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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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크라흐트. 올해 하반기에만 크라흐트의 장편 세 권을 읽는다. 그만큼 특색 있는 작가. 작가는 앞부분에서, 이번엔 20세기가 막 시작할 무렵 한 독일인의 경험을 중심으로 서술했으며, 나중에 한 명의 독일인이 더 출연할 것인데 그가 낭만주의자, 채식주의자이고 아직은 여드름투성이 꼬마이지만 아직 자라고 있는 중이니 독자는 기다려주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래 독자는 이 꼬마가 언제 출연할지 애초부터 눈에 힘을 주고 바라보았으나, 결국 찾아내지 못한 채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이 책은 아직은 꼬마가 채 스무 살이 됐을까 말까할 정도까지 성장한 상태에서 시작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작품의 구성을 미리 그릇되게 내보인 것에 무슨 메타포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러하다면 너무 어려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일 터이다.
  주인공은 뉘른베르크 출신 스무 살 가량의 아우구스트 엥겔하르트. 작가의 말처럼 낭만주의자 겸 채식주의자다. 한 가지 더. 나체주의자이기도 하다. 채식주의자 가운데서도 과일을 최애하는 과일주의자 쪽이다. 엥겔하르트는 약관이 되기 전에 <근심 없는 미래>라는 책을 낸 적이 있는 젊은이로 일찍이 사람이 섭취하는 음식물을 점검해 하나하나 불결한 종류를 제거해나간 일이 있는데, 이 과정을 통해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것이 야자열매였다. 야자열매야말로 가히 피조물의 왕이란 수식이 모자라지 않는, 인류를 위한 최상의 대안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때마침 얼마 전에 스위스에 사는 마르테 숙모가 죽으면서 적지 않은 돈을 엥겔하르트에게 유증함으로써 숙원의 사업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
  나체주의자이기도 한 엥겔하르트는 마치 로마시대 때 토가 같은 긴 가운을 입고, 가죽이 아닌 재료를 꼬아 만든 신발을 신은 채 3등 객실에 몸을 싣고 뮌헨 슈바빙에 사는 친구 구스타프 나겔을 만난다. 나겔은 엥겔하르트를 뮌헨 성문 남쪽의 무르나우로 데려가 나체주의자 농부 부부에게 소개를 시킨다. 여기서 엥겔하르트는 (모두 벌거벗은)농부 부부와 친구와 농가의 하녀에게, 코코열매, 태양에 가장 가까운 까마득한 높은 곳에서 살을 찌우고, 수액과 과육과 과일의 껍질과 껍질의 털과, 나뭇잎과 나무껍질 모두를 사용할 수 있는 신성한 코코야자로 지구 전체를 빙 둘러 싸겠다는 자신의 아이디어와 원대한 사업을 설명한다. “형제자매들이여, 그 옛날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떠났듯이 바이에른을 떠나 적도의 나라로 향하는 배표를 예약하라!” 갑작스럽게 출발할 수는 없으니, 언제라도 자신을 따라 남태평양에 오겠다면 환영해마지 않을 것이란 말을 전하고 이들과 이별한다.
  이어서 베를린으로 향하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동프로이센의 메멜 해변에 도착해 해가 완전히 지지 않은 저녁 무렵에 옷을 훌렁 벗고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곳에서 잠에 들었으나,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산책객이 엥겔하르트를 제국 경찰에 신고를 하는 바람에 세 명의 경찰이 들이닥친 건 그러려니 하겠다. 하지만 경찰들은 불문곡직하고 그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가했고, 피 칠갑을 하고 거의 눈이 보이지 않게 퉁퉁 부을 때까지 두드려 패다가 급기야 기절을 해버리니 겁이 덜컥 들었는지 그때서야 경찰서로 싣고 갔다. 다음날 오후에 지역의 인권단체 대표들이 방문해 경찰들에게 공식적으로 항의를 했고, 절뚝거리며 경찰서를 나와 단체가 마련해준 프로이센 제국 철도의 일등칸에 앉아 베를린으로 향하며 결정적으로 이 ‘제국’을 떠나리라고 작심을 했다.
