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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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트릭 모디아노. 201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이때 문학동네 좋아서 난리났었다. 자기들이 모디아노의 책 몇 권에 대한 판권을 확보하고 있었거든. 나도 그때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었다. 그후 2년 터울로 <도라 부르더>와 <까트린 이야기>를 읽었는데, <까트린 이야기>를 덮고 ”이 세 작품으로 난 위대한 노벨상에 빛나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은 더 이상 읽지 않기로 결심했다.” 라는 독후감을 남겼다. 이것이 2018년 봄.

  그리고 시간이 지나 2025년 가을이 되었을 때, 나는 전에 결심한 것을 까맣게 잊고 다시 도서관 서가에서 모디아노의 책을 한 권 골랐다. <잃어버린 거리>. 역자 김화영이 놀랍게도 21쪽 분량의 ‘역자 해설’이 아닌 ‘옮긴이의 말’을 썼다. 1988년에 책세상에서 초판 출간한 것을 30년 후에 문학동네에서 다시 초판 출간했단다. 이거 초판이라 해도 되는 건가? 중판 아냐? 하여간 뭐, 문학동네에서 처음 찍은 건 맞으니 초판이라 했겠지. 독자가 웃건 말건.


  영국인 탐정 소설가 앰브로즈 가이즈가 샤를 드골 국제 공항에 내려 세관에서 입국심사를 받으며 깊은 감회에 젖는다. 프랑스에는 20년 만에 온다. 앰브로즈 가이즈의 손에는 사자 두 마리가 금박으로 찍히 옅은 녹색의 여권이 들려 있지만, 20년 전에 파리를 떠날 당시 열네 살에 난생 처음 받은 프랑스공화국의 이름으로 발부 받았던 여권은 남색 표지였었다. 가이즈는 모국어인 프랑스 말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습관을 잊어버린 지 오래다. 모든 생각과 표현은 전부 영어로 한다. 아내도 영국인. 두 아이도 영국인. 며칠 후에 영국인 아내와 아이들은 스페인 바스크 지역에 있는 아내의 언니/자매의 집으로 피서를 갈 예정이다. 가이즈는 파리에서 일본의 한 출판사와의 비즈니스, 계약 체결 때문에 이곳에 도착했다. 원래는 만나서 계약서에 서명하고, 선불금 수표를 건네 받은 바로 다음 날 바스크로 날아갈 생각이었다.

  7월. 파리의 7월. 호텔 지배인은 완전한 영국인으로 보이는 가이즈에게 영어로 인사를 하고, 혼자 파리에 온 것을 알아챈 다음에는 밤의 은밀하고 특별한 파리 경험을 원한다면 이곳으로 전화를 해보라고 “헤이우드”라는 상호가 달린 명함을 밤마다 권한다. 헤이우드. 가이즈의 기억에서 잊히지 않는 이름 가운데 하나.


  20년 전, 막 20세가 된 프랑스인 장 데케르는 피치못하게 영국으로 건너가 막막했다. 당시에 장은 문학이건 아니건 일단 먹고 사는 게 급해서 뭔가를, 무엇이라도 해보자고 생각해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게 자신을 스타 작가로 만든 추리소설 <자비스> 시리즈라고 말했다.

  일본 출판사에서 계약 담당자인 요코 다쓰케에게 <자비스>의 사진 소설 시리즈 제작 판권, 이를 TV 연속극으로 제작하는 판권, 일본의 기미하라 연쇄점용 피규어 상품으로 개발하기 위한 계약서에 서명을 하자마자, 다쓰케가 물었다. 자신은 왜 일본인들이 가이즈의 책에 열광하는 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가이즈도 동감한다. 다쓰케는 한 마디 더 했다. <자비스>는 문학이 아니고 심지어 문학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이란다. 가이즈 역시 같은 생각이다. 그래서 자기가 <자비스>를 쓰기 시작한 내력을 이야기해준 것이다. 딱 위에 쓴 것만.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프랑스 출생이기는 하지만 어머니가 파리에서 가장 멋진 쇼걸이었는데 영국에서 온 여성이었다고 말한다.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아니라는 데 한 표, 만 원 건다.

  “프랑스에서는 왜 떠났어요?” 다쓰케가 묻는다.

  “인생이란 앞뒤로 이어진 여러 주기들의 연속이랄까요…” 자비스가 대답한다.

  20세에 프랑스를 떠서,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이름을 바꾸고 추리소설을 써 성공한 작가가 20년이 흐른 후 이제는 완전한 외국인의 신분으로 파리에 도착해 완전히 변해버려 낯선 도시가 된 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기억 또는 추억에 잠긴다. “이걸 <파리에 온 자비스> 비슷한 제목으로 시리즈의 제9권으로 써보시지 않겠습니까? 분명히 일본 독자들이 좋아할 것 같은데요.”

  자비스 또는 장 데케르는 대답한다.

  “이를 테면 작가 자신이 직접 쓴 예술가의 초상이군요. 만일 쓴다면 이번엔 프랑스 말로 쓸 겁니다.”

