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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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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셋, 단편 하나를 실은 모음집. 중편 셋은 요즘 우리나라 출판사에서 장편소설로 치는 분량이며, 옌롄커의 소설적 모태인 바러우 산맥 인근, 허난성 충현崇縣의 비옥하지 않은 농지를 삶의 근거지로 하는 하층 농민 이야기이다. 단편소설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은, 옌롄커 소설에서 처음 읽은 듯한, 중국의 북방지역을 무대로 했다. 58년 개띠 작가인 옌롄커의 책은 여섯 권을 읽었는데, <캄캄한 낮, 환한 밤>에서 보듯이 분명히 세계 최대의 도시 가운데 하나인 베이징에서 돈을 벌고, 먹고, 자는 도시인임에도 언제나 농촌을 무대로 하는 작품만 쓴다. 내가 처음 읽은 옌롄커인 <풍아송>에서 주인공 양커가 중국 고전문학을 전공하는 부교수가 직업이라 하더라도 결국 그 역시 유토피아를 찾아 헤매는 결말을 맞는다. 왜 <풍아송> 이야기를 여기서 하느냐 하면, 모옌과 위화 같은 이들의 작품을 처음 읽을 때도 조금은 그랬는데, 특히 옌롄커의 문장과 서술방식이 상당히 낯설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똑같이 먹고 살기 힘들고, 가난과 기근이 넘실거려도 우리 작가들한테 보지 못했던 생경함에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두번째로 읽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도 비슷했고. 대개 이쯤이면 특정 작가의 작품을 멀리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어떡하다 몇 권을 더 읽는 일이, 우연히, 생겼고 이 우연을 지나면서 옌롄커의 문법이 이제는 낯설지 않게 되자, 세상에 이런 일이, 그만 마음에 들어버린 거다. 바러우 산맥 근방에서 근근이 명을 이어가는 농투성이들. 간혹 장애나 질병을 갖고 사는 인물들이 주축이 되기도 하는 맨 아랫것들의 질긴 생명. 그걸 이어가려면 어찌 늘 선할 수 있을까? 옌롄커는 이 방면으로 귀신이다, 귀신.
《연월일 年月日》의 한국어판 서문을 보면, 29년 전인 1990년에 작가는 지독한 허리 통증과 목디스크를 앓았다고 한다. 의자에 앉을 수 없어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도 침대에 누워서 해야 했을 정도였다니 상당히 심각했던 모양이다. 치료하기 위하여 중국 전역을 돌며 용한 의술과 명약을 찾아다녔다는데, 시안西安에서 떨어진 황량한 들판에 옥수수가 가득한 모습을 보았단다. 우리나라와 같거나 비슷한 들판의 옥수수 밭을 생각하지 마시라. 어쩌면 눈 닿는 지평선까지 옥수수 밭이 펼쳐졌을 수 있다. 하여간 황량하지만 넓은 들 가득했을 옥수수 밭은 그러나 텅 비고 조용했었는데, 이때 한 순간 “쾅”하고 작가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생각이 있었으니,
“한 편의 소설이 한 사람과 옥수수 줄기 하나만을 묘사한다면 어떻게 될까?”
다음 날 곧바로 의사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다음에 베이징 아파트로 돌아와 <연월일>을 썼다고. 다만 작가가 시안에서 본 옥수수 밭의 풍경을 역시 바러우 산맥 근방으로 옮겨왔다. 아무래도 자기가 낳고 자란 곳이어서 묘사하는데 훨씬 수월할 터이니.
바러우 산맥 인근에 태고 이래 최악의 가뭄이 닥쳐왔다. 한발을 견디다 못한 주민들이 기우제를 올렸다. 제단을 설치하고 공양물 세 접시와 용왕의 형상을 그린, 물이 가득 찬 물 항아리 두 개를 제단에 올린다. 그리고 개 한 마리를 머리가 하늘로 향하게 물 항아리 사이에 묶어놓고, 목이 마른 거 같으면 물을 주고, 배가 고픈 거 같으면 먹을 것도 준다. 꽁꽁 묶인 개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해 해를 향해 미친듯이 울부짖을 수만 있을 뿐이다. 개가 짖는 소리 때문에 겁에 질리거나, 하도 시끄러워 도무지 들어주지 못하게 되면 해가 물러가고 그 빈 자리를 검은 용, 비구름이 대신 채워 주기를 기대한다. 이렇게 짧으면 사흘, 길어도 이레면 충분하리라. 그러나 이번 한발은 얘기가 달랐다. 보름이 지나도 여전히 해는 하늘 가운데에서 위용을 거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번 기우제를 망쳤다고, 하늘도 이 고장을 버린 모양이라고 체념하면서 개를 풀어주고, 바싹 마른 공양물을 내다 버린다. 개는 보름동안 잘 먹고 마셨지만 태양의 직사광선을 받아 눈알이 다 말라 앞을 보지 못한다.
