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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 - 2023 브라게문학상 수상작
프로데 그뤼텐 지음, 손화수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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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데 그뤼텐. 노르웨이 남서쪽에 있는 하르당에르 피오르 지역의 작은 도시 오다에서 1960년에 출생한 쥐띠 남자.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이고 노르웨이에서 작가가 받고 싶어하는 문학상은 싹 받았다는 것만 위키피디아에 적혀 있다.
자신의 출생지가 피오르 지역. 피오르가 뭔지 아시지? 옛 시절에 큰 빙하 지역이었다가 빙하가 녹으면서 얼음이 산의 측면을 깎아 경사가 급한 깊은 바다를 만든 곳. 그래서 이이의 2023년 작품, <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의 주인공 닐스 비크의 직업도 피오르 지역 이쪽과 저쪽을 왕복하며 사람과 재화를 운반해주는 페리 선 MB 마르타 호의 선장이다.
제목이 “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이니까 독자는 책을 읽기도 전에 오늘 닐스 비크가 죽을 것임을 알고 시작한다. 사고? 북유럽 소설에서 흔해 빠진 피살? 아니다. 닐스 비크의 두 딸이 벌써 쉰 살은 된 것 같이 보이는 노인이다. 자기 페리선과 같은 이름을 가졌던 아내 마르타 역시 오래 전에 뇌졸중에 시달리다 세상 마감했다. 그리고 오늘, 닐스는 자신이 이제 다 살았다는 것, 그래서 오늘 죽을 것임을 미리 알고 전쟁 직후에 구입해 평생 함께 한 페리를 타고, 오랜 세월 누비고 다닌 피오르 위에서 마지막 숨을 쉬려 한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하면, 사람이 착하면 죽음도 미리 언질을 주어 자기 생을 잘 마감할 수 있게 해주나 보다. 이렇게 생각할 정도로 닐스 비크는, 내가 여태 살면서 한 명도 만나본 적 없을 정도로 순수하고, 순박하고, 정직하고, 곧은, 이런 미덕을 다 합쳐 한 마디로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이의 죽음을 하늘도 슬퍼할 정도로.
MB 마르타호. 그냥 마르타라고 부르는 낡은 페리. 길이 36피트, 너비 9피트의 흰색 참나무 배를 사서, 손재주도 좋은 닐스 본인이 12마력 엔진을 장착한 위풍당당한 범선. 선실과 조타실도 직접 제작하는 등 범선을 페리로 바꾸기 위해 배를 사고 14개월을 투자했다. 아내 이름 마르타를 배의 선명으로 고르자 이를 마땅하지 않게 생각한 아내에게 “그래야 내가 언제나 당신 안에 들어가 있을 수 있지.”라고 대답했고, 마르타는 “아이, 징그러워.”라고 투정했다는 배. 흰색 선체에 선실에 빨간색 줄무늬를 두른 피오르 지역의 가장 이름난 페리선.
그러나 배 이야기는 조금 미루자.
새벽 5시 15분에 닐스 비크의 마지막 날은 시작한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건장한 몸집, 희끗하게 변한 머리카락과 거친 피부. 주름진 얼굴과 벗겨진 이마를 한 닐스 비크 노인이 11월 8일, 비 내리는 고요한 새벽에 3대가 살았던 집을 나서기로 작정한다. 그는 엽서를 써서 커피잔 옆에 놓는다. 두 딸, 엘리와 구로가 읽겠지. 오늘 이후에 절대로 집을 두고 다투지 않겠다고 약속한 자매. 한갓진 피오르 지역이 지금은 노르웨이와 세계 각지의 부자들이 여름별장으로 개발하는 바람에 부동산 가격이 하늘을 찌른다. 부모의 집과 땅을 두고 형제 자매 간에 얼굴 붉히는 일을 너무도 많이 본 닐스. 그는 이 지역에서 집과 보트창고, 창고 주변의 땅을 아직까지 팔지 않은 단 한 명 남은 피오르 주민이었다.
“나는 이 집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란다.”
6시 45분이 되자 닐스는 침대 매트리스를 집 밖으로 끌고 나가 등유를 끼얹고 불에 태운다. 수십년 간의 추억. 지극히 사적인 삶이라 다른 건 몰라도 매트리스만큼은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 온갖 내밀한 부부간의 사랑과 냄새가 묻어 있는 기념물. 오, 사랑하는 마르타. 그녀가 은혼식 선물로 준 오메가 시계를 차고, 배를 운항하면서 밀려올 절대 적요를 물리쳐온 라디오와 힙플라스크(휴대용 술통)을 챙긴 닐스 옆에 개 루나가 와 있다. 태어나 눈 뜬지도 얼마 안 되어 도살되기 바로 전에 닐스가 품에 안아 들어 함께 살기 시작한 개. 20년~25년 전에 트럭에 치어 죽었다. 죽은 후에도 오래 함께 해 이제는 사람의 언어로 배, 비행기, 정치, 축구 등 온갖 관심사에 대해 대화를 해 온 동행. 닐스는 기꺼이 마지막 항해에도 루나를 동행시킨다.
