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
토니 모리슨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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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작 <재즈>의 황금색 피부와 아름다운 금발의 청년 골든 그레이는 열여덟 살이 되고나서야 집안의 늙은 하인으로부터 실제 자신은 도도하고 미모에 눈부신 금발의 어머니와 흑인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흑백 혼혈임을 듣고, 성인으로 독립하는 첫 출발을 아직도 살아 있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러 떠나는 것으로 설정했다. 마치 그러기만 한다면 자신이 순수한 백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토니 모리슨이 여든네 살에 쓴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의 첫 장면은 피부색이 연해 ‘높은 노란색’이라 할 수 있고, 머리카락 역시 뻣뻣한 곱슬머리 대신 부드러운 직모를 가진, 흑인이면 같은 흑인인가 어디, 나름대로 프라이드를 가진 흑인이라 자부한 여인 스위트니스가 한밤중 같은 검은색, 수단Sudan 사람이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같은, 너무 검어 무서울 지경인 딸을 낳고 절망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제 갓 낳은 아이 룰라 앤의 부계 역시 아주 옅은 색의 유색인이어서 남편 루이스는 아이를 보자마자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단정을 하고는 가족을 떠나 매달 오십 달러의 우편환을 송금하는 것으로 연을 끊어버린다. 이때를 1980년대 후반 정도로 짐작할 수 있다.
  스위트니스의 절망은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 할머니는 아예 백인으로 통했단다. 백인으로 살기 위해 자신의 자녀와도 완전히 연락을 끊고 살았다고 한다. 심지어 딸이 편지를 보내도 아예 편지봉투를 열어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벽난로 속으로 집어 던졌을 정도. 한데 당시 반 혼혈 또는 사분의 일 혼혈들은 자신들이 ‘적어도 흑인은 아니다’는 것을 대내외로 증명하기 위해 흔히들 그렇게 했단다. 할머니의 딸, 그러니까 스위트니스의 엄마 룰라 메이 역시 쉽게 백인으로 통할 수준의 피부색을 가지고 있었으나 흑인으로 살기를 선택해 ‘공공시설에서의 백인과 유색인종을 분리’하는 짐크로 법에 청춘시절의 대부분을 희생당하며 살아 왔다.
  이런 상황에서 흰 피부를 향한 스위트니스의 갈망이 어떠했겠는가. 이이는 자신의 딸 룰라 앤을 양육하는데 있어 될 수 있는 한 자신의 희다고 믿는 피부를 새까만 석탄 같은 딸의 피부와 될 수 있는 대로 접촉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다. 룰라 앤이 좋지 않은 짓을 해 스위트니스가 따귀를 때리거나 엉덩이를 때릴 때 어머니의 손을 느낄 수 있어 오히려 더 좋았다는 추억을 갖고 있을 정도였으니.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흐르는 것보다 더 빨리 변한다. 19세기 말에 자신이 백인인 줄 알았던 흑인 청년은 아버지를 살해하기 위하여 길을 떠났지만, 21세기의 룰라 앤은 소녀 시절에 자신의 까만 피부 때문에 백인 소년들의 짓궂은 장난을 몇 번 견뎌야 했으나 성인이 되고나서는, 채용될 때 마지막 순서고 해고될 때는 맨 처음인 사회 환경인 것만 빼고는 자신을 어필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숯처럼 검은 피부를 돋보이게, 그것을 아름답다고 보이게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준 백인 남자 제리는, 16세까지는 룰라 앤이었다가 앤 브라이드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그냥 간단하게 ‘브라이드’로 고친 그녀에게 오로지 흰 색의 옷만을 추천했다. 신발도 흰색 위주지만 꼭 다른 색을 신겠다면 반드시 검정색으로 하고, 화장도 하지 말고, 보석이나 귀금속 일체도 못하게 했다. 작은 진주 귀고리 정도만. 그러자 흑단 같은 피부와 서아프리카 계 우량한 체질의 브라이드는 남의 이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게 사모하는 눈길인 동시에 굶주린 눈길이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고.
  이후 브라이드는 1940년대 ‘실프 코르셋’으로 시작해 이제 화장품으로 영역을 넓힌 실비아 주식회사의 ‘젊은’ ‘흑인’ '여성' 임원으로 여섯 개의 화장품 라인 가운데 하나를 담당하며 회사의 지역 매니저까지 겸직하는 여피 비슷하게 성장하게 된다. 세상이 바뀌었다. 검은 것이 아름답다니. 전혀 화장을 하지 않는 흑인 여자가 화장품 업체의 임원이 된 것. 토니 모리슨은 이런 세상을 쉽게 보리라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세월은 흐르고, 흐르는 것보다 더 빨리 변했다.
  그러나 아무리 여피 비슷한 처지가 돼도 어쩔 수 없이 가슴 속 한 구석에 숨어 있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쿡쿡 쑤시는 것. 결핍. 유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결코 따뜻해본 적이 없던 어머니 스위트니스의 손길에 대한 갈망. 이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인지 브라이드의 곁엔 언제나 남자들이 넘쳤지만 그들은 자신의 몸과 돈만을 기다리는 미래의 배우, 래퍼, 프로 운동선수, 바람둥이이거나 아니면 이미 성공을 거둔 남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용맹을 조용히 증언해줄 존재로 그녀를 선택했을 뿐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브라이드의 앞에 등장한 부커 스타번. 황금빛 피부의 잘생긴 남자. 어깨에 흉한 화상 흉터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과거에 대하여 한 마디도 브라이드에게 설명해주지 않는 상대. 심지어 낮에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도 모르는 동거인. 브라이드는 모른다, 자신의 유일한 절친인 브루클린이 부커를 유혹하기 위해 알몸으로 달려들어도 유혹할 수 없었다는 것은. 브라이드가 살면서 유일하게 사랑한 남자. 브라이드가 살면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남자였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다시피, 부커가 브라이드의 곁은 떠난 후에야 절절하게 알게 된다.
  “너 내가 원하는 여자가 아니야.”
  오직 하나 남긴 메모를 두고 그는 떠났다.
  왜 브라이드는 부커가 원하는 여자가 아니었을까. 이것을 해소하는 것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자는 브라이드와 부커의 내면에 강렬하게 새겨져 있는 상처를 먼저 발견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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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딩 엣지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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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핀천의 작품 <브이.>를 읽은 여세를 몰아 선택했다. 블리딩 엣지. 책 제목만 본 느낌은 ‘피 흘리는 가장자리?’ 이게 뭘까? bleeding edge를 검색해봤다. ‘최첨단’이란 뜻이란다. 나중에야 대강 감을 잡긴 했다. 그래도 ‘옮긴이의 말’에서 역자 박인찬의 정의를 인용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유용성이 전혀 입증되지 않았고, 위험성이 커서, 오직 얼리어댑터만이 편하게 느끼는 최첨단 과학기술로서 단기 고수익을 노리는 벤처자본가들이 고위험을 무릅쓰고 덤벼드는 IT 기술”

