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NW
제이디 스미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스미스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자메이카계 런던시민 가운데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지식계층이다. 물론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온 책에 국한하면 그렇다. 자메이카에는 세 인종이 산다. 소수의 스페인계 백인, 극소수의 원주민, 그리고 대다수의 아프리카계. 그것도 원래 키 크고 건장한 서아프리카 흑인들 가운데서도 노예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올 동안 생존할 수 있었던 우량한 DNA의 아름다운 육체를 지닌 인종들. 흑인들은 백인이 그 많던 원주민을 깡그리 노예 노동에 동원해 거의 다 학살을 한 다음 정신 차려 세 본 후 노동력이 없어져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아프리카에서 수입한 노동자원이었다. 19세기에 노예해방이 있었고, 20세기 들어 점점 개화한 흑인들은 더 나은 돈벌이를 위해 북아메리카와 유럽으로 떠나 그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작가 제이디 스미스의 어머니 이본 베일리도 아프리카계 자메이카 사람 출신의 영국 이민 여성이다. 이이가 삼십 년 연상의 영국 남자 하비 스미스 씨와 결혼하여 제이디 스미스를 낳았으니 그가 주요 등장인물로 자메이카 이민자들을 선택한 것은 당연을 넘어선 필연일 것이다. 어차피 소설이 작가적 삶의 기록을 표백할 수는 없을 터이니.

  스미스가 런던의 북서쪽에 있는 동네 윌즈던Willsden 태생이다. 이 작품의 제목과 같이 런던의 북서쪽NW에 있는 지역 공립학교와 종합 중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하여 책의 첫 장면에서 윌즈던을 설명하고 있으니, 유럽식 거리, 사람들은 맨발로 다니고 유행처럼 야외(집 밖)에서 식사하기 시작하고, 걸어놓은 해먹에 여자가 누워있고는 한단다. 장소만 런던이지, 애초에 ’영국 런던‘ 안의 도시일지언정 그것을 굳이 ’유럽식‘이라 칭하고, 맨발의 주민들, 야외 식사와 걸어놓은 해먹 등을 들먹여 작가의 정체성을 조금 알고 있는 독자는 혹시 중남미의 한 섬을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독자 역시 유럽인, 런던 사람이라면 애초에 런던의 북서쪽의 자메이카 사람들 집단촌을 생각하겠지만. 좋다, 어차피 번역문학을 읽으려면 이 정도 핸디캡이야  어쩔 수 없겠지. 이 윌즈던의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지역인 콜드웰 부근에도 공립 중등학교가 있어 스미스는 이를 ’브레이턴‘이라 작명을 했다. 그리고 이미 마흔 살을 내일모레 하는 브레이턴 출신 두 여자, 백인 리아 한월과 아프리카계 자메이카 이민 가족 출신 내털리 블레이크, 그리고 두 남자, 필릭스 로이드와 네이선 보글을 추적한다. 두 여자는 주연, 두 남자는 조연.

  리아와 내털리. 잠깐. 내털리는 Nathalie일 테고 흔히 우리말로 ’나탈리‘ 정도로 표기하지 않을까 싶다. 어쩐지 내털리, 라고 하니 버터 냄새가 좀 심한 것 같기도 하고, ’내 털이‘ 뭐 어쨌는데 싶기도 하다. 나중에 내털리가 낳은 딸 이름이 또 멋지다. ’네이오미‘다. Naomi, 흔히 ’나오미‘로 쓰는 걸 멋을 부려 네이오미라 하니 또 곡 ’네 어미‘라는 거 같아 좀 어색하다. 그냥 넘어가자. 유색인종들의 집단거주지에 있는 학교니까 당연히 동네 유색인들이 대부분이고, 백인에 비하면 가난한 런던의 유색인종들도 우리나라 입시생들과 마찬가지로 공부 잘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이중 두각을 나타낸 학생이 바로 내털리다. 바로 다음에 남자애 로드니 뱅크스가 있었으나 앞부분에 잠깐 나왔다가 내털리의 첫 경험 상대가 되고는 사라지고, 대학입학자격 시험에 간당간당한 수준으로 백인 여학생이자 내털리의 절친 리아가 있다. 내털리가 열여섯 살 생일을 맞아 익명의 친구로부터 맹랑한 선물을 받았는데 축하 카드에 반드시 혼자 있을 때 포장을 열어보라고 쓰여 있다. 그래 화장실에서 뜯어보니 형광색 바이브레이터였고, 분명 리아가 보낸 것이라 믿으며 두 주일 동안 진정한 오르가슴이 무엇인지 난생처음으로 깨달은 바 있으나, 엄마한테 들켜서 그날로 리아와 몇 년에 걸친 절교 상태로 접어들어야 했다.

