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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동품 진열실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3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동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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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발자크. 또? 그렇다. 이번에는 말 그대로 대박인 걸. 물론 당연히 촌스럽다. 1839년 작품을 지금 시각으로 읽으면 촌스러운 게 자연스럽다. 게다가 무대도 촌이다. 발자크의 문장으로 썼지만 읽으면서 당대에 발자크와 비슷한 수준으로 일필휘지를 날리던 알렉상드르 뒤마가 생각날만큼 드라마틱하기도 하다. 발자크보다 겨우 세 살 아래인 대 뒤마를 진짜로 연상했다니까. 근데 역시 발자크인 건, 상황은 뒤마처럼 긴박하게 클라이맥스를 향하여 줄달음을 치건만, 클라이맥스 바로 앞, 여기서까지 특정인의 직업이 어떻고, 생긴 건 또 어떻고 정원 가꾸기가 취미인데 이이의 온실에 가면 어떻고 저떤 화초가 있어 그게 원산지 어디서 수입한 거고, 아이고, 아주 턱이 뚝 떨어진다. 웃기겠지? 정말 그렇다. 마음 같으면 그냥 후딱 넘어가고 싶지만 언제 또 결말을 품고 있는 복선 끄트머리라도 나올지 몰라 바득바득 읽고 있으면 실실 새는 웃음, 물론 헛웃음이지만 그걸 멈추지 못한다니까.
발자크는 서문에서 이 작품이 “명문가 출신으로서 파리에 상경해서 파멸하는 가련한 젊은이들의 이야기”라고 아예 못을 박고 시작한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아니라 빅튀르니앵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명의 명문가 자제가 말 그대로 “죽다가 깨나는 이야기”다. 발자크는 계속해서 멸망의 원인을 젊은이가 “도박에 의해, 빛나려는 욕망 때문이거나 파리 생활에 현혹당해서, 재산을 증식하려는 시도로 인해서, 행복하거나 불행한 사랑에 의한 파멸”이라고 미끼를 던지기도 한다. 서문을 읽고 혹하지 않기도 쉽지 않다. 독자를 매혹시키는 요소가 듬뿍 들었으니 이걸 어째? 역시 가장 큰 매력은 돈과 사랑, 특히 불륜이거든.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주인공 데그리뇽 백작이 지방 출신 젊은이의 다른 유형인 라스티냑의 반대형이며, 여기서 라스티냑은 <고리오 영감>을 비롯해서 <인생의 새출발>, <12인당 이야기>, <루이 랑베르> 등 여러 작품에 출연하는 라스티냐크를 말하는데, 능란하고 대담한 라스티냑은 데그리뇽 백작이 패배하는 곳에서 성공을 거둔다고 분명히 그랬지만, 그는 그냥 주인공의 파리 생활에서 엑스트라 급으로 몇 장면에 스치듯 나오고 만다. 워낙 많은 작품을 쓰다 보니, 발자크 역시 사람인지라, 자기가 앞에서 한 이야기를 가끔 잊거나, 헛갈리기도 한다. 독자들이 너그럽게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서문에 큰 의의를 두지 말자.
작품의 서두는 프랑스에서 가장 빈한한 현청소재지 중 한 곳의 도심 길모퉁이 집, “데그리뇽 저택”이라 관습적으로 부르는 집에서 시작한다. 이 저택의 주인의 정식 이름은 샤를르-마리-빅토르-앙주 카롤. 정통 프랑크 족으로 1,300여년 전 북쪽에서 내려와 강력한 골 족을 쳐부수고 봉건제를 확립한 영광스러운 카롤 가문의 후손이다. 그렇다니까. 유럽의 귀족들은 원래부터 사병을 이끌고 여기저기 약탈을 하고 다니던 비적 두목 출신이었을 확률이 대단히 높다. 그게 대를 이어 몇 백 년을 지나다보니 이제 자손들에게 조금씩 공맹의 도를 가르치고, 별 희한한 예절을 만들어 그것을 준수하게 하니 멋있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동서양이 다 그렇다. 이 명망 높은 카롤 가문의 노 귀족을 사람들은 데그리뇽 후작으로 불렀다. 하지만 뭐든지 끝이 있는 법이어서, 역대 프랑스 왕가도 함부로 무시하지 못했던, 심지어 공작으로 승격을 권유하는 왕의 호의를 싹 무시하고 후작으로 남았던 대단한 가문도 1789년 대혁명을 만나 거의 완전히 찌그러지고 말았다. 영지의 대부분을 유실해서 이제 연수입이 겨우 9천프랑 이하로 격감을 해 원래 사용했으나 혁명의 와중에 모든 가구를 약탈당한 성chateau을 유지할 수 없어 포기한 채 청 소재지의 자기집이었던 저택을 충성스러운 공증인 쉐넬이 마지막 남은 루이 금화 5백 루이로 마련해주어 들어와 살고 있었다.
