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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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트릭 모디아노. 201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이때 문학동네 좋아서 난리났었다. 자기들이 모디아노의 책 몇 권에 대한 판권을 확보하고 있었거든. 나도 그때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었다. 그후 2년 터울로 <도라 부르더>와 <까트린 이야기>를 읽었는데, <까트린 이야기>를 덮고 ”이 세 작품으로 난 위대한 노벨상에 빛나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은 더 이상 읽지 않기로 결심했다.” 라는 독후감을 남겼다. 이것이 2018년 봄.

  그리고 시간이 지나 2025년 가을이 되었을 때, 나는 전에 결심한 것을 까맣게 잊고 다시 도서관 서가에서 모디아노의 책을 한 권 골랐다. <잃어버린 거리>. 역자 김화영이 놀랍게도 21쪽 분량의 ‘역자 해설’이 아닌 ‘옮긴이의 말’을 썼다. 1988년에 책세상에서 초판 출간한 것을 30년 후에 문학동네에서 다시 초판 출간했단다. 이거 초판이라 해도 되는 건가? 중판 아냐? 하여간 뭐, 문학동네에서 처음 찍은 건 맞으니 초판이라 했겠지. 독자가 웃건 말건.


  영국인 탐정 소설가 앰브로즈 가이즈가 샤를 드골 국제 공항에 내려 세관에서 입국심사를 받으며 깊은 감회에 젖는다. 프랑스에는 20년 만에 온다. 앰브로즈 가이즈의 손에는 사자 두 마리가 금박으로 찍히 옅은 녹색의 여권이 들려 있지만, 20년 전에 파리를 떠날 당시 열네 살에 난생 처음 받은 프랑스공화국의 이름으로 발부 받았던 여권은 남색 표지였었다. 가이즈는 모국어인 프랑스 말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습관을 잊어버린 지 오래다. 모든 생각과 표현은 전부 영어로 한다. 아내도 영국인. 두 아이도 영국인. 며칠 후에 영국인 아내와 아이들은 스페인 바스크 지역에 있는 아내의 언니/자매의 집으로 피서를 갈 예정이다. 가이즈는 파리에서 일본의 한 출판사와의 비즈니스, 계약 체결 때문에 이곳에 도착했다. 원래는 만나서 계약서에 서명하고, 선불금 수표를 건네 받은 바로 다음 날 바스크로 날아갈 생각이었다.

  7월. 파리의 7월. 호텔 지배인은 완전한 영국인으로 보이는 가이즈에게 영어로 인사를 하고, 혼자 파리에 온 것을 알아챈 다음에는 밤의 은밀하고 특별한 파리 경험을 원한다면 이곳으로 전화를 해보라고 “헤이우드”라는 상호가 달린 명함을 밤마다 권한다. 헤이우드. 가이즈의 기억에서 잊히지 않는 이름 가운데 하나.


  20년 전, 막 20세가 된 프랑스인 장 데케르는 피치못하게 영국으로 건너가 막막했다. 당시에 장은 문학이건 아니건 일단 먹고 사는 게 급해서 뭔가를, 무엇이라도 해보자고 생각해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게 자신을 스타 작가로 만든 추리소설 <자비스> 시리즈라고 말했다.

  일본 출판사에서 계약 담당자인 요코 다쓰케에게 <자비스>의 사진 소설 시리즈 제작 판권, 이를 TV 연속극으로 제작하는 판권, 일본의 기미하라 연쇄점용 피규어 상품으로 개발하기 위한 계약서에 서명을 하자마자, 다쓰케가 물었다. 자신은 왜 일본인들이 가이즈의 책에 열광하는 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가이즈도 동감한다. 다쓰케는 한 마디 더 했다. <자비스>는 문학이 아니고 심지어 문학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이란다. 가이즈 역시 같은 생각이다. 그래서 자기가 <자비스>를 쓰기 시작한 내력을 이야기해준 것이다. 딱 위에 쓴 것만.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프랑스 출생이기는 하지만 어머니가 파리에서 가장 멋진 쇼걸이었는데 영국에서 온 여성이었다고 말한다.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아니라는 데 한 표, 만 원 건다.

