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빛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8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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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생이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을유생 해방둥이 닭띠. 생일이 12월이라 아직 일흔아홉 살이다. 독후감을 쓰느라 위키피디아 검색을 해보니, 이이가 아일랜드 사람인 줄은 알았는데, 거기서도 웩스퍼드 출생이다. 웩스퍼드에서 아마 매년 오페라 축제가 열리지? 마이어베어의 <북극성>, 안톤 루빈스타인의 <악령> 등 자주 공연하지 않는 작품들을 무대에 올려 다양한 레퍼토리를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예전엔 실황 음반이 종종 나왔다. 아쉽게도 녹음/화면 저장 장치의 시대가 끝나 이젠 구경하기 힘들지만. 웩스퍼드가 여태 스코틀랜드에 있는 줄 알았지 뭐야. 밴빌이 거기 출신이군.

  차고 직원 마틴 밴빌 씨와 아그네스 사이의 삼남매 빈센트, 존, 베로니카 모두 작가란다.

  존은 웩스퍼드에 있는 세인트피터스 칼리지를 졸업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칼리지College는 대학이 아니라 우리나라 학제로 고등학교를 생각하면 된다. 이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젊은 시절 4년 동안 내리 술을 퍼 마시느라 연애도 하지 않은 걸 이날 이때까지 후회하며 살고 있다고. 그게 뭐 어때서. 죄도 아닌 걸. 너무 어려서부터 밝히면 뼈 삭는다, 뼈 삭아. 그렇다고 놀고먹은 건 아니고, 아일랜드 국적 항공사 에어링구스Aer Lingus에서 직원으로 일을 했는데, 직원들에게 주는 특별 할인 티켓을 이용해 그리스,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며 식견을 넓혔다고. 이후 일간지 몇 군데를 거치다가 전업작가의 길을 선택했다. 잘했다. 존 밴빌 정도의 실력이면 당연히 전업작가를 해야지.

  어디서 주워듣기를, 더블린에 있는 책방 아무데나 가도 작가 세 명의 전문 가판대가 놓였으니 첫째가 조이스요, 둘째가 트레버이고 셋째가 밴빌이라. 뭐 믿거나 말거나. 그만큼 밴빌이 아일랜드에서 성가를 드높이고 있다는 말이겠지. 나는 세 권의 밴빌을 읽었는데 전기 소설 <케플러>와 <코페르니쿠스>는 읽으면서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이 책을 골랐을까, 싶었다. 어린 시절부터 소년소녀 위인전집 같은 전기류를 무척 싫어했던 버릇이 아직도 여전하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 처음 읽은 밴빌 <바다>는 아직도 휴가를 맞은 가족과 주인공 소년을 둘러싼 쓸쓸한 바닷가 광경이 기억날 정도이다. 그때 역자 정영목의 번역 문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궁시렁거린 적 있다. 당시에 감히 유명 역자의 “한국어 문장을 만드는 솜씨”를 가지고 턱도 없는 불만을 터뜨리는 우를 범하기도 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얼굴이 다 화끈하다. 5년 전만 해도 내가 참 건방졌구나. 다시 말해야겠다. 정영목의 우리말 문장은 섬세하다. 어쩌면 (이게 문제인데) 밴빌의 원문보다 더 매끄러울 수도 있겠다. 가만 읽으면서 간혹 긴 복문複文 중에서 주어와 술어가 귀찮을 정도로 헷갈리는 경우가 있었다. 당연히 <바다> 얘기가 아니라 <오래된 빛>의 경우이다. <바다>에서도 마찬가지였겠지.


  작품은 일인칭 시점으로 쓰였다. 독후감은 편의상 ‘나’ 대신 주인공 알렉산더 클리브, 알렉시라 하고 내 시점으로 쓰겠다. 알렉시는 60대 은퇴한 연극 배우이다. 어느 날 무대에 올라 갑자기 먹통 상태, 어린 시절부터 기억력이 남달라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대사가 모두 휘발해 날아가버려 연극을 왕창 말아먹은 다음부터 불러주는 극단이 없어 사실상 강제 은퇴 당했다. 이 알렉시의 삶을 지배하는 세 가지 사건이 작품의 근간이다.