  그리고 이들은 굳게 악수하고, 떠난다. 계약 선불금 8만 파운드 수표를 끊어 건넨 요코 다쓰케는 다음날 아침 비행기를 타고 도쿄로 갈 것이지만, 앰브로즈 가이즈 또는 장 데케르는 런던의 집에 전화를 걸어 아내의 비서에게 한 두 주 정도 파리에 더 머물겠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20세의 장 데케르는 파리의 젊은이가 아니었던 것처럼 읽힌다. 하여간 그때 겨울. 그는 오트사부아 지방에 있는 스키장에서 주머니에 딱 돌아갈 차비만 남을 때까지, 그래봐야 며칠 동안 휴가를 지내고 있었다. 어디로 돌아가야 할 지 자신도 몰랐다니까, 스무살의 유럽인답게 집에서 독립을 했는데 아직 완전히 정착하지 못해서 떠돌고 있는 상태였던 것 같다. 이에 대해 모디아노는 거의 아무 말 하지 않는다. 하늘도 도와주지 않아 갑작스레 눈보라가 몰아쳐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할 지경이라 눈에 띄는 아무 호텔에 몸을 피해 들어갔는데, 폭풍까지 불어 전선이 끊어져 손전등으로 조명을 대신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형 가방을 포함한 열 개의 트렁크를 파리 자기 집까지 운송해줄 방법을 찾아달라는 금발의 여성. 블랭 부인. 호텔의 사장은 자기가 호텔을 절대로 비울 수 없는 처지라서 파리까지 짐을 옮길 상황이 되지 않고, 누가 도와줄 사람도 따로 없지만, 한편으로 블랭 부인이 이 호텔의 소유주라서 난감한 지경으로 빠지고 말았다.

  장이 부인을 한 눈에 알아봤다. 짧은 군복무 시절 부상을 당해 3개월간 입원해 있을 때 병원에서 본 낡은 잡지의 “어떻게 부자가 되었나”라는 기사에 남편과 대리 경주마부와 함께 찍은 사진의 그 부인이었다. 남편 뤼시앵 블랭은 가히 미다스의 손을 가진 것처럼 돈을 버는 데 천부의 자질을 드러내 크고 큰 부를 이루었지만, 재주 있는 사람답게 아름다운 아내 카르멘 블랭을 혼자 남기고 일찍 죽었다. 장의 눈 앞에 있는 여성이 바로 과부 카르멘 블랭 여사.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디로 돌아갈 곳도 딱히 없는 상태였던 장 데케르는 자신이 먼저 접근해 직접 파리의 집까지 모든 트렁크를 실수 없이 운반해주겠노라고 제안한다. 그를 본 블랭 여사는 장의 모습에서 결코 얼굴이 비슷하지는 않지만 베르나르 랄프 파르메르, 카르멘이 1943년에 이이가 소유한 영업소에서 무희로 일하고 있을 때부터 1년간 연인이었고, 자신의 몸에 들어온 첫 남자인 파르메르를 닮아 혹시 그의 아들이 아닐까 싶은 생각에, 주저하지 않고, 그에게 자기 짐을 맡기고 자신은 가까운 비행장에서 스위스로 향한다. 나도 내일 파리에 도착할 거예요, 라는 말만 남긴 채.

  이렇게 장 데케르는 이틀 동안 호텔 수하물 배달원이라는 직업을 갖게 되고, 수하물 배달원이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이 될 것을 그때는 몰랐다.


  돈이 많은 만큼, 정도 많고 친구도 많고, 애인은 별로 없는 것 같지만, 매일 유흥업소에서의 만찬과 금준미주를 멈출 줄 모르는 카르멘 블랭. 장 데케르는 카르멘이 곤란한 지경에 나타나 스스로 봉사를 해주었으며, 첫 애인 비슷한 분위기를 가졌다는 점에서 카르멘은 그를 자기 친구들과 한 팀을 이루도록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많은 친구를 만나는 장. 하지만 거의 아버지 뻘이다. 모두 카르멘 블랭과는 같이 잔 것처럼 보인다. 장보다 열일고여덟 살 더 먹은 카르멘. 그러니 나이 많은 남자들과 혼인을 하던 시절이었으니 남자들은 아버지뻘도 큰아버지뻘일 수도 있었을 듯하다.

  이 가운데 훗날 앰브로즈 가이즈라는 이름으로 <자비스>라는 시리즈를 읽고 그에게 편지를 보낸 인물이 있었다. 로크루아. 자기가 프랑스를 떠나야 할 시점에 잠시라도 숨겨주고, 영국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마지막 편의를 제공한 고마운 사람.

  이제 파리에 두 주 정도 더 머물기로 작정한 앰브로즈 가이즈는 전화번호부에서 로크루아의 이름을 찾아, 다이얼을 돌린다.

  “여보세요? 저 죄송하지만 기타 바이에 좀 바꿔주시겠습니까?”

  여자가 여전히 담배를 피운다는 듯이 쉰 목소리로 받는다. “전데요.”

  “장 데케르예요. 아마 잊어버렸을 지도 모르지만.”

  “장 데케르라고요? 그러면 앰브로즈 가이즈란 말예요?”

  기타 바이에. 예전 로크루아의 비서. 장이 파리를 떠난 후에 결혼한 것이겠지.

  꼼꼼하게 장 데케르와 앰브로즈 가이즈를 챙겨온 로크루아는 세상을 떠났고, 그의 많은 수집자료에 당연히 장 데케르에 관한 것도 있다. 심지어 서류철 표지에 로크루아 특유의 큼직한 글씨로 “가능하다면 장 데케르에게”라고 쓰인 것도 있었다. 은인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장.


  앰브로즈 가이즈 또는 장 데케르는 로크루아의 서류를 들쳐보고, 서류 속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다시 발견한다. 그리고 드디어 마음먹는다.

  자신이 파리를 떠나기 전까지 로크루아의 자료와 앰브로즈 가이즈가 이방인으로 파리에 도착해, 장 데케르가 파리를 떠날 때까지의 과정을 한 편의 프랑스어 소설로 쓰겠다고. 그리고 정말로 썼다. 이렇게 쓰인 소설이 <잃어버린 거리>다.

