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이.
토머스 핀천 지음, 설순봉 옮김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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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자가 빽빽하게 배열된 8백 페이지에 이르는 장편소설. 이 책을 선택하면서, 이이의 작품을 읽는 행위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잊었다. <브이.> 150쪽까지 읽어가다가, 일단 책을 덮고, 잠깐 고민한 다음 (이걸 읽어? 말아?),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이번엔 옆에 노트와 볼펜을 꺼내놓았다. 핀천은 역시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독자인 내게 매우 높은 단계의 집중을 요구했으며, 작은 글씨로 노트 다섯 장 반을 메모하게 했다. 이러니 읽는 속도가 나지 않을 수밖에. 그러나 토머스 핀천을 고르는 순간, 독자 스스로 고난의 행군을 견디겠다는 암묵의 동의를 한 것이므로, 이런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게 된 팔자를 원망해야지 결코 작가나 작품 탓을 하지는 못하리라.
  무엇이 ‘책 좀 읽는’ 나로 하여금 150쪽까지 읽다가 다시 첫 페이지로 되돌아오게 만들었느냐 하면, 무수하게 많은 등장인물들이, 인생이 그렇듯 다 나름대로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는 것까지는 이해하겠지만 핀천 선생의 많은 등장인물들은 아버지 때부터 서로 얽히고설킨 내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 연루에 동참하지 못하는 인물들 역시 먹고, 마시고, 행위하고, 즐기고, 돈을 버는 일상을 일일이 다 소개해, 독자로 하여금 드디어 자신의 뇌 용량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양의 메모리를 쏟아내기 때문이다. 서두부터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결국엔 어느 한 사건이나 장면으로 엮이게 구성되었을 것이란 점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만, 엮이는 과정이 매우 복잡해, 일단 도입부에서 실타래가 한 번 엉크러졌다 하면 미노타우로스가 사는 미노스의 미궁에서 결코 빠져나오지 못한 채 결국 반인반수의 정찬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150쪽이 무슨 대수랴. 250쪽까지 읽었더라도 깨끗하게 포기하고 다시 제일 앞으로 돌아가 모자란 뇌 용량 대신 메모를 해가며 읽는 게 좋다면 그렇게 해야지. 어쨌건 나는 그렇게 했다. 그리하여 꼬박 8일이라는 날짜를 투자해 이제 막 읽기를 마치고, 완독을 자축하기 위해 피처럼 진한 와인 한 잔을 하려 했으나, 아직 오정도 되지 않아 축배는 저녁으로 미루고 독후감을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이 놀랍게도 토머스 핀천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핀천. 이 양반의 삶 자체가 대단히 특징적이어서 누군가 혹은 핀천 스스로 이이/자신의 일생을 소설로 써도 매우 재미있는 작품이 될 정도로 기발한 일생을 살고 있다. 덧니에 뻐드렁니를 합한 치아와 악골을 가진 작가에 대해, 나는 작가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심정에서 하나도 소개하지 않겠다. 작가는 ‘자기공개기피증’이라 역자 설순봉이 명명한 질환에 걸려 있어서 <중력의 무지개>로 큰 상을 받을 때에 이르러 열여덟 살 때 찍은 사진을 처음 공개한 이력이 있고, 심지어 신경질을 내며 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 하니 어찌 작가소개를 생략함이 예의가 아니겠는가.
  책은 1955년의 크리스마스이브에서 출발한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베니 프로페인. 슐레밀이자 요요인간이다. 슐레밀Schlemiel은 중동부 유럽에 살던 아쉬케나지 유대인들의 말인 이디시어에서 온 단어로, 일이 잘 꼬이는 불운한 인간이란 뜻이란다. 주변에 간혹 이런 사람들 보인다. 멀쩡하게 생기고 학력도 괜찮은데 이상하게 면접만 봤다하면 떨어지고, 가게만 차리면 망해먹는 사람들. 외가 쪽으로 당숙 되시는 분이 이런 부류였는데,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해 빌빌대다가 개인택시도 아니고 회사택시 운전하더니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연락도 안 된다. 멀쩡하고 허여멀겋게 잘 나게 생기기까지 했음에도. 이게 인생이지 뭐. 공부 잘 했다고 인생까지 잘 되면 재미없잖아. 물론 당하는 입장에서는 참담하겠지만.