  책은 주인공은 ‘맥신 터노’라는 이름의 아들 둘 키우는 유대인 이혼녀이다. 맥신은 지기와 오티스, 아들만 둘 있는데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하면서 또래인 피오나의 엄마, 캘리포니아의 실리콘 밸리에서 뉴욕의 실리콘 앨리로 이사 온 바이어바 매켈모와 친하게 된다. 여기에 바이어바의 남편 저스틴이 동업자 루커스와 함께 거대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딥 아처’를 개발해 대안공간으로의 가상세계 속으로 빠져드는 현상이 벌어진다.

  동시에, 맥신 터노는, 진짜 이런 직업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으나,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은 ‘공인사기조사관’이었다가 사소한 사건에 회계감사관과 세금관리자들의 영업비밀을 공유했다는 혐의를 받아 자격을 박탈당하고 현재 ‘테일 뎀 & 네일 뎀’, 우리말로 ‘미행하고 잡아들인다’는 뜻의 작은 사기 조사 탐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물론 소송을 통해 자격증을 되찾을 수는 있겠지만 변호사 비용도 없고, 그동안 존경했던 업계 동료들이 쫓아낸 것이라 정나미도 떨어져 그냥 탐정사무실을 차린 것. 그러다 보니 이젠 색바랜 도덕성의 후광 밖으로 나가 어둠의 숭배자를 통해 더욱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나. 하여튼 책을 보면 업계 최고 수준의 타고난 천재 탐정이다.

  90년대 영화 불법복제로 첫발을 디딘 다큐 제작자로 레지 데스파드라는 후줄근한 남자가 하루는 탐정을 찾아와 헤시슬링어즈라는 컴퓨터 보안회사의 다큐를 찍고 있는데, 회사의 일반적 기록, 거래장, 출납부, 일지, 세금계산서 등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내부고발을 한다. 해시슬링어즈는 기막히게 일을 잘 한다고 업계에 소문이 파다한 컴퓨터 보안회사로 주가수익률 신기록을 해마다 갈아치우고 있단다.

  맥신이 레지와 더불어 회사의 관계사와 대표 게이브리얼 아이스를 추적해보니, 아이스 대표가 거의 망해가는 닷컴 회사를 인수해놓고는 이 회사가 거액의 프로젝트를 수주받아 납품한 것처럼 하고 천문학적인 거금을 이젠 서류 위에서밖에 남지 않은 닷컴 회사를 통해 어디론가 보내고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벌써 19년이 넘게 지났다.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장면이 실제로 벌어졌고, 항공기 두 대가 뉴욕의 무역센터 빌딩에 충돌하는 생생한 모습이 위성을 타고 전 세계로 송출되었으며, 심지어 쌍둥이 빌딩이 폭삭 무너져 미처 대피하지 못한 숱한 사람들과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오히려 빌딩으로 들어갔던 소방대원 전원이 검은 먼지 폭풍 속에 사라졌던 것이.


  <블리딩 엣지>의 시작점은 2001년 늦봄이다. 늦어도 반년 후에는 이곳 뉴욕에서 참화가 생기리라는 것은 독자도 이미 알고 있어서 거액의 자금이 지하디스트나 적어도 아랍권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는 맥신의 추측 하나만 가지고도 독자들은 바싹 긴장을 할 수밖에 없다. 당신이 직접 또는 TV를 통해 무역센터가 무너져내리는 장면을 보았다면.