  이게 웬 일? 내가 여태 읽은 모리아노하고 완전 다르다. 심지어 재미도 있으려고 한다. 거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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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10-29 0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모디아노라니… 믿기 어렵지만 한번 믿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25-10-29 15:36   좋아요 1 | URL
아오... 팍 가보셔요!

꼬마요정 2025-10-29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요? 저도 한 번 믿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25-10-29 15:37   좋아요 1 | URL
넵! 근데 요정님 독서 경향으로 봐서는 좀 미지근할 수도 있을 듯하네요. ㅋㅋ

yamoo 2025-10-29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요? 에이~
저는 믿지 않겠습니다..ㅎㅎ
그래도 모디아노 소설은 기본 평타 이상은 치니 리스트에 넣고 읽어 보겠습니다. 모디아노 몇 권을 읽어 봤는데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와 비슷한 작품들만 있어 좀 거시기 했는데,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디아노라니...저도 걍 읽어 볼럅니다~~ㅎㅎ

Falstaff 2025-10-29 15:38   좋아요 0 | URL
저도 상점들 거리 부터 모디아노는 팔자에 맞지 않는 거 같다고 생각했습지요. ㅎㅎ
함 읽어보셔도 좋을 듯한데 큰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ㅎㅎ
 
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 - 2023 브라게문학상 수상작
프로데 그뤼텐 지음, 손화수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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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데 그뤼텐. 노르웨이 남서쪽에 있는 하르당에르 피오르 지역의 작은 도시 오다에서 1960년에 출생한 쥐띠 남자.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이고 노르웨이에서 작가가 받고 싶어하는 문학상은 싹 받았다는 것만 위키피디아에 적혀 있다.


  자신의 출생지가 피오르 지역. 피오르가 뭔지 아시지? 옛 시절에 큰 빙하 지역이었다가 빙하가 녹으면서 얼음이 산의 측면을 깎아 경사가 급한 깊은 바다를 만든 곳. 그래서 이이의 2023년 작품, <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의 주인공 닐스 비크의 직업도 피오르 지역 이쪽과 저쪽을 왕복하며 사람과 재화를 운반해주는 페리 선 MB 마르타 호의 선장이다.

  제목이 “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이니까 독자는 책을 읽기도 전에 오늘 닐스 비크가 죽을 것임을 알고 시작한다. 사고? 북유럽 소설에서 흔해 빠진 피살? 아니다. 닐스 비크의 두 딸이 벌써 쉰 살은 된 것 같이 보이는 노인이다. 자기 페리선과 같은 이름을 가졌던 아내 마르타 역시 오래 전에 뇌졸중에 시달리다 세상 마감했다. 그리고 오늘, 닐스는 자신이 이제 다 살았다는 것, 그래서 오늘 죽을 것임을 미리 알고 전쟁 직후에 구입해 평생 함께 한 페리를 타고, 오랜 세월 누비고 다닌 피오르 위에서 마지막 숨을 쉬려 한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하면, 사람이 착하면 죽음도 미리 언질을 주어 자기 생을 잘 마감할 수 있게 해주나 보다. 이렇게 생각할 정도로 닐스 비크는, 내가 여태 살면서 한 명도 만나본 적 없을 정도로 순수하고, 순박하고, 정직하고, 곧은, 이런 미덕을 다 합쳐 한 마디로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이의 죽음을 하늘도 슬퍼할 정도로.


  MB 마르타호. 그냥 마르타라고 부르는 낡은 페리. 길이 36피트, 너비 9피트의 흰색 참나무 배를 사서, 손재주도 좋은 닐스 본인이 12마력 엔진을 장착한 위풍당당한 범선. 선실과 조타실도 직접 제작하는 등 범선을 페리로 바꾸기 위해 배를 사고 14개월을 투자했다. 아내 이름 마르타를 배의 선명으로 고르자 이를 마땅하지 않게 생각한 아내에게 “그래야 내가 언제나 당신 안에 들어가 있을 수 있지.”라고 대답했고, 마르타는 “아이, 징그러워.”라고 투정했다는 배. 흰색 선체에 선실에 빨간색 줄무늬를 두른 피오르 지역의 가장 이름난 페리선.

  그러나 배 이야기는 조금 미루자.

  새벽 5시 15분에 닐스 비크의 마지막 날은 시작한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건장한 몸집, 희끗하게 변한 머리카락과 거친 피부. 주름진 얼굴과 벗겨진 이마를 한 닐스 비크 노인이 11월 8일, 비 내리는 고요한 새벽에 3대가 살았던 집을 나서기로 작정한다. 그는 엽서를 써서 커피잔 옆에 놓는다. 두 딸, 엘리와 구로가 읽겠지. 오늘 이후에 절대로 집을 두고 다투지 않겠다고 약속한 자매. 한갓진 피오르 지역이 지금은 노르웨이와 세계 각지의 부자들이 여름별장으로 개발하는 바람에 부동산 가격이 하늘을 찌른다. 부모의 집과 땅을 두고 형제 자매 간에 얼굴 붉히는 일을 너무도 많이 본 닐스. 그는 이 지역에서 집과 보트창고, 창고 주변의 땅을 아직까지 팔지 않은 단 한 명 남은 피오르 주민이었다.

  “나는 이 집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란다.”