1802년에 후작은 누아스트르 남작의 딸과 혼인해 아들을 낳았으나 예쁘고 어린 아내가 출산 중에 숨을 거두는 바람에, 이때 미모의 누이동생 마리 아르망드 클레르 데그리뇽 아가씨가 스물일곱 살이었는데 이후에 이 아이, 그러니까 데그리뇽 양의 조카 때문에 어여쁜 아가씨는 파파 할머니가 될 때까지 숫처녀로 살다가 죽을 운명으로 결정이 나버리게 된다. 어여쁘고 기품있으며 현명하기까지 한 아르망드도 즉각적으로 자기 팔자를 알아차리고 조용히 따르기로 했는데, 이 이유가 아니더라도 언감생심, 감히 생각도 하지 못한 낮은 신분의 은행가 뒤 크루아지에 씨가 아르망드에게 청혼했으니 이게 통할 일인가? 청혼 자체를 대단한 불명예를 당한 것으로 여긴 후작과 데그리뇽 아가씨는 그때는 몰랐다. 냉혹한 거절이 지역의 자유주의자들을 대표하게 될 밴댕이 소갈딱지 뒤 크루아지에 씨를 두고두고 스무 해가 넘을 때까지 복수심을 키우게 될 지는. 이이가 품은 극한의 복수심으로 작품은 놀랄만한 출력을 지닌 엔진을 달게 된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뒤 크루아지에의 복수혈전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데그리뇽 저택은 당연히 현청소재지의 대표적인 랜드마크가 된다. 다른 한 곳도 있다. 데그리뇽 양에게 청혼했다가 미역국 먹은 뒤 은행장이 된 크루아지에의 응접실. 후작 저택의 살롱은 혁명 전부터 귀족이었던 가문 대대로 명망가의 자존심과 자부심과 명예와 예법 등의 이젠 세월이 바뀌어 전혀 돈 안 되는 것들을 잔뜩 짊어지고 사는 인간들의 모임. 하도 고릿한 냄새가 진동해 이들이 모인 살롱을, 자유주의자이자 공화주의자 등 진보 좌파적 입장을 유지한 부르주아, 웃기지? 진보 좌파 부르주아들이라니, 하여간 그들이 뒤 크루아지에의 살롱에서, 앙시앵레짐의 혜택을 여전히 그리워하는 인간들이 모이는 데그리뇽 저택의 살롱을 “골동품 진열실”이라고 낮추어 불렀는데 이게 도시 사람들 입에도 짝짝 들러붙었던 거다. 그러니까 <골동품 진열실>은 19세기에도 여전히 명망가라고 폼잡으려는 철없는 귀족 나리들을 일컫는다고 보면 된다.
근데 오노레 드 발자크 자신도 평생 왕정을 지지하던 보수 우파 출신이거든. 그가 자신처럼 왕정에 충성하는 오랜 귀족들의 모임을 낮춰 부른 말로 작품의 제목으로 했다고? 그렇다. 발자크는 정치적으로는 보수파였을 지 몰라도 과학의 세기라고 하는 19세기에 아직도 정처를 모르고 옛 시절의 구태에 머물고 있는 귀족 집단에게 일침을 가하고 있는 거다. 그는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구 귀족과 신규 부르주아의 다툼에서 일방적으로 옛 귀족의 손을 들어주지만, 결코 완전한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승리인 듯하지만 결국 흐름에 굴복해야만 하는. 이크, 더 얘기했다가는 영낙없이… 스포일러?