  근데 이 슐레밀인 프로페인은 자신 스스로가 슐레밀인줄 안다. 그래서 그나마 다행이다. 미 해군에 입대해 구축함 USS스캐폴드 호의 승선원으로 있다가 말뚝 박는데 실패하고 제대해 줄곧 도로 인부로 일을 했다. 그러다가 이젠 길이라면 꼴도 보기 싫어 때려치우고 일 년 반 동안 미국 동해안을 요요처럼 오르락내리락 하는 바람에 ‘요요인간’이란 타이틀까지 차지했다. 어쨌든 첫 무대는 미국 버지니아 주 노포크 시에 있는 ‘세일러스 그레이브’라는 옥호의 술집. 프로페인이 승조원이었을 때 단골로 다니던 집으로 서빙하는 아가씨들 모두는 ‘비어트리스’ 단테 알리기에리에게 구원의 여신 역할을 했던 여인의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는 “모든 술집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비어트리스가 되어야 한다.”는 모토로 영업을 하는 비어트리스 버포 부인의 철학을 기원으로 한다. 그리하여 버포 부인은 발포 고무로 만든, 유방 모양의 맥주 빨아먹는 꼭지를 제작해 해군 월급날에 맞춰 오후 여덟 시부터 아홉 시까지 한 시간 동안 ‘수유시간’을 제정했는데, 이 발포 고무 맥주 빨개를 향해 몰려드는 수병들이 몇 백에 달해 근 백 대 일의 경쟁을 뚫어야 겨우 한 모금을 마시는 행운이 걸리는지라 월급날마다 싸움 그치지 않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왜 지금 소설 줄거리와 거의 상관이 없는 곁가지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게 책의 1장 몇 절에 소개하는 에피소드인데, 독자 입장에선 과연 비어트리스 버포 여사가 나중에 중요 인물로 등장할지, 안 할지 모르고, 매우 독창적인 캐릭터로 해군장화를 신은 키가 150센티미터 밖에 안 되는 악동, 풍치로 이를 전부 뽑고 (군인이니까)세금으로 새로 해 넣은 인조 이를 줄로 날카롭게 갈아 세일러스 그레이브에서 비어트리스들의 엉덩이를 깨무는 습관이 생긴 플로이 역시 나중에 중요 등장인물인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이나 행위가 재미있으니 기억하게 되며, 결국 이 딱 한 번의 등장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란 걸 알 때쯤엔 대신 다른 중요한 등장인물을 기억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길까, 안 생길까. 그건 당신이 직접 읽어보시고 판단하시라.
  프로페인은 술집에서 옛 동료이자 무단으로 외출 나온 피그 보딘을 만나 갑판장 호드 영감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호드 영감이 45세일 때 지중해, 시칠리아 섬에서 일곱 시 반 위치에 있는 몰타의 명망가 열여섯 살 아가씨 파올라 마이스트랄과 결혼을 해 미국으로 함께 온 일로 연결되고, 파올라가 호드 영감하고 별거에 들어갔으며 지금 세일러스 그레이브에서 비어트리스로 일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 사실은 나중에 중요한 것임이 드러나는데, 절반은 가톨릭이고 엄마가 유대인이라서 일관된 도덕관이 없는 프로페인이 어찌어찌 해서 파올라와 한 침대에 들었다가 관계를 맺지 못하고 눈 내리는 밤에 정처 없이 (남의)집을 나서 피그 보딘의 지저분한 집에서 숙박한 다음 뉴욕으로 흘러들어오게 된다. 그러니 적어도 피그 보딘과 파올라는 끝까지 주인공 프로페인의 곁을 지킨다는 거 아닌가. 물론 아직까지 독자는 파올라가 나중에 그렇게도 중요한 등장인물로 상향조정될지는 꿈에도 모르고 있을 터이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니 1901년생, 그러니까 언필칭 20세기 인간, 로버트 스텐슬. 아버지 시드니 스텐슬은 전직 영국 외무부 공무원이었다고 하나 사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만날 외국으로만 나가 다니는 동안 자신이 태어났고 자랐으며, 아버지는 죽었다. 현금이나 부동산 재산 하나 남기지 않고. 혹시 모르지 엄마가 다 떼어 먹었는지. 이 로버트 스텐슬을 프로페인과 연결시켜주기 위해 핀천은 이들 가운데 부잣집 따님이자 털털하고 완전 서민적 풍모로 무장한 의리의 여인 레이철을 등장시킨다. 레이철은 TV 시리즈 각본을 쓰는 라울, 산발적으로 작업을 하는 화가 슬램, 기타 연주자이자 진보적인 포크 송을 노래하는 멜빈 등과 함께 뉴욕의 젊은 예술가들과 ‘영혼의 동반’을 하고 있으니 이 동아리를 ‘모든 병든 족속들’이라 칭했다. 이 족속 가운데 가장 연장자로 스텐슬이 들어온다. 그의 타이틀은 ‘세계적인 모헙가.’