  이렇게 책은 크게 두 가지 이야기를 가지고 흘러간다. 딥 아처라고 하는 가상, 또는 대안의 공간이 하나. 그리고 미국 정부, 특별히 정보와 세계각지에서 벌어지는 정보활동 업무 담당 부서와도 긴밀하게 교류하고 있는 컴퓨터 보안업체 해시슬링어즈, 특히 업체의 대표 게이브리얼 아이스와 우리의 주인공 맥신 터너 간의, 아이스라는 이름의 냉정한 빌리어네어와 일개 탐정사무실 대표와의 관계니까 ‘숨막히는’. ‘긴박한’이라는 형용사가 어울리진 않지만 어쨌든 이들을 둘러싼 의혹과 일종의 대립이 둘이다.

  여기에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것이, 역시 2001년의 뉴욕을 무대로 했을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장면, 911 테러와 관련된 일. 만일 지하디스트 단체가 있어서 비행기를 이용한 무역센터 빌딩 테러 당시 비행기 운전을 맡은 무슬림이 순간적으로 죽음이 두려워 충돌을 회피했을 경우가 생겼다면 어떻게 했을까. 핀천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두 번째 팀이 뉴욕 외곽의 한 빌딩 옥상에서 소형 미사일로 계획된 여객기가 나타나면 요격을 할 예정이었다고 그림을 그린다. 즉 비행기에 타고 있는 지하디스트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까 임무를 성공시키는 길을 택할 것이라고.

  그런데 미사일을 발사할 전사가 무슨 이유로 인해 비행기를 향해 발사 버튼을 누르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면? 역시 바로 옆 건물의 옥상에서 저격용 소총의 망원경을 통해 이들을 겨누는 스나이퍼를 배치한다. 즉, 보험과 재보험까지 들어놓았다는 얘기.

  물론 독자들은 핀천의 이야기를 믿거나 믿어줄 의무는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확인되지 않은 음모들의 만찬이니까. 21세기는 막을 열자마자 신자본주의와 해체된 공산주의, 분열에 이은 폭발 단계로 접어든 이슬람 극단주의, 중국으로 대변하는 동아시아로부터의 경제적 잠식 등으로 특히 미합중국 내 불안요소가 과열되었으며 이런 현상은 언제나처럼 숱한 음모설을 마련하게 한다. 세계사에서 이런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나.

  놀라운 이야기꾼 핀천은 사실 별 볼 일 없는 작자였다가 기회를 제대로 잡아 세계최강 컴퓨터 보안회사 헤시슬링어즈의 대표로 등극하는 게이브리얼 아이스를 등장시켜, 그가 정말 지하디스트들에게 투쟁의 자금을 대주었는지는 다음으로 하고, 하여튼 거액의 달러를 해외로 반출을 하게 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 자리에 오른 아이스는 스스로 가상공간, 대안공간의 한 존재인 것처럼 인식하는 단계로 오른다. 무슨 이야기냐고? 하 참. 이걸 얘기해? 말아? 좋다. 한다. 스스로를 프로그램 자체로 인식하는 단계까지 업그레이드 된다는 말씀. 자세한 건 직접 읽어보시라.

  그러나 토머스 핀천이다. 쉽게 읽히면 핀천이 아니다. <브이.>를 읽고 조금 시간을 두었다가 <블리딩 엣지>를 읽으려 했었다. 그러다 신문 서평인가에서 핀천 가운데 읽기가 수월하다는 내용이 몇 군데나 나오는 바람에 주저하지 않고 선택했다가 아직도 터진 코피가 멈추지 않는다. 내 경우엔 <브이.>보다 읽기가 더 어려웠는데, 왜냐하면 내가 아직 또는 이제는 블리딩 엣지, 유용성이 입증되지 않았고 위험성이 커서 이런 최첨단의 내용을 편하게 느낄 수 있는 얼리어댑터가 아니기 때문인 것 같다. 수없이 쏟아지는 프로그램 용어의 홍수 속에 그만 길을 잃고 말았던 것. 그런데 그것뿐인가 어디.

  이 책도 그렇고 <브이.>도 그렇고, <바인랜드>, <느리게 배우는 사람>, <49호 품의 경매>도, 하긴 어떤 번역서가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이 책의 경우에) 무려 1920년대부터 2000년까지 대중문화 즉, 영화, TV 드라마, 음악, 만화 등의 등장인물, 배우나 연주자, 가수, 노래 제목과 가사 기타 등등을 무제한으로 쏟아내니, 이건 미국사람이 아니라면, 그것도 나이가 좀 지긋하지 않으면 도무지 읽는 즉시 내용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이다. 정치인들과 그들의 주장 같은 것까지 몽땅. 물론 내용도 위에 간략하게 소개한 것들을 위해 수없이 많은 등장인물들이 서로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고 숱한 관계를 만들어간다. 이것들을 다 소개하기 위해서라면 독후감 읽는 데에만 일박이일이 소요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이 책을 출간한 것이 2013년, 칠십 대 중반의 핀천이 최첨단 프로그램 언어까지 몽땅 연구해 이런 작품을 만들었다는 한 가지만 해도 사실 기적이고 그가 천재이긴 하다. 읽어볼 만하다. 당신에게 권하지는 않겠다. 책을 읽느라고 하도 고생을 해서. 오죽하면 그의 대표작이라고들 하는 <중력의 무지개>가 절판 상태인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했을까. 사람마다 다르니 당신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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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0-08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싶어요˝ 누르면서도 ˝ bleeding edge˝가 건물끝부분인가? 수준에서 넘어갔는데 뜻이 의외네요. falstaff님께서 워낙 생생하게 소개해주시니 벌써 10분의 1은 읽고 시작한 느낌... 그런데 70대 중반에 아주 새로울 프로그램 언어를 공부해서 쓰신 글이란 말인가요? 나이는 정말 핑계네요. 소설에 대한 소개뿐 아니라 인생 지혜도 새로 얻어갑니다

