 어질머리와 가슴의 두방망이질을, 똑 그만큼의 고양된 감정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할 만큼 새침해서 그 많은 백야(白夜)를 보내게 만들었던 여인네가 눈을 내리깔고 다소곳이, 그러나 의도적이기 때문에 결코 다소곳하지 않게시리 젖가슴을 슬쩍 제공하는 모습을.
  천왕문에 기대 서서 절마당과 종각과 대웅전을 거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눈길을 찬찬히 돌리면 우선 착 가라앉은 무채(無彩)로 인하여 이 절집이 모시 옷을 잘 차려입은 여인의 모습을 하고 차분하니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리를 옮겨 대웅전에 다가가서 유명한 이 절집의 꽃잎 문양 문살, 그 옛스럽게 창연, 아니, 처연한 문살을 쓰다듬다가 문득 천정을 올려다보면, 이 절의 무채는 누백년의 시간이 단청을 거의 벗겨내 이제 알몸의 나무만 남아있어서인 것을 알게된다. 대웅전 내부에는 옛적의 화려했던 금가루 단청이 아직 군데군데 남아 있어 호사했던 지난 날을 짐작하거라 하지만, 어디 옛적의 금가루 호사가 누백년 지난 다음 켜켜이 우려져 나오는 시간의 고즈넉과 비교가 될까.
  아, 세월이 흐르면서 추해지는 것은 사람살이 뿐이구나. 뙤약볕 떨어지는 절마당에 서서 고개를 들어 멀찍하니 바라보면, 절을 둘러싸고 있는 산자락들, 바람과 별빛과 안개에 닳고 닳아 이제 부드러운 곡선만 남고, 그것도 모자라 당초에는 땅 속 깊은 곳에 있었던 바위들이 무른 흙이 닳아 없어진 곳으로 군데군데 부드럽게 솟아, 산자락이 마치 꽃잎 모양으로 벌려있는 모습이 시간의 영광을 위해 꽃으로 복무하길 기꺼워하는 듯하다. 산이건 절집이건 시간은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어 가꾸길 마다하지 않고 그리하여 이 무채의 절집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내밀해질 수 있었을 터이다.
  장인의 손길은 여기에도 있다. 큰 목수도 천년 전 변산과 바닷가에서 세월의 부드러운 손길을, 그 내밀함을 알았을 터. 그는 마침내 꽃잎으로 벌어진 산자락 사이에 용의 눈을 그려넣듯 난만한 다산성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절을 둘러싸고 있는 산자락, 대웅전과 설선당, 절마당의 느티나무와 보리수. 넓은, 그러나 결코 넓어보이지 않는 절터에 적절히 자리잡은 옹기종기함, 큰 목수는 요조하면서도 난만하고, 정숙한 가운데의 다산성이라는 절명의 절창을 하고 세상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는 얼마나 행복한가. 한 번 한 번의 망치질, 대패질을 목숨을 걸고 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천년 후의 나그네가 그의 손길을, 그의 절창을 쓰다듬으면서, 바라보면서 한여름 팔뚝에 소름까지 돋아내며 감동해마지않으니.
  다시 천왕문에 돌아와 앉아 절마당을 바라보노라니 나도 이왕 죽는다면 일생의 절창을 한 번 쏟아내고, ‘내소사 앞마당에 수국으로 피어나 / 꽃잎이 질 때까지 묵언정진 하고나서’¹더 노래할 건덕지 없는 낳고 죽는 고리를 이제는 툭 끊고 싶어진다.
  내소사는 꽃이다. 하필이면 고기압이라서 청명한 하늘이 보장된다면, 그런 날의 내소사는 꽃잎을 한껏 젖히고 흰 꽃잎으로 자신이 요조함을 시위하며, 아무 말 하지 않고 자랑스레 자신의 음부를 활짝 펴보이는 그런 꽃이다. 푸른 공기가 움직일 때마다 자신의 몸냄새를 조금 조금씩 실어보내면서도 결코 그런 태를 내지 않는 꽃, 진하지 않은 몸냄새만으로도 온갖 이야기를 조근조근하게 펼치는 꽃이다.



 ※  ¹: 정호승 시집 「사랑하다 죽어버려라」가운데 ‘희방폭포’에서 따옴. 원작은 ‘희방사 앞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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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0-09-20 0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Falstaff님께서 자그마치 25년전 기록을 찾아 올리신 글을 읽을 수 있으니, 제가 내소사 다녀온 사진 몇장이나마 올린 보람이 더해졌습니다. 이런 글은 맘먹고 쓰신 글 맞죠? 얼마나 공들여 쓰셨는지 한줄 한줄마다 느껴집니다. 서정주 시인의 시가 문득 연상되기도 하고요.
음, 몇번 더 읽어봐야겠습니다.

Falstaff 2021-09-19 11:07   좋아요 0 | URL
먼저.... 사진 무단 도용, 죄송합니다. ^^;;
사진 보자마자 반가운 김에 덜컥 올리긴 올렸는데 멋만 부린 조잡한 글을 나인 님께서 이리 상찬을 해주시니, 솔직하게 말씀드려, 매우 기분이 좋네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