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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의 여마법사
살만 루슈디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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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많이 한 스코틀랜드의 귀족. 조지 루이스 하우크스방크. 하우크스방크 중의 하우크스방크. 일찍이 카리브 해에서 주로 스페인 상선을 대상으로 잔인한 약탈을 일삼던 해적으로 악명을 떨쳤으나, 노략질한 황금을 자신의 기업이 기록한 상업적 이익이라고 생각해, 약탈물품의 상당부분을 한 번도 빼지 않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꼬박꼬박 세금을 바쳐온 47세의 남자. 반짝반짝한 눈동자와 깨끗한 피부에 전설적인 칼솜씨를 자랑하고 흰 황소처럼 힘센 하우크스방크 오브 하우크스방크는 그동안 바친 세금의 대가로 엘리자베스 1세의 친서를 해적선 스카타크호의 선장실 비밀 벽 함에 간직한 채 인도 무굴제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대영제국의 대사’ 자격으로, 임무는 힌두스탄으로 가서 무굴제국의 황제에게 처녀왕의 친서를 전하고 황제의 답장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항해를 시작하고 며칠이 지난 후, 선원 하나가 선실 저 구석에서 밀항자 한 명을 발견해 데리고 온다. 밀항자는 피렌체 사람으로 겨자색 더블릿과 긴 양말을 신고, 밝은 색 마름모꼴 가죽을 이어 붙인 알록달록한 긴 외투를 입었는데, 이 외투는 베네치아의 유대인 보석상으로부터 카드 게임을 해 얻은 것이었다. 주로 다이아몬드를 취급하는 유대인 보석상은 최고의 재단사에게 특별히 주문을 해 수많은 주머니를 감추고 있으며, 주머니 속에 무엇이 들었든지 간에 중량을 몸 전체에 골고루 분산시켜 여간해 무게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어렸을 때부터 눈속임, 손기술 등등을 시전하는 마술사로 교육을 받은 이 여행자에겐 최고의 의상이었다. 이 밀항자 또는 여행자는 전직 해적단의 법률에 의거하여 조만간에 대양의 푸른 파도 속에 빠져 죽을 운명이었지만, 놀랍게도 스카타크 호 갑판장의 귀에서 살아 있는 물뱀을 끄집어내는 묘기를 부려 죽음의 위기를 간신히 모면했다. 그런 여행자의 얼굴에는 조금도 긴장한 모습이 없었다나?
이 여행자로 말할 거 같으면 이름을 우첼로라고 하고, 일찍이 비밀스런 모험에 나선 몸으로 자신의 비밀은 당대의 가장 강력한 여마법사가 건 저주에 의하여 지켜지리라고 주장한다. 세상을 얼마나 쏘다녔는지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러시아어, 영어, 포르투갈어, 이렇게 일곱 개 언어로 꿈을 꿀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고, 말을 할 줄 아는 건 여기다가 몇 개의 언어를 더 보태야 하는데, 사람을 더욱 경악시키는 건 이이, 우첼로의 기가 넘어가는 마술솜씨조차 시시하게 보일정도로 찬란하고 현란한 말솜씨로, 가히 천 날 하고도 하루 동안 더 수다를 떤 셰헤라자데 왕비와 버금가거나 능가할 정도였다.