빅튀르니앵은 말했다시피 고모인 아르망드가 업어서 키운다. 낳자마자 엄마를 잃은 가여운 아이. 자라면서 어땠겠어? 아버지 후작은 후작 가오가 있지 아들 키우는데 감놔라 배놔라 할 수 없어 그저 뒷짐 짚고 동생 하는 대로 맡겨 놓았을 것이 뻔하고, 작품에서 가장 교훈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라고 작가가 직접 언급한 고모는 지성이 빠진 가장 순결한 덕성이 아이에게 어떤 해를 끼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었다면서 희극적으로 이야기한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응석받이 자체로 키웠다는 뜻이다. 매사에 오냐, 오냐만 했지, 직접 낳은 엄마라면 따끔하게 혼을 낼 일조차 차마 그러지 못하고 감싸는 데만 전력을 기울인 거다. 이렇게 자라는 빅튀르니앵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작자가 하나 있었으니, 이 가문에 앙심을 품고 늘 복수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뒤 크루아지에. 그는 젊은 귀족이 받고 있는 교육의 오류 속에서 가혹한 복수의 가능성을 감지해, 어린 양을 어미의 젖 속에 빠트려 익사시킬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빅튀르니앵은 점점 자라며 우월성의 신조를 뒤집어쓰게 된다. 기막힌 미모로 태어난 데다가 키는 중키라 해도 매우 근육질의 단단한 몸에 놀라운 운동능력을 갖게 됐다. 사실 아름다운 외모라는 건 재산과 재능 이상의 가치가 있으며 모습을 드러내기만 하면 승리할 수 있는 조건으로 기능한다. 귀족신분의 아름다운 청년, 그리고 열렬한 정신, 무엇이든 이해할 수 있는 경이로운 능력과 뛰어난 기억력은, 그러나, 왕자처럼 이기적이고 중세의 혈기왕성한 추기경처럼 고집불통이며 무례하고 방약무인의 독선적인 성격으로 진화하면서 드디어 18세가 되어 지방 사교계에 데뷔했다.
난리가 났다. 사교계의 귀족, 부르주아 아가씨들과 숱한 배우, 가수, 그리고 유부녀들도. 빅튀르니앵은 예전엔 자기 가문의 땅이었지만 지금은 엄연히 남의 숲 속에 들어가 아무 짐승이나 사냥을 해, 가문의 충성스러운 공증인 쉐렐로 하여금 돈으로 해결하게 하더니, 처녀들한테 분별없이 결혼 약속을 하고 속고쟁이를 벗기는 바람에 신세를 망친 아가씨들과 가족이 난리를 쳐서 역시 쉐넬이 한 번 더 돈으로 막았으며, 노름판에서 함부로 발행한 약속어음이라는 노름빚도 대신 갚아주는 등, 18세부터 21세까지 쉐렐은 아버지와 고모 모르게 거의 8만 프랑의 자기 돈을 지출해야 했다.
이러다가 1822년 10월이 오고, 현의 한 기사가 골동품 진열실에서 데그리뇽 후작과 면담을 청해, 이제 아들 데그리뇽 백작이 스무 살이 됐으니 파리로 올려 보내 궁에서 일자리를 얻게 해야 한다고 진언한다. 후작이 행각하기에 그 말이 마땅한지라 친척이기도 한 파리의 대 귀족 드 르농쿠르 공작에게 전할 서신을 써서 아들에게 주고 파리로 보낸다. 이때 쉐넬은 자신의 시골 소유지를 담보로 해 10만 프랑을 마련해서 고모 아르망드에게 전해주기도 했다. 빅튀르니앵의 초기 비용으로 1만 프랑을 주고, 한 달에 가용 용돈으로 2천 프랑을 줄 수 있도록 파리에 있는 공증인 동창에게 전권을 주라고 하면서. 하지만, 쉐넬의 동창생은 이미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후임 공증인은 빅튀르니앵에게 한 방에 10만 프랑 전부를 전해주는 기가 막힌 일을 해버렸고, 거의 최고 수준의 사치를 시작한 빅튀르니앵은 마구간과 마차를 보관하는 차고가 하나씩, 마차 끄는 말과 승마용 영국 말 한 필씩, 거처를 꾸미는데 5만 프랑, 이런 식으로 펑펑 써 제친다. 또 젊디 젊어 리비도가 풍풍 솟구치는 청년이 연애를 하지 않으면 말이 되나? 귀족신분에 아름답기까지 한데? 그리하여 열렬한 첫사랑을 시작하니, 상대는 당대 파리에서 예쁘기로 열 번째 안에 든다는 디안느. 이 여인이 바로 드 모프리뇌즈 공작부인이었던 거다. 이렇게 작품은 파란만장한 데그리뇽 백작, 빅튀르니앵의 불꽃 같은 허랑방탕과 급격한 몰락을 향해 급발진을 시작했던 거디었던 거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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