  6시 45분이 되자 닐스는 침대 매트리스를 집 밖으로 끌고 나가 등유를 끼얹고 불에 태운다. 수십년 간의 추억. 지극히 사적인 삶이라 다른 건 몰라도 매트리스만큼은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 온갖 내밀한 부부간의 사랑과 냄새가 묻어 있는 기념물. 오, 사랑하는 마르타. 그녀가 은혼식 선물로 준 오메가 시계를 차고, 배를 운항하면서 밀려올 절대 적요를 물리쳐온 라디오와 힙플라스크(휴대용 술통)을 챙긴 닐스 옆에 개 루나가 와 있다. 태어나 눈 뜬지도 얼마 안 되어 도살되기 바로 전에 닐스가 품에 안아 들어 함께 살기 시작한 개. 20년~25년 전에 트럭에 치어 죽었다. 죽은 후에도 오래 함께 해 이제는 사람의 언어로 배, 비행기, 정치, 축구 등 온갖 관심사에 대해 대화를 해 온 동행. 닐스는 기꺼이 마지막 항해에도 루나를 동행시킨다.

  이제 8시 30분. 아침이긴 하지만 높은 위도의 11월이라 여전히 밤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 하긴 닐스는 이미 시간을 떠났다. 이제 닐스는 루나와 함께 마르타호에 올랐고, 선실에는 그가 수십년 동안 써 온 대충 스물다섯 권을 될 것 같아 보이는 항해일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배에 올라 묶은 줄을 풀고 닻을 올린다. 고개를 드니 숲 속에 죽은 자들이 몰려 있다. 외로운 이들이 이제 서로를 찾는 것일 터. 환영幻影, 환영일 수밖에 없을 것. 죽은 자들이 그에게 온 것일까? 저들 모두 닐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다. 자기가 만났던 무수한 사람들. 이제는 자기보다 먼저 시간의 벽을 넘어선 이들. 그들은 닐스의 속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 스물다섯 권의 항해일지 안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닐스는 항해일지를 편다.

  마르타호에 올라 탑승료를 지불한 첫 승객.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쉰베 네스베와 스베레 네스뵈.


  닐스 비크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뱃사람은 오직 배만 믿는다. 예로부터 뱃사람들은 헤엄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 배가 가라앉으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가장 최선의 방법은 즉시 익사하는 거였단다. 수영을 할 줄 알면 그만큼 고통만 길어질 뿐이었으니.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둘러싼 피오르, 얼음바다 위에 떠 있는다 해도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아무도 몰랐을 터이다.

  닐스 역시 끝까지 수영하는 법을 배우려 하지 않자, 피오르 지역의 여자들처럼 빼어난 미인이었던 사랑하는 아내 마르타는 닐스의 귀싸대기를 후려쳤다. 한 번 더. 또 한 번 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나야지. 살아날 생각을 해야지. 집에 남은 아내와 두 딸은 어떻게 하라고. 그래서 닐스는 피오르의 뱃사람답지 않게 북해의 차가운 바다 속에 들어가 마르타한테 수영을 배웠다. 평생 한 번도 실제로 써먹은 기회가 없어서 다행이지만. 마지막으로 항해하는 오늘까지.

  이제 닐스는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들은 하나같이 작은 옛 시절의 선착장에 앉거나 서서 그를 기다린다. 기타를 쳤고 노래를 잘 부르던 소년 욘 안데르손, 거친 땅에서 수수한 농부로 살다가 앞으로 고꾸라져 흙에 얼굴을 파묻고 죽은 옌스 헤우게, 피오르 건너 도시에 가 총으로 자기 얼굴을 쏴 자살해버린 막냇동생 이바르 비크, 외지에서 와서 피오르 사람과 학생들에게 불만 많고 깐깐했던 학교 선생 잉그리드 알스타세테르, 그리고 전직 장관, 평생 하이힐을 신고 다닌 1968년 미스 노르웨이, 그리고 사람들, 사람들. 브리타 셀도스, 에이나르 스보르테비크, 프레드릭 모스, 아문 모게, 릴리 글로펜, 마르기트 예센달, 에길 에릭센, 엘렌 쇠르트베이트, 그리고, 그리고 틀림없이 닐스의 아내 마르타와 사랑을 나누었고, 서로 사랑을 했을 미국인 로버트 소트,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이들 모두 죽은 자들이다. 그래서 귀신들.


  요즘 죽은 자들, 귀신 이야기 많이 읽는다. 이 책에서도 오늘 죽을 사람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이미 죽은 자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당시를 생각하고, 추억한다. 살아 있는 자들은 오직 두 명, 엘리 비크와 구로 비크. 두 딸.

  죽은 자들. 죽었다가 다시 죽어가는 사람 앞에 나서는 이미 죽은 자들을 귀신이라 부르니까, 이 책은 당연히 ㅆㄴㄹ 소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이고, 나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를 근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를 빼고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의 평은 꽤 괜찮다.

  하지만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를 제하더라도, 주인공 닐스 비크, 조금은 완고한 노르웨이의 변방 피오르 지역의 연락선 선장이, 정말 거의 결점이 없는, 너무도, 너무도 선하기만 한 인간으로 살다가, 지극하게 선한 인간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나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더라는 것. 아무리 빙하 녹은 물 위에서, 빙하 녹은 물만 먹고 살았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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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10-28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이거 왠지 좋아보여서 보관함에 담아뒀던 책인데... 빼야겠습니다.
ㅆㄴㄹ 소설이었다니....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5-10-29 04:28   좋아요 0 | URL
다른 독자들은 평이 좋다니까요! ㅎㅎㅎ
 
나는 바보다
셔우드 앤더슨 지음, 박희원 옮김, 김선옥 해설 / 아고라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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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년 전에 앤더슨의 소설집 《와인즈버그, 오하이오》를 참 괜찮게 읽었다. 지금 당시에 쓴 짧은 독후감을 읽어보니, 그때는 독후감 쓰는 습관이 이렇게 커질 줄은 꿈에도 몰랐을 때라 짧게, 그저 메모를 넘어서는 정도밖에는 쓰지 않았는데, 소프트한 그로테스크, 소외되고 고독한 군상들, 단편소설 습작하는 분들의 필독서 운운 같은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그의 우화 같은 죽음에 관해서도.

