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무엇이든 가능하다 ㅣ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평점 :
.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지 19일이 지났다. 그리고 열흘 넘어 “책읽기 슬럼프”에 빠지고 말았다. 이후 캉길렘과 헤밍웨이를 그저 들춰봤을 뿐. 책에 몰두할 수 없었다.
나는 왜 이런 식으로 책을 읽을까. 숱한 선량한 사람들이 읽고 등장인물의 처지, 환경, 생활이라는 삶에 가슴 절절하게 공감해, 선량한 마음으로 주변인들에게 권하는 작품, 이것을, 작가가 말하는 의도대로 따라가지 못하거나 그렇게 안 하는 건 어쩌면 천성일 수도 있다. 아니면 어느새 작품을 감상하기보다 조각조각 뜯어보려는 건방진 마음에 사로잡혀버렸는지도. 하나하나 다 아픔과, 상처라는 아픔의 흔적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보다 이야기들의 상투성을 먼저 발견하는 야박함이라니. <…루시 바턴>에서 벌써 “이야기의 상투성”을 말했고, 스트라우트를 그래도 읽는 건 문장 때문이라고 결론을 낸 적이 있다. 《무엇이든 가능하다》 역시 아픔 속의 아름다움(왜 아름다운 건 대개 아플까?) 이것을 발견하는 대신 누추한 추억(언제나 추억은 누추할 수밖에)을 작가가 의도적으로 아름다움 쪽으로 끌고 가려는 것처럼 읽고, 그걸 구태여 남들이 다 보는 독후감에 그대로 썼다. 그리고 꼴난 독후감 이후 책 읽고 싶은 마음이 거의 사라졌고 읽히지도 않은, 이른바 슬럼프를 맞았다. 그게 19일 전이다.
남들이 다 볼 수 있는 독후감, 게다가 솔직히 말하건대, 남들이 좀 봐주었으면 바라기도 하는 독후감에 구태여 안 좋거나 덜 좋은 이야기를 하는 이유, 그것도 무수한 독자들이 바치는 찬사를 향유하는 책에 관하여. 아무리 잘 봐줘도, 내가 책, 그리고 작품을 이해하는 수준이 선량한 다중의 것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난 좋은 독자가 아니다.
+++++++++++++
스트라우트는 2008년 발표한 <올리브 키터리지>로 2009년 퓰리처 상을 받는다. 상을 받고 10년 후인 2019년에 그동안 흐른 세월만큼의 나이를 더 먹은 올리브를 다시 등장시킨 후속작 <다시, 올리브>를 발표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며칠 전에 읽은 2016년 작 <내 이름은 루시 바턴>도 예외가 아니라서 2017년에 이 책의 후속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무엇이든 가능하다>를 내고, 2021년에는 심지어 다시 후속작으로 루시 바턴의 첫 남편인 윌리엄을 호출한 것처럼 보이는 <오, 윌리엄>까지 발표했으며, 이 삼부작 모두 우리말로 번역되어 절찬리에 팔리고 있다. <오, 윌리엄>이 삼부작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다시, 올리브>에서 볼 수 있듯이 제목에 쉼표가 하나 첨가되어 강조하고 있어 추측하는 것뿐이다. 스트라우트는 우리나라에서 벌써 만만치 않은 팬들을 지닌 인기작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나는 제일 처음 읽은 스트라우트인 <올리브 키터리치>를 제일 좋았다고 기억한다. 어떤 작가가 있어서 70대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엄격하면서도 세상을 충분히 이해하고 따뜻한 눈길로 사물과 사람을 볼 줄 아는 ‘현명한 늙은이’를 그릴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 맥락에서 집단 PTSD를 다룬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이 오늘 읽은 《무엇이든 가능하다》보다 더 좋았다. <…루시 바턴>에서 PTSD 또는 이와 유사한 심정적 상처라는 주제를 설정했다. 그리고 후속작인 《무엇이든…》은 전작에 출연했던 등장인물들 주변의 사람들 역시, 그러니까 지금 숨쉬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지 누구나 심정적 내상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이야말로 이의 해소를 위한 가장 중요한 해결책이라고, <…루시 바턴>에서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 윌리엄>을 조만간에 읽을 예정이지만 그것 역시 같거나 비슷한 내용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1부와 마찬가지로 작중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은 바턴 가 구성원이지만 부모는 이미 하직하고 이제 삼남매, 차례로 피트, 비키, 루시 만 남았다. 