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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세트 - 전6권 ㅣ 로마제국쇠망사
에드워드 기번 지음, 송은주 외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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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도 아니고 1837년도 아닌, 1737년에 영국 서리주의 런던 근방에서 태어난 한 천재의 역작. 1752년, 열다섯 살에 옥스퍼드의 모들린 칼리지에 다녔으나 어린 시절부터 무수한 책을 독파해나가 능히 가르칠 교수가 없었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의 에드워드 기번은 14개월의 학창시절을 보내다가 가톨릭 주교 보쉬에가 쓴 책 등에 영향을 받아 성공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해버린다. 영국에서는 가톨릭 교도들에 가해지는 불이익을 피할 방법이 없는 터라, 꼭지가 돈 아버지는 그를 스위스의 로잔으로 보내, 그곳에서 만난 칼뱅파 목사 파비야르의 배려로 2년 만에 다시 개신교로 개종을 한다. 그렇다고 독실한 개신교 신자까지는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회의주이자 수준이랄까. 기번이 쓴 <로마제국 쇠망사 1>의 내용 가운데 기독교에 관한 그의 관점이, 비록 적나라하다는 표현까지는 아니더라도, 짐작할 정도는 될 듯하다. 하여튼 그는 로잔에서 5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라틴어를 완전히 숙달하게 되고, 목사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어도 배웠으며, 위용을 과시하던 프랑스의 철학과 문학과도 만날 기회를 가졌는데, 무엇보다도 당대 최고의 프랑스 지성이라 일컫던 볼테르와 친교를 맺어 평생지기가 되었다고 하니 그로서는 훗날 <로마제국 쇠망사>를 쓰기 위한 지적 체력을 튼튼히 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기번은 서른여섯 살이 되던 1773년에 <로마제국 쇠망사>를 쓰기 시작해 77년에 1권을 출간하면서 단박에 명성을 즐기기 시작했다. 이후 1787년에 6권까지 완성을 하고 이듬해인 1788년, 자신의 쉰한 살 생일에 맞춰 출간을 하고, 곧바로 현타에 빠져버렸다.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사학자의 본능적인 호기심이 발동하면서 혁명의 진행과정에 관심을 두었지만 그것도 잠시, 대작을 끝낸 후유증이 만만치 않아 몸까지 쇠약해지고, 1793년 친구가 홀아비가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로잔에서 마지막 여행 겸 귀국을 한다. 이후 종양제거 수술을 받았고, 항생제가 없었던 때라 어려서부터 허약했던 체질이 수술 후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1794년 1월 56세 8개월의 연치로 죽는다.
예를 들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관한 연구에 관해 알고 싶다면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어야 할까, 아니면 전 예일대 예일 칼리지 학장을 역임한 도널드 케이건이 2004년에 쓴 같은 제목의 책을 읽는 것이 좋을까. 나는 케이건을 선택했었다. 당시에 아테나이 군의 장군으로 전쟁을 직접 경험한 투퀴디데스가 이 전쟁을 시작부터 끝까지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었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투퀴디데스의 역작이 고전으로의 성가를 누리고 있다는 이유 만으로 선택을 하는 것보다는, 무려 2,500년 동안 수많은 역사가들의 탐구를 바탕으로 세계적 석학이 쓴 21세기 역사서를 더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기번의 경우는 달랐다. 비록 내가 역사책 읽는 것을 즐기기는 하지만 기번의 문학적 성가가 워낙 대단한 것에 더해, 아무리 그렇더라도 어떻게 생각해봐도 역사학자가 아닌 시오노 나나미를 통해 로마를 들여다볼 수는 없는 일이라서, 아주 오래 전부터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기로 작정을 했다가, 퇴직 기념으로 내가 내게 주는 선물로 이 책 전권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테오도르 몸젠의 로마사도 있기는 하지만 그도 19세기 사람이라 그리 큰 고려대상은 아니었다.
<로마제국 쇠망사>는 로마의 오현제, 五賢帝,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 시절부터 시작한다. 이제 1권을 읽었을 뿐이니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으나, 쇠망사라고 했으니까 로마가 드디어 막을 내릴 때까지가 아니겠는가 싶다. 몸젠의 로마사처럼 로마와 이탈리아의 진짜 고대 역사부터 시작하거나,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 이야기나 트로이를 탈출해 이탈리아에 도착한 아이네이스부터 시작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한니발과 포에니 전쟁, 로마 공화정,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가 승리를 거둔 두 번의 내전, 옥타비아누스가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되는 과정과 네로까지 이어지는 최초 황제의 가계에 대한 내력 등이 빠져 있는 건 아쉬웠다. 물론 이건 로버트 그레이브스가 쓴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를 재미있게 읽은 영향이 크기는 하다.
꽤 오래 전에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를 읽을 당시에, 초대 황제 아우구스트 사후에 위를 잇는 과정은 원로원이나 집정관, 또는 황가의 권력자들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황제 근위병, 그것도 속주 출신 이민족 병사들이 숱하게 많이 포함된 근위병에 의하여 한 순간에 결정된다는 걸 알고 경악한 적이 있다. 이들이 원로원에 쳐들어가 자신들의 의견을 반대하는 원로들을 단칼에 처치해버리고 황족 중의 한 명을 무등 태워 대다수 근위병들이 환호하며 황제로 선임해버린다. 그럼 그가 황제가 되는 거다. 황제는 대신에 자신을 신 또는 신과 비슷한 인간으로 만들어준 근위 병사들에게 활수하게 보답을 해야 한다. 당연히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금화로.