  지금은 《와인즈버그, 오하이오》의 어떤 모습에 그렇게 좋은 인상을 받았는지 거의 기억나는 게 없다. 그럼에도 누가 미국의 단편소설을 이야기하면 꼭 셔우드 앤더슨을 말하고 싶어 한다. 심지어 얼마 전에 읽은 필립 로스의 장편 <울분>에서 뉴욕에 사는 유대인 주인공 마커스가 대학을 오하이오에 있는 와인즈버그 대학에 들어가는 것도 인상깊었다니까? 아마 로스 선생도 하고 많은 동네 가운데 콕 집어서 와인즈버그를 선택한 이유가 있지 않겠나 싶다. 어떤 엽기적 말썽을 부려도 소프트한 그로테스크로 덮어둘 수 있는 외딴 동네. 아닐까? 넘겨 짚은 것이긴 하지만 뭐 그런들 어떠랴.


  단편소설 열두 편을 실었다. 《와인즈버그, 오하이오》와 겹치는 작품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확인하기 위하여 전작을 한 번 더 읽어볼 생각까지는 나지 않아서, 같은 작품을 제목만 바꿔 실었을 수도 있지만 그건 알아서 하시라. 3백 페이지 분량이지만 하루면 뚝딱 다 읽어버린다. 작은 판형에 큼직한 글씨체.

  셔우드 앤더슨이 미국의 대표적인 지방주의 작가라고 알고 있었다. 이 책 역시 미국의 중서부 지역을 무대로 하는 것들이 많고 가끔가다 시카고나 펜실베이니아 같은 대도시를 배경으로 하기도 한다.

  전형적인 단편소설. 이이가 1876년에 태어나 1941년에 숟가락 놓았으니, 소설 속 이야기와 묘사 같은 스타일에서 새로운 걸 찾는 건 애초에 포기하고 읽는 편이 좋다. 좀 낡은 이야기 속에 <숲속의 죽음>처럼 소외당하는 이웃, <달걀>처럼 미국식 성공을 위하여 아등바등 삶을 이어가는 보통의 사람들, <슬픈 나팔수들>의 등장인물 같이 성인으로 탈각해가는 젊은이들을 차분하지만 앞에서 말했듯 소프트하게 그로테스크한 시각으로 조망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나처럼 앉은 자리에서 한 방에 후딱 읽어치우면 나중에는 좀 질릴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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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5-10-27 2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밌을 것 같습니다. 이 책 언제 샀는지 집에 있다는 걸 알고 놀랐습니다. ㅋㅋㅋㅋ

Falstaff 2025-10-28 03:57   좋아요 1 | URL
이 책 신간인데 ㅋㅋㅋ 언제 샀는지 모르신다니.... 무지 재밌지는 않고요 그냥 그런데 좀 재미있는 정도입니다. 벌써 오래 전 사람인지라서 말입지요.

꼬마요정 2025-10-29 14:08   좋아요 1 | URL
얼마 전에 책 살 때 같이 샀네요... 헐.... 장바구니에 마구 담아놓고 선택해서 결제하는데 그 때 같이 체크되었나봐요 ㅋㅋㅋㅋㅋ 아 놔.... 책 제목이랑 제 상황이 같아요 ㅋㅋㅋㅋ
 
비극의 일인자 - 김성민 희곡집
김성민 지음 / 연극과인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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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작가 김성민이 극단 ‘피오르’의 대표라는데, 200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당선한 중견 극작가이고, 이러저러한 상을 받았다는 수상 경력 이외의 바이오는 찾기 힘들다. 같은 이름을 한 인사들도 참 많다. 극작가, 작가, 소설가, 만화가, 화가, 연극인, 심지어 몇 년 전에 잘 나가다가 마약 복용이 들통나 TV에서 퇴출당하고 스스로 삶을 거둔 전직 연기자 김성민까지.

  《비극의 일인자》를 읽은 다음이면, 특히 제일 뒤에 실린 <마지막 물방울 너는 영원해>를 읽고 김성민을 검색하면, 이 극작가가 여성이라는 걸 알고 뭥미? 할 수도 있다. 나는 그랬다.


  세 편의 작품을 실은 희곡집. 표제작 <비극의 일인자>는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시행하는 창작팩토리 대본공모에 당선한 것을 필두로 2013년 공연예술창작산실 우수작품제작 지원에 선정되고, 2014년 공연예술창작산실 우수작품”재공연”지원작품에 다시 선정되었단다.

  <비극의 일인자>는 마치 부조리극처럼 읽힌다. 2012년 작품이니 소설가 한강보다 훨씬 앞서 우리나라의 극작가 고일봉 씨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시기, 고일봉과 고일봉의 (죽은)아내, 고일봉씨의 처음 모습일 수도 있고 그럴 것 같은 젊은 작가, 젊은 작가의 아내, 고일봉 씨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작가의 첫사랑 등이 출연한다.

