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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ㅣ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24
미르체아 커르터레스쿠 지음, 백승남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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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부크레슈티에서 태어난 미르체아 커르터레스쿠는 1956년생 잔나비띠라서 그런지 문학적으로 재주가 많다. 시인, 장편, 단편 소설가, 문학평론가에 에세이스트로 명함을 박았다. 부쿠레슈티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루마니아 어문학 교수로 재직했는데, 흔히 “헤르타 뮐러와 함께 루마니아의 대표작가”라 불리는 거 같다. 헤르타 뮐러는 루마니아에서 성장했지만 끝까지 독일인 정체성을 고수한 독일 작가 아닌가? 뭐 좋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커르터레스쿠의 《멜랑콜리아》를 작품집, 그러니까 중단편소설 모음집으로 보아야 할까, 프롤로그, 3부로 이루어진 본문, 그리고 에필로그로 구성된 장편소설로 읽어야 할까? 이것부터 헛갈린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는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독재 체제에 시와 음악과 소설로 저항한 ‘80년대 세대’ 작가로서 루마니아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정립한 미르체아 커르터레스쿠의 단편집 《멜랑콜리아》(Melancolia, 2019)” 딱 단편집이라고 못박았다. 그러면 책 표지나 하여간 독자가 읽기 시작하기 전에 어디다 단편집이라고 좀 적어주면 덧나나? 무슨 평론가도 아니고 하다못해 문학 강의 한 번 들어본 적도 없는 생짜 아마추어 필부가 장편소설인 줄 알고 읽게 만들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지.
근데 다 읽고나서 보니까, 굳이 이 책을 작품집, 단편집이라 생각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싶었다. 본문격인 “멜랑콜리아”는 다섯 살 아이가 주인공인 <다리>, 여덟 살 먹은 소년인 주인공을 하는 <여우> 그리고 열다섯 살 청소년 ‘이반’이 주인공인 <껍데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껍데기>에서 인간의 성장과정을 곤충의 탈각脫殼, 변태變態 단계로 보려 애쓰기 때문에 다섯 살과 여덟 살의 아이/소년 관점 역시 한 인간이 성장, 즉 탈각하는 순간의 포착이라 해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곤충의 경우에는 완전 변태, 불완전 변태, 알-애벌레-(번데기)-성충의 단계를 거치지만 인간은 시도 때도 없이 각 개인의 차이에 따라 숱하게 변태 또는 탈각의 과정을 가진다는 주장도 뭐 타당하겠지. 물론 가장 큰 탈각, 변태의 과정은 사춘기가 아닐 수 없을 것이고.
하지만 “루마니아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정립한” 미르테아 커르터레스쿠는 쉽게 읽히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한국외국어대학 루마니아어과 교수인 역자 백승남이 이 말을 들으면 실소를 금하지 못하겠지만, 다섯 살 아이가 “주인공”인 <다리>는 결코 다섯 살 아이의 시선으로 본 세계가 아니다. 이 작품이 아이가 혼자 집에 있는 몇 시간 동안의 “집”이라는 공간과 아이의 세계를 묘사했으나, 시각은 63세 나이든 작가의 것이다. 당연히 여덟 살 소년이 주인공인 <여우>도 마찬가지이고 <껍데기>역시 같다. 커르터레스쿠가 자신의 연구실에 박혀 자신의 혹은 남성 일반의 저 유소년과 사춘기 시절을 “포스트모던”하게, 멜랑콜리하게, 그리고 아무리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읽어도 작가가 주장하는 것을 정확하게 받아들이지 못할 방식으로 애매하게, 몽롱하게, 지극한 방식의 은유로 펼쳐낸다. 그리하여 독자는 책을 읽기 전에 마음을 단단히 가져야 마땅하다.
만일 나처럼 《멜랑콜리아》를 장편소설로 읽는다면, 본문의 1부 격인 <다리>에서 다섯 살 먹은 주인공 ‘아이’가 아무도 없는 자기 집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지 한 번 볼까?
시작부터 파격적이다. “어느 날 아침에 엄마는 장을 보러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다른 독자는 모르겠고 나는 처음부터 죽여줬다. “허물처럼 벗어던진 브래지어가 / 나무의자 등허리에 걸려있고 / 사랑은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제목은 잊었다. 최승자의 시 첫 구절인데 아마 시집 《즐거운 일기》에 실렸지 않나 싶다. 하여간 “엄마는 몇 주, 몇 달, 몇 년, 많은 날이 지나갔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다리>를 다 읽으면 이 구절을 왜 썼는지 이해가 가지만 처음엔 그렇구나, 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다. 아이는 오래 전부터 시간 감각을 잃었다는 것. 그리하여 몇 주, 몇 달, 몇 년 동안 정말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엄마는 영원히 아이와 이별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나 그건 그냥 보통의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고, 아이 입장에서는 몇 주, 몇 달, 몇 년의 시간이 흐른 것 같은, 오래오래,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엄마가 커다란 장바구니를 들고 아파트 현관문을 열 수도 있는 거다. 물론 영원한 아듀일 수도 있는 거고. 이걸 커르터레스쿠의 작품을 처음 읽는 독자가 알아차릴 방법은? 없다. 그냥 당하면 된다. 당해야 하고 당할 수밖에 없다.