  “프랑스에서는 왜 떠났어요?” 다쓰케가 묻는다.

  “인생이란 앞뒤로 이어진 여러 주기들의 연속이랄까요…” 자비스가 대답한다.

  20세에 프랑스를 떠서,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이름을 바꾸고 추리소설을 써 성공한 작가가 20년이 흐른 후 이제는 완전한 외국인의 신분으로 파리에 도착해 완전히 변해버려 낯선 도시가 된 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기억 또는 추억에 잠긴다. “이걸 <파리에 온 자비스> 비슷한 제목으로 시리즈의 제9권으로 써보시지 않겠습니까? 분명히 일본 독자들이 좋아할 것 같은데요.”

  자비스 또는 장 데케르는 대답한다.

  “이를 테면 작가 자신이 직접 쓴 예술가의 초상이군요. 만일 쓴다면 이번엔 프랑스 말로 쓸 겁니다.”

  그리고 이들은 굳게 악수하고, 떠난다. 계약 선불금 8만 파운드 수표를 끊어 건넨 요코 다쓰케는 다음날 아침 비행기를 타고 도쿄로 갈 것이지만, 앰브로즈 가이즈 또는 장 데케르는 런던의 집에 전화를 걸어 아내의 비서에게 한 두 주 정도 파리에 더 머물겠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20세의 장 데케르는 파리의 젊은이가 아니었던 것처럼 읽힌다. 하여간 그때 겨울. 그는 오트사부아 지방에 있는 스키장에서 주머니에 딱 돌아갈 차비만 남을 때까지, 그래봐야 며칠 동안 휴가를 지내고 있었다. 어디로 돌아가야 할 지 자신도 몰랐다니까, 스무살의 유럽인답게 집에서 독립을 했는데 아직 완전히 정착하지 못해서 떠돌고 있는 상태였던 것 같다. 이에 대해 모디아노는 거의 아무 말 하지 않는다. 하늘도 도와주지 않아 갑작스레 눈보라가 몰아쳐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할 지경이라 눈에 띄는 아무 호텔에 몸을 피해 들어갔는데, 폭풍까지 불어 전선이 끊어져 손전등으로 조명을 대신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형 가방을 포함한 열 개의 트렁크를 파리 자기 집까지 운송해줄 방법을 찾아달라는 금발의 여성. 블랭 부인. 호텔의 사장은 자기가 호텔을 절대로 비울 수 없는 처지라서 파리까지 짐을 옮길 상황이 되지 않고, 누가 도와줄 사람도 따로 없지만, 한편으로 블랭 부인이 이 호텔의 소유주라서 난감한 지경으로 빠지고 말았다.

  장이 부인을 한 눈에 알아봤다. 짧은 군복무 시절 부상을 당해 3개월간 입원해 있을 때 병원에서 본 낡은 잡지의 “어떻게 부자가 되었나”라는 기사에 남편과 대리 경주마부와 함께 찍은 사진의 그 부인이었다. 남편 뤼시앵 블랭은 가히 미다스의 손을 가진 것처럼 돈을 버는 데 천부의 자질을 드러내 크고 큰 부를 이루었지만, 재주 있는 사람답게 아름다운 아내 카르멘 블랭을 혼자 남기고 일찍 죽었다. 장의 눈 앞에 있는 여성이 바로 과부 카르멘 블랭 여사.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디로 돌아갈 곳도 딱히 없는 상태였던 장 데케르는 자신이 먼저 접근해 직접 파리의 집까지 모든 트렁크를 실수 없이 운반해주겠노라고 제안한다. 그를 본 블랭 여사는 장의 모습에서 결코 얼굴이 비슷하지는 않지만 베르나르 랄프 파르메르, 카르멘이 1943년에 이이가 소유한 영업소에서 무희로 일하고 있을 때부터 1년간 연인이었고, 자신의 몸에 들어온 첫 남자인 파르메르를 닮아 혹시 그의 아들이 아닐까 싶은 생각에, 주저하지 않고, 그에게 자기 짐을 맡기고 자신은 가까운 비행장에서 스위스로 향한다. 나도 내일 파리에 도착할 거예요, 라는 말만 남긴 채.