엘리자베스 1세 치하이니 16세기 초. 아직 오디오와 비디오는 출현할 기미조차 없던 시절이라서 당시에 가장 인기 있었던 즐길 거리는 셰익스피어가 장악해버린 연극, 그리고 방랑시인, 즉 트로바토레가 돈을 받고 운율을 섞어 이야기를 노래하는 서사시, 이 다음이 노변담화, 요즘 같은 늦가을부터 시작해 밤이 긴 겨울 내내 화로 앞에서 군밤을 까 손자들 입에 넣어주며 느긋하게 “옛날,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로 시작하는 전래 이야기였던 지라, 스카타크 호의 선장 하우크스방크 오브 하우크스방크 역시 놀라운 입담을 가진 여행자 우첼로를 즉각 선장실로 초빙하여 그가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자신의 비밀을 먼저 밝혔으니, 피노키오 또는 살라미 소시지처럼 희미하게 회향 냄새를 풍기며 탁자 위에 턱, 올려놓은 선장의 얼룩덜룩한 문신이 새겨진 음경이었다. 그러나 우첼로는 선장의 비밀에 대하여 무게와 크기에 적절한 존경심을 표할지언정 여마법사가 건 저주 때문에 자신의 비밀을 들은 사람 가운데 아직 명줄이 붙어 있는 사람은 딱 한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위협한다. 이에 기가 죽을 선장이 아니라서 그는 침실 벽판 뒤 숨겨진 나무상자를 꺼내 진품 수집품을 보여주는데, 기가 질릴 만큼 크고 투명한 보석,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스페인 금괴, 고대 소그디아나 이교도 여신이 잊힌 영웅에게 사랑의 증표로 주었다는 비단 손수건, 고래 뼈에 수사슴 사냥 장면을 정교하게 새긴 세공품, 여왕 폐하의 초상화가 든 로켓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우첼로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르칼리아 또는 아르갈리아라고 불리는 모험가 군주는 마법의 무기를 가진 위대한 전사로 무시무시한 거인 네 명이 수행했으며, 안젤리카라는 여인과 함께 다녔는데, 안젤리카는 칭기즈칸과 티무르의 피를 이은 고귀한 공주로…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자, 선장은 입에 흰 거품을 조금 물고 그만 혼절해버리고 만다. 마술을 썼을까? 아니다. 손기술을 써 선장의 하우스와인 잔에 적절한 양의 아편을 넣었던 것으로, 아편은 베네치아의 유대인 보석상 샬라크 코르모라노의 외투 어느 구석에서 슬그머니 흘러나왔던 거였다. 이후 여행자 우첼로는 잠 한 숨 자지 않고 쓰러진 선장 하우크스방크 오브 하우크스방크의 병상을 지키며 가끔 흑흑, 오열도 숨기지 않으면서 간병에 전념해 선원들조차 눈물이 앞을 가리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물론 선원들이 비탄에 잠겨 겨우 잠에 빠지는 새벽 시간에는 선장실 곳곳을 뒤져 숨겨진 벽판 뒤 창고에 모셔져 있는 온갖 보물상자 일곱 개를 더 발견해서, 알록달록한 마름모꼴 가죽을 덧대 만든 외투의 속주머니를 채웠고, 마지막 여덟 번째 벽판 뒤 상자에서 드디어 목표로 했던 엘리자베스 1세의 봉인이 찍힌 친서를 발견한다. 이날 새벽, 적정량의 아편을 흡수한 선장이 숨을 거두어 예를 갖춘 장례의식을 준비하느라고 정신이 없을 때, 짙은 안개 속에서 비상탈출 보트 한 척이 내려지고, 이 보트를 탄 우첼로는 안개 속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데, 이곳은 바로 힌두스탄 무굴제국의 항구도시 수라트 근처였다.
수라트에 도착한 여행자는 곧바로 무굴제국의 수도로 향하지 않고 부란푸르, 힌디아, 시론, 나르와르, 괄리오르, 돌프르, 아그라를 거쳐 위대한 군주 아불파트 잘랄우드딘 무하마드, 그러나 ‘황제’라는 뜻의 아크바르로 불리워, 위대하고 위대한 자, 아크바르 황제, 즉 황제 황제를 두 번 사용할 정도의 유능하고 총명하고 무용이 넘치는 독재자가 군림한 도시로 흘러오게 된다. 아크바르 황제로 말할 것 같으면 몸집이 크고 강인한 남자다운 남자로, 소년시절엔 암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고, 이 일 때문에 심란해져 이후 영원히 육식을 끊기로 맹세한 무슬림 채식주의자였다. 평화만을 바라는 전사이자 철학자 왕으로, 야만인 철학자인 동시에 울보 살인자일 뿐 아니라 아첨과 굴종에 중독된 인물이기도 했다. 오직 담화의 즐거움을 위해 정복을 포기할 수 있는 세계를 갈망할 정도로 이야기를 즐기는 이 왕은, 다른 무슬림 제왕들과 마찬가지로 할렘에 수다한 처첩을 거느린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황실 할렘의 귀인들 중 한 명은 아크바르가 생각해낸 상상의 아내로 실재하지 않았으며, 그는 이 상상의 여인을 ‘조다’라고 불렀다. 황제는 살아있는 수많은 진자 왕비들이 유령이고, 존재하지 않는 조다바이가 진짜라고 생각할 지경에 이르렀으며, 황궁 내의 아무도 이를 반박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다는 황제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전하의 아내 가운데 가장 추하고 성질 못된 처라 해도 피와 살로 이루어졌나이다. 결국 저는 그녀와 상대가 될 수 없나이다.” 상상 속의 왕비, 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굴제국의 수도 시크라에서는 이야기 속의 그녀는 엄연하게 존재하는 곳이었다.