Falstaff 2021-10-09 22:50   좋아요 0 | URL
음. 이 책은 양심상 함부로 권하기가 쉽지 않네요. 토마스 핀천 작품이 다 그렇더라고요. 읽으면 나름대로 진지하고 좋은데, 읽는 일 자체가 참 힘이 들었습니다.
독자가 읽기도 이리 힘드는데, 그걸 쓴 작가는 어찌 쉽게 썼겠습니까. 그것도 일흔이 넘은 양반이. 어려운 직업이지요, 작가라는 것이. 물론 설렁설렁 쓰는 사람들이 훨씬 많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
 
강아지풀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7
박용래 지음 / 민음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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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 “오늘의 시인 총서”의 일곱 번째 시집 《강아지풀》을 출간한 1975년에 박용래 나이 만 오십. 이때부터 20년 전, 그는 잡지 『현대문학』에 시 <가을의 노래>가 박두진의 추천을 받았고 이듬해인 56년에 <황톳길>, <땅>으로 추천을 완료해 정식 시인이 된다. 이 20년 동안 박용래가 쓴 시를 다 모아봐야 겨우 백 편이 넘는다고 한다.
  충남에서 가장 먼저 전기가 들어왔을 정도로 부유했던 물산 교역의 중심지 강경에서 태어난 시인은 조선은행에 근무하다 해방과 더불어 그만 두고 이후 잠깐 중학교 교사를 지냈다고만 연표에 적혀 있을 뿐, 생활을 위해 어떤 직업을 지니고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시인들 가운데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어 하는 이들이 평균보다 많은 것 같다. 혹시 박용래도 이 부류가 아니었을까. 해방 전 조선은행이면 지금의 한국은행 전신으로 최고의 인재들이 모이는 곳 아닌가. 짧은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곧바로 시 쓰기를 위한 삶으로 접어들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20년 동안 백 편의 시를 썼으면, 한 해에 겨우 다섯 편 남짓이란 말인데, 가히 과작寡作이다.
  내가 알고 있는 과작의 이름난 시인은 서정춘이다. 시인으로 등단한 후 28년 만인 예순두 살의 나이에 겨우 마흔 편도 되지 않는 시를 실은 첫 시집 《죽편》을 낸 이다. 우연이랄까. 박용래나 아홉 살 아래인 서정춘이나, 시가 참 간결하다. 고르고 고른 시어들 몇 개를 나열하여 그것들만 가지고 산문이나 단편소설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소곤거릴 수 있는 시를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예컨대 서정춘의 <죽편 1 - 여행> 전문을 감상해보자.


  여기서부터 ―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전문)


  대나무 한 마디가 기차 한 칸이 되어 시인은 대나무라는 푸른 기차를 타고 전라도 순천 자신의 고향까지 간다는데 그 길이 백년이 걸린다는 시. 구차한 이야기 한 마디 없는 순백의 스케치 한 장이다.
  서정춘은 원래부터 시(에 대하여) 구두쇠라고 호가 났으나 박용래는 이보다 더한 시어의 구두쇠라서 과감하게 동사, 형용사 같은 것도 생략해버린다. 《강아지풀》에서 제일 흥미로웠던 시 한 수 읊어보겠다.



  뜨락


  모과나무, 구름
  소금항아리
  삽살개
  개비름
  주인은 부재
  손만이 기다리는 시간
  흐르는 그늘
  그들은 서로 말을 할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족과 같이 어울려 있다  (전문)

  시인이 주인 없는 집의 툇마루에 앉아 본 뜨락의 정경. 시 한 수 읽는 것으로 한갓진 저 옛 그림 속의 마당 있는 집이 환등기처럼 그려진다.
  박용래의 이런 생략은 물론 처음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생래적으로 향토시인. 1950년대의 농촌 풍경에서 시작했다. 그의 데뷔작인 <가을의 노래>를 보자.


  깊은 밤 풀벌레 소리와 나뿐이로다
  시냇물은 흘러서 바다로 간다
  어두움을 저어 시냇물처럼 저렇게 떨며


  흐느끼는 풀벌레 소리……
  쓸쓸한 마음을 몰고 간다
  빗방울처럼 이었는 슬픔의 나라
  후원을 돌아가며 잦아지게 운다
  오로지 하나의 길 위
  뉘가 밤을 절망이라 하였나
  말긋 말긋 푸른 별들의 눈짓
  풀잎에 바람
  살아 있기에
  밤이 오고
  통이 트고
  하루가 오가는 다시 가을밤
  외로운 그림자는 서성거린다
  찬 이슬밭엔 찬 이슬에 젖고
  언덕에 오르면 언덕
  허전한 수풀 그늘에 앉는다
  그리고 등불을 죽이고 침실에 누워
  호젓한 꿈 태양처럼 지닌다
  허술한
  허술한
  풀벌레와 그림자와 가을밤  (전문. 2연 3행 “이었는”의 정체에 대해서는 좀 더 궁리가 필요하다.)