그래도 날은 가서 어느덧 파종할 때가 왔다. 날에 맞춰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고, 이에 기운을 얻은 마을사람들은 너도나도 몰려나와 북과 꽹과리를 치며 “파종을 합시다, 가을 파종을 합시다!” 외치고 다녔다. 천쯔두의 희곡 <뽕나무벌 이야기>를 보면 중국 시안 지방에서 먹구름을 쫓아낼 때 북과 꽹과리를 치며 “여기는 그냥 지나가고 저 남쪽 마을에 머물러라!” 외친단다. 먹구름은 비를 몰고 다니는 흑룡이니, 북과 꽹과리로 놀라게 해서 쫓아버리는 일. 근데 오랜 가뭄에 시달리는 바러우 산맥 사람들이 먹구름 조금 몰려왔다고 북과 꽹과리를 치고 있으니 이게 될 일이냐는 말이지. 아니다 다를까, 짙은 먹구름은 3일 동안 동네 하늘에 빽빽하게 몰려 있다가, 농민들이 비 오기 전에 얼른 옥수수 종자 파종을 끝내자마자, 그만 시새푸새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보름 후, 마을사람들은 지독한 가뭄을 피해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피난 행렬은 사나흘 이어졌고, 음력 유월 열아흐레가 되자 주인공 션先 할아버지도 마지막 이주 대열에 끼어 피난길에 나섰으니 이때 일흔두 살이었다. 할아버지는 동쪽으로 40일이나 50일 동안 걸으면 나오는 쉬저우徐州에 도착해 편하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바리반八里半까지 왔을 때 더 이상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자기 같은 노인이 계속 걷다가는 쉬저우는커녕 며칠 가지도 못해 객사할 것임을 알아서. 마침 이곳에는 셴 할아버지의 옥수수 밭 1무3분, 260평이 있기도 했다. 자기 밭에 주저앉은 할아버지, 이제 마을을 통틀어, 산맥을 통틀어 일흔둘의 노인 하나만 남았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고 공허와 적막, 그리고 황량한 바람이 가슴에 휙 스쳐 지나갔다.
옌롄커는 사람 하나와 옥수수 줄기 하나만 등장하는 소설을 쓰려 했다. 근데 성씨가 옌閻, 마을, 거리, 한길이라는 뜻을 가졌으며 천생 설레발꾼의 팔자를 타고 난 사람이 등장인물이 오직 하나. 이게 어디 말이 되나? 그리하여 주인공 셴 할아버지한테 필수불가결한 말상대, 라기보다는 말을 들어줄 대상을 하나 마련했으니 할아버지가 “장님”이라고 이름을 붙인 눈먼 개였다. 미쳐버리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인 기우제 제단 위의 바로 그 개. 그렇게 해서 셴 할아버지와 눈먼 개 장님이는 새벽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이 8리 반 떨어진 바리반의 옥수수 밭에 그 중에도 양지바른 땅에 심어놓은 한 줄기의 옥수수 싹에, 직접 그럴 수는 없고 주변을 따라 졸졸졸졸 오줌을 누는 일이었다. 황토만 풀풀 날리는 260평의 밭에 오직 한 포기, 근처에 오줌을 눈 옥수수만 촉촉하게 약간의 물기를 간직하고 있는 이유였다. 원래 제일 좋은 거름은 오줌이 아니라 인분이지만 가뜩이나 먹는 게 없고 소화기능도 왕창 떨어진 일흔 고개의 할아버지가 똥을 눈들 얼마나 눌까? 할아버지의 땀에 전 적삼은 빨래를 한 지 하도 오래라서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천도 두툼하니 뻣뻣해졌어도 보름만 더 지나고 빨아 그 빤 물을 옥수수 거름으로 쓸 생각이다. 이 와중에 사람의 것보다 훨씬 영양분이 많은 개의 오줌을 앞 못 보는 장님이가 옥수수 뿌리, 수염 말고 뿌리 바로 밑에다 분사하는 바람에 오줌독이 올라 비실비실하는 일까지 생겼으니, 할아버지가 열을 받아 눈먼 장님이 옆구리를 모질게 걷어차기도 했다.
그러나 비는 안 온다. 작품이 끝날 때까지 결코 비는 오지 않는다. 셴 할아버지와 눈먼 개 장님이는 과연 옥수수를 길러낼 수 있을까? 옥수수의 의미는? 바러우 산맥을 둘러싼 허난성 일대의 하층 계급인 농민들의 생존과 생명의 영속이다. 그러니 아무리 환난과 궁상 묘사의 끝판왕인 옌롄커라 할지라도 차마 한 그루 남은 옥수수를 지옥 염천 아래 태워 죽이지는 못하리라는 건 눈치챘다. 다만 방법이 문제지. 물론 극도의 과장으로 결말을 향해 치닫기는 하지만, 또 그러지 않으면 옌롄커가 아니다. 이 황당한 옌롄커 식 문법에 처음엔 지독하게 적응하기가 어렵더니 점점 익숙해져 지금은 부담스러운 친숙함으로 즐겨 읽는 작가가 됐다.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네 그려.
표제작 <연월일> 말고도 두 중편 <골수>, <천궁도>도 참 환난과 궁상과 가난으로 점철된 것들이지만 내가 읽기에 <연월일>보다 더 흥미로웠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도 독자의 뒤통수 한 방 때리는 단편이다. 별점을 준다면 넷은 많이 아쉽고, 다섯까지 올리기는 거시기하고, 이런 심정이다. 당신이 읽어보고 결정하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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