이제 집은? 텅 빈 상태. 아이는 자신 혼자 있는 집에서 탐험을 시작한다. 자신의 새로운 인생에 슬프고 이상한 매력을 느끼면서. 그리고 아이답게 이런 상태에 쉽게 익숙해진다. 사실은 엄마한테 단단히 주의를 들었겠지. 집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그렇다고 나가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나갈 수 없는 상태이지만. 그리하여 아이는 집 밖으로 나갈 방법을 만들어낸다. 먼저 발코니. 문 밖으로 가지가 무성한 미루나무의 꼭대기가 있는 곳. 미루나무 너머로는 벽돌을 쌓아올린 공장이 있고, 공장 꼭대기는 반원형 둥근 창문에 사람의 그림자가 보인다. 쿠이드라트 고무공장. 둥근 창문의 꼭대기에서 담배를 피우던 노동자. 아이는 그곳과 연결하는 투명한 다리를 만든다. 그리고 이 투명하고 딱딱하지 않은, 아이가 마음먹은 대로 구부러지기도 하는 다리를 타고, 마치 수영장의 미끄럼틀처럼, 그러나 너무 빠르지 않는 속도로 아이가 원하는 장소까지 미끄러질 수 있다.
이름하여 “하늘의 다리.” 저 먼 기억 속의 나. 최인훈의 <하늘의 다리>를 나는 제목만 보고 이 다섯 살 아이가 생각하는 바로 그 다리를 연상했었다. 최인훈의 다리는 배꼽 아래, 엉덩이를 지탱하는 한 쌍의 이동 기관인 것을 알고 나는 내 다리를 탁, 쳤고.
아이는 엄마가 집에 돌아오지 않은 때부터 자기 방, 자기 침대 대신 엄마의 방에서 엄마의 침대에서 자기 시작했다. 독자는 또다시 엄마가 완전히 집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이해한다. 하여간 엄마 방의 엄마 침대에서 잔다는 건, 엄마의 모든 장소에 무엇이 있는 지 뒤져볼 권리가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수도 있다. 이건 여덟 살이 된 소년 이야기 <여우>와 열다섯 살 사춘기 청소년 이반의 이야기 <껍데기>에서도 이하동문이다. 엄마의 방, 장 안에서 발견한 엄마의 소유물. 그곳에서 엄마인 여성의 여성용품을 처음 볼 수도 있고, 만져 보기도 하고, 냄새 맡아볼 수도 있다. 엄마와 한 남자와 아이였다가 소년이었다가 사춘기 청소년이 된 한 남자 아이의 지난 시절을 확인할 사진첩을 들출 수도 있고.
그것 말고도 아이가 보기엔 집이 평생에 걸쳐 탐험할 온갖 모험이 가득한 곳이다.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오래된 라디오. 노란 진공관 불빛이 흐르고, 집안의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면서 언제나 같은 노래가 흘러나오는. “언제나 같은” 노래라니까 혹시 라디오가 아니라 오디오일 수도 있지만 아이가 보기엔 그게 그거다. 이 라디오가 아이가 살아가야 할 밀봉되고 텅 빈 아파트 내부에서 유일하게 소리로 혼란스러움을 만드는 소중한 물건이다. 아이가 라디오를 듣는 것이 “마치 잔혹하고 매혹적인 멜랑콜리아의 우상을 경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순간, 나는 생각한다. 아이가 라디오 하나 듣는 거 가지고 별 말장난을 다 하네.
커르터레스쿠의 포스트모던한 문장은 수시로 이렇게 과하다. 나처럼 장편소설로 《멜랑콜리아》를 읽는다면 십 년이 지나 이 아이가 사춘기를 맹렬하게 앓고 있는 열다섯 살의 시인 지망생 청소년 이반으로 성장해서 자신의 베아트리체인 도라를 알게 되는데, 소년이 소녀를 바라보는 광경에 이런 묘사가 등장한다.
“소녀의 머리 타래는 소녀 자신의 삶이자 의지처럼 보였고 정오의 형이상학적인 태양 아래에서 떨리고 뒤엉키고 반짝거리고 있었다.” (p.182)
여태 살면서 정오의 형이상학적 태양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나는 도무지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어떤 태양이지? 뭐 이 문장만 그런 게 아니고, 다섯 살 아이가 주인공이라고 분명히 역자이자 한국외국어대학 루마니아어과 교수인 백승남이 그랬는데, 이 아이가 라디오를 듣는 일이 “잔혹하고 매혹적인 멜랑콜리아의 우상을 경배하는 것” 같다고?
좋아, 좋아. 처음 읽으면 멋있게 보일 수도 있고, 그럴 듯하고, 폼도 나고, 후까시 잡는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렇다. 근데 폼 나는 후까시도 한두번, 삼세번이지, 시도 때도 없이 폼 나는 후까시로 도배되어 있으니 내가 질리겠어, 안 질리겠어? 폼 나는 후까시도 좋고, 포스트모던도 좋고, 눈부신 은유의 행렬도 좋고, 환상과 몽환, 의식의 흐름도 좋은 데, 그런 거 다, 적당할 때 좋은 법. 아니면 이 모든 걸 수용하는 내 그릇이 작아서. 하여간 둘 가운데 하나다.
나는 말했다. 이 책 읽기 전에 마음 단디 먹으라고. 허투루 듣고 읽은 다음에 내 욕하지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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