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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2 - 2021년 개정판 ㅣ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21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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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 아홉 편을 실은 책. 그리스 비극을 거칠게 구분하면, ① 오이디푸스 왕, ② 트로이 전쟁, 그리고③ 그리스 신화를 그렸거나, 위의 세 가지를 주축으로 하되 내용을 각색한 작품이 대부분이다. 이 책에서 눈길을 끈 것도 기존의 트로이 전쟁과 다르게 해석한 두 작품이었다. 제일 앞에 실은 <헬레네>와 두번째 이야기 <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 다섯 번째 작품 <오레스테스>은 각색은 되어 있지만 원래 이야기하고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에우리피데스의 <헬레네>는 20세기에 들어 그리스 시인 요르고스 세페리스가 한 번 더 원래 이야기와 많이 상충하는 허구를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유명한 대본가 휴고 폰 호프만스탈이 <이집트의 헬레나>를 써서 이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오페라로 만들기도 했다. 나는 에우리피데스의 <헬레네>를 이번에 처음 읽어봤다. 반면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를 통해 헬레네가 이집트로 간 내역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에우리피데스를 읽고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두 작품 간의 내용 차이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어떤 버전이 진짜인지 모르지만, 내가 아는 원래 이야기로 말하자면, 십년 간이나 그리스 군대를 애먹이던 트로이 성을 함락한 침략자들은 불쌍한 늙은 왕 프리아모스를 필두로 그의 아들들을 몽땅 도륙하고, 늙은 왕비 헤카베를 포함해 죽은 영웅 헥토르의 아내인 안드로마케까지 몽땅 전리품이란 명목의 노예 또는 첩으로 끌고 갔다. 특히 헥토르의 어린 아들들까지 남자들은 전부, 혹시라도 훗날을 도모하지 않을까 싶어 높은 성벽 위에서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향해 패대기 쳐버렸고. 브래드 피트가 아킬레우스로 출연하는 영화 <트로이>에선 파리스가 아이네이스와 함께 트로이를 탈출하는 데 성공하건만, 천만의 말씀, 파리스 역시 점령군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이 모든 전쟁의 막을 열게 한 헬레네도 옛 남편, 아니, 호적에 아직 남편으로 이름이 올라있는 메넬라오스한테 잡혀 스파르타로 돌아가, 일반 상식 관점으로 보면 웃기게도, 기운 센 천하장사 메넬라오스와 사이좋게 다시 한번 깨를 볶는다. 자기 형 아가멤논은 늘 정확한 예언을 하고도 믿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불행한 예언자 카산드라(알렉산드라)를 데리고 귀환했지만 첫날 발가벗고 목욕탕 욕조에 누웠다가 부정한 미모의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한테 칼 맞아 죽는다. 아가멤논이 아내한테 죽는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클뤼타이메스트라가 제일 좋아했던 맏딸 이피게네이아를 출전 당시 희생 제단에 올렸던 일이다.
에우리피데스는 이 두 가지 내용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어 버린다. 왜? 늘 같은 이야기만 하면 청자는 뻔하게 알고 있는 걸 한 번 더 듣는 일밖에 안 되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기원전 5세기 사람이다. 원작의 빈 틈을 자기가 어떻게 각색을 하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그게 원작의 비의를 콕 집어냈다고 말하긴 쉽지 않다.
에우리피데스는, 파리스가 헬레네를 꼬드겨서 배에 싣고 트로이로 향할 때, 도둑과 나그네와 상인의 신인 헤르메스가 진짜 헬레네를 아무도 모르게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이집트 프로테우스 왕의 궁전으로 옮겨 그곳에서 남편 메넬라오스를 기다리게 해준다. 파리스가 배에 태워 프뤼기아 땅으로 데려간 것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가 아니라 헤르메스가 마법을 써서 만든 헬레네의 환영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헬라스와 프뤼기아 사람들은 허수아비 헬레네를 위해 수만명의 목숨을 걸고 죽고 죽였던 거다. 메넬라오스는 파리스를 죽이고 헬레네의 환영을 되찾아 배에 싣고 귀국하다가 마치 오뒷세이아처럼 길을 잃고 무려 7년 동안 바다 위를 헤매다가, 결정적인 태풍을 만나 거지꼴을 한 채 이집트 해변에 도착했으니, 이때 배에 타고 있던 사람으로는, 메넬라오스와 헬레네(의 허상), 텔라몬의 아들이자 살라미스 섬의 왕 테우크로스 그리고 몇 명 남지 않은 병사들이었다.