  먼저 반백 년 전 알렉시의 가장 가까운 친구 빌리 그레이. 그의 어머니 실리아 그레이와 사랑에 빠진 일. 당시 알렉시는 열다섯 살, 미시즈 그레이는 서른다섯 살의 원숙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알렉시는 기억을 확신하지 않는다. 너무도 오랜 시절이라 디테일은 가물가물한 안개 비슷한 막에 싸여 있다. 언제 미시즈 그레이를 처음 보았을까? 알렉시가 열한 두 살이었던 기억의 저편에 떠오르는 그림 하나. 왜곡된 것이 분명하겠지. 어느 봄날. 봄이어야 한다. 4월. 검정 자전거를 타고 성당에 가는 여인. 성당 앞 마당가에 이르렀고, 4월의 오전이었으며, 당시 여성들의 일상 외출복이었던 넓고 펑퍼짐한 치마가 허리까지 훌렁 올라가게 무심한 봄바람이 아주 짧게 훅 불어왔는데, 자전거를 탄 어른 여자가 겨우 열살을 넘겼을까 하는 소년하고 눈이 마주치자, 입을 알파벳 O자로 만들면서 콸콸 시원한 수돗물처럼 경쾌하게 웃으며 지나치던 기억. 이제 알렉시는 이 기억을 자신하지 못한다. 4~5년 뒤의 미시즈 그레이가 목 깊은 곳에서부터 웃음을 터뜨리며 자전거 위에서 내려다보던 소탈하고 흥겹고 너그러운 알렉시의 베누스, 가정주부이면서도 베누스였다고 확정해버렸다.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치마를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라앉히던 손등의 우아함, 그리고 너그러움. 이후 알렉시가 살면서 유일하게 진정으로 뜨겁게 추구할 것들.

  4월, 프리아포스의 축일의 잔치 같은 기억. 수업이 없는 날이었고, 언제나 그랬듯이 빌리네 집에 놀러간 날. 방문이 조금 열려 있는 빌리 부모의 침실 속 부부욕실. 벌거벗은 채 목욕을 하고 있는 미시즈 그레이가 전신거울에 비친 모습이 마치 트립티콘처럼 생긴 화장대의 3면 거울에 다시 비쳐 알렉시의 망막에 첫번째 혼란과 충격으로 다다랐다. 루벤스 때문에 갖고 있던 분홍과 복숭앗빛 색조의 배반. 미시즈 그레이의 피부는 거친 입자로 되어 있었으며 탁하면서도 희미한 광택을 발했다. 곤혹스럽게도 마그네슘 색에서부터 은색과 주석색, 불투명한 노란색과 연한 황토색, 심지어 군데군데 희미한 녹색 기운도 보이고, 우묵한 곳의 이끼 같은 연보라색 그림자까지 그리 밝지 않은 다양한 색조였는데, 거의 모든 것이 화장대 거울의 중앙 패널에 담겨 있었으며 양 팔과 팔꿈치는 양쪽 가의 거울 속 광경이었다.

  질풍과 갑작스러운 비와 씻겨 나간 광대한 하늘이 있는 수채화 같던 4월, 덜덜거리던 왜건 속에서 미시즈 그레이가 가볍게 입을 맞추기 전까지 알렉시는 그저 아들의 친구, 겨울 바지에 가랑이가 쓸려 옷을 벗기고 까진 허벅지 안쪽 말랑말랑한 살 위에 텔컴 파우더를 발라주던 조무라기였을 뿐이었건만 이후 154번의 낮과 153번의 밤 동안 지속된, 열다섯 살짜리 날 것 그대로의 소년과 삼십대 중반의 무르익은 유부녀의 불륜은 타운에서도 일찍이 알려진 적이 없었을 것이다. 아니다. 아마 알렉시의 이런 생각이 틀렸을 것이다. 세상에 일어난 적이 없던 일은 없으니까.


  리디아는 알렉시의 아내. 정식 이름은 리아 머서 클리브. 잘 생기고 큰 몸집에 극적인 옆모습을 가졌다. 술을 조금 과하게 마시고 담배 역시 그렇다. 간혹 부부 사이에 마찰이 있고 말도 잘 하지 않지만 서로 여전히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몽유병이 있다. 차라리 몽주병夢走病이라 해도 좋을 만큼 잠에서 깨지 않은 상태로 집의 아래층, 위층을 뛰어다니며, 우리 캐서린, 캐스, 캐스가 아직 살아 있고, 다시 아이가 되어 집안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잠 속에서. 알레시는 이때마다 리디아를 깨우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혹시 어딘가에 부딪거나 뭔가 발에 걸려 넘어져 심하게 다칠까봐 항상 꿈 속의 리디아 곁을 따라다닌다. 딸 캐서린이 죽고 10년이 흘렀다. 삶과 죽음의 법칙에 잔인한 빈틈이 있어서 캐스가 아직 완전히 죽지 못하고 어떤 식이든 여전히 어둠의 땅에서 포로가 되어 괴로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머니가 자기를 다시 살아있는 자들 사이로 데려가주기를 헛되이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지 리디아는 꿈 속에서 딸을 찾아 달음박질 친다.