  광경은 농촌이로되 심상은 쓸쓸함, 외로움 등의 멜랑콜리. 전쟁 후 극빈했던 농촌/향토가 동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이는) 슬픔의 정서로 시작한 박용래. 시는 시간이 지나며 <뜨락>처럼 간략해지다가, 이후엔 또 어린 시절, 소년, 유년기의 회상으로 변신한다. 어려서 본 장면들을 별 수사 없이 묘사하는 간결한 시로. <꽃물>을 읽어보자.


  수수밭
  수수밭 사이로
  기우는
  고향
  가까운
  산자락
  보릿재
  내는
  사람들
  귀향열차
  뒤칸에
  매달린
  노을,
  맨드라미 꽃물  (전문)


  말 그대로 이런 시 구두쇠가 있나 그래. 더 붙여봤자 조금이라도 구적거리는 단어는 품사를 막론하고 면도칼로 싹 잘라버린 시. 나, 너, 그대 같은 대명사는 물론이고 수식어 한 마디 없다. 그래도 탁, 읽으면 단박에 이해가 간다.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함 자체.
  조금 더 오래 살지. 이 시집을 내고 5년 후인 1980년, 갑작스럽게 닥친 심장마비로 겨우 55세에 생을 마치고 만다. 아까운 인물.

일찍 상했구나. 많아봐야 쉰다섯일 텐데 일흔 너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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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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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크라흐트. 올해 하반기에만 크라흐트의 장편 세 권을 읽는다. 그만큼 특색 있는 작가. 작가는 앞부분에서, 이번엔 20세기가 막 시작할 무렵 한 독일인의 경험을 중심으로 서술했으며, 나중에 한 명의 독일인이 더 출연할 것인데 그가 낭만주의자, 채식주의자이고 아직은 여드름투성이 꼬마이지만 아직 자라고 있는 중이니 독자는 기다려주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래 독자는 이 꼬마가 언제 출연할지 애초부터 눈에 힘을 주고 바라보았으나, 결국 찾아내지 못한 채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이 책은 아직은 꼬마가 채 스무 살이 됐을까 말까할 정도까지 성장한 상태에서 시작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작품의 구성을 미리 그릇되게 내보인 것에 무슨 메타포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러하다면 너무 어려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일 터이다.
  주인공은 뉘른베르크 출신 스무 살 가량의 아우구스트 엥겔하르트. 작가의 말처럼 낭만주의자 겸 채식주의자다. 한 가지 더. 나체주의자이기도 하다. 채식주의자 가운데서도 과일을 최애하는 과일주의자 쪽이다. 엥겔하르트는 약관이 되기 전에 <근심 없는 미래>라는 책을 낸 적이 있는 젊은이로 일찍이 사람이 섭취하는 음식물을 점검해 하나하나 불결한 종류를 제거해나간 일이 있는데, 이 과정을 통해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것이 야자열매였다. 야자열매야말로 가히 피조물의 왕이란 수식이 모자라지 않는, 인류를 위한 최상의 대안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때마침 얼마 전에 스위스에 사는 마르테 숙모가 죽으면서 적지 않은 돈을 엥겔하르트에게 유증함으로써 숙원의 사업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
  나체주의자이기도 한 엥겔하르트는 마치 로마시대 때 토가 같은 긴 가운을 입고, 가죽이 아닌 재료를 꼬아 만든 신발을 신은 채 3등 객실에 몸을 싣고 뮌헨 슈바빙에 사는 친구 구스타프 나겔을 만난다. 나겔은 엥겔하르트를 뮌헨 성문 남쪽의 무르나우로 데려가 나체주의자 농부 부부에게 소개를 시킨다. 여기서 엥겔하르트는 (모두 벌거벗은)농부 부부와 친구와 농가의 하녀에게, 코코열매, 태양에 가장 가까운 까마득한 높은 곳에서 살을 찌우고, 수액과 과육과 과일의 껍질과 껍질의 털과, 나뭇잎과 나무껍질 모두를 사용할 수 있는 신성한 코코야자로 지구 전체를 빙 둘러 싸겠다는 자신의 아이디어와 원대한 사업을 설명한다. “형제자매들이여, 그 옛날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떠났듯이 바이에른을 떠나 적도의 나라로 향하는 배표를 예약하라!” 갑작스럽게 출발할 수는 없으니, 언제라도 자신을 따라 남태평양에 오겠다면 환영해마지 않을 것이란 말을 전하고 이들과 이별한다.