  하여간 고일봉 씨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어 아직 스톡홀름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기 전. 각 매체의 기자들이 고일봉의 집에 들이닥쳐 인터뷰를 하려 하지만 고일봉은 특별히 할 말도 없다. 서둘러 취재를 마친 기자들이 빠져나가자, 이미 죽은 고일봉의 아내의 노래소리가 들려오고, 드디어 부부가 만난다. 노벨문학상이라는 큰 성취를 이룬 작가가 옛 시절을 회상하는 것일 수도 있고, 회한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겠다. 연출가가 어떻게 극을 만드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할 수 있을 듯. 이 작품이 부조리극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부조리극처럼 연출하는 것도 상당히 그럴 듯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다.


  두번째 순서로 실린 <숲 없는 숲>은 귀신들의 난장판이다. 약자로 ㅆㄴㄹ. 귀신 씨나락 까먹는 얘기.  말이 그렇다는 거다. 죽음과 탄생. 아이를 원하는 처녀와 농부. 출산 행위가 아니라 아이를 낳고 싶은, 인간의 가장 오랜 본능을 잇고 싶어하는 처녀의 소원을 들어주려 저승 명부 순서를 뒤바꾸는 저승사자. 저승의 염라대왕급은 아니지만 대신 급의 판관들, 이런 이들이 등장해 삶과 죽음과 생명의 연속, 즉 근본적으로 “삶”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한다. 말이 그렇다는 거다. 여차하면 나처럼 ㅆㄴㄹ 정도로 읽을 수도 있다. 극작가 김성민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숲 없는 숲>은 공연을 해도 보러 가지는 않았을 거 같다.

  그런데 사실, 연극의 대본인 희곡을 읽고 근본적으로 “삶의 의미”에 대한 것이라는 말보다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표현도 없다. 연극 자체가 삶의 의미에 관한 다양한 도구라서. 수다한 연극과 희곡을 보고 읽으면서, 삶의 의미에 대한 작품이라고 하면 2 곱하기 2는 4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하품나는 말일 터이다. 그러니까 이런 독후감을 쓰는 게 사실은 면목 없는 일이다.

  노르웨이 소설가 프로데 그뤼텐의 <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에서도 주인공인 뱃사람 닐스가 입센의 연극을 보고 “3막에 걸친 연극이 펼쳐지는 동안, 그는 조명 아래 비추어지고 있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삶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한다. 그래, 연극이 바로 그거라니까? 삶의 의미에 관한 것. 자기 삶이 아니라면 유사 이래로 그렇게 많은 관객이 공감을 했겠느냐고.


  제일 뒤에 실린 <우주의 물방울 너는 영원해>는 왕년의 잘 나가는 연극배우이자 지금은 늙어 서울 변두리의 룸살롱에서 기타 반주해주고 받는 팁으로 먹고 사는 악사 일봉의 이야기. 그렇다. 일봉 씨가 또 나온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극작가 고일봉 씨가 아니라, 왕년의 연극배우 일봉 씨. 남성의 로망, 우뚝 선 봉우리 한 개, 일봉 씨. 제대로 서는지 아닌지는 확인한 바 없지만 젊었던 한 시절엔 꽤 대단했던 거 같다. 아무리 연극판에서 날고 뛰어도 TV 조연으로 한 번 뜨는 것보다 훨씬 배고팠던 시절이니까 그냥 알아서 판단해도 좋을 듯. 일봉씨가 평생 사랑했던, 그러나 연극 배우들의 생활에 비추어, 그리 호강시켜주지는 못했던, 호강? 호강 비슷한 것도 바라지 않았으니 그저 크게 불편함 없이 살게 해주지도 못한 아내 화수는 지금 뇌경색으로 오늘 내일 한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나 한참 예쁠 때 사고로 죽은 아들 동수. 화장해서 산골을 하지 않고 매장을 했다. 당시엔 죽은 아들 생각나면 한 번씩 둘러보겠다고 했겠지. 이제 화수가 자기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들 무덤에 한 번 가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일봉씨 부부와 일봉의 친구 만수, 만수의 아들이자 일봉이 악사로 일하는 룸살롱 웨이터 병만, 이렇게 넷이, 화수의 휠체어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밀어 나중엔 병만이 화수를 들쳐 업고 동수의 무덤에 가, 무덤의 풀이나마 한 번 쓰다듬고 내려온다. 화수는 죽고, 일봉은 월세방에서 쫓겨나고, 월세방에는 새로 신혼부부가 와서 자리를 잡고, 그렇게 삶은 이어진다.


  이런 작품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쪽. 죽음, 귀신, 사후세계, 영적 교류 같은 4차원적 이야기들이라 그냥 훅훅 읽었다. 이런 책 읽으면 괜히 극작가한테도 미안한 기분이 든다. 김성민 씨, 미안합니다. 이렇게밖에 쓰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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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24
미르체아 커르터레스쿠 지음, 백승남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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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마니아 부크레슈티에서 태어난 미르체아 커르터레스쿠는 1956년생 잔나비띠라서 그런지 문학적으로 재주가 많다. 시인, 장편, 단편 소설가, 문학평론가에 에세이스트로 명함을 박았다. 부쿠레슈티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루마니아 어문학 교수로 재직했는데, 흔히 “헤르타 뮐러와 함께 루마니아의 대표작가”라 불리는 거 같다. 헤르타 뮐러는 루마니아에서 성장했지만 끝까지 독일인 정체성을 고수한 독일 작가 아닌가? 뭐 좋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커르터레스쿠의 《멜랑콜리아》를 작품집, 그러니까 중단편소설 모음집으로 보아야 할까, 프롤로그, 3부로 이루어진 본문, 그리고 에필로그로 구성된 장편소설로 읽어야 할까? 이것부터 헛갈린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는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독재 체제에 시와 음악과 소설로 저항한 ‘80년대 세대’ 작가로서 루마니아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정립한 미르체아 커르터레스쿠의 단편집 《멜랑콜리아》(Melancolia, 2019)” 딱 단편집이라고 못박았다. 그러면 책 표지나 하여간 독자가 읽기 시작하기 전에 어디다 단편집이라고 좀 적어주면 덧나나? 무슨 평론가도 아니고 하다못해 문학 강의 한 번 들어본 적도 없는 생짜 아마추어 필부가 장편소설인 줄 알고 읽게 만들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지.

