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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
도메니코 스타르노네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2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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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르노네의 <끈>을 읽고 한 달 만에 다시 스타르노네를 읽었다. <끈>을 읽자마자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했다는 이야기다. <끈>이 앞부분에서 내 취향 상 시새푸새 했다가 뒤로 갈수록 매력이 폭발하는 바람에, 어 이거 봐라 싶은 묘한 당김이 있었기 때문이다. <끈>과 마찬가지로 <트릭>도 가족 간 다양하게 상처를 주는 방법을 소개한다. 일찍이 캐빈 윌슨은 <신경 좀 꺼줄래>에서 부모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애들을 망치는 인간이라고 설파한 적 있고, 파나마에서 태어난 바람둥이 작가 카를로스 푸엔테스도 그의 작품집 《모든 행복한 가족들》에서 참으로 다양하게 서로 상처를 주는 가족들의 모습을 조망한 적 있다. 유독 우리나라 작품 속에서 일상적으로 묘사하는 가정폭력 말고도 그렇다는 거다. <끈>의 끈은 개인의 행복을 위하여 처자식을 버리고 연인의 품으로 떠난 아버지와 소원한 아이들이 공유하는 신발 끈 묶는 유별난 방법을 말하는 것이지만, <트릭>에서는 ‘가족’이란 끈, 어쩔 수 없이 유지해야 하고, 대부분 그게 또 어쩔 수 없게 유지하게 되는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 적 유대,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은근하고 친절한 폭력에 대해 쓰고 있다. 하여간 도메니코 스타르노네, 이름을 들어본 지 겨우 한 달 밖에 되지 않은 이 나폴리 작가를 당분간은 주목할 듯하다. 세상에서 제일 단순해 보이는 가족이라는, 참으로 복잡한 인간관계, 이것에 대한 독특한 시각과 사건을 이이처럼 맛나게 쓰는 작가도 흔하지 않다.
화자 ‘나’의 이름은 다니엘레 말라리코. 일흔다섯 살의 화가이다. 삽화가로 더 이름이 났다. 사내 셋이 모여 있을 때 그들 주변에 잭 나이프를 하나 던져주면 삼십 분 안에 신기하게도 세 명이 다 죽고 마는 도시, 나폴리에서 낳고 자랐다 (표절이다. 책에는 안 나온다. 로사노의 작품 <마녀들>에 나오는 장면이다. 잭나이프 말고 마체테가 오리지널이다). 증조부 때부터 살던 집을 물려 받았다. 노름꾼 아버지는 한 달 동안 일해서 받은 돈을 ‘나’가 기억하기에 거의 매달 몇 분 안에 몽땅 잃고 ‘독특한’ 방법으로 가족에게 ‘독특한’ 분위기를 전파했다. 어릴 때부터 거의 천재 소리를 듣던 ‘나’는 사춘기를 맞이하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 하는 것”의 목록이 차례로 지워지기 시작하다가 잘 하는 것이 거의 몽땅 사라질 때쯤 독립해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반면에 이제 마흔 살이 된 딸 베타는 여전히 나폴리에서 사는 것에 만족해, 베타가 결혼하기도 전에 ‘나’가 물려받은 부모의 집에서 애인 사베리오와 함께 살게 했고, 명의도 옮겨주어 이제는 딸의 집이다. ‘나’는 어떤 이유에서라도 부모의 집으로 가는 게 마땅하지 않다.
‘나’는 몸이 좋지 않다. 일흔다섯의 나이. 거기다 순환계에 문제가 생겨 몇 주 전에 심각하진 않지만 가볍지도 않은 수술을 받았다. 혈액 관련 수치가 낮아 뇌에 피가 공급이 덜 되는지 병실의 벽에서 밀가루 반죽처럼 하얗고 작은 사람들의 머리가 스멀스멀 솟아나는 환상을 보기도 했다. 이건 작품의 중간 뒤편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와 다분히 중의적이기도 하다. 이때 의사들이 즉각 수혈을 해주어 증상이 없어졌고 퇴원도 할 수 있었다. 입원, 수술, 회복, 퇴원 기간에 나폴리에서 사는 딸과 사위는 한 번도 병원을 찾은 적이 없다. 그렇다는 거다. 수술했다고 꼭 자식이 와 봐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나도 그런 거 바라지는 않는다. 오면 좋기는, 위안이 되기는 하겠지만. 이후에도 여전히 몸이 좋지 않다.