  캐서린은 학자 기질이 있고 실제로 아직 공부중인 스물일곱 살 학생이었다. 만델바움 증후군이라는 희귀한 정신결함으로 어렸을 때 고생한 적 있다. 이탈리아 리구리아의 포르토베네레 해안, 산피에트로 교회 아래에서 파도에 씻긴 바위들에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몸이 으깨진 시신으로 발견되었을 때는 임신중이었다. 제노바만 안으로 길게 파고 들어간 곶의 맨 끝, 시인 셸리가 익사한 레리치의 맞은편에서. 알렉시는 미래의 아버지가 되지 못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정말로 알고 싶다. 그러나 찾을 방법이 없다. 찾으면 어쩌려고? 그저 보고 싶을 뿐이다. 얼굴의 이목구비가 사라진 시신을 딸이라고 증언할 수밖에 없는 부모. 그 시신을 직접 눈으로 봐야 했던 어머니가 몽유, 차라리 몽주라고 해야 마땅한 몽유에 시달린다고 해서 이상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나머지 하나는 난데없이 걸려온 전화 한 통. 미국 여자로부터 온 전화. 영화에 한 번도 출연해본 적이 없는 알렉시에게 영화의 주연을 맡아달라는 의뢰. 마시 메리웨더. 캘리포니아 해안의 카버시티에서 온 젊지 않은 흡연자의 목소리. 영화사 펜터그림처스의 임원이며, 독립 스튜디오에서 건 전화였다. 악셀 판더라는 사람의 삶에 기반한 영화를 제작하려 하고, 영화의 제목은 “과거의 발명”이 될 것이란다. 토비 태거트라는 사람이 감독을 맡았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감독은 남우 주연으로 스크린에 새롭고 신선한 인물을 발탁해달라고 주문했다. 마시 메리웨더가 하는 말을 믿는다면, 메리웨더가 접촉한 첫번째 인물이 알렉시였다.

  그리하여 영화를 찍는다. 여우 주연은 돈 데번포트. 영화는 스케쥴을 따라 정연하게 진행하고, 그러나 끝까지 이렇듯 깔끔하게 마감을 할 수 있으면 소설이 아니라서, 불과 몇 컷을 남겨두지 않은 상태로 갑작스럽게 중단되고 만다. 돈 데번포트가 수면유도제를 한 통 다 삼켜버린 것. 이 젊은 여성은 또 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틀림없이 결국 죽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수면제 한 통을 다 삼켜 고통스러운 위세척과 후유증을 자초했을까? 이런 건 알렉시가 알 바 아니다. 다만 이성 간의 사랑이 아니라, 서양 문학에서 거의 처음보는 듯한, 나이든 남자와 젊은 여성 간의, 아마도 딸 캐서린을 빙의한 자살을 매개로 한 것 같은 아버지의 정 비슷한 심정으로, 아내 리디아의 허락을 받아, 둘은 이탈리아 리구리아 해안을 향해 떠난다.

  이 세가지 사건이 서로 맞물리면서 작품은 아일랜드 작가들한테 유난히 드러나는 쓸쓸한 아름다움 속으로 한발한발, 더듬더듬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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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4-16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별 다섯 또 출현이네욤!! 이번엔 밴빌..
요것도 질러야 겠습니다.. 또 한 권이 추가되네요...제게도 별5개였으면 좋겠슴돠!!

Falstaff 2025-04-16 15:21   좋아요 0 | URL
야무 님도 재미나게 읽으실 거 같아요.

blanca 2025-04-16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바다>와 비교해서 어떠셨어요? 저는 그 작품이 너무 좋아 이게 그 아류인가 싶어 안 봤거든요. 풀스타프님 별 다섯 개 주신 거 보니 읽어야겠다 싶어요.

Falstaff 2025-04-16 17:56   좋아요 0 | URL
<바다>는 읽은 지 꽤 오래라 기억이 아스름합니다. 아류...는 아닐 겁니다. ㅎㅎㅎ 아류 아닙니다. 이 책도 다른 독자에게 권하고 싶을 정도로 제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는 <바다>보다 좀 더 좋았습니다.

coolcat329 2025-04-16 1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이것도 별다섯!
친구의 엄마와 사랑이라니...내용이 심상치 않네요. ‘쓸쓸한 아름다움 속으로‘ 저도 들어가고 싶네요.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5-04-16 20:10   좋아요 1 | URL
ㅎㅎㅎ 추천작이 대개 그러하듯이 너무 기대가 크지 않기 바랍니다. ^^;;

그레이스 2025-04-18 2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정영목을 칭찬하시니 제가 기분이 좋네요.
저도 이 책 궁금했는데,,, 폴스타프님의 별 다섯은 읽어야죠!

Falstaff 2025-04-18 21:31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 님이 정영목을 좋아하시는군요!
저는 뭐 이랬다 저랬나 장난꾸러기인 걸요. ㅋㅋㅋ
이 책 괜찮더라고요. 엇그제 읽은 장바티스트 앙드레아가 쓴 <그녀를 지키다>도 좋았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