  이렇게 장 데케르는 이틀 동안 호텔 수하물 배달원이라는 직업을 갖게 되고, 수하물 배달원이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이 될 것을 그때는 몰랐다.


  돈이 많은 만큼, 정도 많고 친구도 많고, 애인은 별로 없는 것 같지만, 매일 유흥업소에서의 만찬과 금준미주를 멈출 줄 모르는 카르멘 블랭. 장 데케르는 카르멘이 곤란한 지경에 나타나 스스로 봉사를 해주었으며, 첫 애인 비슷한 분위기를 가졌다는 점에서 카르멘은 그를 자기 친구들과 한 팀을 이루도록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많은 친구를 만나는 장. 하지만 거의 아버지 뻘이다. 모두 카르멘 블랭과는 같이 잔 것처럼 보인다. 장보다 열일고여덟 살 더 먹은 카르멘. 그러니 나이 많은 남자들과 혼인을 하던 시절이었으니 남자들은 아버지뻘도 큰아버지뻘일 수도 있었을 듯하다.

  이 가운데 훗날 앰브로즈 가이즈라는 이름으로 <자비스>라는 시리즈를 읽고 그에게 편지를 보낸 인물이 있었다. 로크루아. 자기가 프랑스를 떠나야 할 시점에 잠시라도 숨겨주고, 영국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마지막 편의를 제공한 고마운 사람.

  이제 파리에 두 주 정도 더 머물기로 작정한 앰브로즈 가이즈는 전화번호부에서 로크루아의 이름을 찾아, 다이얼을 돌린다.

  “여보세요? 저 죄송하지만 기타 바이에 좀 바꿔주시겠습니까?”

  여자가 여전히 담배를 피운다는 듯이 쉰 목소리로 받는다. “전데요.”

  “장 데케르예요. 아마 잊어버렸을 지도 모르지만.”

  “장 데케르라고요? 그러면 앰브로즈 가이즈란 말예요?”

  기타 바이에. 예전 로크루아의 비서. 장이 파리를 떠난 후에 결혼한 것이겠지.

  꼼꼼하게 장 데케르와 앰브로즈 가이즈를 챙겨온 로크루아는 세상을 떠났고, 그의 많은 수집자료에 당연히 장 데케르에 관한 것도 있다. 심지어 서류철 표지에 로크루아 특유의 큼직한 글씨로 “가능하다면 장 데케르에게”라고 쓰인 것도 있었다. 은인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장.


  앰브로즈 가이즈 또는 장 데케르는 로크루아의 서류를 들쳐보고, 서류 속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다시 발견한다. 그리고 드디어 마음먹는다.

  자신이 파리를 떠나기 전까지 로크루아의 자료와 앰브로즈 가이즈가 이방인으로 파리에 도착해, 장 데케르가 파리를 떠날 때까지의 과정을 한 편의 프랑스어 소설로 쓰겠다고. 그리고 정말로 썼다. 이렇게 쓰인 소설이 <잃어버린 거리>다.

  이게 웬 일? 내가 여태 읽은 모리아노하고 완전 다르다. 심지어 재미도 있으려고 한다. 거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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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10-29 0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모디아노라니… 믿기 어렵지만 한번 믿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25-10-29 15:36   좋아요 1 | URL
아오... 팍 가보셔요!

꼬마요정 2025-10-29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요? 저도 한 번 믿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25-10-29 15:37   좋아요 1 | URL
넵! 근데 요정님 독서 경향으로 봐서는 좀 미지근할 수도 있을 듯하네요. ㅋㅋ

yamoo 2025-10-29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요? 에이~
저는 믿지 않겠습니다..ㅎㅎ
그래도 모디아노 소설은 기본 평타 이상은 치니 리스트에 넣고 읽어 보겠습니다. 모디아노 몇 권을 읽어 봤는데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와 비슷한 작품들만 있어 좀 거시기 했는데,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디아노라니...저도 걍 읽어 볼럅니다~~ㅎㅎ

Falstaff 2025-10-29 15:38   좋아요 0 | URL
저도 상점들 거리 부터 모디아노는 팔자에 맞지 않는 거 같다고 생각했습지요. ㅎㅎ
함 읽어보셔도 좋을 듯한데 큰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