  한 번에 남태평양으로 가는 배편이 없어 먼저 실론 섬에 기착을 했다. 콜롬보에서 가장 좋은 갈레페이스 호텔에 여장을 풀고 실론 왕국의 고도인 캔디를 방문하고자 다음날 열차 객실에 올라 만난 사람이, 우연하게도 채식주의자, 그중에서도 과일주의자인 타밀족 신사 K.V. 고빈다라얀 씨. 그가 말하기를 엥겔하르트의 신념, 그 가운데 코코야자에 관한 믿을 수 없으리만큼 경건한 확신은 ‘신을 먹는 자’ God-eater를 넘어서 신의 섭취자Devourer of God, 즉 신과 동격인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추어올린다. 그는 힌두교의 비슈누 신의 스물네 번째 아바타인 부처의 왼쪽 위 송곳니를 보기 위해 사원을 방문할 것인데 같이 가자고 유인해 동의를 얻고 캔디의 작은 호텔에 여장을 풀고는 사원을 향한다. 그런데 부처의 송곳니가 있는 곳은 거의 완전히 어둠에 덮인 깊숙한 동굴. 동굴 속에서 고빈다라얀을 잃어버린 엥겔하르트는 자신이 그에게 지금 가지고 있는 거액의 전신환을 비롯해 가방에 든 것들에 대한 정보도 흥분한 김에 다 말해주었다는 것을 기억해낸다. 힘들게 동굴에서 빠져나온 엥겔하르트가 허겁지겁 호텔에 도착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미 고빈다라얀이 가방 속에 바늘로 꿰맨 비밀 주머니를 뜯어내고 거액의 전신환을 훔쳐 달아난 다음이었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넘었을까, 말았을까한 어리숙한 청년이라니.
  12주마다 한 번씩 홍콩에서 시드니로 향하는 프린츠 발데마르 호를 타고 노이포메른이라 불리는 독일보호령 내 가젤반도, 블랑슈만bay의 수도 헤르베르트쇠헤(현재의 ‘코코포’)에 도착한 엥겔하르트는 태평양으로 출발하기 전에 노이포메른의 할 총독에게 자신의 뜻에 관하여 편지를 보낸 결과, 에마 포사이스 부인을 적극 추천한 바 있다. 에마 포사이스 부인은 노이포메른에서 하와이 군도에 이르기까지 ‘여왕 에마’로 불리며 솔로몬 해sea는 물론이거니와 비스마르크 해 등등에 막강한 재력을 과시하고 있는 인물이다. ‘구난탐부’라 하는 여사의 목조 궁전에 직접 만나보니 오십 살을 약간 넘긴 것 같은 혼혈로 완벽한 독일어를 구사했다. 여사가 젊고 잘생긴 엥겔하르트를 본 순간 그의 얼굴에서 피렌체의 거장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산마르코 성당의 예수 순교 모습이 떠올랐으나, 정작 한 일이라고는 저 먼 시절 툴라이 족 추장에게 낡아빠진 총 두 정, 도끼 한 상자, 돛단배 두 척, 돼지 서른 마리를 주고 구입한 75 헥타르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카바콘 섬을 무려 사만 마르크의 금액으로 팔아넘긴 거였다. 스무 살 청년은 만 육천 마르크는 현금으로, 나머지는 섬에서 코코야자를 키워 생기는 수익금으로 갚기로 하고 섬을 향해 드디어 떠나게 된다. 조국 독일에서 프러시아 경찰들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고, 실론왕국의 콜롬보에서 고빈다라얀에게 재산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재산을 잃은 다음, 나머지 재산과 만만치 않은 부채를 안고 산 꿈의 땅 카바콘 섬에 드디어 도착한 카바콘. 그러나 섬에는 여전히 원주민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땅의 소유권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엥겔하르트는 이곳을 그가 생각했던 낙원, 신의 섭취자로서 신과 동격인 신성을 가지게 될까. 아니면 염증을 느껴 먼 먼 남태평양까지 오게 만든 조국과 비슷한 또 다른 제국을 구현하고자 할까.
  크리스티안 크라흐트는 내게 흥미로운 작가다. 그러면서도 섣불리 다른 이한테 권하기는 쉽지 않다. 이는 그의 독특한 시각 때문이다. 글을 쓰는 스타일도 다르다. 행간에 독자들은 쉽게 알아챌 수 있는 힌트를 많이 배치해놓아 재미를 더하는데, 동아시아 독자가 아니라 원어민이라면 더욱 많은 힌트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남태평양과는 그다지 깊은 관계가 없어 보이는 1차 세계대전을 그리면서 “서부전선에서 하얀 섬광과 함께 폭발하는 수백만 개의 유탄 파편 중 하나가 제6왕립 바이에른 예비사단 한 젊은 상병의 장딴지 속으로 하얀 벌레처럼 파고든다.”고 하는데, 이 젊은 상병이 누구? 아돌프 히틀러. 그러면서 그것들이 시대적 환경에 어울리게 만들어낸다. 조금 뾰족하다. 그 뾰족함이 나 같은 독자에겐 기발한 방식이라고 환영받는 것이고 다른 이에겐 뾰족함 때문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말씀.

* 크라흐트의 작품들이 희한한 것이, 매우 흥미롭지만 별점은 대개 네 개에서 멈춘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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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2-24 13: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인스타에 책 사진을 올렸더니만,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작가가 직접 좋아요를 눌러 주었더라구요.

Falstaff 2020-12-24 14:05   좋아요 2 | URL
아, 그랬습니까! 일종의 사인을 받으신 거네요. ㅋㅋㅋㅋ

scott 2020-12-24 15:07   좋아요 2 | URL
우와!
매냐님!
팔스타프님 말씀처럼
비대면 사인 받으셨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