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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파크
유디트 헤르만 지음, 신동화 옮김 / 마라카스 / 202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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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열일곱 편의 짧은 이야기를 담은 선집.
내가 사랑했던 20~30대 70년 개띠 독일여성 유디트 헤르만도 어느새 2016년, 40대 중년이 됐고, 이제 소설 속 주인공 역시 중년과 노년의 여성이 많이 등장하는 시기를 맞았다. 이이의 새로운 작품집 《레티파크》가 시중에 깔린 것을 보고, 《여름 별장, 그 후》, 《단지 유령일 뿐》, 《알리스》에서 경험했던 감각적이고 섬세한 묘사를 여전히 구사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헤르만의 문장은 흘러나오는 것이라기 보다 갈고 쪼아서 만들어내는 거라고 봐 애초부터 다작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고, 장편소설은 더 애를 먹을 거라 짐작했다.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지는 않았지만 이이가 두 편의 장편소설도 출판했는데, 장편이라고 해도 2백쪽에 미치지 못하는 분량이라고, 역자 해설에 쓰여 있다. 두 장편이 나온 시기가 2014년과 2021년임에도 아직 번역하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나라 출판계가 혹시 장편소설로의 경쟁력을 의심하고 있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실제로 헤르만의 단편집 세 권은 민음사에서 나왔으나 《레티파크》는 마라카스라는 신생 출판사가 찍어, 한국어 출판계약도 조금 변한 거 같기도 하고.
독후감 시작도 하기 전에 어째 시선이 삐딱한 거 같다. 이 책이 본문만 241페이지. 열일곱 편의 짧은 단편이 실렸으니 한 편당 14쪽 분량이지만 이 가운데 적어도 두 쪽은 각 단편의 문지방으로 사용했고, 각 작품이 홀수 페이지로 끝나면 다음 짝수 페이지는 공백으로 내버려 두었다. 그러니 말이 241쪽, 편당 14쪽이지 그냥 열 쪽, 다섯 장 분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하여 “짧은 단편”, 단편이라고 하면 충분할 것 하나 더 붙여 “짧은” 단편이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건 나도 그렇고, 역자도 그랬던 듯하다.
아무리 단편소설이라도 그래도 정도가 있는 것이지, 이렇게 초단편을 남발하면 이걸 장편소설이라고도 하는데, 이때의 장은 길다는 뜻의 장長이 아니라 손바닥 장掌을 써서 장편소설掌篇小說, 손바닥 한 면이면 충분할 분량이라고 우스개를 날릴 수도 있다.
나는 이 책을 오늘 아침에 읽기 시작해 오후 두 시에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물론 점심도 먹었다. CJ 덮밥, 강된장보리비빔밥. 열일곱 편을 읽었지만 다 고만고만해서 탁 떠오르는 것도 없고, 어째 그래, 허벅지를 탁, 치며 그렇지! 이렇게 감탄한 적도 없다. 물론 어제가 쇤네 생일이라고, 기쁘다 구주 배셨네, 만 백성이 노래하는 2월 25일이라고 가족들이 다 모이는 바람에 낮술부터 과해 오늘 컨디션이 영 말이 아니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하여간 그랬는데, 괜히 하루를 망가뜨린 것 같은 기분은, 유디트 헤르만, 이 사랑스런 여성의 작품이라고, 기대가 과하게 컸던 반작용일 수도 있다.
오늘 느낀 점. 작가한테 함부로 정 주지 말자. 독후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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