이런 황제 앞에 모습을 드러낸 주인공이자 이야기꾼 우첼로. 그는 ‘모고르 델라모레’ 즉 사랑의 무굴인이란 이름으로 황제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엘리자베스 1세의 친서를 개봉한 뒤, 원문을 영어로 읽은 다음, 유창한 페르시아어로 이를 극적이라 할 만큼 왜곡해 번역해 설명해준다. 이후 모고르 델라모레는 특유의 입담으로 아크바르 황제를 확 휘어잡는 데 성공하지만, 한때는 해적선이었던 스카타크 호의 선원들이 곧바로 시크라에 도착해 우첼로, 또는 모고르를 고발하면서, 그는 실상 자신의 본명이 니콜로 베스푸치로 굳이 족보를 따지자면 아크바르 황제의 할아버지이자 무굴제국의 창시자인 바바르의 여동생이며 위대한 여마법사였던 카라 쾨즈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리하여 모고르 델라모레 또는 니콜로 베스푸치는 어떻게 해서 무굴제국 황제의 여동생 카라 쾨즈가 중앙아시아에서 튀르크를 거쳐 피렌체로, 이어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게 되었는지, 길고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것으로 사이비 마술사 우첼로 또는 모고르 델라모르, 또는 니콜로 베스푸치가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길게, 그러나 내 나름대로는 간략하게 쓰려고 애쓰면서 소개했다. <피렌체의 여마법사>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궁전 도시 아래, 하루의 마지막 빛 속에서 반짝이는 호수가 녹은 금으로 이루어진 바다처럼 보였다.”
나는 이 문장이 얼마나 매혹적인지 몇 번을 읽었다. 저녁 노을이 황금색으로 호수 면을 비추는 광경을 이 시대 최고의 입담꾼 살만 루슈디는 이렇게 묘사했던 거였다. 넓고 넓어서 광활한 호수가, 세상에나, 녹은 금이라니. 거대한 수도 시크라 옆에는 수도 만큼이나 웅장한 급수탑이 우뚝 서 있고, 세상의 모든 나그네를 주눅들게 하는 코끼리 엄니로 만든 탑이자 도시의 랜드마크인 히란 미나르가 굽어보고 있었다. 모고르 델라모르는 이 모든 것들을 둘러보는 동시에 도시 입구의 황금 호수를 떠올리며, “물이 없으면 말짱 다 헛것이지. 황제라 해도 물이 없으면 순식간에 한 줌의 재로 변할 거야. 물이야말로 진짜 군주이고 우리는 모두 그 노예지.”라고 독백한다.
도무지 살만 루슈디의 입담은 어디서 끝이 날까. 루슈디 만큼 화려체를 난만하게 사용하는 작가가 있기는 할까. 자유자재로, 세상의 모든 방향을 향해 날뛰는 그의 독특한 상상력 하나만 가지고도 그의 환상 세계를 엿볼 가치가 있다. 올해 테러를 당했지만 제발 건강하라. 비겁한 테러리즘에 굴복하지 않고 더 많은 작품을 생산하기를 기원한다. 정말 이야기 나라의 아크바르 오브 아크바르, 황제 중의 황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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