이런 형식으로 황제를 옹립하는 일이 아우구스트 왕조에 국한하는 것도 아니고, 이번에 읽어보니, 꼭 황제의 근위병만 황제 선택의 권리를 누린 것도 아니어서, 오현제 시대 이후에는 근위병을 비롯해 속주를 방어하고 있는 군단에서도 그냥 자기 군단장을 황제로 참칭해버리고 내전을 일으켜 이기기만 하면 상당한 금화의 보너스를 받는 동시에, 여태 자기들이 모신 군단장이나 장군이 황제가 되기 때문에 훗날의 콩고물도 얻어 걸리기를 기대할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가 정치에 너무 깊숙하게 관여하면 문제가 되지만, 사실상 영토확장을 완수했던 공화정 시대부터 제정 시대까지 너무 넓은 영토와 속주를 지키기 위해 막강한 군사력을 확보해야만 했던 로마 입장에서 군벌의 힘이 약해져도 큰 문제였을 터이다.
이 책의 실제적인 시작은 오현제 가운데서도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저 유명한 <명상록>을 쓴 철학자 황제부터다. 이전 황제 가운데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클라우디우스와 하드리아누스를 들 수 있는데, 두 명 다 소설을 통해 읽어본 인물들이라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기번은 비록 두 명의 안토니누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양자인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피우스의 양자인 마르쿠스 안토니누스를 말하는데, 이들이 제정 로마의 전성시대를 이끌었지만 모든 체제가 최고 전성기 시절부터 이미 쇠퇴의 씨앗을 발아시키듯이 이때부터 제정 로마는 망조가 들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피우스 황제는 하드리아누스 전 황제의 유지를 받아 주제主帝가 되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첫번째 부제副帝, 그리고 향락을 누리는데 만 열성이고 나머지는 게을렀던 루키우스가 두번째 부제, 이렇게 세 명의 황제가 형식상으로는 공동으로 권력을 나누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르쿠스는 열일곱 살에 부제가 되어 마흔이 훌쩍 넘어 피우스가 죽기 전까지 전혀 황제가 되고 싶다는 내색을 보이지 않았고, 루키우스는 환락에 여념이 없을 뿐이지 의붓형인 마르쿠스가 얼마나 뛰어난지 잘 알고 있어서 욕심을 부리지 않아, 또는 부릴 수 없어서 평화로운 시기가 가능했지만, 후에 극도의 혼란기를 마치고 다시 나타날 4명 또는 6명의 황제 시기엔 당연히 두 명 이상의 야심가가 포함될 확률이 거의 백 퍼센트라서 국력을 쇠퇴시킬 내란은 이미 예약이 되어 있었던 거다.
제정 시대의 로마는 정말 답이 없다. (크게 봐서)왕정 정치가 노답인 것은 세습 또는 지정되어 왕위에 오른 절대 권력자가 제 정신이 아니거나 무능하면 곧바로 국가가 망가지는 길로 접어들기 때문이다. 이건 로마 시대 뿐 아니라 전 세계가 마찬가지라 이후 펼쳐질 유구한 역사 내내 왕권과 신권臣權, 신하의 권리의 충돌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브리타니아에서 시작해 에스파냐, 라인 서쪽의 갈리아에서부터 사하라 북부 아프리카와 페르시아 접경에 이르기까지의 아시아라는 거대 속주를 거느리고 있던 로마는 각 속주들의 영토를 방위해야 한다는 커다란 과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속주 너머 자리하고 있던 야만인들의 세력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로마나 페르시아 같은 커다란 국가의 체계를 모방해 점점 세력을 불리고 있었던 것도 제정 로마가 부담해야 하는 시시포스의 바위였을 것이다.
이 책은 제목처럼 “로마제국” 만 다루고 있다. 여섯 권 가운데 1권이다. 황제 가운데 다시 단일 황제 체제로 통일하고, 2권에 접어들면 그리스도 교를 승인하고 자신 스스로 죽음의 침상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비잔티움으로 천도를 하게 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까지를 설명하고 있다.
2022년에 읽는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에드워드 기번의 역사관이나 역사적 사실의 확인이기보다 서문에 역자가 썼다시피 기번의 유려한 문장을 통해서 알기 쉽게 로마의 제정 역사를 배우는데 있다. 18세기 이후에 근 250년 동안 더 축적된 지식으로 무장해 세련된 시각으로 쓰인 로마사와 비교하면 내용상 좀 남루한 점도 있겠지만, 이 책을 읽는 나는 세계사에 그리 밝지 않은 아마추어이며, 아마추어 수준에서 기번을 읽는 것은 확실하게 유익하다.
다만 기독교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종교에 대하여 알지도 못하고, 흥미도 없으며, 굳이 알고 싶지도 않은 인간이, 그러나 로마와 유럽 역사를 통해 절대로 가볍게 지나가지 못하는 그리스도교 관련한 부분은 읽기가 고통스러웠다. 유럽인, 그것도 18세기 유럽인이라면 21세기 유럽인한테보다 한 1,270배 정도 더 중요했겠지만, 집 나간, 아니, 처음부터 벌판을 헤매고 있어서 이게 집을 나간 것인지 넓은 벌판 전부가 내 집인지도 모르는 검은 양 입장에선 전혀 관심이 없어, 마지막 두 장, 15장과 16장은, 읽다가, 읽다가 결국 대충 페이지만 훌훌 넘기고 말았다는 것은 고백해야겠다. 다만 이 이유 하나 때문에 별점 하나를 깎고 말았다. 이것은 책의 결함이 아니라 전적으로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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