  근데 다 읽고나서 보니까, 굳이 이 책을 작품집, 단편집이라 생각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싶었다. 본문격인 “멜랑콜리아”는 다섯 살 아이가 주인공인 <다리>, 여덟 살 먹은 소년인 주인공을 하는 <여우> 그리고 열다섯 살 청소년 ‘이반’이 주인공인 <껍데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껍데기>에서 인간의 성장과정을 곤충의 탈각脫殼, 변태變態 단계로 보려 애쓰기 때문에 다섯 살과 여덟 살의 아이/소년 관점 역시 한 인간이 성장, 즉 탈각하는 순간의 포착이라 해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곤충의 경우에는 완전 변태, 불완전 변태, 알-애벌레-(번데기)-성충의 단계를 거치지만 인간은 시도 때도 없이 각 개인의 차이에 따라 숱하게 변태 또는 탈각의 과정을 가진다는 주장도 뭐 타당하겠지. 물론 가장 큰 탈각, 변태의 과정은 사춘기가 아닐 수 없을 것이고.

  하지만 “루마니아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정립한” 미르테아 커르터레스쿠는 쉽게 읽히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한국외국어대학 루마니아어과 교수인 역자 백승남이 이 말을 들으면 실소를 금하지 못하겠지만, 다섯 살 아이가 “주인공”인 <다리>는 결코 다섯 살 아이의 시선으로 본 세계가 아니다. 이 작품이 아이가 혼자 집에 있는 몇 시간 동안의 “집”이라는 공간과 아이의 세계를 묘사했으나, 시각은 63세 나이든 작가의 것이다. 당연히 여덟 살 소년이 주인공인 <여우>도 마찬가지이고 <껍데기>역시 같다. 커르터레스쿠가 자신의 연구실에 박혀 자신의 혹은 남성 일반의 저 유소년과 사춘기 시절을 “포스트모던”하게, 멜랑콜리하게, 그리고 아무리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읽어도 작가가 주장하는 것을 정확하게 받아들이지 못할 방식으로 애매하게, 몽롱하게, 지극한 방식의 은유로 펼쳐낸다. 그리하여 독자는 책을 읽기 전에 마음을 단단히 가져야 마땅하다.

  만일 나처럼 《멜랑콜리아》를 장편소설로 읽는다면, 본문의 1부 격인 <다리>에서 다섯 살 먹은 주인공 ‘아이’가 아무도 없는 자기 집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지 한 번 볼까?


  시작부터 파격적이다. “어느 날 아침에 엄마는 장을 보러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다른 독자는 모르겠고 나는 처음부터 죽여줬다. “허물처럼 벗어던진 브래지어가 / 나무의자 등허리에 걸려있고 / 사랑은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제목은 잊었다. 최승자의 시 첫 구절인데 아마 시집 《즐거운 일기》에 실렸지 않나 싶다. 하여간 “엄마는 몇 주, 몇 달, 몇 년, 많은 날이 지나갔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다리>를 다 읽으면 이 구절을 왜 썼는지 이해가 가지만 처음엔 그렇구나, 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다. 아이는 오래 전부터 시간 감각을 잃었다는 것. 그리하여 몇 주, 몇 달, 몇 년 동안 정말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엄마는 영원히 아이와 이별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나 그건 그냥 보통의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고, 아이 입장에서는 몇 주, 몇 달, 몇 년의 시간이 흐른 것 같은, 오래오래,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엄마가 커다란 장바구니를 들고 아파트 현관문을 열 수도 있는 거다. 물론 영원한 아듀일 수도 있는 거고. 이걸 커르터레스쿠의 작품을 처음 읽는 독자가 알아차릴 방법은? 없다. 그냥 당하면 된다. 당해야 하고 당할 수밖에 없다.

  이제 집은? 텅 빈 상태. 아이는 자신 혼자 있는 집에서 탐험을 시작한다. 자신의 새로운 인생에 슬프고 이상한 매력을 느끼면서. 그리고 아이답게 이런 상태에 쉽게 익숙해진다. 사실은 엄마한테 단단히 주의를 들었겠지. 집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그렇다고 나가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나갈 수 없는 상태이지만. 그리하여 아이는 집 밖으로 나갈 방법을 만들어낸다. 먼저 발코니. 문 밖으로 가지가 무성한 미루나무의 꼭대기가 있는 곳. 미루나무 너머로는 벽돌을 쌓아올린 공장이 있고, 공장 꼭대기는 반원형 둥근 창문에 사람의 그림자가 보인다. 쿠이드라트 고무공장. 둥근 창문의 꼭대기에서 담배를 피우던 노동자. 아이는 그곳과 연결하는 투명한 다리를 만든다. 그리고 이 투명하고 딱딱하지 않은, 아이가 마음먹은 대로 구부러지기도 하는 다리를 타고, 마치 수영장의 미끄럼틀처럼, 그러나 너무 빠르지 않는 속도로 아이가 원하는 장소까지 미끄러질 수 있다.