전쟁을 10년 했고, 방랑도 7년을 했으니 도합 17년을 기다린 헬레네. 17년 동안 이집트에서는 정의롭고 신망 높은 프로테우스 왕이 죽고 그의 아들 테오클뤼메노스가 왕위를 이었다. 어진 임금 사후는 대개 욕정에 눈이 먼 차기 임금이 자리를 잇는 것이 서양 비극의 전통이다. 테오클뤼메노스는 왕자 시절에 세젤예 헬레네에게 청혼을 했다가 아버지한테 얻어 터진 적이 있었는데 이제 왕이 되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졌다. 이를 견디다 못한 헬레네는 연극 목적상 궁전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자리잡은 선왕의 무덤에 지푸라기를 깔고 그곳에서 기거하며 왕의 청혼을 생까고 있었다. 아무리 왕이라도 지 아버지 무덤에 와서 아버지 말을 거역한 채 헬레네를 억지로 취할 수는 없는 법이라서. 이때 메넬라오스의 배가 이집트 해변에 도착하고 흔히 쓰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거지꼴을 한 메넬라오스가 등장하니, 연극이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해주어야 마땅하게, 이집트 땅을 밟자마자 헬레네를 발견, 무려 17년 만에 부부 상봉하는 장면. 눈물이 앞을 가리겠지? 천만의 말씀. 메넬라오스는 분명히 트로이에서 헬레네를 배에 싣고 왔는데 여기 또 헬레네가 있거든. 어리둥절. 갑분싸. 눈 앞에 아내가 보이자마자 헬레네의 환영이 바람과 함께 사라진 걸 조금 후에 알게 된다. 웃기지? 아무리 기원전 5세기 작품이라고 해도 너무 황당하다. 이후로 꾀를 내서 이집트를 떠나는 것만 남았다. 굳이 스토리를 이야기할 필요 없을 듯.
그러면 세페리스-호프만스탈로 이어지는 <이집트의 헬레나>는 어떻게 될까? 나는 세페리스의 헬레네는 잘 몰라서 검색을 해봤다. 그랬더니 세페리스는 호프만스탈이 아니라 오히려 에우리피데스와 더 가깝다. 이래서 무식하면 용감해지는 거다. 서울 안 가본 놈이 가본 놈하고 서울 얘기하다 싸우면 안 가 본 놈이 이긴다잖는가 말이지. 에우리피데스-세페리스 vs. 호프만슈탈. 이런 구도가 옳다.
호프만스탈의 이야기에서는 메넬라오스가 파리스를 죽이고 실물 세젤예 헬레네를 배에 싣고 출항한다. 귀국하는 도중에 제우스의 동생이자 바다의 큰 신 포세이돈과의 사이에서 영웅 테세우스를 낳은 아이트라가 매넬라오스의 속셈을 눈치챈다. 스파르타로 돌아가 같이 사는 대신 헬레네를 죽여버릴 생각이란 것을. 여신 아이트라는 헬레네를 가여이 여겨 폭풍을 일으키고, 배가 난파하여 부부는 이집트 땅에 도착한다. 아이트라가 이들 앞에 나타나 시치미 뚝 떼고 두 팔을 벌린 채, 웰컴 투 이집트, 환영을 하지만 메넬라오스는 여전히 파리스를 처단한 바로 그 칼로 헬레네의 어여쁜 목을 뎅겅 잘라버릴 생각을 도무지 멈추지 못한다는 걸 알아차린다. 그러다가 정말로 칼을 쳐들려 하자 여신은 요정들을 불러 칼부림을 멈추게 하고, 요정들은 마법을 써서 메넬라오스로 하여금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으며 파리스도 여전히 살아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이어서 헬레네에게도 물약을 먹여 과거를 잊은 채 깊은 잠에 빠지게 만든다.
요정들이 퇴장하자 제 정신으로 돌아온 메넬라오스는 드디어 자기가 헬레네와 파리스 둘 다 죽였다고 믿는데, 다시 아이트라 여신이 와서 헬레네한테 먹였던 물약을 마시게 해 과거를 몽땅 잊게 만든다. 메넬라오스는 올림포스의 신들이 헬레네를 파리스로부터 구출해냈다고 믿고, 잠에서 깬 헬레네는 메넬라오스와 다시 결합한다. 이들은 아이트라에게 자신들을 아는 사람들이 없는 먼 곳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하는데, 2막에 들어서 갑자기 난데없이 사막의 베두인이 나타나 세젤예 헬레네에게 퐁당 반해버려 사랑에 빠지고 이를 파리스로 착각한 메넬라오스가 그를 뎅거덩 두 쪽을 내버린 후 진정으로 헬레네를 사랑하게 되어 우짜구저짜구 막 이런 내용이다.
결론은, 트로이 전쟁, <일리아드>가 괜히 고전 명작이 아니란 말씀. 비록 <일리아드>에는 이런 후일담이 나오지 않지만, 이렇게 저렇게 우리 귀에 가장 익숙하게 된 이야기는, 많고 많은 것들 가운데 제일 근사하고 그럴듯한 것으로 결정되는 거 아닐까 싶다. 헬레네 이야기도 내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내용이 에우리피데스가 됐건, 호프만스탈이 됐건 간에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보편적이고 재미있었다.
<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그것도 이야기하고 싶지만 지면이 꽉 차서 아무래도 당신이 직접 읽어보셔야겠는데, 그것도 이하동문, 원래 내가 알고 있던 이야기가 제일 그럴듯하고 재미있다는 것만 덧붙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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