딸 베타한테 전화가 왔다. 그러니까 수술을 받고 몇 주 후에. 11월 20일에 남편과 칼리아리에서 열리는 수학학회에 참석하는 동안 나폴리 자기 집에 와서 아이를 돌봐 달라고 부탁하기 위하여. 나는 밀라노로 이사와 산 지 20년이 넘은 홀아비다. 이제는 타인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 어색하다. 게다가 불과 몇 주 전에 심각하기까지 하지는 않지만 가볍지도 않은 수술을 받은 노인이다. 더구나 부모한테 물려받은 집은 지긋지긋해서 그 공간으로 가는 게 영 내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딸 베타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하면 베타는 대들겠지. 꽃노래도 삼세번인데 그만 하라고. 그래서 ‘나’는 진실만을 말한다. 지금 헨리 제임스의 소설에 들어갈 삽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 시작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내가 꼭 가야 하겠니?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출장이예요, 아빠. 저는 모두 발언을 맡았고 그이는 이튿날 오후에 발표해야 해요. 그 정도 소설 삽화 그리는 데 얼마나 걸리는데요? 아직 시간이 없는 건 아니잖아요. 어쨌든 11월 20일까지 작업을 못 끝내시면 여기 와서 작업을 계속 하세요. 마리오는 어른들을 귀찮게 하지 않으니까요.
손자 마리오는 네 살이다. 네 살에 모든 일을 알아서 하는 아이는 없다는 걸 ‘나’는 잘 안다. 딸 베타는 ‘나’를 원망했다. 내가 아버지로서도, 할아버지로서도 무심했다고. ‘나’는 졌다. 어쩌면 그게 사실일 터이니까. 11월 20일은 한 달 남았다. 1주일 전에 도착하겠다고 말했지만 지키지 못했다. 다시 출혈을 했고, 의사가 크게 문제는 없어도 한 주일 후에 다시 보자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11월 18일, 출발 하루 전에 열차를 올랐다. 나폴리 출생의 폭력적인 유색인과 같은 객실이었다. 깜빡하고 손자 마이로의 선물 사는 걸 잊은 채로.
누가 딸에 관해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것이다. 성격은 말라 비틀어진 나무껍질처럼 까칠하지만 조금만 벗겨내면 화사하고 보드라운 속마음을 만날 수 있다고. 어디까지나 다분히 립 서비스 측면의 발언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오랜 세월 베타는 오롯이 나의 것이었다.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거대한 세포, 세월 속에 닳고 닳은 세포막이 베타였다. 이에 비해 사위 사베리오 카주리는 땅딸막하고 다부진 체격으로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는 스타일이다. 훤칠하고 우아한 베타와는 어울리지도 않고, ‘나’가 객관적으로 보기에, 물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도무지 격이 다른 인물인데 어떻게 부부가 됐는지 아쉽기도 하고 의아스럽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사베리오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베타가 말하기를,
“아빠! 전 정말로 지긋지긋해요.”
하지만 베타가 응접실에서 잠시 사라진 순간, 사베리오도 장인에게 하소연을 한다.
“마음 편한 날이 없고 행복하지 않아요. 제 인생은 쓰디쓴 독과 다름이 없다고요.”
이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는 네 살짜리 손자 마리오. 아직까지는 순하고, 당연히 착하고 선하다. 아마도 딸 부부에게 집을 통째로 거저 준 아버지한테 넓고 편한 방을 주지 않을까, 김치국물을 벌컥벌컥 들이킨 ‘나’에게 베타는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이 손자 마리오와 같은 방을 사용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타인과 공간을 공유하는 게 어색한 ‘나’에게.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이제 남의 집인 것을. ‘나’의 가방을 들고 베타가 사라지자 이게 웬 일, 마리오는 오히려 안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 가족이란 지옥 속에는 아이들도 있는 법이지.