피트는 앰개시 카운티의 변두리에서 전작에서 별로 개선이 되지 않은 상태로 부모가 남긴 집을 지키면서 독신으로 궁색하게 살고 있고, 비키의 딸 라일라 레인은 이모를 닮았는지 매우 총명해 학업에 독보적인 성취를 이루지만 전형적인 반항아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삐딱한 십대로 성장했으며, 비키 역시 과체중을 넘어 고도비만 정도로 요양원에서 일하며 ‘불쾌한 비키’라는 뜻의 ‘익키 비키’라 불리고 있다. 즉, 손위 두 남매는 부모세대에서 전혀 개선되지 않은 사회적 루저의 위치를 보전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비키의 경우엔 딸 라일라가 대학에 진학하기만 하면 재수없는 앰개시를 떠나 대도시에서 (이모처럼)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비키 입장에서 대학에 보낼 수 없으니 누군가가 도와주거나 장학금을 받은 수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긴 하지만. 루시는 이혼을 하고 재혼도 했으며, 작가로 이름이 나 이제는 회고록을 출간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대도시를 두루 돌아다니며 사인회 등을 개최하는데, 전작 <…루시 바턴>에서 루시와 함께 뒷골목 식당 쓰레기통을 뒤져 먹지 않은 스테이크와 케이크를 발견하고 기뻐했던 외가쪽 육촌형제, 지금은 에어컨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에이블을 만나 재회의 기쁨도 나누고, 아버지가 죽은 이후 처음으로 앰개시 본가에 들러 오빠 피트로 하여금 십여 년 만에 집안 대청소도 하고 깨끗한 러그도 사오게 만든다. 이렇게 오랜만에 만난 삼남매가 언제나 반가왔던 건 아니지만. 생각해보라. 십여 년 만에 만났는데 어떻게 친할 수 있느냐는 것을. 그냥 잘 살았어? 잘 있었어? 잘 지내지? 이거 세 개만 물어보면 더 뭔 할 말이 있다고. 그저 사이가 좋으려면 (물론 나쁘려면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가까이 또는 자주 얼굴 맞대야 한다.
이렇게 사람 사는 이야기다. PTSD는 이들 가족, 남매들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들이 다 그렇다. 친족 내 성폭행의 경험, 동성애를 딸에게 들키지 않을까 싶어 숲 속으로의 외출을 금지시키는 아버지, 2차 세계대전 참전 후 PTSD에 시달리는 가난한 가장인 바턴 씨와 바턴 씨 부부의 (어린 남매가 생각하기에) 끔찍한 성생활, 계부가 어린 의붓아들에게 가한 성폭행,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의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 고등학생 시절 위경련으로 조퇴를 하고 일찍 들어간 집에서 어머니와 스페인어 교사 딜레이니 선생이 벌이던 대낮의 불륜 라이브와 이어진 어머니의 가출 등등. 이것들 모두 PTSD이다.
그리고 그저 젊어서 또는 어려서 경험한 가난. 이것 역시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 PTSD인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꽤 많은데, 가난 역시 다르지 않다. 다만 그냥 부족함이 어느 정도 있는 살림살이를 살고 자기가 한 시절 가난하게 살았다고 착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가난의 기억 역시 한 인간의 평생을 따라다니며 극복하기 어려운 불안감을 초래한다. 전쟁이나 천재지변 등의 역사적인 큰 사건을 통한 공통의 가난, 평등한 가난이 아닐 경우에는.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특정시기에 가난 때문에 어려웠다는 얘기를 쉽게 하지 않는다. 그러니 무릇 사람들은 널리 살펴 언행에 주의하시기를.
이것으로 네 권의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를 읽었다. 앞으로 <오, 윌리엄> 한 권을 더 읽을 예정이다. 나는 스트라우트가 좋다. 그러나 이이의 이야기가 좋은 건 아니다. 문제를 꺼내놓고 딱 미국에서 권장하는 해결방식인 “그래도 가족”과 “사랑”에 충실한 결론이 이제는 식상한다. 내가 스트라우트에게 느끼는 매력은 단지 하나, 문장이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 사랑은 불완전해. 앤젤리나,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노랫말 같기도 하고 격언 같기도 한 반짝반짝한 문장이 도처에서 튀어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스트라우트가 좋은 것이지, 스토리는 이제 질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아쉽게도 고백할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