이제 8시 30분. 아침이긴 하지만 높은 위도의 11월이라 여전히 밤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 하긴 닐스는 이미 시간을 떠났다. 이제 닐스는 루나와 함께 마르타호에 올랐고, 선실에는 그가 수십년 동안 써 온 대충 스물다섯 권을 될 것 같아 보이는 항해일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배에 올라 묶은 줄을 풀고 닻을 올린다. 고개를 드니 숲 속에 죽은 자들이 몰려 있다. 외로운 이들이 이제 서로를 찾는 것일 터. 환영幻影, 환영일 수밖에 없을 것. 죽은 자들이 그에게 온 것일까? 저들 모두 닐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다. 자기가 만났던 무수한 사람들. 이제는 자기보다 먼저 시간의 벽을 넘어선 이들. 그들은 닐스의 속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 스물다섯 권의 항해일지 안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닐스는 항해일지를 편다.
마르타호에 올라 탑승료를 지불한 첫 승객.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쉰베 네스베와 스베레 네스뵈.
닐스 비크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뱃사람은 오직 배만 믿는다. 예로부터 뱃사람들은 헤엄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 배가 가라앉으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가장 최선의 방법은 즉시 익사하는 거였단다. 수영을 할 줄 알면 그만큼 고통만 길어질 뿐이었으니.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둘러싼 피오르, 얼음바다 위에 떠 있는다 해도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아무도 몰랐을 터이다.
닐스 역시 끝까지 수영하는 법을 배우려 하지 않자, 피오르 지역의 여자들처럼 빼어난 미인이었던 사랑하는 아내 마르타는 닐스의 귀싸대기를 후려쳤다. 한 번 더. 또 한 번 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나야지. 살아날 생각을 해야지. 집에 남은 아내와 두 딸은 어떻게 하라고. 그래서 닐스는 피오르의 뱃사람답지 않게 북해의 차가운 바다 속에 들어가 마르타한테 수영을 배웠다. 평생 한 번도 실제로 써먹은 기회가 없어서 다행이지만. 마지막으로 항해하는 오늘까지.
이제 닐스는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들은 하나같이 작은 옛 시절의 선착장에 앉거나 서서 그를 기다린다. 기타를 쳤고 노래를 잘 부르던 소년 욘 안데르손, 거친 땅에서 수수한 농부로 살다가 앞으로 고꾸라져 흙에 얼굴을 파묻고 죽은 옌스 헤우게, 피오르 건너 도시에 가 총으로 자기 얼굴을 쏴 자살해버린 막냇동생 이바르 비크, 외지에서 와서 피오르 사람과 학생들에게 불만 많고 깐깐했던 학교 선생 잉그리드 알스타세테르, 그리고 전직 장관, 평생 하이힐을 신고 다닌 1968년 미스 노르웨이, 그리고 사람들, 사람들. 브리타 셀도스, 에이나르 스보르테비크, 프레드릭 모스, 아문 모게, 릴리 글로펜, 마르기트 예센달, 에길 에릭센, 엘렌 쇠르트베이트, 그리고, 그리고 틀림없이 닐스의 아내 마르타와 사랑을 나누었고, 서로 사랑을 했을 미국인 로버트 소트,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이들 모두 죽은 자들이다. 그래서 귀신들.
요즘 죽은 자들, 귀신 이야기 많이 읽는다. 이 책에서도 오늘 죽을 사람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이미 죽은 자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당시를 생각하고, 추억한다. 살아 있는 자들은 오직 두 명, 엘리 비크와 구로 비크. 두 딸.
죽은 자들. 죽었다가 다시 죽어가는 사람 앞에 나서는 이미 죽은 자들을 귀신이라 부르니까, 이 책은 당연히 ㅆㄴㄹ 소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이고, 나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를 근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를 빼고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의 평은 꽤 괜찮다.
하지만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를 제하더라도, 주인공 닐스 비크, 조금은 완고한 노르웨이의 변방 피오르 지역의 연락선 선장이, 정말 거의 결점이 없는, 너무도, 너무도 선하기만 한 인간으로 살다가, 지극하게 선한 인간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나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더라는 것. 아무리 빙하 녹은 물 위에서, 빙하 녹은 물만 먹고 살았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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