  이어서 베를린으로 향하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동프로이센의 메멜 해변에 도착해 해가 완전히 지지 않은 저녁 무렵에 옷을 훌렁 벗고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곳에서 잠에 들었으나,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산책객이 엥겔하르트를 제국 경찰에 신고를 하는 바람에 세 명의 경찰이 들이닥친 건 그러려니 하겠다. 하지만 경찰들은 불문곡직하고 그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가했고, 피 칠갑을 하고 거의 눈이 보이지 않게 퉁퉁 부을 때까지 두드려 패다가 급기야 기절을 해버리니 겁이 덜컥 들었는지 그때서야 경찰서로 싣고 갔다. 다음날 오후에 지역의 인권단체 대표들이 방문해 경찰들에게 공식적으로 항의를 했고, 절뚝거리며 경찰서를 나와 단체가 마련해준 프로이센 제국 철도의 일등칸에 앉아 베를린으로 향하며 결정적으로 이 ‘제국’을 떠나리라고 작심을 했다.
  한 번에 남태평양으로 가는 배편이 없어 먼저 실론 섬에 기착을 했다. 콜롬보에서 가장 좋은 갈레페이스 호텔에 여장을 풀고 실론 왕국의 고도인 캔디를 방문하고자 다음날 열차 객실에 올라 만난 사람이, 우연하게도 채식주의자, 그중에서도 과일주의자인 타밀족 신사 K.V. 고빈다라얀 씨. 그가 말하기를 엥겔하르트의 신념, 그 가운데 코코야자에 관한 믿을 수 없으리만큼 경건한 확신은 ‘신을 먹는 자’ God-eater를 넘어서 신의 섭취자Devourer of God, 즉 신과 동격인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추어올린다. 그는 힌두교의 비슈누 신의 스물네 번째 아바타인 부처의 왼쪽 위 송곳니를 보기 위해 사원을 방문할 것인데 같이 가자고 유인해 동의를 얻고 캔디의 작은 호텔에 여장을 풀고는 사원을 향한다. 그런데 부처의 송곳니가 있는 곳은 거의 완전히 어둠에 덮인 깊숙한 동굴. 동굴 속에서 고빈다라얀을 잃어버린 엥겔하르트는 자신이 그에게 지금 가지고 있는 거액의 전신환을 비롯해 가방에 든 것들에 대한 정보도 흥분한 김에 다 말해주었다는 것을 기억해낸다. 힘들게 동굴에서 빠져나온 엥겔하르트가 허겁지겁 호텔에 도착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미 고빈다라얀이 가방 속에 바늘로 꿰맨 비밀 주머니를 뜯어내고 거액의 전신환을 훔쳐 달아난 다음이었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넘었을까, 말았을까한 어리숙한 청년이라니.
  12주마다 한 번씩 홍콩에서 시드니로 향하는 프린츠 발데마르 호를 타고 노이포메른이라 불리는 독일보호령 내 가젤반도, 블랑슈만bay의 수도 헤르베르트쇠헤(현재의 ‘코코포’)에 도착한 엥겔하르트는 태평양으로 출발하기 전에 노이포메른의 할 총독에게 자신의 뜻에 관하여 편지를 보낸 결과, 에마 포사이스 부인을 적극 추천한 바 있다. 에마 포사이스 부인은 노이포메른에서 하와이 군도에 이르기까지 ‘여왕 에마’로 불리며 솔로몬 해sea는 물론이거니와 비스마르크 해 등등에 막강한 재력을 과시하고 있는 인물이다. ‘구난탐부’라 하는 여사의 목조 궁전에 직접 만나보니 오십 살을 약간 넘긴 것 같은 혼혈로 완벽한 독일어를 구사했다. 여사가 젊고 잘생긴 엥겔하르트를 본 순간 그의 얼굴에서 피렌체의 거장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산마르코 성당의 예수 순교 모습이 떠올랐으나, 정작 한 일이라고는 저 먼 시절 툴라이 족 추장에게 낡아빠진 총 두 정, 도끼 한 상자, 돛단배 두 척, 돼지 서른 마리를 주고 구입한 75 헥타르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카바콘 섬을 무려 사만 마르크의 금액으로 팔아넘긴 거였다. 스무 살 청년은 만 육천 마르크는 현금으로, 나머지는 섬에서 코코야자를 키워 생기는 수익금으로 갚기로 하고 섬을 향해 드디어 떠나게 된다. 조국 독일에서 프러시아 경찰들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고, 실론왕국의 콜롬보에서 고빈다라얀에게 재산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재산을 잃은 다음, 나머지 재산과 만만치 않은 부채를 안고 산 꿈의 땅 카바콘 섬에 드디어 도착한 카바콘. 그러나 섬에는 여전히 원주민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땅의 소유권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엥겔하르트는 이곳을 그가 생각했던 낙원, 신의 섭취자로서 신과 동격인 신성을 가지게 될까. 아니면 염증을 느껴 먼 먼 남태평양까지 오게 만든 조국과 비슷한 또 다른 제국을 구현하고자 할까.
  크리스티안 크라흐트는 내게 흥미로운 작가다. 그러면서도 섣불리 다른 이한테 권하기는 쉽지 않다. 이는 그의 독특한 시각 때문이다. 글을 쓰는 스타일도 다르다. 행간에 독자들은 쉽게 알아챌 수 있는 힌트를 많이 배치해놓아 재미를 더하는데, 동아시아 독자가 아니라 원어민이라면 더욱 많은 힌트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남태평양과는 그다지 깊은 관계가 없어 보이는 1차 세계대전을 그리면서 “서부전선에서 하얀 섬광과 함께 폭발하는 수백만 개의 유탄 파편 중 하나가 제6왕립 바이에른 예비사단 한 젊은 상병의 장딴지 속으로 하얀 벌레처럼 파고든다.”고 하는데, 이 젊은 상병이 누구? 아돌프 히틀러. 그러면서 그것들이 시대적 환경에 어울리게 만들어낸다. 조금 뾰족하다. 그 뾰족함이 나 같은 독자에겐 기발한 방식이라고 환영받는 것이고 다른 이에겐 뾰족함 때문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말씀.