‘나’가 척 보니까, 딸 내외가 학회에 참석하는 진짜 이유는 아이가 없는 데서 눈치 보지 않고 마음 놓고 싸우기 위해서인 것 같다. 2년을 연애하고 12년간 이 집에서 동거한 다음에 결혼하고 이제 결혼 5년차. 사위는 나한테 하소연한다. 베타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 베타네 학교 수학과 학과장으로 부임했는데, 베타가 그이한테 푹 빠져버렸단다. 뛰어난 수학자이며 자타가 공인하는 학교의 실세라니까 얼핏 보기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베타는 ‘나’의 딸. ‘나’는 당연히 베타 역성을 들 수밖에. 아니나 다를까, 베타가 주장하는 건, 사베리오가 있지도 않은 일을 오해하고 있어서 부부와 마리오, 그리고 집안 전체의 균형을 망가뜨리고 있단다. 아, 여자들은 왜 그럴까? ‘나’가 알고 있는 단 두 명의 여자. 베타와 죽은 아내 아다. 아다도 몇 번 나를 배신했다. (‘나’말고 다른)육체에 관심이 있어서 일 수도 있고,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한 눈 먼 몸부림일 수도 있었겠지. 소모적인 일상의 이면에는 우리가 못 보는 척 외면하는 무례한 유령이 존재하는 법이기도 하고.
이런 부모에 대한 마리오의 평가. 아빠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해서 하다못해 자기가 항상 도와주어야 하고, 엄마는 신경질쟁이로 걸핏하면 소리 지르고, 뭐든 혼자서 빨리 끝내버리는 독불장군이자 집안의 대장이다. 그러고 보니, ‘나’가 집에 올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나’가 그동안 수 없이 여러 번 선물한 크고 작은 ‘나’의 그림은 아무 데도 걸려 있지 않다. 에이, 상관없지 뭐. 그러나 사실은 상관 있다. 그까짓 것이 뭐가 중요하냐고? 그래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게 사는 거다.
오늘은 변죽만 올리기로 했다. 이제 부부는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칼리아리로 떠나고, 집에는 일흔다섯 살 먹고, 몇 주 전에 수술을 받아 쇠약하며, 기한 내에 헨리 제임스의 소설 <밝은 모퉁이 집>의 삽화를 마쳐야 한다. 네 살짜리 마리오는 어린이 집에 갔다 오면 할아버지 말라리코 화백에게 지하철 타러 가자고 졸라대기도 하고, 딸 베타가 엄금한 바 있는 TV 만화영화를 거의 최대치 음역대로 보면서 네 살 먹은 아이답게 끊임없이 같이 놀아줄 것을 요구한다. 사위 사베리노는 집을 오직 하나의 용도인 편의성을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수리를 해, 우리나라처럼 알루미늄 새시를 설치하지 않은 발코니에 나갔다가 문이라도 닫히면 누군가가 열어주기 전엔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방범용이다. 응접실에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설치물이 허벅지와 옆구리를 갑자기 부딪히기도 하고, 아무리 봐도 소파도 잘못된 장소에 놓인 것 같다.
이렇게 노인과 아이, 둘 만의 장소와 시간. 이들은 생각보다 잘 지내기도 하고, 생각만큼 재미있는 놀이를 하기도 하고, 생각한 것보다 안 좋은 사건을 만들기도 하고, 당연히 진짜로 생명유지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최악의 시간을 만들기도 한다. 노인과 아이 사이도 마찬가지로 늘 누군가가 누군가를 지옥으로 밀어 떨어뜨릴 수 있는 관계. 그게 바로 가족이다. 어쩔 수 없이 유지해야 하고, 어쩔 수 없게 유지하게 되는 게마인샤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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