  이 때쯤, 혹은 책을 열 때부터 “V."가 무엇인지 독자는 V.의 정체 찾기에 골몰하고 있을 듯하다. 프로페인은 V.와 거의 관련이 없고 이 스텐슬, 아들인 로버트 스텐슬이 V.와 더욱 밀접한데, 그게 뭘까. 나는 첫 장부터 V.의 정체에 거의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서 심지어 ‘세일러스 그레이브’의 여급들 이름으로 나온 베아트리스도 혹시 Beatrice가 아닌 Veartice, 즉 ‘V.’ 아닐까? 했을 정도다. 그건 아닌 게 확실하고, 그럼 파올라가 살던 몰타의 수도 발레타Valleta? 그러나 V.에 대한 최초의 문자적 기록은 로버트의 아버지 시드니가 1899년 4월에 피렌체에서 남긴 기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V.의 배후와 내부에는 우리 중 누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비밀이 숨어 있다. 그것은 ‘누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올바를 것이다. 그녀는 과연 무엇일까? 제발 내가 그 답을 적지 않아도 되기를 기원할 뿐이다. 이 기록에서나 공적인 기록에서 거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아도 되기를 바란다.”
  이것을 보면 V.가 분명히 ‘그녀’라고 되어 있으니 한 여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서양 사람들, 특히 영국인이 여인을 ‘무엇’이라고 했을까? 구체적으로 ‘빅토리아Victoria’라는 이름의 여성을 가리키는데 정말 이 여자가 V. 맞아? 스텐슬이 생각하는 V.로 말할 거 같으면, 난봉꾼에게는 벌린 다리가 V.이고, 조류학자에겐 이동하는 새의 무리가 V.이며, 촬영기사에겐 쓸만한 기계, 예를 들어 잘 빠진 삼각대 다리가 V. 아니겠느냐는 건데 혹시 V.라는 것이 특정한 형태를 갖지 않은 <황금가지>나 <백색여신>같은 정신적 모험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애매한 생각도 가지고 있다. 물론 끝까지 읽어보면 핀천이 이렇게 쓴 게 틀림없이 독자를 헛갈리게 만들 의도였음이 드러나긴 하지만, 아 그래도 도대체 V.가 뭐냐고! 아니면 누구냐고!
  글쎄. 그걸 알려드리면 곤란하지 않을까? 8백 페이지에 달하며, 읽기가 상당히 난감해 지독하게 진도가 나가지 않는 책을 읽은 보람이 없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안 알려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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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0-09-20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어떤 글일지 상상이 안가지만 이 책은 v의 정체를 밝혀내는게 목표인가보네요. 정자세로 8일 동안 읽으셨는데 저라도 안 가르쳐 줄거같아요. 근데 읽을 엄두가 안나니 영영 v는 알 수 없네요.ㅎㅎ

Falstaff 2020-09-20 16:56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절대 추천하지 않을 겁니다. 그냥 핀천이 좋은 몇 몇 이상한 독자들은 즐길 수 있을까요? 하하하...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잠자냥 2020-09-20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어떤 대작을 읽으시기에 리뷰가 뜸한가 했더니 이 책을 읽고 계셨군요! ㅎㅎ 저도 이 책, 올해 안에는 읽는 게 목표입니다.

Falstaff 2020-09-20 16:56   좋아요 1 | URL
에휴,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이 이 책에 비하면 이도 안 난 수준이더라고요. 포스트 모던? 염병이나 하면 좋겠어요. ㅋㅋㅋㅋㅋ

xiwangmoo 2024-10-03 1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장부터 핀천 애호가답네요. 끝까지 읽으셨다는데 경외감이.....

Falstaff 2024-10-04 04:43   좋아요 0 | URL
고비만 넘기면 훅 빨려 들어갑니다. 도전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