* 크라흐트의 작품들이 희한한 것이, 매우 흥미롭지만 별점은 대개 네 개에서 멈춘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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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2-24 13: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인스타에 책 사진을 올렸더니만,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작가가 직접 좋아요를 눌러 주었더라구요.

Falstaff 2020-12-24 14:05   좋아요 2 | URL
아, 그랬습니까! 일종의 사인을 받으신 거네요. ㅋㅋㅋㅋ

scott 2020-12-24 15:07   좋아요 2 | URL
우와!
매냐님!
팔스타프님 말씀처럼
비대면 사인 받으셨어요.
^@^
 
런던, NW
제이디 스미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스미스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자메이카계 런던시민 가운데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지식계층이다. 물론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온 책에 국한하면 그렇다. 자메이카에는 세 인종이 산다. 소수의 스페인계 백인, 극소수의 원주민, 그리고 대다수의 아프리카계. 그것도 원래 키 크고 건장한 서아프리카 흑인들 가운데서도 노예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올 동안 생존할 수 있었던 우량한 DNA의 아름다운 육체를 지닌 인종들. 흑인들은 백인이 그 많던 원주민을 깡그리 노예 노동에 동원해 거의 다 학살을 한 다음 정신 차려 세 본 후 노동력이 없어져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아프리카에서 수입한 노동자원이었다. 19세기에 노예해방이 있었고, 20세기 들어 점점 개화한 흑인들은 더 나은 돈벌이를 위해 북아메리카와 유럽으로 떠나 그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작가 제이디 스미스의 어머니 이본 베일리도 아프리카계 자메이카 사람 출신의 영국 이민 여성이다. 이이가 삼십 년 연상의 영국 남자 하비 스미스 씨와 결혼하여 제이디 스미스를 낳았으니 그가 주요 등장인물로 자메이카 이민자들을 선택한 것은 당연을 넘어선 필연일 것이다. 어차피 소설이 작가적 삶의 기록을 표백할 수는 없을 터이니.

  스미스가 런던의 북서쪽에 있는 동네 윌즈던Willsden 태생이다. 이 작품의 제목과 같이 런던의 북서쪽NW에 있는 지역 공립학교와 종합 중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하여 책의 첫 장면에서 윌즈던을 설명하고 있으니, 유럽식 거리, 사람들은 맨발로 다니고 유행처럼 야외(집 밖)에서 식사하기 시작하고, 걸어놓은 해먹에 여자가 누워있고는 한단다. 장소만 런던이지, 애초에 ’영국 런던‘ 안의 도시일지언정 그것을 굳이 ’유럽식‘이라 칭하고, 맨발의 주민들, 야외 식사와 걸어놓은 해먹 등을 들먹여 작가의 정체성을 조금 알고 있는 독자는 혹시 중남미의 한 섬을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독자 역시 유럽인, 런던 사람이라면 애초에 런던의 북서쪽의 자메이카 사람들 집단촌을 생각하겠지만. 좋다, 어차피 번역문학을 읽으려면 이 정도 핸디캡이야  어쩔 수 없겠지. 이 윌즈던의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지역인 콜드웰 부근에도 공립 중등학교가 있어 스미스는 이를 ’브레이턴‘이라 작명을 했다. 그리고 이미 마흔 살을 내일모레 하는 브레이턴 출신 두 여자, 백인 리아 한월과 아프리카계 자메이카 이민 가족 출신 내털리 블레이크, 그리고 두 남자, 필릭스 로이드와 네이선 보글을 추적한다. 두 여자는 주연, 두 남자는 조연.

  리아와 내털리. 잠깐. 내털리는 Nathalie일 테고 흔히 우리말로 ’나탈리‘ 정도로 표기하지 않을까 싶다. 어쩐지 내털리, 라고 하니 버터 냄새가 좀 심한 것 같기도 하고, ’내 털이‘ 뭐 어쨌는데 싶기도 하다. 나중에 내털리가 낳은 딸 이름이 또 멋지다. ’네이오미‘다. Naomi, 흔히 ’나오미‘로 쓰는 걸 멋을 부려 네이오미라 하니 또 곡 ’네 어미‘라는 거 같아 좀 어색하다. 그냥 넘어가자. 유색인종들의 집단거주지에 있는 학교니까 당연히 동네 유색인들이 대부분이고, 백인에 비하면 가난한 런던의 유색인종들도 우리나라 입시생들과 마찬가지로 공부 잘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이중 두각을 나타낸 학생이 바로 내털리다. 바로 다음에 남자애 로드니 뱅크스가 있었으나 앞부분에 잠깐 나왔다가 내털리의 첫 경험 상대가 되고는 사라지고, 대학입학자격 시험에 간당간당한 수준으로 백인 여학생이자 내털리의 절친 리아가 있다. 내털리가 열여섯 살 생일을 맞아 익명의 친구로부터 맹랑한 선물을 받았는데 축하 카드에 반드시 혼자 있을 때 포장을 열어보라고 쓰여 있다. 그래 화장실에서 뜯어보니 형광색 바이브레이터였고, 분명 리아가 보낸 것이라 믿으며 두 주일 동안 진정한 오르가슴이 무엇인지 난생처음으로 깨달은 바 있으나, 엄마한테 들켜서 그날로 리아와 몇 년에 걸친 절교 상태로 접어들어야 했다.