  둘은 케임브리지에 입학한다. 우리나라였으면 동네에 현수막 붙였을지도 모른다. 내털리는 법학을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고, 이탈리아 출신으로 경영학과에 다니는 법학 청강생 프랭크(프란체스코) 드 안젤리스와 눈이 맞아 결혼해 남매를 둔 성공한 유색인 법정 변호사라는 타이틀의 하이클래스 유색인으로 등극한다.

  또 한 명의 주인공 백인 리아 한월은 대학에 다니면서 조금씩 변모해 펑크나 히피 스타일로 마리화나와 코카인 맛을 알기도 했다가 점점 자기 자리를 찾아 대학 졸업 후에 비영리단체를 돕는 시청 기구에서 사무를 보고 있다. 사무실에서 유일한 대졸자로 애초부터 팀장 아디나 조지가 중요한 업무를 주지 않을 것임을 통보받은 적도 있다. 왜냐하면, 거창한 학력 때문에 한심한 직장에서 곧 이직할 것이 분명하니까. 그러나 6년이 지나자 이젠 유일한 대졸자라는 타이틀은 아무 소용이 없어지고, 업무를 위해 자신의 학력도 전혀 쓸모 없다는 걸 알고 이젠 웬만큼 터를 잡은 수준.

  리아는 수십 명의 애인을 거쳐 서른 살이 훨씬 넘어 서아프리카계다운 멋진 골격을 지닌 마르세유 출신의 프랑스 남자이자 헤어디자이너 미셸과 결혼해 아직 아이를 갖지 않았다. 일찍이 생명체의 자기복제에 관심이 별로 없어서 열아홉 살 때 첫 번째 중절 수술을 경험한 바 있다. 숨을 들이마시고, 열부터 거꾸로 세세요. 열, 아홉, 여덟…,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지난 두 시간 반. 이마에 와 닿은 남자의 입술. 이어서 스물세 살 때 또 한 번. 그리하여 어느 한 시절, 여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얻는 이점 중 하나가 둘 다 의무를 뛰어넘어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걸 알기도 했다. 반면에 미셸은 적어도 세 명의 자녀를 갖기 ’간절히‘ 바라는 남자. 미셸은 욕실 찬장의 리아가 생리용품을 담아두는 상자 안에 피임약을 숨겨두고 하루에 한 정씩 복용하고 있는 것을 아직은 모르고 있다.

  이들은 중등학교 시절의 절교를 벗어나 다시 오랜 세월을 두고 우정을 쌓아가지만, 한편으로는 케케묵은 우정의 의무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하고, 상대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독자의 권리로 이런 내용과 관계없이, 나는 등장인물들의 삶의 방식의 차이로 책을 읽었다. 내털리와 조연으로 등장하는 필릭스, 그리고 리아의 남편 미셸과 엄마 폴린 한월여사는 인생의 뚜렷한 목표를 정하고, 모든 노력을 다 해 기어이 목표를 달성한 후, 다시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또 아등바등 안간힘을 써 기어이 달성하려는 자기개발형 인간들이다. 반면 리아와 내털리의 남편인 프랭크 드 안젤리스와 (조금 과격하지만)네이선 보글은 삶 자체를 즐기며 동시에 견뎌내는 것처럼 보인다. 제이디 스미스는 두 그룹 어느 쪽의 삶이 더 올바른 길이라 결코 결론을 내지 않아 결국 선택은 독자의 몫으로 넘어간다. 단, 이 책을 나와 같은 방식으로 읽는다는 전제에서 말하자면 그렇다. 그리하여 <런던, NW>는 전작 <하얀 이빨>이나 <온 뷰티>처럼 문화, 계급, 빈부, 젠더의 충돌이라기보다 의식의 충돌일 수도, 그렇게 읽을 수도 있다. 물론 아마추어의 억측이겠지만.

  목표달성을 통한 삶의 여유를 택할 것인지, 안분의 삶을 살며 작은 행복과 많은 자잘한 고통을 견딜 것인지, 아쉽게 이게 마음대로, 선택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다 팔자소관이긴 하다. 아, 그러나 나는 애초에 경쟁을 싫어하고 목표와 달성을 혐오하지만, 두 가지 경우 다 당신에게, 그리고 나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행복. 그건 언제나 과거에만 있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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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24 1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팔스타프님에 리뷰 항상 눈팅만 @ㅅ@만 하며 소심하게 추천 리뷰만 눌렀어요 ㅋㅋ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팔스타프님 서재에 트리 하그루 놓고 가여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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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메리 크리스마스 ^.~

Falstaff 2020-12-24 10:33   좋아요 1 | URL
하하하... 고맙습니다.
스콧 님도 오붓하게 매우 즐거운 성탄 만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