  이름하여 “하늘의 다리.” 저 먼 기억 속의 나. 최인훈의 <하늘의 다리>를 나는 제목만 보고 이 다섯 살 아이가 생각하는 바로 그 다리를 연상했었다. 최인훈의 다리는 배꼽 아래, 엉덩이를 지탱하는 한 쌍의 이동 기관인 것을 알고 나는 내 다리를 탁, 쳤고.


  아이는 엄마가 집에 돌아오지 않은 때부터 자기 방, 자기 침대 대신 엄마의 방에서 엄마의 침대에서 자기 시작했다. 독자는 또다시 엄마가 완전히 집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이해한다. 하여간 엄마 방의 엄마 침대에서 잔다는 건, 엄마의 모든 장소에 무엇이 있는 지 뒤져볼 권리가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수도 있다. 이건 여덟 살이 된 소년 이야기 <여우>와 열다섯 살 사춘기 청소년 이반의 이야기 <껍데기>에서도 이하동문이다. 엄마의 방, 장 안에서 발견한 엄마의 소유물. 그곳에서 엄마인 여성의 여성용품을 처음 볼 수도 있고, 만져 보기도 하고, 냄새 맡아볼 수도 있다. 엄마와 한 남자와 아이였다가 소년이었다가 사춘기 청소년이 된 한 남자 아이의 지난 시절을 확인할 사진첩을 들출 수도 있고.

  그것 말고도 아이가 보기엔 집이 평생에 걸쳐 탐험할 온갖 모험이 가득한 곳이다.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오래된 라디오. 노란 진공관 불빛이 흐르고, 집안의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면서 언제나 같은 노래가 흘러나오는. “언제나 같은” 노래라니까 혹시 라디오가 아니라 오디오일 수도 있지만 아이가 보기엔 그게 그거다. 이 라디오가 아이가 살아가야 할 밀봉되고 텅 빈 아파트 내부에서 유일하게 소리로 혼란스러움을 만드는 소중한 물건이다. 아이가 라디오를 듣는 것이 “마치 잔혹하고 매혹적인 멜랑콜리아의 우상을 경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순간, 나는 생각한다. 아이가 라디오 하나 듣는 거 가지고 별 말장난을 다 하네.


  커르터레스쿠의 포스트모던한 문장은 수시로 이렇게 과하다. 나처럼 장편소설로 《멜랑콜리아》를 읽는다면 십 년이 지나 이 아이가 사춘기를 맹렬하게 앓고 있는 열다섯 살의 시인 지망생 청소년 이반으로 성장해서 자신의 베아트리체인 도라를 알게 되는데, 소년이 소녀를 바라보는 광경에 이런 묘사가 등장한다.

  “소녀의 머리 타래는 소녀 자신의 삶이자 의지처럼 보였고 정오의 형이상학적인 태양 아래에서 떨리고 뒤엉키고 반짝거리고 있었다.” (p.182)

  여태 살면서 정오의 형이상학적 태양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나는 도무지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어떤 태양이지? 뭐 이 문장만 그런 게 아니고, 다섯 살 아이가 주인공이라고 분명히 역자이자 한국외국어대학 루마니아어과 교수인 백승남이 그랬는데, 이 아이가 라디오를 듣는 일이 “잔혹하고 매혹적인 멜랑콜리아의 우상을 경배하는 것” 같다고?

  좋아, 좋아. 처음 읽으면 멋있게 보일 수도 있고, 그럴 듯하고, 폼도 나고, 후까시 잡는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렇다. 근데 폼 나는 후까시도 한두번, 삼세번이지, 시도 때도 없이 폼 나는 후까시로 도배되어 있으니 내가 질리겠어, 안 질리겠어? 폼 나는 후까시도 좋고, 포스트모던도 좋고, 눈부신 은유의 행렬도 좋고, 환상과 몽환, 의식의 흐름도 좋은 데, 그런 거 다, 적당할 때 좋은 법. 아니면 이 모든 걸 수용하는 내 그릇이 작아서. 하여간 둘 가운데 하나다.

  나는 말했다. 이 책 읽기 전에 마음 단디 먹으라고. 허투루 듣고 읽은 다음에 내 욕하지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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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0-23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헉! 책 타이틀이 <멜랑콜리아>...갑자기 욘 포세의 트라우마가..!!

근데 진짜 정오의 형이상학적인 태양이 어떤지 저도 한 번도 못봐서뤼...
문학적 형용이라면...유치하기 짝이없는 표현이네요..ㅎㅎ

Falstaff 2025-10-23 16:17   좋아요 0 | URL
전 아직 욘 포세 작품을 딱 하나 읽었습니다. 11월 20일에 업로드 할 <보트 하우스>인데요, 아휴, 저는 스칸디나비아 소설은 잘 맞지 않더라고요.
ㅋㅋㅋ 형이상학적 태양. 이런 건 정말 가끔 나와야 제대로 빛을 발하는데 밝은 보라를 함부로 쓴 그림처럼 자주 나오면 못봐줍니다. ㅋㅋㅋ

잠자냥 2025-12-02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각은 63세 나이든 작가의 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라서 반갑습니다.
어휴..... 이 짧은 책이 왜 이렇게 안 읽힌데요? 전 이 작가 책 또 안 읽을 것 같아요.
이번에 노문상 후보로 종종 올라오는 작가라 해서 한번 읽어봤는데 그냥 앞으로는 패스하기로........

Falstaff 2025-12-02 19:22   좋아요 1 | URL
누가 이 책 읽겠다면 흠... 읽어라, 읽은 다음에 나한테 쥐랄하지만 말아라... 이런 심정입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