  둘은 케임브리지에 입학한다. 우리나라였으면 동네에 현수막 붙였을지도 모른다. 내털리는 법학을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고, 이탈리아 출신으로 경영학과에 다니는 법학 청강생 프랭크(프란체스코) 드 안젤리스와 눈이 맞아 결혼해 남매를 둔 성공한 유색인 법정 변호사라는 타이틀의 하이클래스 유색인으로 등극한다.

  또 한 명의 주인공 백인 리아 한월은 대학에 다니면서 조금씩 변모해 펑크나 히피 스타일로 마리화나와 코카인 맛을 알기도 했다가 점점 자기 자리를 찾아 대학 졸업 후에 비영리단체를 돕는 시청 기구에서 사무를 보고 있다. 사무실에서 유일한 대졸자로 애초부터 팀장 아디나 조지가 중요한 업무를 주지 않을 것임을 통보받은 적도 있다. 왜냐하면, 거창한 학력 때문에 한심한 직장에서 곧 이직할 것이 분명하니까. 그러나 6년이 지나자 이젠 유일한 대졸자라는 타이틀은 아무 소용이 없어지고, 업무를 위해 자신의 학력도 전혀 쓸모 없다는 걸 알고 이젠 웬만큼 터를 잡은 수준.

  리아는 수십 명의 애인을 거쳐 서른 살이 훨씬 넘어 서아프리카계다운 멋진 골격을 지닌 마르세유 출신의 프랑스 남자이자 헤어디자이너 미셸과 결혼해 아직 아이를 갖지 않았다. 일찍이 생명체의 자기복제에 관심이 별로 없어서 열아홉 살 때 첫 번째 중절 수술을 경험한 바 있다. 숨을 들이마시고, 열부터 거꾸로 세세요. 열, 아홉, 여덟…,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지난 두 시간 반. 이마에 와 닿은 남자의 입술. 이어서 스물세 살 때 또 한 번. 그리하여 어느 한 시절, 여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얻는 이점 중 하나가 둘 다 의무를 뛰어넘어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걸 알기도 했다. 반면에 미셸은 적어도 세 명의 자녀를 갖기 ’간절히‘ 바라는 남자. 미셸은 욕실 찬장의 리아가 생리용품을 담아두는 상자 안에 피임약을 숨겨두고 하루에 한 정씩 복용하고 있는 것을 아직은 모르고 있다.

  이들은 중등학교 시절의 절교를 벗어나 다시 오랜 세월을 두고 우정을 쌓아가지만, 한편으로는 케케묵은 우정의 의무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하고, 상대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독자의 권리로 이런 내용과 관계없이, 나는 등장인물들의 삶의 방식의 차이로 책을 읽었다. 내털리와 조연으로 등장하는 필릭스, 그리고 리아의 남편 미셸과 엄마 폴린 한월여사는 인생의 뚜렷한 목표를 정하고, 모든 노력을 다 해 기어이 목표를 달성한 후, 다시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또 아등바등 안간힘을 써 기어이 달성하려는 자기개발형 인간들이다. 반면 리아와 내털리의 남편인 프랭크 드 안젤리스와 (조금 과격하지만)네이선 보글은 삶 자체를 즐기며 동시에 견뎌내는 것처럼 보인다. 제이디 스미스는 두 그룹 어느 쪽의 삶이 더 올바른 길이라 결코 결론을 내지 않아 결국 선택은 독자의 몫으로 넘어간다. 단, 이 책을 나와 같은 방식으로 읽는다는 전제에서 말하자면 그렇다. 그리하여 <런던, NW>는 전작 <하얀 이빨>이나 <온 뷰티>처럼 문화, 계급, 빈부, 젠더의 충돌이라기보다 의식의 충돌일 수도, 그렇게 읽을 수도 있다. 물론 아마추어의 억측이겠지만.

  목표달성을 통한 삶의 여유를 택할 것인지, 안분의 삶을 살며 작은 행복과 많은 자잘한 고통을 견딜 것인지, 아쉽게 이게 마음대로, 선택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다 팔자소관이긴 하다. 아, 그러나 나는 애초에 경쟁을 싫어하고 목표와 달성을 혐오하지만, 두 가지 경우 다 당신에게, 그리고 나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행복. 그건 언제나 과거에만 있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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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24 1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팔스타프님에 리뷰 항상 눈팅만 @ㅅ@만 하며 소심하게 추천 리뷰만 눌렀어요 ㅋㅋ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팔스타프님 서재에 트리 하그루 놓고 가여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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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메리 크리스마스 ^.~

Falstaff 2020-12-24 10:33   좋아요 1 | URL
하하하... 고맙습니다.
스콧 님도 오붓하게 매우 즐거운 성탄 만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